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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60
9월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 이동)/연중 제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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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5주일)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예수님의 비유로 들어하신 말씀들은 당대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나 가난한 백성들의 귀에도 쏙쏙 들어올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율법 교사나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가르침과는 달리,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도 환호하고 박수를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신 ‘불의한 집사’ 혹은 ‘약은 청지기’의 비유 말씀은 꽤나 난해합니다. 몇 번을 되새김질하며 읽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특별한 비유를 통해 강조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사실 불의한 집사의 행동 하나 하나는 명백한 범법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재판에 넘겨져야 마땅합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 관리를 총 책임지는 담당자였습니다.집사가 주인 허락도 없이 재산을 낭비했으니, 절도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비리가 주인에게 발각되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 문서를 위조했으니,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불의한 집사는 갖은 비리의 종합선물셋트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하게도 주인은 불의한 집사가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합니다.
이 비유 앞에 많은 분들이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렇게 알아듣기 힘들어서야! 대체 주장하시는 바가 무언인가?’하고 고민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의 비리와 위법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불의한 집사의 민첩하고 슬기로운 처신, 신속 정확한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칭찬하셨습니다.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가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비리와 불법 행위가 용서되거나 의롭게 되는 것을 절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편법적인 행동으로 인해 끝까지 불의한 집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과 관련해서 불의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릴 것을, 그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상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면서, 할 짓 못할 짓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들 영혼의 유익을 위해, 불의한 집사처럼 목숨을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이 순간, 신속히 결단을 내리라는 요청이 불의한 집사 비유의 핵심입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60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80에 세상을 뜨시면 살짝 아쉬을 정도입니다.
다들 길어진 노년기에 대비해서 걱정도 많고, 또 각자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하십니다. 재취직 계획, 넉넉한 연금 수령을 위한 준비, 정기적인 건강검진, 적당한 운동, 철저한 식단 관리...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준비에 비해 영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90퍼센트, 100퍼센트 육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고 계시다면, 10퍼센트, 아니면 20퍼센트 정도 ‘뚝!’ 떼어 영적인 준비에 할애해 보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현세적 재산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죽기살기로 꽉 움켜쥐고 있지만, 불과 10년, 20년, 30년 뒤면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세의 재물로는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사심없는 자선과 희사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가장 좋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부당하다 해도, 우리가 지상에서 행한 자선과 희사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땅의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여,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엽시다.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줍시다. 우리 것이 아닌 물질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가 됩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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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다>
제가 초등학교 때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오셔서 103위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품에 올리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린나이였음에도 많은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저런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만약 그때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았다면 신앙적으로 큰 성장을 하였겠지만 살다 보니 순교의 정신이 무뎌지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당시 저와 비슷한 나이의 순교자 이야기는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열 살 갓 넘은 어린 나이에 어디서 저런 믿음과 용기가 나왔는지 가히 부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성인은 소년 성인 유대철 베드로입니다.
그는 유진길 성인의 아들이며,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과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천주교를 싫어하고 방해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는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고 아버지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자신도 순교하기로 결심하고 자수합니다. 재판관들은 어린 소년을 배교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였지만 소년 유 베드로의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한 옥쇄장이 담배통으로 그의 넓적다리를 사뭇 내리쳐 살 한 점을 떼어 내며 소리쳤습니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럼요. 이것쯤으로 배교할 줄 아시나요?”
이에 옥쇄장은 부젓가락으로 벌건 숯덩이를 집어 입을 벌리라고 했습니다.
“자요.”
유대철이 서슴없이 입을 크게 벌리니 이번에는 옥쇄장도 기가 막혀서 뒤로 물러났습니다.
“너는 이쯤으로 아마 고생을 많이 한 줄로 생각할 거다만 큰 형벌에 비기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교우가 말하니 유대철은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것을 쌀 한 알을 한 말에 비기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포청에서 총 14차의 형벌과 100여 대의 매질, 그리고 40도의 치도곤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표정을 띠었습니다.
