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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동래읍성_2토편,202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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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코스
작성자 : 이재익 시인 (학정) / 2021.6.12. 시, <천곡결서>를 짓는 그 순간의 모습.
인터넷서점 판매중
<천곡결서>
이재익
한 초인(超人)* 최후에 갑옷 위 관복 덮어 입고
북향 4배하고 의연히 앉아 시 한 수 쓰고,
적의 칼날 받았음이여.
창창한 마흔둘에 충을 쫓아 효를 밀쳤구나.
연년세세 5월 25일* 충렬사에 와서
92위 동지들 제일 윗자리에 앉고
본전 한 단 아래 의열각의 연인도 만나보리라.
임진년 음력 4월 15일 그 피 얼룩진
천곡결서(泉谷決書)* 결연함을
후세인은 소줄당(昭崒堂)* 당호로 칭송하였다.
백합나무꽃과 송악덩굴 힘찬 햇순이
어찌 옛날의 장엄한 슬픔을 알리오.
끝내 꺾이지 않은,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亂)* 그 정신에
부산동래와 만고(萬古)의 역사가 빛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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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12.
* 초인 ; 송상현(1551~1592) ; 임진왜란시 동래부사, 본관 여산, 호 천곡, 시호 충렬, 묘는 청주.
* 제향일 5월 25일 ; 전사한 음력 4월 15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
* 의열각 ; 금섬(송상현 부사 시녀), 애향(정발 장군 애첩), 수영 두 의녀를 모심.
* 천곡결서 ; 孤城月暈(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외로운 성에 달빛이 흐린데, 여러 진은 깊이 잠들고 있도다. 군신의 의는 무겁고 부모의 은혜는 가볍도다.) 송상현 부사가 전사 직전에 부모에게 남긴 한시.
* 소줄당 ; 충렬사가 겸하는 안락서원 강당. ‘일월보다 밝고 태산보다 높다’ 는 한유의 시구 의미 내포함.
* 戰死易假道亂 ; 왜적이 “싸우려면 싸우고, 길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응대한 말 “싸워서 죽기는 쉽고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충렬사에 집결
충렬사에서 동장대길은 6월 1일부터~10월 31일까지 개방된다. 그런데 오늘은 6월 12일인데 문이 잠겼다. 공휴일는 또 개방이 안되는 모양이다. 충렬사~ 군관청~동장대는 참~ 가기 어렵다. 화목타운 102동옆으로 돌아서 갔으며, 동장대 울타리 넘어서 바라만 봤다.
군관청 ; 충렬사와 동장대 사이에 있다.
* 군관청은 원래 수안동에 있었는데, 소유주 고촌 김도근 회장(동일고무벨트 창업주) 께서 기증하여 1982년에 여기(충렬사 경내)로 이건하였다. 원래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관집무실이었다.
잘 가기 어려운 동장대
동장대는 또 별칭이 망월대
가기 힘든 동장대 그 멋진 글씨, 망월대이기도 하고.
충렬사에서
충렬사 가장 낮은 마당에 있는 <전사이가도난비>가 이 충렬사 정신의 핵심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충렬사~동래읍성을 탐방하러 온 우리 친구들 오늘 공부 좀 많이 합시다!!
충렬사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짜증을 내는 친구가 있긴 있었습니다만~ 그런게 아니지요.
▩ 천곡결서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막 함락될 무렵에 부친에게 하직을 고하는 詩 ‘천곡결서(泉谷決書)’를 남겼다.
외로운 성에 달빛이 흐린데 여러 진은 깊이 잠들고 있도다.
군신의 의는 무겁고 부모의 은혜는 가볍도다.
<原詩> 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 충렬공 송상현 동래부사
1) 1551(명종 6년)~1592(선조 25년),
* 출생지는 서울, 부친 송복흥의 고향은 전남 정읍(아마도 천곡사지 부근일 듯)
* 묘소는 청주(덕흥구 수의동), 순국 직후 왜장 히라요시가 매장한 것을 임진왜란이 진정되자 어느 때인가 청주로 이장하였고, 1610년 광해군 때 비문은 송시열 짓고, 송준길 글씨를 씀.
2) 본관 여산, 호 천곡(泉谷)
3) 1576년 별시문과 병과 급제
4) 경성판관, 승정원 등, 춘추관, 공조, 호조 정랑, 경성판관, 배천군수 등 역임
5) 종계변무사(명이 이성계가 이인임 자라고 틀린 호적 고집한 것 고쳐달라고 청원하러 간 사신)의 질정관으로 명에 갔다 옴.
