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당시 주류 종교였던 상좌부 불교가 일체는 실유라는 존재론에 취우치자..
석가세존의 핵심 가르침은 존재가 아닌 반야(공)라 하며,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청년들에게 바른 불교를 받아들이려면 안으로는 어떻게 마음을 세우고, 밖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답하는 경이다.
반야부 경은 <반야심경>이 그렇듯이 군더더기가 없이 곧바로 가르침으로 들어가는 특징이듯이 <금강경> 역시 바로 정견을 드러낸다.
해서 안으로는 아상 등 4상이 없음을 새기고, 밖으로는 접촉하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선행을 해야 한다 고 한다.
<금강경>의 시작은 평범만이 있는 석가 세존의 오전 일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불교는 조용한 산 속에 들어가 선정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일상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선지식의 밝은 지혜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불교는 잘 모르는 것은 묻고 답하는 것이다. 다만 평범한 이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고 지녀야만 하는 세상 지식은 내려놓고
괴로움이 아닌 진정항 행복 더 나아가 해탈과 열반에 머물수 있는 지혜와 관련된 주재에 대해 대화나 논의를 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요새는 많은 절들이 일요 법회를 여는데.. 일주일에 한번 여는 법회 진행을 보면 예불과 축원 그리고 주지스님의 법문이 있고,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 절이 많은 것으로 안다.
절에 오는 이유는 각자마다 다르므로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는 주지스님과 신도 회장단이 상황을 잘 판단하여 가장 적당한 방법을 실천하고 있겠지만.. 절에 오면 일상에서 벗어나 불교의 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곳임을 분명히 자각하여 일요일 만이라도 신도들이 불교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어야만 하지 않을까?.
만일 절에서 2개월 동안 <금강경> 공부를 하기로 정했다면..
신도회는 신도들이 <금강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찾아 준비해 놓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점심 식사가 끝난 후 오늘 공부한 <금강경> 내용을 조금 더 들여다 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점심 식사가 끝나면 이미 알고 지내는 신도들 끼리 일상적인 내용을 주고받다가 헤어지고 있지 않은지..
결국 그 날 법사님이 설한 내용은 점심 식사가 끝나기 전에 다 잊어버리니.. <금강경>에 대한 지식은 십 년, 삼십 년이 지나도 늘어나지 않는다.
오늘 법사이신 주지스님이 보살은 아상 등 4상이 없다고 했는데.. 아상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를 식사가 듵나고 토론을 하든 짧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아상 등에 대해 대화를 했더라면 더 낫지 않을까?.
<금강경>이 말하고픈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말고하자 한다.
<금강경>에 나오는 4상은 경이 나오던 2세기 경 인도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5온의 주체인 주인 곧 나에 대한 인식이다.
그 당시 많은 인도인들은 자기 주신의 주인을 아트만으로 보았다. 그런데 <금경경>에서 그런 아트만은 없다고 하듯이, 5온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불교보다 세력이 적지만 자이나교에서는 5온의 주인으로 지바를 주장했다. 그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그들이 믿고 있는 지바는 없다고 한다.
그런 <금강경>에 동 아시아에 들어왔는데.. 동 아시아에서는 5온의 주인을 지바라고 믿는 자들이 없었다.
그것을 잘 아는 금강경 한역자는 지바상을 수자상으로 한역했다. 수자상이란 동아시아인들이 동경하는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상이 된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자아에 대해 어떤 상을 갖고 있는가?.
불자라면 부처님이나 보살을 그리며 자신은 중생이라 상을 갖고 있고,
기독교인은 천국에 살기를 바라는 영혼이란 상을 갖고 있고,
현대 과학을 따르는 자들은 일회 삶이라는 단멸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금강경>에는 보살이라면 당연히 자아 상, 중생이란 상, 영혼이라 상, 일회뿐이라는 상이 없어야 한다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자아상이란 접촉하는 대상을 만나면 그것을 인식하는 존재인 상이 있는 것으로 아는 아상이 된다.
해서 그냥 아상이 없어야 한다고 하면 되겠다.
더불어 주체인 아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대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아상이 없다고 안다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는 것이 되니.. 말을 바꾸어 대상에 머물지 않고 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그것을 대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어라[응무소주 이생기심] 하였는데..
머물지 않고 내는 마음은 주체인 자아가 아닌가?
우리는 나인 주체와 대상인 둘이 모두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곧 내가 있으면 대상이 있다. 내가 생기면 즉시 대상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대상이 생기면 내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괴로움이 스트레스가 끊임없이 늘어난다. 만일 괴로움을 멸하고 싶다면..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 싶다면
내가 있다고 아는 마음을 멸해야만 한다.
지금 우리는 모르지만..
석가세존은 접촉이 생기면 마음이 일어나는데..
1) 그때 마음은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기 전 마음임을 발견했다.
2) 하여 마음은 주체인 자 6내처와 대상인 6외처로 구분이 되고 그 둘이 만나 인식이 생기면
3) 그 인식인 마음이 대상을 접촉하는 마음인 내가 있다고 인식한다 했다.
우리가 아는 나라는 마음은 3)에서 바라보는 마음으로 내마음이 된다.
불교에서 수행이란 3)의 마음에서 2)의 마음인 6내처와 6외처를 관하고,
1)의 마음이 되는 것이 된다.
<금강경>에 나오는 보살은 아상이 없어야 한다 했는데.. 바로 1)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 마음이 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중국 스님 6조 혜능 조사는 응무소주이생기심을 듣고 깨달음이 일어났다고 하는 데.. 그 깨달음은 바로
1)의 마음이 있음을 이해한 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