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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추워졌다. 비 올 듯한 잔뜩 찌푸린 날씨다.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 늦게 시작한다. 명절 끝나는 날이라 다소 조촐하게 모였다.
- 동그라미의 손길로 말씀을 나눈다. “마르코 복음12장 1절 ~ 12절”
- 관옥 : 하필이면 많이 구절가운데 이것을 뽑았어? (웃음) 은혜스러운 것도 많은데.
- 동그라미 : 얼마 전에 관옥나무 도서관에서 루미의 시를 전시하고, 필사했잖아요. 그 때, 제가 와서 기도를 하고 제가 마음에 담고 있는 질문을 가지고 시를 펼쳤거든요. 그 때 나온 시가 “절름발이 염소”라는 시였어요. 다 무리가 있는데, 절름발이 염소는 맨 뒤에 있는데, 다시 무리가 돌면, 그 절름발이 염소가 제일 먼저 앞장을 선다. 그 절름발이 염소에게 배워라. 앎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이런 얘기였어요. 이 말씀을 보더라도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 머릿돌로 쓰시다니, 주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기록된 성경말씀에서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가. 그들은 이 비유를 자기들을 겨냥한 거라고, 얘기를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주류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불안해하거나 불편해 했을 거 같은데, 제가 느끼는 모퉁이 머릿돌이라는 게 절름발이 염소와 비슷한 것인가. 그런 질문이 들어요.
- 관옥 : 구약에 어디 있을 꺼야. 사람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이 선한 머릿돌로 쓰셨다는 말이 어디에 있어. 그냥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건축하는 사람들이 “이 돌은 못 쓰겠다.” 버린 돌을 그 돌을 하나님이 들어서 그 분의 머릿돌로 삼으신다. 그런 말이지. 예수가 사실, 그렇게 보면 권력들 가진 사람들한테는 버린 돌이지. 그러고 제자들도 다 보냈잖아. 별로 예수님 마지막 최후를 보면, 몇 사람 여자들 남아있었고, 남자들 가운데는 가장 여성스러운 요한이 남아있었고, 다 갔어. 집권자들한테도, 호산나라고 환호 받았던 군중들로 부터도 외면당했고, 참 쓸쓸한 죽음이지. 예수의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이렇게 기독교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모시고 그러는 거지, 그 때 상황으로 확 들어가서 얘기하면 참 쓸쓸한 죽음이지. 아무도 죽음에 대해서, 그래, 아버지한테도 버림받고,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그런 죽음이지. 모세도 죽을 때는 참 쓸쓸하게 죽었고,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고. (계속 개가 짖는 소리) 저 계속 짖는 것이 송이일 거야. 어려서부터 버르장머리가 그러더니 커서도, 딴 얘들은 가만히 있구만 혼자서 저렇게. (웃음) (어려서부터 이 학교를 다였던 학생들이 명절이 되니까 와서 세 시간 씩 족구하는 팀도 있고, 자기 어렸을 때 다니던 학교라.) (저 분들은 여기 사시는데, 도서관이 궁금해서 왔대요.) 들어와서 구경하시라고 그러지.
그렇다고 하나님한테 쓰임 받을라고 사람들한테 일부러 버림받으면 안 돼. 왜 그럴까. 왜 버림받은 사람을 쓰실까. 그러니까 지금 기억이 나는데, 한 번 명동성당에서 청년들이 얘기해 달라고 해서 얘기를 하게 됐는데, 시간이 돼서 20분 전에 갔어. 막 앞에 예배를 마친 신부님이 떠나면서 인사하시는 시간에 내가 들어갔어. 10분 휴식했다가 내가 얘기하는 시간인데, 신부님이 인사를 하는데,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요새는 수도원에 지망하는 청년들이 옛날만큼은 없대. 지금은 그런 추세 인가봐. 요새 젊은 세대들이 잘 안 갈라고 그러나봐. 수도자를 모집하는 광고야. 하는 말이, “여러분, 집 안에 쓸 만한 녀석들이 있으면 우리 수도회에 보내주세요.” 자기가 어디 수도원에 속한 신부 인가봐. 쓸 만한 사람들 있으면 보내달라는 얘기를 두 어번 했어. 내가 들었지. 내 시간이 돼서, 그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에라, 하자.’ 해서 했어. “아까 신부님이 여러분한테 쓸만한 놈들 있으면 보내라고 말씀하시던데, 누가 나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그 말을 그대로 전할께요. 쓸만한 놈 있으면 네가 쓰고, 도대체 어디다가 쓸데없는 골치 아픈 놈들 있으면 보내봐라. 내가 잘 고쳐서 써 볼게. 그러시는 것 같더라.” 그 말을 내가 전한다고 했어요.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죠. 그 말들을 때 퍼뜩 그런 생각이 났어. ‘그래, 쓸만하면 너 써. 못쓰겠으면 나한테 보내봐. 내가 멋있게 써 볼게.’ 지금도 그러지 않은가 싶어.