6) 사간원 집의, 사재감 군자감 正 거쳐서, 1591년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승진하여, 동래부사로 부임함(임진왜란 1년 전)
7) 임진왜란시, 1592년 음력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왜적이 동래성에 도착해
* 협박 ;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 달라)
* 송부사는 목패로 응답 ; 戰死易假道難(싸워서 죽을 망정 길을 비켜주기 어렵다)
* 힘껏 싸우다 중과부적, 함락 직전에 조복을 껴입고, 천곡결서 남기고, 단좌(端坐) 순사(殉死)함. (향년 42세)
* 적장 히라요시가 충의를 인정하여 동문 밖에 장사지내줌.
8) 추증 ; 이조판서, 좌찬성, 시호 ; 忠烈 (충렬공)
9) 제향처 ; 부산 충렬사, 개성 숭절사, 청주 신항서원, 청원 충렬묘, 고부 장충사 등.
충렬사의 제향은 5월 25일이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왜적이 부산항에 처들어 왔고, 부산진성전투는 14일, 함락됐고, 그날 동래성까지 도착해서 길을 비키겠느냐 싸우겠느냐? 의사를 타진해고 <전사이기도난> 으로 답을 보냈다.
전투는 다음날 15일에 있었으면 이날 송부사 등이 전사했다. 그러므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25일이 되는 것이다.
충렬사 忠烈祠
*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 욕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이라는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으나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송공사(宋公祠, 송상현 사당)를 세워 忠烈公 宋象賢 부사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 1624년 (인조 2년) 에는 선위사 이민구의 건의로 忠烈祠라는 賜額(사액 ; 사당의 명을 왕으로 부터 하사 받음)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忠壯公 鄭撥(정발) 장군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 이후 1652년(효종 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安樂書院이라 하고,사우祠宇(사당)와 서원書院(교육)의 기능을 갖추었다.
* 1709년(숙종 35년)에는 충렬공과 충정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 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과 양조한, 비장 송봉수,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 1736년 (영조 12년)에는 별사別祠에 모셨던 분들을 충렬사에 합향(合享 ; 함께 모시고 제사함)하였으며
* 1772년(영조 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을 추배하고
* 임진왜란 때 송상현공과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김섬(송부사 시녀, 금섬?)과 애향(정발 장군 애첩)이 따라 죽어 열녀였다)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나타나네.)
*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 95, 804 ㎡(28,980평)의 경역에 본전 외 15개 동의 건물이 있으며,
*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본전옆에 초봄에는 매화가 만발하여 볼만해요. ↓
충렬사 본전옆으로 장애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쪽문옆에 핀 매화
충렬사 본전옆으로 장애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쪽문옆에 핀 매화
지금은 6월초라, 석류꽃이 만발하였다.
석류꽃이 좋아서 한 컷
어디를 보는지?
계단 조금 내려와서 찍어야 겠네. 그래야 충렬사 현판이 제대로 보이겠다.
처마밑에 잠시 비를 피한다.
연못가에 태산목꽃이 피었다.
소줄당(昭崒堂)
* 충렬사 본전 바로 아래에 좌측 <의열각> 은 임진왜란시 義로운 여성들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의열각 맞은 편에는 <소줄당> 이 있다. 안락서원 강당이다.
* 소줄당은 임진왜란 선열들의 충절은 해와 달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뜻으로,
한유의 '이제송(夷齊頌; 백이와 숙제 칭송 )'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昭乎日月 不足爲明)
줄호태산 부족위고(崒乎泰山 不足爲高)'
에서 따온 당호(堂號, 집이름)이다.
* 현재 안락서원 현대적 강당 역할은 충렬사 정문 밖, 충렬사를 향한 오른쪽 현대식 건물로 운영되고 있다. <안락서원 교육회관>이다.
충렬사 소줄당(昭崒堂) 의미에 대하여
* 보통 서원은 강학기능인 강당이 가장 큰 주건물이고 기숙사 기능이 있어서 강학시설이 주이고 강당 뒷편에 제향기능인 사당이 작은 건물로 존재한다.
* 그런데 충렬사는 안락서원을 겸한다. 그 서원의 강당 기능이 바로 소줄당이다. 처음 제향기능인 사당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안락서원 기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강당인 소줄당은 형식적이고, 실제적 현대기능은 정문밖 오른쪽 안락서원 교육회관이 운영되며 활동이 활발하다.
인생문
人生門은 임진왜란 시에 여기로 피난을 간 사람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다.
인생문
* 동래 읍성은 1387년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창궐하자 박위 장군이 쌓았다. 동래시장 일원이다.
* 1731년 영조 때, 동래부사 정언섭이 넓혀서 다시 쌓았다. 이 성을 쌓은 여러가지 사정을 기록한 비석이 <내주축성비> 이다.
