|
< 며칠전 채널A에서 방영한 야사TV에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한 뒤 두문동에 들어가 살면서 조선 조정에 벼슬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위해 불을 질렀으나 72명이 모두 불에 타 죽었다고 방송을 하였다. 아무리 야사라고 해도 이런식으로 방송하면 진실로 받아들일 것 같아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1.두문동 72현(賢)
두문동은 현재 북한지역인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廣德山)에 있는 골짜기이며 두문동이라고 하거나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면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한 충절있는 선비들을 추앙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고려 말기에 벼슬을 하던 관리나 선비들이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두문동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새로 건국한 조선 조정에서 수차에 걸쳐 이들에게 골짜기에서 나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지만 이들이 응하지 않자 이들이 살고있는 골짜기에 불을 놓으면 연기나 불에 견디지 못하고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불을 질렀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고 모두 불에 타 죽었는데 그 인원이 72명 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중국 은나라의 백이(伯夷)‧숙제(叔齊)가 나라가 망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고 살다가 죽었다는 고사(故事)를 본 따 나라가 망하자 새로 들어선 왕조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옛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킨 것으로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2. 72명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일설에는 동두문동에는 무신 48명이 있었고 서두문동에는 문신 72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신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므로 그 실태를 알 수 없고 두문동 72명의 명단은 『화해사전(華海師全)』과 『기우집(騎牛集)』에 실려 있다. 그런데 두 자료를 보면 공통으로 거론되는 이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름도 많고 『전고대방(典故大方)』에도 명단이 실려있는데 그 근거를 『화해사전』이라고 하고 있다.
『화해사전』은 고려 말 평산 신씨인 신현(申賢)과 그의 자손에 관한 글을 모아놓은 것을 철종11년(1860) 후손들이 간행한 것으로 그 내용 중에 72현의 명단이 있는데 조선 건국 이후 고려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을 위주로 하고 있다.
『기우집』은 12년 후인 고종9년(1872) 72현인 이행(李行)의 16세손인 이종술이 편찬한 것으로 그 중 72현의 명단은 공민왕 이후의 인물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한다.
72명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부에서는 공자의 제자 중 72현(賢)을 배향하는 것을 본 따 두문동에 가서 살지 않았어도 고려에 대한 충심(忠心)을 가지고 조선 정부에 들어와 벼슬하기를 거부한 사람과 고려에 대한 충심에 변함이 없었던 사람들을 선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표창(表彰)의 시작은 영조27년(1751)으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비각(碑閣)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72인인 임선미의 후손에게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실록』을 보면 “ 72인들은 우뚝한 충절이 진실로 정몽주 · 길재 등이 성취해 놓은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는데, 그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曺義生) · 임선미(林先味)와 성이 맹가(孟哥)인 세 사람이며, 맹가는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72현(賢)이라고 전해지는 사람들의 명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3. 72명이 두문동에 살다 화재로 죽었다?