왜 그럴까? 정말 저 분의 일을 하려면, 마지막에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거든.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못 써. 쓰고 싶어도, 왜냐면, “하이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인가 보다. 나는 정말 무능한 놈이고, 나는 정말 재주도 없고, 내세울 거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나는 정말 못난 놈입니다.” 그런거, 그게 꼭 필요해. 진심으로. “제가 해볼께요. 잘 해볼께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아직 하나님이 쓰시기에 어렵다. 말하자면 못난 놈, 못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솔직히 말해서 어떤 놈이 똑똑해. 누가 다 알아? 지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그렇잖아? 내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그 착각 속에 머물러 있는 한, “내가 숨 쉬는 것도 내가 쉬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고, “100프로 저 분이 주시지 않으면 난 꼼짝도 못 하는 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알고 고백할 때, “그럼 너는 내가 써 볼게.” 그러시는 거야.
자주 내가 얘기하는 것이지만,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 만났을 때, 애굽에 가서 네 백성을 구해내라고 했을 때, “네, 제가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랬으면, 못 갔을 거야. “저는 안 됩니다. 무능해서 안 됩니다. 다른 사람 구해 보십시오.” 세 번씩이나 거절했다고. 진심으로. 그러니 하나님이, “너는 때가 됐다.” 세 번째는 화를 내셨어. “가라면 가지.” 그래서, 억지로 간다고. 그게 모세야.
- 언연 : 앞에 포도원 농부와 집짓는 자의 버린 돌과 뭔 관련이 있는지? (잘 안 어울리지?) 네. (매치가 되기 어려워.)
- 관옥 : 좀 억지스럽지? 그게 발하자면, 신학적인 문제가 되는 거야. 신학자들은 성경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성경이라는 것이 누가 한 사람이 쭉 쓴 것이 아니란 말이야. 원래 자료자체가 토막토막 자료들이 다니던 것을 편집자가 이렇게 모은 거야. 편집한 거지. 어떤 것은 자기 생각에 이것은 아니다 싶으면, 잘라버리고 어떤 것을 늘리고, 편집이야. 말 그대로 가위질해가지고 그 과정에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야. 비슷한 것끼리 묶어놨는데, 사실은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에서 얘기한 것들을 같이 붙여 놓으니까 억지스러운 일들이 생기는 거야. 그런 것을 들여다보는 거야. 그것이 신학의 눈이 뜨여 있기 전에는 그대로 믿어야 해. 억지스럽더라도. 소위, 신신학이라는 것이 나오는 게 뭐냐면, 그것을 들여다보는 거야. 성경이 만들어지는 자체가 여러 문서들을 짬뽕해 놓은 거기 때문에, 한 자료에서 한 통으로 말씀 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20세기 말에 나와. 1940년대 그 무렵에. 구약에 보면, 문서가 크게 4개가 있어. 그 문서의 종류가 달라. 성급이 다르고, 이것은 짬뽕해 놓은 거야. 창세기 보면 서로 안 맞는 얘기가 있어. 이름도 다르고, 똑같은 사건인데. 제 2문서에는 야훼라는 이름을 써. 피문서는 야훼라는 이름이 안 나와. 이래서 학자들이 나눠보는 거야. 그 자체를 무엄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는 것을 전통 신학자들은 이단으로 치고 내쫓고 그랬어. 김장로 부친은 그 신신학을 한 거야. 구약에 있는 안 맞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쫓겨났잖아. 제명됐을 거야. 만들었던 것이 기장이라는 거야. 그렇게 보면, 이 둘은 안 맞아. 딴 데서 하신 말씀이야. 편집한 친구가 억지로 만든 거지. 이해가 죄니? 사실은 비유자체도 내 눈으로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야. 여기서 보면,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야. 아직 당신 안 돌아가셨을 때 얘기란 말이야. 여기서는 죽잖아. 그것은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이 얘기를 만든 거지. 그래서, 예수님의 입으로 이런 얘기를 했다고 기록해 놓은 거야.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기의 생각을 이렇게 이야기로 만들어서 감히 스승님의 입을 빌려서 했다라고 얘기하는 거야. (농부들까지 죽여 버리잖아요.)
