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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요세미티 엘캐피탄 아메리칸월에 있는 쓰리 시 호스 VI 5.9 A5등급 코스 개척보고회를 하기 위해 27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서울, 대구, 부산지역에 이어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원을 마지막으로 개척보고회를 끝마쳤다.
나는 1980년대 초반부터 등반프로가이드로 활동했었다. 이번 귀국길에는 보고회와 더불어 요세미티 빅월등반가이드 사업을 재개할 꿈을 꾸었으나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계획을 변경하여 한국에서 빅월등산학교를 열기로 결정했다.
빅월등산학교를 하려면 교육장이 있어야 한다. 때문에 인공등반과 빅월등반 교육을 시킬 암장을 찾아 북한산과 도봉산 주변을 찾아다녔다. 선인봉 만월암에서 자운봉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우측 방향에 오버행으로 되어 있는 붉은색 바위벽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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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산 붉은벽 오버행 구간을 인공등반하고 있는 필자. 요세미티에 못지 않은 고난도 인공등반기술을 구사해야 했다.
- 이 붉은색 바위벽은 서울 지역 암벽등반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바위벽이다. 등반가들에게 특이한 인상을 주는 매력적인 바위다. 1978년 내가 장봉완, 박일환, 백성현과 설악산 비선대 적벽에서 개척등반을 하고 있을 때 한국봔트산악회 회원들이 이 붉은색 바위벽에서 개척등반을 시작했다. 이 붉은벽의 동남 벽은 삼단 역층 오버행 형태의 큰 바위벽이다.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천장 벽들이 무너지고 송곳같이 꽂혀 있는 붉은 바위들이 떨어질 것만 같다. 이 불길했던 느낌은 현실이 되었다. 1피치 역층 오버행 바위벽에 하켄(피톤)을 박는 순간 방 크기만 한 오버행의 바위벽이 깨져 무너져 떨어지면서 선등으로 오르던 사람과 확보 빌레이를 보던 사람이 일순간에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났다.
1970년대 말 2명 클라이머 숨진 벽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송곳같이 꽂혀 있는 바위들과 엄청나게 큰 붉은색 바위벽들이 무너져 덮칠 것 같다. 사고가 난 지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고 빅월등산학교도 생긴 지 15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는 개척등반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올라왔다. 테라스가 정해질 만한 장소를 관찰해 본다. 아무도 손을 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크랙에는 잡목들이 무성하다. 붉은색 바위벽이 나를 유혹하며 매력적으로 내 가슴을 흔든다. 단독으로 개척등반을 하기로 결정한다.
내가 만든 한미알파인가이드협회가 요세미티 빅월등반을 가이드들과 함께 하지 않기로 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암벽등반의 본질과 매력은 선등반을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암벽등반가들이 빅월등반에 입문하고 요세미티계곡에서 즐겁고 재미있는 빅월등반을 자연스럽고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게끔 체계적인 등반기술을 전수하는 빅월등산학교를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나는 이 붉은벽 루트 개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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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산 자운봉으로 이어지는 붉은벽. 역단층이 진 오버행이 연속되는 벽으로, 요세미티와 같은 거벽 인공등반 연습을 하기에 안성마춤인 곳이다.
- 도봉산 붉은색 바위벽은 설악산 비선대 적벽보다 등반성이 높고, 코스 길이도 길어 훈련지로 적격이다. 고도감과 위압감도 빅월에서와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서울 산악인이 설악산 비선대 적벽을 하려면 최소 2박3일이나 3박4일 기간이 필요하지만 도봉산 붉은벽은 1박2일로 충분하다. 1피치 테라스에다 포타렛지(허공침대)를 설치하고 선인봉과 만장봉, 자운봉 계곡의 자연경관을 마음껏 즐길 수도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아마도 유일한 자연 인공등반 암장이 될 것이다.
붉은벽 동남벽에서 서벽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트래버스 등반선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6월 3일 금요일 붉은색 바위벽을 향해 올랐다. 무거운 홀백을 메고 힘들게 올라가는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막걸리 배달하느냐”고 물어 본다. 홀백의 장비들은 내가 보고회 때 전시용으로 가져온 것인데, 이렇게 등반에 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크랙 속의 흙 긁어내며 등반 속개
6월 4일(토요일). 붉은벽 동남면은 하단 중단 상단 삼단역층 오버행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침 햇살이 붉은색 바위벽을 더 붉게 물들인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붉은색 바위벽을 개척등반할 수 있게 해준 대자연에 감사한다.
