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가의 공훈이 있는 신하들이 있던 충훈부란 관아가 있었으므로 관아 인근에 민가가 생기면서 취락을 형성하자 관아의 명칭을 취해『충훈부』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1906년 당시 시흥군수였던 남기선에 의해 보고된 "시흥군전충훈부전친군영 양둔내장사추수기"에 의하면 친군영 둔사로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유등리(현 광명시 가학동 공세동 마을), 읍내(현서울시 구로구 시흥동), 사성리(현 광명시 철산동), 가리봉(현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 신림리(현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철산리 (현 광명시 철산동)의 연간 도지가 10석5두5승이며 충훈부 둔토로 사성리를 비롯하여 우두리(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시청 인근에 있던 마을), 광화대리(현 광명시 광명동)에 소재해 있는데 년간 도지가 3석 2두였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지역에 있는 친군영과 충훈부의 둔토에서 일
반 농민에게 경작하게 하고 추수 때 도지를 받아 그것으로 충훈부를 관리,운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꽃챙이 남쪽에 위치한 충훈부 마을은 일제강점기만 해도 안양천변에 밤나무가 무성해 밤의 명산지로도 유명했을 뿐만아니라, 1950년대에는 당시 시흥군에 의해 화훼 및 고등소채 육성마을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마을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광주 이씨로 폐동 전(1982)에는 60여 호가 있었는데 그중 광주이씨가 33호로 대성을 이루었다. 1983년 폐동되자 주공아파트가 들어섰고 농경지였던 곳에는 석수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1990년 1월 1일 시조례 제1000호에 따라 석수3동이 되었다.마을에서는 폐동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음력 10월1일이면 마을 동쪽에 있는 꽃메산정상에서 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