예수님이 이런 얘기를 하실 리가 없어. 나도 죽였으니, 너도 죽여. 이게 말이 되니? 말이 안 돼.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고 싶은 거야. 이것보다 더 심한 것도 있어. 다른 비유보면 이것보다 더 살벌해. (지금이나 이것을 누가 썼다. 그러지 AD전에를 보면 선생님의 이름을 빌려서 책을 쓰더라구요.) 옛날에는 그랬어.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빌려서 제자들이 책을 다 썼더라구요.) 소크라테스도 한 줄도 안 썼어. 다 제자들이 썼지. 이것도 예수님이 썼나? 그 중에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대로 기억해서 쓴 것도 있고, 자기의 생각을 그 분의 말씀이라고 그렇게 썼단 말이야. 종교가 대개 그런 짓을 해. (그러면, 의외의 글이 나오면 제자들이 했는갑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나요?) 잘 모르겠다. 라고 하면, 알라고 머리 쓸 거 없고, 그냥 넘어가. (웃음) 그 대신 동그라미처럼 그 구절이 쏙 들어오면, 그 구절가지고, 내가 동감이 되면 먹고, 동감이 안 되면 피해도 돼. 괜찮아. 자꾸 읽다보면 몇 년 전에 모르겠다가 지금은 알겠다. 라는 구절도 나와. (그러면 여기에서,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한 것임을 알고 했다. 에서 그들은 누구예요?) 그들은 율법학자나 그런 사람들.
노자란 사람이 그랬어. “내 말은 알아듣기 쉽고, 내가 가르친 것은 행동하기 쉬운데,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고 행동을 잘 못 한다.” 그런 얘기를 했거든. 예수님이 가르친 것이 사실 너무 쉬워서 잘 몰라. 아주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거든. 예수님이 던지는 것은 너무 쉬운 거라, 그래서, 못 하는 거야. 행동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예수님 하라고 하는 것 보면 어려운 것 없어. 어려운 것 안 시켜, 우리한테. 하면 되는 거야. 누구나 다. 나한테 누가 잘 못 했어. 용서해라. 내가 하면 되는 거야. (웃음) 복잡하지도 않아. 용서하면 돼. 사람들은 엄청 어려워하는 거야. 내가 하는 말도 참 쉽다. 라고 노자가 했는데, 왜 못 알아 듣냐, 머리가 복잡한 거야. 간단한 말을 왜 이러냐고 뒤로 쑤시고 그러니까. 오늘도 내가 요한묵시록 읽다가 왔는데, 십 사만 사천, 그 숫자가지고 몇 천년동안 그것을 가지고 나눠 먹는 놈들이 많아. 요한이 쓸려고 하는 종지는 그게 아닌데, 그렇게 얘기하는 거지. 내가 많은 말을 했다고 그래. 그런데, 정말 그 시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라고 하자. 그것을 종지라고 하거든. 우두머리 종, 뜻 지. 나머지는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 것이고, 그 종지를 놓치고 설명하는 것 가지고 헤매다보면, 말을 못 알아듣게 되는 거야. 종지라 하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말의 중심을 그 사람이 정말 그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것을 놓치지 말아라. 그거 외에 자꾸 다른 데에 자꾸 신경을 쓰다 보니까, 점점 더 난해해 지고, 어려워지는 거야.