정조는 개성부유수의 건의에 따라 기왕에 있던 충절사에 당시까지 72현으로 이름이 알려져 오던 임선미, 조의생, 맹씨 3명을 추가로 모시고 그들의 충절을 기리도록 하였다. 순조22년에는 민안부, 김충한을 추가하였고 순조31년에는 장안세를 추가로 모셨다. 어찌되었던 두 가지 책에 두문동 72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을 정리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화해사전, 기우집 | 화해사전=전고대방 | 기우집 |
김주, 최양, 길재, 남을진, 임선미, 원천석, 조의생, 김자수, 이색, 이양중, 이사경, 최문한, 서견, 신덕린, 배상지, 이행, 변숙, 이양소, 구홍, 성사제, 김충한, 박문수, 차원부, 김약시, 채귀하 | 우현보, 고천상, 전귀생, 이숭인, 이맹예, 유순, 전조생, 조승숙, 서보, 박심, 신안, 박녕, 고천우, 서중보, 조안경, 이유, 조견, 허금, 이수인, 정희, 조홍, 이륜, 김육비, 전오륜, 이수생, 임탁, 변귀수, 안종약, 김준, 윤육, 이유인, 이석지, 민보, 박침, 임계, 신석, 신자악, 김위, 민안부, 신포시, 박의중, 박태시, 이경, 맹호성, 길인적, 신이, 반ㅇ. | 정몽주, 이존오, 정추, 맹유, 도응, 이사지, 도동명, 장안세, 정광, 한철충, 국유, 나천서, 성부, 이명성, 정지, 하자종, 김진양, 안성, 조충숙, 허징, 맹희적, 김약항, 이무방, 김광치, 이종학, 민유, 문익점, 임귀연, 조희직, 김사렴, 김승길, 조유, 김제, 조철산, 범세동, 윤충보, 유구, 민안부, 채왕택, 송교, 최칠석, 김자진, 조윤, 정온, 이연, 송인, 곽추 |
그럼 두 가지 자료에 공통되는 분만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나중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많다.
ㅁ 구홍(具鴻) : 두류산에 들어가 살았다.
ㅁ 길재(吉再) : 고향 선산에 거주, 정종 때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 태종 때 농토를 주어 먹고 살도록 해 주었다. 태조 때 청백리로 선정되었고 세종 즉위년(1419) 사망
ㅁ 김약시(金若時) : 금광리에 은거하였으며 태종6년(1406) 사망
ㅁ 김자수(金自粹) : 호는 상촌(桑村)으로 경기도 광주 추령(秋嶺)에 은거하였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의 선조이다.
ㅁ 김주(金澍) :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다 압록강에서 조선이 개국했다는 말을듣고 중국으로 갔다.
ㅁ 김충한(金冲漢) : 백이숙제처럼 나물만 먹겠다며 두류산에 숨었다
ㅁ 남을진(南乙珍) : 감악산(紺岳山)에 살았고 태조2년(1393) 사망
ㅁ 박문수(朴門壽) : 백이숙제처럼 살겠다고 했고 태종 때 사망
ㅁ 배상지(裴尙志) : 두류산에 들어가 살았다.
ㅁ 변숙(邊肅) : 불명
ㅁ 서견(徐甄) : 금천에 은거하였다. 태종이 직접 집으로 찾아가 벼슬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 12년(1412) 고려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태조 때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ㅁ 성사제(成思齊) : 조선 개국연도인 1392년 사망
ㅁ 신덕린(申德隣) : 두류산에 들어가 살았다.
ㅁ 원천석(元天錫) : 태종의 스승, 치악산에 들어가 살았고 태종이 여러번 불렀으나 오지 않으므로 직접 찾아갔으나 피하였다. 아들을 현감으로 특별히 임용하였다.
ㅁ 이사경(李思敬) : 고향인 신리(薪里)로 돌아갔다.
ㅁ 이색(李穡) : 태조4년(1395) 한산백으로 봉했으나 고사하였고 태조5년(1396) 사망
ㅁ 이양소(李陽昭) : 거문고를 가지고 돌아가 조상(?) 묘(墓)에 은거하였다.
ㅁ 이양중(李養中) : 호 석탄, 광릉(廣陵)에 은거하였다.
ㅁ 이행(李行) : 예천(醴泉)에 은거하였다.
ㅁ 임선미(林先味) : 두문동에 살았다.
ㅁ 조의생(曺義生) : 두문동에 살았다.
ㅁ 차원부(車元頫) : 두문동에 살았다.
ㅁ 채귀하(蔡貴河) : 다의현에 숨어살다 세종2년(1420) 사망
ㅁ 최문한(崔文漢) : 강릉인으로 충숙왕의 부마인데 강릉으로 돌아갔다.