하루는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채 옥에 끌려왔습니다. 함께 갇혀 있는 교우들이 정신을 들게 하느라고 허둥지둥할 때 그가 말한 첫 마디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 까짓것쯤으로는 죽지 않아요.”라고 하였습니다.
관원들은 어린 소년을 공공연하게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 1839년 10월 31일, 형리들을 옥 안으로 들여보내 상처투성이가 된 그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잡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어린 순교 소년 유대철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여, 우리 민족 모든 어린이들의 신앙적인 모범이 되었습니다.
유대철 성인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도 어린이들에게 이런 신앙을 들려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란 말씀처럼,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하게 만드는 예수님이 아니라 순교 앞에서도 당당한 유대철로 만드는 신앙을 주시는 예수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새로운 믿음을 키우는 씨앗입니다. 예수님은 피가 온 세상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자라나게 한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의 피가 아니면 자녀는 그 부모가 자신의 부모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피 없이 생겨나는 믿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을 믿게 만들려면 작은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너무 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그들의 피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피가 지금의 신자들의 심장 위에 계속 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들의 순교가 신앙인들의 가슴 위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도 아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어 신학공부를 시킨다는 죄가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형벌로 큰 고통을 받은 분이십니다.
태장 340도, 곤장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고,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다음날인 12일에 옥중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형리가 그에게 고통을 더하기 위해 도둑 한 명을 그와 함께 잡아매었습니다. 도둑은 그를 조롱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상처를 장난삼아 발로 차서 덧내 놓곤 했습니다.
그러나 경환은 모든 것을 아무 말 없이 참아 견뎠습니다. 본래 최경환 성인은 다혈질의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신앙을 가지고 성격도 바뀐 것입니다. 그러자 이 몹쓸 도둑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이 인내심에 감격한 나머지 최경환과 천주교를 아울러 탄복하고 찬미하며 외쳤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천주학쟁이다.”
그리고 옥에 갇힌 다른 교우들을 보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너희들도 이 교를 믿으려거든 이 사람처럼 믿어라.”
그러던 어느 날, 옥쇄장들이 교리책을 가지고 와 읽어 달라고 청하자 최경환은 책을 들어 웅변으로 그것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이에 청중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무서운 사람이야! 형벌을 받아 초죽음이 되었다가도 종교 서적을 들든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상처나 죽음에 대한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고 아주 마음이 흡족한 것 같단 말이야.”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백인대장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
피는 분명 믿음의 씨앗입니다. 자녀들의 믿음이 크지 못했다면 어쩌면 부모님이 신앙을 위해 피를 덜 흘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뜨거우면 분명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뜨거움이 전달되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은 혼자 노력해서 절대 얻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믿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누군가가 나의 믿음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믿음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서 굳건히 서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 피를 흘린 분들을 배우고 또한 그렇게 피를 흘리시는 분들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믿음도 강해집니다.
만약 제가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을 가까이 했었다면 지금보다는 믿음이 더 성장했을 것입니다. 믿음을 성장시키고 싶다면 믿음의 선배들의 피를 받읍시다.
믿음을 성장시키고 싶다면 믿음으로 흘리는 내 피를 뿌려줍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믿음으로 흘리는 피만이 부활의 영광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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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25주일)
오늘 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재물 사용법에 대해 몇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재물을 잘 사용하여 진정 하늘나라에 자신을 개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8,4-7: 가난한 사람들을 돈으로 부려먹는 자들에 대한 경고
1독서는 예언자 아모스 시대에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서(BC 783-743)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던 이스라엘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 양을 치던 아모스가 그들을 호되게 비난하며 질책을 퍼붓는다. 제1독서의 내용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는 전형적인 착취형태로서, 이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수많은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착취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모스의 외침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자신들이 압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형제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상재화의 ‘의미’를 재조명하라고 하는 촉구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가 16,1-13: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는 어떻게 그런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주인에게 들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나쁜 짓임에 틀림없다. 당시의 청지기는 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자신들의 보수를 챙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의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를 감해주고, 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를 감해준다. 이렇게 이 약은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줌으로써 개인적인 수익을 거둘 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의 환심도 산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다.(8절) 이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우선은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는 것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울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9절) 이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알라는 권고로 맺고 있다. 여기서의 ‘친구들’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막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을 의미한다.