안동호박사님이 신학 연구소할 때, 성서 주석 책을 시리즈로 해서 구약과 신약을 전부 수 십권이 될 거야. 독일학자들이 전부 번역을 했거든. 마태복음에 이만큼 두꺼운 주석 책이 나와. 본문은 두 줄, 주석 책은 엄청 길어. 읽어보면 본문은 뭔 말인지 알겠어. 예수 말이니까. 주석은 정말 몰라. 뭔 말인지. (웃음) 번역한 누구한테 내가 농담처럼 얘기 했어. “예수님 말씀은 그렇게 어렵지 않더니, 주석은 그렇게 어렵냐? 내가 대학교 졸업생인데, 못 읽겠다.” 독일 말을 직역을 해놨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웃으면서, “주석 책에 대한 주석을 하나 써 놔라.” (웃음) 예수님 말씀을 이 무지랭이들은 알아들었어. 뱃사람 이런 사람들은 알아들었어. 바리새파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 뭔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 그런 인간들은 마찬가지야. 예수님의 종지가, “너희들이 나 죽였냐?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와서 너희들 싹 죽일 거야.” 그러지 않았어. (웃음)
아버지 부시가 걸프전 했잖아. 세계 여론이 반반이었어. 많은 사람들이 전쟁하면 안 된다. 걸프전은 보복하는 거지.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가서 박살 내야한다. 라는 여론도 있었어. 젊었을 때야. 신문 보니까, 부시가 고민한다는 거야. 전쟁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아버지 부시는 남 장로교, 아들 부시는 성공회야. 기도하러 들어갔대. 모든 스케쥴을 접고 기도하러 들어갔다는 거야. 그게 신문에 났어. 그래서, 가까운 친구들한테 “야, 전쟁 안 난다.” 그랬지. (웃음) 하나님과 독대를 해서 “전쟁 할까요, 말까요.” 여쭤보러 갔을 거 아니야, 그런데, 아버지가 “때려라.” 이럴 리가 없잖아.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지. 그래서, 나는 전쟁 안 일어난다고 그랬지. 한 방에 터졌잖아. (웃음) 부시의 하나님은 “가서 박살내라.” 내가 믿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은 다른가 보다. (웃음) 사실은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정치가잖아. 정치인은 뭘 먹고 사니? 정치가는 표하고 돈을 먹고 살아. 어디에 돈이 있냐, 어디에 표가 있냐. 그게 생명줄이야. 진실? 웃기지 마. 나훈아가 한 마디 했다더라. 왕과 대통령이 국민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것을 못 봤다고 그랬대. 부시는 자기를 밑받침해주는 것이 유권자잖아. 유권자들이 자기들이 제일 신뢰하는 것이 미국 남 장로교야. 세력이 커. 돈도 많고. 그들이 전쟁을 다 지지하는데, 어떻게 내가 반대할 수 있어. “아무리 너희들이 전쟁을 하라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내가 대통령에 있는 한, 나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되지도 않지.
내가 무방비 상태로 아무 대책 없이 누구를 만나. 그러면, 그 상대방의 기운이 나에게로 그냥 와. 막을 수가 없어. 상대방이 악한 기운이 있어. 그러면 그 악한 기운이 와. 내가 아무 방어 없이 그냥 가면, 사람 만날 때 에너지라는 게 있잖아. 그 에너지가 아주 사악하고 위선적이고 그런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처신하는 거야. 근사하게 밖에서 보일 줄은 몰라도, 그 속은 욕심꾸러기야.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야. 제일 그게 교묘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주 선하고 그런 일을 해. 그 깊은 속에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래.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해. 겉은 양이야. 속은 늑대야. 사람들이 볼 때는 양으로 보이지. 그 속에서 나오는 기운은 사악하단 말이야. 어느 순간에 힘이 생겼다 하면, 본색을 드러내는 거야. 그런 상대를 만났으니, 그 마음이 그대로 나한테 온 거야. 똑같이 반응한 거지. 데모, 투사하다가 싸움꾼으로 바뀐 사람들 많아. 정신 안 차리면 그렇게 돼. 부정과 더불어 싸우다가 부정의 하수인이 되는 거야. 지가 부정하는 거야.
얼마나 불쌍한 일이야.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으로 사냐. “너 뭐하다 왔냐?” “사람 미워하다가 왔어요.”