하단 좌측 오버행 벽에서 두 명의 개척자들이 한순간에 불운을 당했다. 나는 하단 오버행 중앙크랙으로 개척등반하기로 결정한다. 출발 크랙은 동남면 좌측으로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직상크랙을 따라 개척등반을 준비한다. 출발점에 든든한 나무나 큰 바위가 있으면 볼트를 사용하지 않고 단독등반을 할 수 있는데 협곡이라서 출발 볼트를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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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척등반 도중 밑에서 바라본 붉은벽. 필자가 등반하며 설치한 로프들이 확보물과 함께 걸려 있다.
- 좁고 넓은 균열 속의 작은 나무와 잡초, 흙을 청소하며 안전한 인공등반으로 첫 하단 오버행을 행해 오른다. 0.5~2인치 캠들을 설치하면서 C1등급으로 개척등반을 한다.
우측으로 스카이 훅 트래버스 등반해, 하단 오버행 중앙 밑에 깨끗한 실 크랙을 작은 캠과 마이크로 너트를 설치하면서 C2등급으로 올라 하단 오버행 밑에 도착했다. 붉은색 바위 동남면은 큰 바윗덩어리들이 거꾸로 꽂혀 있고 붙어 있는 바위와 흔들리는 바위로 되어 있다.
하단 오버행 위쪽 균열 속으로 확보물을 설치한다. 올라서면 바위벽이 왼쪽으로 무너지면서 엄청난 낙석과 함께 떨어져 죽을 것 같다. 확보물을 설치해 놓고 망설인다. 올라설 수 없다. 겁먹지 말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올라갈 것이냐, 포기할 것이냐, 결정을 내려라. 이 구간만 넘기면 다음 구간부터는 바위가 무너질 위험성은 적어 보인다. 중단 오버행에 ㄴ자를 네 번 그리면서 연결되어 있는 좌향의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언더크랙이 손짓하며 부르고 있다.
6년 전 엘캐피탄 세 마리에 해마 쓰리 시 호스코스에서 두 번째의 해마인 블랙 시 호스 60m 빅 언더크랙에서도 지금같이 흥분하면서 단독으로 개척 등반을 하던 생각이 바람과 함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개척 등반의 이상야릇한 느낌은 나의 피와 함께 섞여, 40년 이상 내 몸속으로 돌아다니면서 마음을 설레게 한다.
좌측으로 이어지는 중단 오버행 언더크랙 개척등반은 긴장감과 흥분의 연속동작이다. 붉은벽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언더크랙이 끝나는 좌측 벽으로 두 개에 테라스볼트를 박는다. 직선으로 35m, 등반 길이 40m로 1피치 개척등반을 끝마치고 하강, 확보물들을 회수하면서 다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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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붉은벽 루트를 오르고 있는 필자. (아래) 개척등반 도중 내려다본 붉은벽의 크랙.
- 2피치는 우측 동남면에서 좌측 서면으로 돌아가 개척 등반을 시작한다. #5알루미늄 헤드 스카이 훅, 작은 캠을 설치하면서 좌측으로 트래버스 등반을 한다. 위쪽 오버행 벽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버섯같이 붙은 얇은 바위벽으로 형성되어 있다. 좌측으로 스카이훅 트래버스 등반해, 서면 벽 밑에 있는 침니 크랙으로 진입한다. 침니 등반도 아니고 인공 등반도 아닌 자세로 오른발만 침니 속에 집어넣고 0.5~5인치 캠들을 설치하면서 C2+등급으로 개척 등반을 한다.
결국 낙반사고 나며 큰 부상당할 뻔
서면 벽은 바위벽이 흔들리면서 썩어 있고 붙어 있는 큰 바위벽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바위와 함께 떨어질 것 같다. 둥둥 소리가 나고 금이 가 있는 큰 바위 벽 속에다 4인치 캠을 설치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올라서는 순간 좌측에 붙어 있는 책상만 한 바위벽이 깨져 무너지면서 나를 덮친다. 끔찍한 순간, 정신을 차려 상체를 우측 벽으로 붙이면서 몸을 움츠린다. 책상만 한 바윗덩어리가 내 허벅지와 무릎 위로 떨어지며 굉음소리와 함께 계곡 전체를 뒤흔든다.
무릎과 허벅지의 통증은 참을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계곡으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산행객들이 없었을까 걱정된다. 낙석사고를 예측할 수 없다. 통증과 긴장이 전해지는 시간은 길고 괴롭기만 하다. 무릎과 허벅지를 움직일 수 없다. 1피치 출발점 좌측 위로 하강한다. 엉금엉금 기면서 비박지로 가서 쓰러진다.
6월 6일(현충일). 움직일 수 없어서 앉은 자리에서 하루를 보내고 철수를 할 것이냐, 2피치 나머지 구간을 개척 등반할 것이냐,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것, 철수할 수는 없다.