이것이 루가의 입장에서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고 해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만다. 재물은 나눔이 있을 때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던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저주만이 있게 된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재화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재화이다. 참고로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12절)고 하시는데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은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재물은 사람의 모든 관심을 당겨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있으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이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태도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교부들도, 오늘의 교회도 이렇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재화의 대부분이 인류의 1/3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듯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1디모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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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5주일)
부모의 생일이 되면 어린 자녀들은 부모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는 합니다. 예쁜 편지를 쓰거나 용돈을 쪼개서 모은 돈으로 선물을 사 드립니다. 작은 선물일지라도 부모는 그 선물을 받고 크게 기뻐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서 선물을 받지만, 이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준 것의 일부를 돌려받는 것일 뿐입니다. 어린 자녀들도 이것을 압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커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는 자신들이 부모에게 무엇인가 해 준다고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부모가 아니면 태어날 수도, 일어서 걸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는데 조금 내어 주면서 곧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도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오늘 하루,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나의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서 받은 것의 아주 일부를 돌려드리는 것임에도, 우리는 봉헌을 하면서 ‘나의 것’을 드린다고 착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약삭빠른 집사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고 하십니다. 집사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재물은 어차피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집사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거나,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모든 것도 결국 하느님의 것입니다. 나의 것이 아니니 ‘불의한 재물’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주는 모든 것은 본디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다시 봉헌하고 그 일부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봉헌하고 자선을 베풀면서도 스스로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주님의 것을 내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칭찬받은 약삭빠른 집사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불의한 재물’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봉헌과 자선을 행하면서도 자신이 불의하다고 여겨 부끄러워할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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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 경축이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은 ‘나’라는 1인칭 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밖에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를 더 생각하면 이웃을 덜 생각하게 됩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려면 나를 잊어야 합니다.
또 그는 길을 다닐 때,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정신을 팔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기 자신과의 작은 싸움이었기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작은 순교들이 모여 완성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그분들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현 시대에는 이런 피의 순교를 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순교 정신이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교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매일의 작은 순교가 모여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큰 순교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나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입니다. 성경 한 줄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찾는 것도 순교입니다. 내 몸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고자 나의 욕구를 죽일 때 그것이 순교인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해군 장교는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이불 먼저 개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을 기리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오늘 하루 단 1분이라도 순교의 삶으로 나아가려는 구체적인 결심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이 없듯 순교 없는 신앙도 없습니다. 아침에 1분 더 일찍 일어나 성경 한 줄이라도 읽는 작은 순교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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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25주일)
<재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루카 16,10)
이 말씀은, ‘세속의 재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는 말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일’, 또는 “세속의 재물을 대하는 태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큰일’이라는 말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일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라는 말씀은, 세속의 재물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재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복음 정신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라는 말씀의 뜻은, “세속의 재물을 대하는 태도가 불의하다면 복음 정신대로 살아갈 수 없다.”, 즉 “복음 정신대로 살고 싶다면, 재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씀의 ‘작은 일’과 ‘큰일’은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일은 하나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일이 됩니다. 우리는 큰일을 하기 위해서 작은 일들을 합니다. ‘신앙생활’과 ‘먹고살기 위해서 세속에서 돈을 버는 일’은 아무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신앙생활과 세속 생활은 하나의 생활입니다.