- 푸른솔 : 이 비유가 포도원은 우주, 자연으로 느껴졌고, 종들은 자연 현상 중에 기후도 있는 거고, 바이러스도 있는 거고, 농부들은 인간으로 느껴졌어요.
- 관옥 : 예수님이 포도원 비유를 여러 번 했어. 포도밭 얘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살벌하게는 안 했어. 포도밭에 와서 새벽부터 일한 사람이나 해거름에 와서 일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으로 받는 것이 일반사람들이 듣기에는 정말 이해가 되기 어려워. 그러니까 진짜 예수님이 하신 얘기야.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 라고 하던가, 그런 얘기는 예수님이 하신 얘기야. 우리 상식을 뛰어 넘어. 아까 가졌던 의문이 풀린 거지?
- 간송 : 네. 그렇게 한 번 시선을 바꿔버리면 모든 게 사실은, 풀린다고 해야 하나?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걸로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시선을 내가 바꿔버리니까. 늘 그렇게 보는데, 봐버리면 되는데, 또 다시 펼쳐보면 왜 이러지? 계속 보여 지는 것은 또 다른 도돌이표가 되는 것 같아요. 혹시나, 그럴 수도 있나? 이 책이 가지는 힘이 있다 보니까, 계속 전개되어 있는 거죠. 어제 저녁에 들어가서 다시 얘기 했어요. 사과하고, 잘 받아들이고, 30분 정도 얘기 했어요. (예온이도 잘 받아들이고?) 네. (저는 또 뭐라고 안 그래? 끝까지 잘 했대?) 그런 거는 아닌데, 자기가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설명을 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했으면 괜찮은데, 하필 아빠니까 더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강해지는 거 같아요.
- 관옥 : 좋아. 엑소더스를 신학자들이 얘기할 때, 출애굽을 얘기 할 때, 엑소더스 프롬, 이라는 말을 써. 이집트지. 또, 엑소더스 투, 가나안. 어디로 부터의 탈출이냐, 어디로의 탈출이냐. 이것은 과거고, 이것은 미래란 말이야. 우리는 탈출하는 도중에 있다. 어디로부터의 탈출은 다 알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의 탈출, 어디로의 탈출은 아직 몰라. 왜? 아직 안 가봤기 때문에. 여기는 경험했기 때문에 알아. 과거는. 그런데, 여기는 아직 안 가봤어. 가나안이 어떤데 인지 몰라. 그냥 그런 곳이 있다. 라는 약속만 있어. 현실은 아직 없어. 그래서, 뭐는 아니다. 라는 것은 분명해.
아버지는 아니다. 너는 뭐냐? 저는 아직 모르는 거야. 그것을 아직 몰라. 이놈들이. 다 아는 줄 알아. 그 차이야. 뭐가 아니다. 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서, 너는? 이제부터 찾아 갈 거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그러고는 솔직하게는 몰라. 이게 양심적인 미래학자들이야. 점쟁이처럼 희망하고 생각하는 거지, 정말 네가 어떻게 아니? 몰라. 아무도 모르는 거야. 미래이기 때문에. 그러니, 희망은 있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냥 그것만 가지고 가는 거야. 구체적으로 희망이 이루워질까, 안 이뤄질까, 이것은 정직한 놈은 “모른다.” 이게 바로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란으로 떠나라.” “네, 어디로 갈까요?” “나중에 일러 줄게.” 분명한 과거와 분명한 미래 사이에 있는 거란 말이야. 예온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그래. 그 미래는 할 수 없어. 걔들한테 맡기고 지원해 줘야 해. 걔들 몫이야. 지구별에 코로나가 오기 전에 작년만 해도 이런 일이 벌여질지 누가 알았어? 몰라, 아무도. 그렇잖아?
어제도 얘기했지만, 코로나의 메시지 제 1호, 입 좀 틀어막아라, 이놈들아. (웃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좀 덜 먹어라. 말도 좀 덜 해. 너무 시끄러워. 말도 삼가고, 음식도. 입으로 하는 것이 두 가지잖아. 먹는 거하고, 말하는 거하고, 둘 다 그만해. 너무해. 이런 메시지라고 볼 수 있잖아. 아주 우스운 상징이야. 현대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야. 고만 떠들어. 명상 좀 해라, 이놈들아. (웃음) 계속 돌아다니고 일하니까 지치지. 지치고 재미도 없고, 그래. 좀 가만히 있어 봐. 그리고, 왜 그리 뭉쳐 다니냐?