ㅁ 최양(崔瀁) : 포은 정몽주의 생질로 중대산으로 들어가 살다 세종6년(1424) 사망
그 외 화해사전이나 기우집에만 보이는 분들 중에도 조선에 들어와 벼슬을 한 분들도 여럿 있는 것을 보면 종전의 주장처럼 두문동에서 돌아가신 분들이라고 하기보다는 두문동처럼 골짜기 등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자기 고향 등에서 은거하면서 조선 조정에 벼슬을 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사람들 이라고 해석을 하여야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정몽주 같은 분은 고려가 망하기 전에 돌아가신 분이고 안성, 김약항 같은 분은 조선에 들어와 오랫동안 벼슬을 하였으니 어떻게 설명을 하여야 할지 고민이 되며 황희 정승은 처음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조정과 동료들의 권유로 두문동에서 나와 조선 조정에 벼슬을 하였다고 전해 오는데 이 분은 왜 누락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화해사전(전고대방)』에 있는 47명 중 우현보는 정도전에 의해 고려 말부터 고생을 하였으나 정도전이 망한 후 태종때 공신으로 책봉되기도 하였고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도은(陶隱) 이숭인은 조선이 개국하던 해 개국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기우집』에 있는 사람은 총 47명인데 정몽주는 다들 아시지만 조선이 개국하기 전에 태종 이방원측에 의해 피살된 인물이고 안성은 조선에 들어와 관찰사를 역임하다가 청백리에 뽑히기도 하였고 김약항도 조선에 들어와 벼슬을 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에서 사망한 사람이다. 이종학은 목은 이색의 아들로 고려말에 이성계측의 반대편에 서 있다가 여러번 곤욕을 당하였고 조선이 개국한 뒤 귀양을 갔다가 개국세력에 의해 피살된 인물이다.
목화씨를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문익점도 이성계측의 반대편 사람이었는데 조선이 개국한 뒤 7년이나 더 살다가 죽었으며 유구도 조선에 들어와 벼슬을 하고 청백리에 선발된 사람이다.
한편 『연려실기술』을 보면 이의(李倚)는 두문동에 들어가 있다가 새 조정에서 여러번 벼슬을 내려도 거절하였다고 하여 부평 자연도로 귀양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위 명단에는 보이지 않는다. 『전고대방(화해사전)』에 있는 72명의 명단을 자세히 보면 두문동에 들어간 사람은 허금 등 7명이고 김주는 중국으로 갔고 대부분은 자기 연고지로 갔다.
위와 같은 이유로 두문동72현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고 또 이들이 모두 두문동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고려가 망하자 많은 유학자들이 두문동이나 자기의 연고지 등으로 가서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고려에 대한 충심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새로운 해석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첨언하면 집에만 있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거나 집에 은거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거나 사회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4. TV나 역사 유튜브를 보면서 아쉬운점
위와 같이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야사이고 더구나 불을 놓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야사이다. 단지 그런 충절(忠節)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길만한 이야기이다.
나는 정통 역사학자는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조금 더 공부한 수준이지만 TV에서 하는 역사 관련 방송이나 요즈음 유튜브가 대세라고 역사 관련 유튜브도 매우 많은데 내가 보기에는 엉터리가 많다.
채널 A같이 제법 규모가 있는 방송에서 이런식으로 방송하면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손자가 보는 <조선왕조실톡> 이라는 책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다) 조선왕조 역사를 만화식으로 현대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한 제목이 끝날 때마다 책 내용중에 이런 이런 것은 실록에 나오고 이런 이런 것은 근거가 없이 자기네가 만든 말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채널 A도 그런식으로 끝부분에 명기를 해야 시청자들이 오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 유튜브는 보지 않거나 그냥 재미로 보고 믿지는 마셨으면 한다.
[출처] 두문동(杜門洞)에서 72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작성자 2008jsl
|
첫댓글 두곡서원지 [杜谷書院址]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두신리 398번지 에있는 사당,
주고 싶은 것은 사랑이고, 받고 싶은 것은
행복이라면.지키고 싶은 것은 건강입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