신앙인은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신앙으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세속에서 돈을 버는 일을 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 하고, 그 일을 하면서도 복음을 실천하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1-12)
이 말씀은 ‘작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즉 선행과 사랑 실천을 통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은, 세속의 재물을 뜻합니다. (세속의 재물은 모두 불의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참된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여기서 ‘남의 것’이라는 말도 ‘세속의 재물’을 뜻하는데, 이 말은, 인간은 세속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인은 주님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잠시 재물을 맡아서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너희의 몫’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이라는 말씀과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이라는 말씀의 뜻은, “재물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이고,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라는 말씀과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라는 말씀의 뜻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느냐?”입니다.
‘작은 일’과 ‘큰일’에 관한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바로 앞에 있는 ‘약은 집사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집사는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일까? 불의한 사람일까? 1절에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는 성실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해고당한 뒤에 먹고살 방도를 찾으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또 그 일을 알게 된 주인이 그 집사를 칭찬한 것은(8절)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 집사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가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자기가 잘못한 일을 바로잡은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율법에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신명 23,20) 그래서 집사가 한 일은 이자에 관한 율법을 지킨 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러면 주인이 그를 칭찬한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집사는 처음에는 ‘작은 일’에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잘못한 일을 바로잡음으로써 성실한 사람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잘못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회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에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친 일이 있다면,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손해배상까지 한 다음에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옳습니다.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재물을 모은 부자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그 재물을 모두 노동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착취한 재물로 여전히 부유하게 살면서, 회개한다고 말 한 마디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거짓 회개입니다. 또 그런 식으로 고해성사를 본다면 거짓 고해이고 성사모독죄입니다.) 그러면, 남의 목숨을 빼앗은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없으니, 회개와 보속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는 평생 보속을 하더라도 그 보속이 충분할 수는 없고, 그러니 연옥에 가서 보속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잘못했습니다.”라는 한 마디 고백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섬긴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만 섬기기를 바라신다.”라는 말씀입니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 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멀리 밀어내는 사회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세속의 풍조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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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교회는 매년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정하여 순교성인들을 기리고 그들이 심어놓은 신앙의 마음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동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성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가 없이 스스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거룩한 죽음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또 우리는 하나의 밀알이 되어 선한 행동과 마음으로 타인에게 천주교의 기쁨과 진리를 전파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순교자들의 전기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들은 결코 하루 아침에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믿음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죽음의 날까지 오랜 시간 전 생애를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사교’로 단정되었고, 이 사교를 말살하고 뿌리째 뽑는 것이 나라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천주교와 관계되는 것은 모두 죽음과 고통을 의미하였습니다. 교리를 배우고 세례 받는 것은 물론 성경과 기도서를 비롯하여 십자가, 묵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 조차 죽음을 뜻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은 이를 잘 알면서도 믿음을 버릴 수 없었고 그만큼 기쁘게 하느님에 의한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응당하게 죽음, 그리고 빈곤한 삶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더더군다나 나의 생명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배우자, 부모, 자식 모두가 나로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죽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아마 순교 성인들 역시 이러한 갈등이 아주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일같이 약해지는 육체와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며 무엇이 옳은 일인지 과연 주님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거역할 수 없었으며 죽음 이후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구원의 삶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인하여 가족들에게 이를 권유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의 형장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순교의 삶은 결코 혼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체포되지 않은 교우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몰래 감옥에 찾아가 잡힌 교우들의 형편을 알아보고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여성 교우들은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조롱,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이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돌보아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을해 박해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증거자들은 밤이 되면 등불을 밝혀 성서를 읽으며 큰 소리로 공동기도를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감옥 속의 수인들이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동네 주민들은 “천주학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신분을 숨기고, 못 배운 이들을 가르치며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종들을 형제로 대우하는 등 힘겨운 싸움 속에서도 남을 위한 봉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오늘날 세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앙의 참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위대한 신앙이란 거창하거나 일시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사소한 삶 속에서 준비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모습과 같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이토록 아름답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안겨주실 그 죽음 이후의 삶은 더더욱 풍성하고 눈부실 것입니다. 이런 삶의 한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생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겪는 우리들이지만 이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믿음으로 견디어 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음의 말로 용기를 심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이제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여전히 너무나도 많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마음 등 우리의 신앙을 가리는 것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순교자들의 후예 답게 우리가 가진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그리하여 삶에서 오는 고통과 인간적인 한계들을 잘 견디어 냄으로써 언젠가 주님의 곁에 함께 설 날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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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성남 야고보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제자들이라는 한정된 그룹과 제한된 시기에만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반드시, 가장,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라서는 곤란하다는 말씀이시다.