20년 전에 무위당 선생님이 예언했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것은 이승만이고, 이승만한테는 그것이 맞아. 그런데, 앞으로 우리세대는 “뭉쳐라, 죽는다. 헤어져라, 산다.” 이런 시대가 올 거라는 거잖아. 20년이 뭐야? 그 양반 돌아가신 것이 25년 됐으니까, 한 30년 전에 앞으로 사회운동이고 뭐고 흩어져야 해. 뭉쳐서 광장을 메꾸는 시대는 끝났어. “흩어져서 네트워크를 형성해라.” 네트워크가 뭐냐 하면, 인터넷이잖아. 그런 게 예언이지. 지금 그러고 있잖아. 여럿이서 세를 형성하는 문화는 안 될 거야. 몇 사람 모였냐고 으시대는 시대는 지났어. 이제 인터넷이 있으니까.
- 신난다 : 아까 말씀 하실 때, 이 글의 종지는 뭐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나는 하나님 아들인데, 너희들이 건들면 아버지가 너희들 벌 줄 거야.” 이 글에 있어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이 구절을 읽고 어떤 종지를 받아야 할까요?
- 관옥 : 사람마다 다 다르지. (선생님이시라면.) 이 이야기 자체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로 해석한 거야. 예수의 죽음을, “너희들이 예언자 다 죽였는데 나중에 예수님까지 죽였지? 하나님 오셔서 너희들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러고 다른 사람들로 채울 거야.” 다른 사람들이 누구냐, 자기들이지. 기독교 신자들. 그런 생각을 이 속에 담았다고 봐서 이것을 진지하게 보지는 않지.
- 간송 : 이 이야기가 현대의 기독교에서는 힘이 있는 게 예수를 그렇게 했던 유대사람들, 정통 율법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다 부정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중에 다 죽을 거야. 그리고 세대가 바뀌어서 그 정통이 아닌 비기독교인들 국가들, 예를 들어 아시아, 퍼져갔던 제 3세계들에 의해서 다시 기독교가 다시 성립이 될거야. 아메리카나 이런 곳에서 성해지는 그러고 보면, 이 이야기가 상당히 중요한 자기들의 합리화시켜내는데, 중요한 기둥이 되고 있거든요.
- 관옥: 이 구절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 구절이 다. 오죽하면 사탄도 성경구절을 이용한다고 그러잖아. (웃음) 사탄도 성경 이용해 충분히. 성경이 그래. 어떤 놈이 어떻게 읽느냐, 그것은 누가 못 말려.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예수도 당신 말씀을 하시지만, 사람들이 당신이 얘기한 그 말 그대로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을 안 하셨어.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거야. “저 인간들이 내 얘기를 분명히 오해하고, 곡해하고, 맘대로 해석할 수는 있겠다.” 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시면서도 하신 거지. 그렇게 봐야지. 오죽하면, “귀가 있으면 들으라.” 했겠니? 너희들 잘 못 알아들을 건지 분명히 아시면서도 할 때는 할 수 밖에 없는 거지. 그 때 만일 “에고”라는 단어가 사람들이 알고, 에고라는 단어를 알았다면, 사탄이라는 말을 안 쓰고 에고라는 말을 썼을 거야. 우리가 볼 때에는 사탄이라는 말을 에고라는 말로 바꿔 읽어 봐. 이해가 확 와. 그 때는 사람들이 지동설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의식수준에서 얘기해야 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기도 참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종지는 너무 분명하잖아. “하나님 사랑하고, 예수님 사랑하라.” 이거야. 이 말씀에 비추어서 보면,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아니다. 되잖아? 간단해. 죄 지은 사람을 없애라는 말은 예수님 입에서 나올 수는 없어. 죄를 지었으니 더 사랑하고, 관심 기울이고 그래야지. 죄인이니까 죽인다. 그것은 예수님의 종지에 어긋나.