늦은 시간에 출발점으로 가, 바위와 함께 떨어졌던 2피치 중간구간으로 어센더를 사용해 저깅(jugging)한다. 나와 함께 떨어진 바윗덩어리 위쪽의 더 큰 바위가 또 떨어질 것 같다. 밑으로 백 클라이밍을 한 다음 좌측으로 슬링과 스카이훅을 확보물로 사용하면서 C2등급으로 트래버스 등반해 좌측에 있는 넓은 크랙으로 진입한다. 직상크랙을 A2~C2등급으로 작은 너트, 칼날형 피톤, 0.3~2인치 캠들을 설치하면서 오른다. C3R등급으로 어렵고 힘들게 개척등반을 한다.
2피치에 확보용으로 첫 번째 리벳볼트를 박는다. #3코퍼헤드와 작은 캠, 작은 너트들을 설치하면서 C2+등급으로 2피치 개척등반을 마무리한다. 2피치가 끝나는 장소에 두 번째 확보용 리벳볼트를 설치하며 붉은벽 초등반을 기록했다. 등반길이 80m IV C3R A2등급의 개척등반을 마치고 루트 이름을 KAGA(Korea Alpine Guide Association)로 했다. 예전에 내가 동참했던 알파인가이드협회의 약자로, 그것을 기념하는 뜻에서다. 두려움과 외로움, 아픔을 참고 넘기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 KAGA길이 완벽하게 완성되는 즐거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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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산 붉은벽 개념도
- 6월 15일 (수요일). 두 번째 사가르마타 코스는 동남면 우측 협곡 위에 출발점을 정하고 출발 볼트를 박는다. 우향 크랙으로 개척 등반을 시작해, 작은 나무와 잡초 속에 있는 흙을 파내며 좌향 크랙으로 작은 스토퍼 너트부터 5인치까지 설치하면서 C2등급으로 개척 등반을 한다. 우측 사선으로 이어지는 크랙은 붙어 있는 바위벽이라 위험해 보인다.
공중곡예하는 곡마단원보다 더 처절한 몸짓
좌측 크랙으로 트래버스 등반을 하기 위해, 출발점에서 15m 정도 위쪽에 첫 번째 볼트를 박고, 직상크랙 위쪽의 우향 넓은 크랙으로 1~6인치 캠들을 설치하면서 10m 정도 올라 KAGA길 중단 언더크랙으로 진입하는 장소에서 합류한다. 위쪽으로 불확실하게 형성되어 있는 직상크랙을 청소작업하며 0.5~3인치 캠들을 설치하면서 7~8m 정도 C2+등급으로 연결시키면서 올라선다. 3년 만에 살벌한 절벽 위에 혼자 매달려 공중곡예하는 곡마단원보다 더 절박하고 처절한 몸짓으로 오름짓을 하고 있다.
작은 바위턱 위에 스카이훅이 걸리는 순간 들리는 소리-. 스카이훅에서 느껴지는 전율과 진동 속에 움직이는 소리가 작고 강렬하게 내 가슴을 흔든다. 고행의 길을 가는 나에게 들리는 야릇한 쇠소리들이 붉은벽 동남면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스카이훅, 스카이훅, 스카이훅의 연속등반이 이루어지고 있다.
들떠 있는 작은 바위벽 속으로 작은 캠을 설치한다. 붙어 있는 작은 바위가 깨져버리면 엄청난 추락으로 이어진다. 계속해서 불안한 확보물의 연속이다. C3등급으로 움직이는 살벌한 스카이훅에 매달려 살 떨리고 발 떨리는 종료 볼트를 박는다.
2피치는 상단 오버행 좌측크랙으로 0.5~1인치 캠들을 설치하면서 트래버스등반을 한다. 동남면에서 우측 서면 벽으로 건너가 오버행을 0.3~2인치 캠들을 설치하면서 오른다. C2+등급 직상크랙 좌측으로 느껴지는 고도감은 이상야릇한 느낌을 준다.
중간에서 좌측으로 살벌한 트래버스 등반을 시도한다. 2피치 마지막구간은 침니 등반으로 10m 정도 올라야 한다. 1~6인치의 넓은 크랙이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침니 중간구간 10인치 정도의 빅 브로(Big Bros)를 설치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5.7등급의 침니 등반으로 우측 슬랩에 올라선다. 이어 5m정도 우측으로 자유등반을 해 2피치 개척등반을 끝마친다.
3피치는 우측으로 돌아 원형으로 10m 정도 자유등반한 후 이윽고 정상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