오늘 기념하는 김대건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성인과 동료 순교자들의 삶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삶이었다.
로마가톨릭 신앙은 로마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한국 천주교 신앙 역시 한국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
순교자들의 삶은 한국천주교 신앙의 참 모습이며 신앙의 뿌리이다. 따라서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이 순교 신앙인들의 삶을 따르는 것은 의무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참 많다. 이곳저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님을 찬미하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믿는다는 자들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하지는 않는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뜻과 욕망을 좇아 살아간다.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재물과 출세와 명예를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편리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그릇되고 잘못된 신앙 생활을 깨닫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니 옳은 길로 가려고 하지도 않고 타성에 젖어 그렇게 흘러간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이 어찌 예수님의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종교들 중에 어떤 종교가 이렇게 수많은 순교자를 지니고 있는가? 오늘은 한국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기념해야 할 날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곳곳에는 특혜! 말들이 많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도 십자가를 지지 않는 특혜를 기대하지는 않는지. 신앙의 참 모습과 뿌리를 잊지 말고 순교성인들의 고귀한 삶을 따라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참된 신앙 생활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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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
(대축일 경축이동)
<지조 있는 신앙인>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몇 년 전 ‘평화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유명하다는 어느 점쟁이를 찾아가 문의를 했더니 고객 10명 중의 2명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은 부적을 받아간 후 자식이 명문대에 합격했다면서 고마움을 표시하러 다시 찾아와 웃돈을 얹어 주며 점쟁이가 차려놓은 신단에 큰절까지 하고 가더랍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는 지조 없는 신앙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은 지조를 지킨 분들이었습니다. 1839년 기해·1846년 병오·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103명의 성인들은 하나뿐인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하느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국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성인은 서품 후 1년도 채 안되어서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관헌들은 그분의 박학한 지식과 고결한 인품에 감동하여 신앙만 버린다면 높은 관직까지 주겠다고 회유하였지만, 그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작은 시련과 유혹 앞에서도 쉽게 신앙을 뒷전으로 밀어놓는 우리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또한 정하상 성인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로서, 1801년 신유박해로 피폐해진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서 무진 애를 썼던 분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까지 왕복 5천리의 길을 아홉 차례나 다녀오고, 마침내 교황청에 청원서를 보내어 앵베르 주교님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영입과 조선교구가 설정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체포된 후에도 자신이 저술한 ‘상재상서’라는 글을 통해서 박해자들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며 박해를 그치도록 역설하였습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일신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던 성인을 생각하면 좋은 조건에서도 바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우리 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순교 성인들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고통 후에 큰 축복을 주실 하느님께 희망(제1독서)을 두고, 그분의 사랑이 늘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제2독서)을 굳건하게 믿으면서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순교 성인들의 후손답게 지조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박해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듯이 우리는 그릇된 세태에 맞서 지조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부와 출세, 권세를 얻기 위해서 인간 사이의 신의는 물론 신앙마저도 저버리는 것이 요즘의 세태입니다. 지조 있는 신앙인이라면,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세속의 영화보다는 하느님께 희망을 둘 것입니다.
또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쫓아가는 것이 요즘의 세태입니다. 지조 있는 신앙인이라면, 설령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하느님의 뜻대로 이웃과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나누어줄 것입니다.
