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과
평생 웬수에서 천생연분(天生緣分)으로
오래전에 코미디 프로에 시골 노부부가 텔리비젼에 나와서 퀴즈를 맞추는 그런 프로가 있었다. 할머니가 남편과 자기가 이렇게 오래도록 사는 것을 네 글자로 뭐라고 하느냐? 고 물어 보는 문제다.
정답은 천생연분인데 할머니의 대답이 ‘평생왠수’라고 대답을 해서 모두가 배꼽이 빠져라 웃었던 기억이 난다. 평생을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아온 노부부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천생연분’이던 사이를 ‘평생웬수’라고 했겠는가?
이 노부부의 말이 그냥 한 바탕 웃고 지나가 버리는 코미디가 아니다. 이 땅에 살았던 이들도,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도, 그리고 장차도 살아가야 할 모든 부부들의 공통된 문제라는 점에서 왠지 씁쓸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부부 관계를 어떤 목적(目的)으로 허용(許容)하셨는가?
물론 남녀가 만나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결합함으로 부부가 되어 자식을 낳으므로 종족을 퍼뜨리고 민족이나 국가를 이루게도 하시고, 또한 종국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생산하는 의미로 남녀의 결합을 인도하시고 허용되는 것이 기본적인 출발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남녀가 결합하여 부부 관계를 맺고 사는 그 이면에는, 보다 더 중요하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이 땅을 허락하시고, 이 땅 위의 인생의 삶을 허락해 주셨는데, 목적은 너무나 분명하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장차하나님 나라 백성을 이 땅에서 생육하여 양육하고 번성케 하시기 위함이다.
단순히 이 땅에서 인생들이 자기들이 좋아서 만나고 먹고 마시며 자식 낳고 살아가는 자연적인 삶이 목적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선민들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이 땅을 허락하시고 이 땅의 삶을 허락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대로 주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선민들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코스일 뿐만 아니라 그 현장이 바로 부부 관계이며 가정인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초지일관 계획은 바로 타락한 죄 성을 가진 사람의 형질을 근본적으로 아예 바꾸시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죄를 좋아하고 제 멋대로 하기 좋아하는 타락한 육신의 성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좋아하고 주님의 마음이 되어 살기를 좋아하는 거룩한 새 사람의 성품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이 일에만 관심이 있으시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하여 한결 같으신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하면 저 녀석의 못돼먹은 육신의 죄 된 성향을 깨뜨려 부셔버릴까? 박살을 내버릴까?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성품으로 새롭게 할 것인가?"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부부 관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하면 저 못돼 쳐 먹은 육신의 성질머리를 박살내서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저 동방에 블레셋을 붙여서 깨뜨릴까?
아니면 저 원방에 사는 아말렉 족속을 붙여서 뜯어 고칠까? 하나님의 성품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 못돼먹은 성깔,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날뛰는 그 안하무인 인 이놈의 자아(自我)를 박살 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상이요 계획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처방이 뭐냐면, 애당초 부부 관계를 맺게 되는 그 만남부터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이다. 정반대의 극과 극의 성격끼리 만나게 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부부 관계를 통하여 인간의 성품을 개조하시는 하나님의 특별 처방법이기 때문이다.
급한 사람은 느린 사람과, 붙 같은 사람은 물 같은 사람과, 시간관념이 철저한 사람은 시간관념이라고는 희박하여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사람과 만나게 하신다. 깔끔 떠는 사람에게는 털털하기 그지없는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서로가 전혀 맞지 않는 정반대가 되는 성격을 만나게 하신다.
두 사람의 만남은 정반대의 성격 때문에 애당초 피차간에 시한폭탄을 품고 만난 만남이다. 서로 다른 성격 때문에 티격태격 부딪쳐서 치고 박고하는 것이 이미 예고된 일이요, 하나님의 준비되신 각본인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맞지 않는 그 못된 성깔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치고 박고 때리고 부수고 티격태격 살면서 온갖 상처를 주고받는다.
상대방을 자기 맘에 맞게 뜯어 고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결국은 힘이 빠져서 포기하게 되고 그러다가 마침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힘이 빠져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상대를 바라다보니까 이제야 서로에게 없던 성품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서로가 서로의 성품들을 조금씩 양보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의 성품들이 화합되고 중화되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서로에게 없던 것들이 화합되고 중화되고 활성화 되면서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상대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새롭게 생겨난 그 성품을 통하여 주님의 온유한 성품을 덧입게 되는 놀라운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의 못된 성깔과 나의 못된 성깔을 처리 받는, 보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는, 주님께서 “상대방의 모습들을 나의 못된 성깔을 비춰주는 거울”로 허락하신 것이다. 상대방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 흉내를 내게 하신다는 말이다.