성경을 분명하게 보면, 이것이 보여. 이것은 제자가 스승의 입으로 얘기하는 거구나. 일종의 전통이야. 우리나라도 비슷할 거야. 괜찮아. 대부분 스승이 죽은 다음에 하거든. 스승이 살아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어렵지. 내가 장일순 선생 돌아가신 후에, 노자 썼는데, 한 일년 못 했어. 어떻게 해? 돌아가셨는데, 출판사에서는 완간을 해서 책을 내야, 책을 팔아먹을 텐데, 이것은 안 나오고. 차장은 자꾸만 나한테 원고를 하라고 그러고. 나는 선생님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어느 날, “그래 한 번 써 보자.” 내 기억에 일주일 안 걸렸어. 쭉 썼는데,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어. 그 분과 교감이 이뤄지는 거야. 꼭 내 귀에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써. 지금 읽어봐도 여전히 그 선생님과 내가 대화하는 것처럼 되는 거야. 사실, 내가 쓴 거지. 질문도 대답도 내가 한 거지. 그래도 그렇게 부끄럽지 않아. 선생님이 썼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제자들도 그럴 수 있지. 바울도 그렇고.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내 생각이지. 책임은 내가져야지. 잘 못되면 내가 한 거고. 내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드리기는 드렸어. 사모님이 옆에 계셔서 그 말하기 어려웠어. 사모님만 안 계시면, “이제 돌아가실 텐데 소감이 어떠세요?” 이런 것도 물어 보고 싶고, (웃음)
사모님이 옆에 계시니까 죽음에 대한 얘기를 내가 못 하겠더라고. 하고 싶은데, 못 하겠어. 그게 아쉽기는 해. 나도 언젠가 죽을 텐데, 그 때는 내가 먼저 얘기하고 싶어. 죽음에 대해서. (잊어먹기 전에 여쭤 볼께요.) 그런 시간을 좀 가졌으면 좋겠어. 안동호박사의 경우에도 마지막에 아무도 면회 못 시키고, 여성숙 선생은 지금도 그것이 아쉬운 거야. 마지막 순간에 그 양반이 뭐라고 했는지 그 얘기를 듣고 싶은데, 면회를 차단해 버렸어. 이 양반 아직 의식 있는데, 그래서, 내가 눈치를 보다가 얘기했어. “1권밖에 못 나왔는데요, 선생님 가시고 나면 제가 마저 쓰도록 하겠습니다. 81장까지 다 쓰지요.” 내가 그랬어. “그래? 자네가 쓴 거면 내가 쓴 거지.” 그래도 막상 일 년 동안 착상을 못 했어. 그러다가 딱 시작되니까 쫘악 쓴 거야. (선생님은 아셨어요?) 선생님은 몰랐지. 돌아가신 뒤니까. 그 약속은 받아놨는데, 막상 쓸려니까 그게 잘 안되더라고. 첫 자 쓰기가 어려웠어. 그래도 딱 시작하니까, 어떨 때는 질문을 쓰면서도 답을 몰라. 쓰면서도 영 답이 안 오면, 질문을 없던 걸로 해야 해. 그 기억도 나. 그렇게 하면서 쓴 거야. 바로 답이 오는 거야. 답이 딱 떠오르는 거야.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81장인가, 80장인가, 대화중에 “자연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그런 말이 나와. “도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내가 예를 들었어. “30대 농사꾼이 밭에 농사하러 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습니다. 이것도 해치지 않는 겁니까?” 이렇게. 그러면서, 답이 안 떠오르는 거야. (웃음) 답이 안 떠오르면 없었던 걸로 해야 하잖아. 바로 이어서, “그러니까 네 말은 늙어죽으면 괜찮고, 젊어 죽으면 손해라는 말이냐? 해를 입은 거란 말이냐?” 그게 답이지. 젊어서 죽은 것이 복인지, 해인지 네가 어떻게 아냐? 그 대답은 미리 내가 생각하지 않은 거거든. 기억나는 것은 그것인데, 그런 것들이 많았어. 선생님과 소위 말하는 교감이라는 게 있구나. 예수님과 우리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거야.
- 목영이네 오셔서 반가운 만남을 이어가다. 장로님 기도로 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