지조를 지킨 신앙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상급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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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예진광 이레네오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순교란?>
어떤 신부님께서 쓰신 편지의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주교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저는 사랑하올 부친이요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천당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힌 김 안드레아 신부”
이 편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순교를 당하시기 얼마 전에 감옥에서 쓰신 편지입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 10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공부하였고, 마침내 신부가 되어 조선에 입국한지 1년 남짓 지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죽음을 기다리며 주교님께 쓴 편지 입니다.
오늘은 최초의 조선인 사목자였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훌륭한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순교자들이 뿌리신 피의 대가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순교’란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믿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증명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비록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라도 걸고서라도 해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순교’라는 단어에 너무 익숙합니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순교’라는 두 글자만 머리에만 맴돌 뿐 진실한 의미는 몸과 마음속에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말은 쉬운 것 같지만 막상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기는 쉬운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식사하기위해 큰 용기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요즘에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지는 않습니다. 옛날처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어떠한 큰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살아가기가 더욱 어렵다고들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어떻게 보면 불가능하게만 보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자발적으로 하는 희생과 자선, 기도 등 신앙을 증거하는 모든 것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순교정신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순교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또한 그분의 사랑을 친구와 형제들에게 전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목숨을 바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순교 당하기 직전에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오. 내가 외국사람과 만난 것은 오직 종교를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나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순교성인들을 본받아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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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날마다>
루카 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날마다>
갑자기 어느 날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고 싶을 뿐이지요
갑자기 어느 날
예수님 바로 뒤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한걸음씩이라도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고 싶을 뿐이지요
갑자기 어느 날
나를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얼마 되지 않을지라도
나를 비워가고 싶을 뿐이지요
갑자기 어느 날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보는 이 없을지라도
예수님을 드러내고 싶을 뿐이지요
갑자기 어느 날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죽어가고 싶을 뿐이지요
갑자기 어느 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보잘것없을지라도
내 작은 십자가들을 짊어지고 싶을 뿐이지요
갑자기 어느 날
예수님과 감격스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날마다 부족하기 그지없을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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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대축일 경축이동)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본당에서 사목할 때 항상 대림 시기를 맞이하며 밤 피정을 했는데, 주제가로 본당 신자들과 피정자들이 함께 불렀던 노래입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난 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받고 갑니다. 눈물 닦아주러 왔을 뿐인데 내 눈물만 흘리고 갑니다. 씻어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씻겨 졌습니다. 고쳐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치료되어 갑니다. 전하러 왔는데 이미 이곳에 계신 예수를 보고 갑니다. 꿈을 가지고 와 꿈을 보고 돌아갑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다만 다함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죠. 사랑하러 왔는데 더 큰사랑을 받고 돌아갑니다. 죽은 영혼 살리러 와 내가 살아서 갑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더 주를 사랑하지 못함이 미안합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더 주를 사랑하지 못함이 미안합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더 주님을 오직 사랑하고 충성하고 순명하지 못했음을 회개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는 치유의 날이 되고, 우리 자녀들에게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자비의 거룩한 날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한국의 순교자들이신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103위 순교 성인, 성녀들과 124위 복자들도 부끄럽고, 허약함이 많았던 분이셨습니다. 순교자들의 마음은 마치, 인간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는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모습이고, 나약하고 허약한 모습, 그리고 죄스러운 모습으로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나 자신을 내세우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버리고, 대신에 자신의 허약함과 부족함,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안고 당신을 따르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께서 십자가의 어리석음과 허약함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의 힘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온갖 환난과 괴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칠지언정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이 땅에 모든 순교자, 반쯤 떨어진 목을 치켜들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분들,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포졸들에게 부모로서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그래도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다고 외쳤던 분들, 산 채로 묻으려고 자신들 위로 흙을 퍼붓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올리시던 분들,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도 차라리 바닥의 흙을 한 줌 주워서 먹을지언정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분들, 유일한 식량이라고는 곪아 터진 상처에서 나오는 구더기와 썩어 문드러진 짚단이 전부였던 그분들, 그리고도 종교를 배교하기는커녕 같이 잡혀있던 교우들을 서로 격려하던 그분들,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모든 고문과 역경과 죽음의 위협까지도 물리쳤던 그분들……. 한국의 순교자들은 이런 약하면서도 강한 모습을 통해 부활의 삶이 있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그런데 이 순교자들에게도 삶의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포졸들이 순교자들을 박해하는 방법의 하나가, 마당에 십자가와 묵주를 깔아놓고, 순교자들에게 “그것들을 짓밟으면 살려 준다.”라고 유혹을 합니다. 또한, 자식들에게 이런 장면을 보게 해서 “아버지 어머니! 십자가와 묵주를 밟아라.”라고 외치게 합니다. 옆에서는 포졸들은 순교자들에게 자식들이 불쌍하니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십자가와 묵주를 밟아.”라고 속삭입니다.