내 스스로 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내 모습을 볼 수가 없는데, 내가 잘 못하고 있는지?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내 모습이 어떠한지? 를 모르는데 어떻게 참된 나를 알 수가 있으며, 나를 볼 수가 없는데 고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를 볼 수 있도록, 내 못된 모습을 보고 고치도록 하시기 위해, 나를 볼 수 있는 거울로 상대방을 허락하신 것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 속에 있는 것을 비추어 냄으로 나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상대방이 하고 있는 모습은 내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 나타나는 내 모습이라는 말이다. 밴댕이처럼 속 좁은 것도 내 모습이라는 말이다. 여차하면 혈기 부리고 삐치고 토라지는 모습도 내 모습이라는 말이고, 상대방의 못돼먹은 모습이 못마땅하여 그걸 어떻게 하든지 고치려고 덤비다 보니 티격태격 맨날 다투고 싸웠는데 그 모습이 내 모습이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상대방을 통하여 내 모습을 보여 주신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사실 알고 나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그런데 그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했으니 맨날 네 탓이라고 치고 박고 난리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통하여 비춰진 나의 그 못돼 먹은 성격과 지랄 같은 성깔을 처리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모습이 내 모습임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거울을 통하여 나를 못마땅하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내 맘보를 건드리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
사실 그 모든 모습들은 상대방의 모습이기 이전에 내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짜증 부리고 티격태격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입술로 “주님, 맞습니다. 남편의 그 옹졸한 모습은 제 모습입니다. 주님 제 모습임을 인정합니다. 주님, 나의 치사하고 옹졸한 나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라고 회개하며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문제를 만날 때마다 ‘내 탓’이라고 회개하고 인정하게 되면, 즉시로 주님이 개입하신다. 내가 회개하고, 고백하고 인정한 문제를 속히 사라지게 하신다. 그 옹졸한 것을 뽑아내 주시고 즉시로 주님의 성품을 입혀 주시는 것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상대방에 나타난 모습을 고치려고 덤비는 것이 아니라, 그걸 탓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늘 내 모습이라고 인정할 때마다, 놀랍도록 주님의 은총을 입게 되어 그 못된 성깔들이 주님의 성품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반대 성향의 부부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우리 주님의 영적인 원리인 것이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내가 죽어지는 것이다. 죽어야 부활이 있다.
두 번째는, 상대방의 비춰진 모습을 내 모습으로 무조건 감사함으로 받아먹는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제나 그 모습을 받아 먹을 때 내 자아가 죽어지는 것이다.
“주님, 남편을 통하여 내 모습을 보게 하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할 때 생명이 되어 지고 실재가 되어 진다.
“주님, 내 모습입니다. 내 탓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진심으로 나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함으로만 우리가 주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가 있다.
“주님 맞습니다. 사실 나는 저 모습보다 더 추하고 더럽습니다. 주님, 진실로 제 모습인 것을 인정합니다. 저의 참모습을 보게 하셔서 저를 고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미사일처럼 정확하신 주님이 우리의 못된 성깔머리를 고치시려고 어쩌면 그렇게도 영락없이 내 성깔하고 똑같은 상대를 주셔서 나를 보게 하시고 나를 고치시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세 번째는, 상대방의 그 못된 모습 그대로를 보듬고 덮어서 사랑하는 것이다. 내게 보여 주신 것은 내가 보듬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나의 십자가인 것이다.
사랑만이 허다한 허물을 덮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까발리고 들쳐 내서 온통 나리법석을 떨었는데 이제는 그 허물이 내 것이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사랑으로 그 허물을 덮으시고 용서하셨던 것처럼 덮어 주고 용서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다. 그럴 때 그 허물들이 녹아지고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문제를 감사함으로 먹고 내 모습이라고 시인하고 사랑으로 덮을 때 내 영혼이 힘을 얻어 성장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성품으로 덧입혀지는 역사가 나타난다.
피조물은 피조물끼리만 살면 문제가 생긴다. 두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셔야 서로가 온전하게 빚어지게 된다. 사랑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어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때 육의 사랑이 아닌 영혼의 사랑으로 성숙되어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영원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육신의 차원에서도 이기적 욕망의 기준으로 부부 관계를 판단하지 마라. 부부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은 고귀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어 나가신다. 부부 관계는 그냥 멜랑꼴리한 낭만적 감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피차 서로가 훈련 받아야 할 트레이닝 파트너(훈련대상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은 천국 인을 만드는 천국훈련소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부를 만나게 하실 때 우리 안에 있는 제거되어야 할 성품을 처리하는데 가장 필요한 성품의 소유자를 만나게 하시는데 그런 사람은 주소를 안 가르쳐줘도 땅 끝에서부터 찾아와서 정확하게 여러분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보통 때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도 많지만 부부를 맺으실 때는 정확하게 역사하심을 알게 하신다. 우리의 부부 관계는, 오늘 이 땅에서 방패와 창처럼 서로 결코 타협이 없고, 죽도록 맞서서 지지고 볶고 “평생 웬수”로 부부 관계를 살아가는 심령들 속에 주님의 새 성품을 덧입게 하기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개입하셨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훈련코스를 통과하여 “천생연분”이 되어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인 것이다.
우리의 성품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데까지 성숙되면 그 삶에 예정된 연단이 끝나게 하시고, 그 부부에게, 그 가정에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이 넘치게 하셔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영, 육간에 풍성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정을 예비하시고 허락하신 축복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계획을 알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자.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온 가슴으로 뜨겁게 받아들이자. 중세에는 하나님께서 심령들을 처리하시기 위하여 수도원으로 보내셨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바로 가정 안에서 가족 간에 특별히 부부간의 대소사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듬으시며 처리하시고 세우셔서 그 영혼을 아름답게 성숙시키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부 관계를 통하여 생명의 재창조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인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