인생문
성문앞으로 돌출한 장치는 방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옹성이다. 대표적인 옹성은 수원화성 팔달문 등에서 잘 보인다.
마안산 삼일탑.
삼일탑의 첨탑 부분(추은수)
삼일탑의 첨탑 부분(추은수)
마안산 정상부에 왜 삼일탑이 있을까요?
삼일탑 옆에는 체육공원
1910년대 초기 일제의 식민통치는 무자비한 총칼의 무단정치(헌병경찰통치) , 제1차대전(1914~1918) 종결 세계평화무드 조성. 마침 고종황제가 붕어하셨다. 그런 계기로 삼일운동이 일어났지요. 부산에도 여기저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부산의 만세운동은 최초가 3/11일.
1. 부산 최초 ; 3/11. 좌천동 일신여학교
2. 3/13. 동래장날,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중심
3. 3/18.19. 동래시장
4. 범어사 명정학교 참가
5. 3/29. 구포장날
6. 4/5 기장장날
7. 4/10. 명지 동명학교
8. 부산상업학교 학생도 참가
9. 운전자 철도 직공
10. 5월 까지 지속
11. 검거 2백명, 투옥 150명(지금 기준으로 보면 규모가 많은 편은 아닌것 같다.)
최해군 선생은 <부산포> 임진왜란 역사소설을 쓴 분이지요.
삼일탑
삼일탑
삼일탑
3.1운동 그날의 함성, 그날의 울부짖음이 생생히 들리네.
북장대
6월의 까치수염꽃이 반기고 있네요.
북장대 올라가는 마지막 데크 계단길
북장대
북장대
북장대는 전망이 좋다.
북장대에서 띠운 이 미소는 오늘 최고미소상
오늘 일기예보는 크게 어긋났다.
어제 비오고, 오늘은 개인다고 했는데 하루종일 비가 왔다.
우중에도 북장대에서 기를 받아가는 이 친구는 누굴까요?
이 친구는 동장대 울타리 밖에서 동장대를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휴전선 철조망이라도 되는 기분.
팔에 알통이 안보이는데?
북장대에서 북문으로 곧장 데크계단길로 가파르게 내려간다. ↓
보무도 당당?
삶의 반석을 오늘 이렇게 다진다.
미소는 천금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돌아요, 오늘
싱그러운 오솔길 못지않네.
명상의 시간
망설이다, 오기를 잘했다.
북문에 도착했어요. 북문 안쪽에서는 문루의 글이 보이지 않고, 문밖에서는 보인다. ↓
수문장 빼고 한 컷
수문장 넣어서 한 컷
코로나 때문에 수문장도 할 짓이 아닙니다. 마스크를 써야죠. 어떤 때는 눈도 가려놨어요. 시민들의 해학?
요즘 시절 같으면, 수문장 하기도 힘들다.
오늘 군관나리만 마스크 벗었다. 백신 맞았나 보네.
북문 밖으로 나가서 편백숲 오솔길을 가면 ' 시가 있는 오솔길' 이지요. 서장대가 나와요.
여기에 공작고사리가 많더라고요.
공작고사리
시, 한명희 <비목>
시, 천상병 <귀천>
기타 많은 시들이 있다.
서장대는 마루가 없고, 신을 신고 바로 들어갈 수 있어요.
서장대에서 다시 북문으로 돌아갑니다, 왔던 성벽밖 길인 편백숲 오솔길이 아니라, 성벽 안쪽길으로 갑니다.
북문안에는 장영실과학동산이 있고, 동래읍성역사관이 있으며,
길옆에는 큰 비석 하나 있는데 높이가 4.2m <내주축성비> 이 비석은 옮겨 이사를 다녔어요. 처음 동래읍성 남문밖ㅡ> 일제가
금강공원에 옮김 ㅡ> 현재는 동래읍성 북문 안쪽, 영원한 자리같은데?
내주축성비에 대하여
* 영조 때 7년, 1731년 정언섭 부사, 동래읍성을 크게 중수한 시실을 밝힌 비석
* 비석 높이 4.2m, 폭 108cm
* 읍성 규모의 확대 ; 본래 읍성 둘레 1.4km, 높이 3.9m -> 둘레 3.8km, 높이 5m
* 경상도 65개 군민 차출, 5만2천명 동원/ 총인원 약 42만명 /
* 비용 ; 쌀 4,585석, 베 1,552필,,돈 13454냥
* 비석의 이동 ; 본래자리 동래읍성 남문 밖 ->1930년 금강원 -> 2012년 10. 현위치
내주축성비
장영실과학동산
* 장영실은 동래 출신 인물, 관노 내지 천민 출신으로 뛰어난 과학소질로 세종대왕의 파격적인 인재등용에 의해 높은 관직까지 올라갔으며, 세종 때의 각종 과학기구는 이 사람이 만들었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로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 장영실(蔣英實)은 어떤 인물인가?