순교자들이 밟았겠습니까? 아니면 안 밟았겠습니까? 순교자들은 “하느님께서 내 자식들을 살려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와 묵주를 밟지를 않았습니다.
바로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꾸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순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느님께 감사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한국의 순교자들은 “남의 탓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제 탓이었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미사 때마다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말합니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한 마디로 “순교”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순교”는 “제 탓이요.”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안 해도 괜찮겠지”가 아니라 “나 혼자만이라도 해야 해.” 하는 것입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순교성인들이 목이 잘리는 죽음에 순간까지도 똑같이 외친 외침이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 대한 사랑” “오직 예수님께 대한 충성” “오직 예수님께 대한 순명”
우리는 그 순교자들의 합창을 늘 미사 중에 고백의 기도로 바칩니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제 큰 탓이옵니다.”
고운님들이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순교자들이 받았던 은총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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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62)
♧♧ 시편 50편 21절….
"네가 이런 짓들을 해 왔어도 잠잠히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로 여기는구나. 나 너를 벌하리라. 네 눈앞에 네 행실을 펼쳐 놓으리라."
* 네가 이런 짓들을 해 왔어도 잠잠히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로 여기는구나...
하느님께서도 악인들이 죄악을 행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징벌하시지 않자, 악인들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믿지 아니하고, 더욱 더 죄악을 행하기를 서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들의 죄악을 용납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심판을 유보하고 계실 뿐인데 하느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면 엄정하고도 철저한 보응이 주어질 것입니다.
* 네 눈앞에 네 행실을 펼쳐 놓으리라...
‘펼쳐 놓으리라.’라는 말은 ‘순서대로 나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심판의 때에, 정의로우신 하느님이 살아계시어 인간의 모든 행위를 살펴보시고 계심을 무시하고 죄악을 행한 죄인에게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드러나게 하여, 그 행위대로 엄정하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 시편 50편 22절….
"이를 알아들어라.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잡아 찢어도 구해 줄자 없으리라."
* 이를 알아들어라.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여기서 ‘잊어버리다...’라는 말은 형식적인 제사에만 마음을 쏟고 실제 삶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아들어라.’라는 말은 정녕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어 그 말씀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형식적으로 하느님을 경배하지 말고 심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경배하라고 촉구하는 다윗의 간절한 권고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잡아 찢어도 구해 줄자 없으리라...
‘찢는다...’라는 것은 맹수가 먹이를 물러 갈기갈기 찢는 것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하느님의 진노의 엄중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이는 하느님이 진노하시어 인간을 벌하신다면 아무도 그를 구원할 자가 없음을 나타내 줍니다.(시편 49편 8-9절. 참조) 이런 준엄한 하느님의 심판의 경고는 결국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와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적인 행위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됨을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교훈)입니다
♧♧ 시편 50편 23절….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가 나를 공경하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 주리라."