1) 조선초 세종 때 사람이나 그가 어디서 누구의 아들인지? 생몰 연대 미상.
세종실록에는 관노였으며 부는 원나라 때 귀화한 중국인. 어머니는 동래 기생. 아산장씨 족보에는 고려말 전서(典書)를 지낸 5형제 가운데 세번째인 장성휘의 외아들이라고 하였다.
2) 세종의 배려로 중국 유학후 상의원(尙依院 ; 의복, 금은, 보화 관리)별좌로 시작해서 상호군까지 승진.
- 갖가지 천문기구를 만들었고 경상도 채방별감으로 구리와 철의 채광과 제련을 맡기도함.
3) 1442년 세종 24년 뛰어난 공헌에도 불고하고 그가 만든 임금의 수레가 부서지는 바람에 장 80대를 맞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4) 장영실의 업적
① 자격루(自擊漏 ; 물시계) ; 경회루 부근에서 한밤중 3경에 자격루가 자동으로 북을 세 번치면 그 소리를 듣고 광화문의 북을 세 번치고 종각의 북이 세 번 울렸다.
- 화폐 1만원권의 물시계 모습은 중중때 것 물통만 5개 남은 것 뿐(국보 229호)
② 측우기 : 1441년 세자(문종)가 고안 장영실이 제작. 통설은 그 용도가 기우제 주술적 샤머니즘적.
* 이태진 교수 주장 ; 강우량을 측정, 풍흉정도를 참작하여 세금부과를 위한 것이다. 만약 주술적이라면 제사의례를 주관하는 예조에서 관장했을 것, 그러나 호조에서 담당했다.
동래읍성역사관
북문 부근에 있는 전사이가도난 포토존
까만 머리 부분에 자신이 들어가면 돼지요. 송부사도 되고, 장군도 되고~
복천동고분군
시장해서 일원들은 지나쳐버렸는데~ 꼭 보고 가야겠다는 친구.
191기가 발굴 조사됐다. 1969~2008년까지
얘들 오늘 비오는 날이 잔치날인가보네.
비오는 날은 이렇고
마른 날은 이렇고
유물 1만 2천전점 나왔고
발굴에 참가한 부산대, 동아대, 부산박물관, 복천박물관 등에 나누어 분산 전시
봉분은 아예 없애버렸다. 사각형 표시만~
원래 판자촌으로 다 허물어져 모양을 알 수 없었으니~ 그래도 좀 덩싱덩실 봉분을 만들었으면~
* 동래지역은 신라의 땅이 되기전에는 삼한~가야~초기 신라시대에 작은 성읍국가(부족국가), 독립 국가였다.
그 이름은 독로국, 장산국, 내산국, 거칠산국 등의 이름이 보이며, 하나였는지 여러개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고, 금관가야지역내지 그 문화권이었다, 그 흥망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확실하지 않다. 결국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곳의 고분 유물을 통해 지배층의 세력과 성격을 규명해 나가고 있을 뿐이다.
* 지배층이 여기에 묘를 다 쓴 후에는 자연히 연산동 고분군으로 옮겨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복천동고분(2~7세기)보다 연산동 고분(4세기 후반~ 6세기후반) 이 규모가 더 크고 후기에 나타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참고 ; 연산동 고분군] ↓
[참고] 연산동 고분군봐라~
복천박물관
동래의 지명과 역사
원래 이 고분군 언덕에는 판자촌이었다. 다 철거시키고 정비함.
잔을 하필 산발안에다가 세웠나?
금동관. 나뭇가지 장식. 소박하기는 하다.
높은 그릇 받침. 위례, 의례용
7두령가지방울. 주술용
철기의 문화 가야시대 부산
발굴 성과중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올렸습니다. 장수는 물론 말에게도 철갑옷을 입혔다.
편백숲길.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시절 조림사업
요즘은 태양광사업입네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산림을 많이 훼손한다는데? 원전은 박대하고 문제 많은 태양광?
복천박물관~ 고분군 전경. 비가 오면 고즈넉하다.
비오는 날 홀로 이 여인은? 무슨 생각을?
뭐가 최고라는 거야?
코스가? 회장이? 막걸리가? 아구찜이?
인생이란 이런 것.
그래도 정신을 차리면 멋진 포즈나와요.
살구 저 색깔은 천하의 아름다운 주홍색
이 차제에 이재익 시인 <살구> 한 수 소개하고~↓
살구꽃과 열매는 맛 이전에 향수를 불러 온다.
쫓아가자!
느긋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