시편 50편의 결론과 주제는 이 구절에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경외의 자세로 드리는 예배, 그리고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이의 예배만이 진정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며, 이러한 예배를 야훼 하느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삶 전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합당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 된 이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자세로서 모든 시대에 주님께 충실한 이들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교훈입니다.(로마서 12장 1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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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무화과를 잘 아실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로 인류가 재배한 최초의 과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구약에서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수치심을 느끼고 입은 옷이 무화과 잎이었지요. 단백질 분해효소가 있어서 육식 후에 소화제로 먹으면 좋고, 변비에도 아주 좋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무화과’라는 이름을 쓸까요? 무화과는 한자로 없을 무(無), 꽃 화(꽃), 실과 과(果)를 씁니다. 즉, 꽃 없이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꽃 없이 열매를 만드는 나무는 없지요.
이 무화과나무 역시 꽃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은 꽃들을 꽃 주머니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꽃을 피우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꽃들이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꽃 없이 열매를 맺는 이상한 나무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다른 나무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내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신과 다른 점을 가지고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보면서 쉽게 판단하고 때로는 나와 맞지 않는다면서 단죄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안에 보이지 않는 꽃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내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어서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나옵니다. 불의한 집사의 비유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집사 일에서 쫓겨나기 직전, 그는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호의를 베풉니다.
쫓겨난 뒤의 일을 대비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입장으로 우리는 이 집사를 바라봅니다. ‘아니 어쩌면 주인의 돈을 가지고서 호의를 베풀 수가 있는가? 주인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치는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간교하고 부정한 사람이다.’ 하지만 주인은 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영리하게 대처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 남을 돕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신이 맡긴 재물을 가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칭찬받은 이유였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나만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사용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행한 이웃 사랑만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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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의 가치}
언젠가 뉴스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기사입니다. 미국 보스턴에 사는 한 노숙자가 1억 원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된 사연이 나와 있더군요. 복권에 당첨된 것일까요? 아니면 우연히 돈을 주운 것일까요? 사실 착한 행동 하나로 얻게 된 결과였습니다.
글렌 제임스라는 이름의 노숙자는 보스턴의 한 쇼핑몰에서 배낭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현금 2천4백 달러와 여행자수표 4만 달러, 중국인의 여권과 개인 서류 등이 들어 있었다.
노숙 생활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욕심이 안 났을까요? 그러나 그는 바로 주인을 찾기 시작했답니다. 다행히 배낭은 쉽게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었고, 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어떤 이가 노숙자로 살면서도 정직함을 잃지 않은 제임스에게 감동하여 기금마련 사이트를 통해 제임스를 위한 돈을 모으자는 캠페인을 전개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틀 만에 무려 9만1천855달러(약 9천950만 원)가 모였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정직을 잃지 않았던 제임스. 이러한 정직이 그에게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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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중 제25주일)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의 담당 회계사와 만났습니다. 재정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영리 단체이지만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고, 신문사를 운영해야 하기에 재정 관리를 해야 합니다. 주된 수입은 구독료, 광고료, 찬조금입니다. 주된 지출은 급여, 신문 제작비, 사무실 운영비, 잡비입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운영을 잘하여서 적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단순히 신문을 제작하고, 발송하는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자동차가 거리를 달릴 수 있는 건 차에 기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제작되고, 발송될 수 있는 건 비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이 재정적인 어려움 없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신학생 때, 재정과 관련된 일을 하였습니다. 학교 판매부에서 봉사자를 뽑는다고 해서 자원했습니다. 신학교에 학생 자치 신협이 있었고, 신학교에서는 신협의 학생들이 매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매점을 운영하는 거였습니다. 매점의 운영시간은 저녁 먹고 묵주기도 시간까지 대략 30분이었습니다. 판매 물품은 음료수, 담배, 과자, 학용품이었습니다. 방학 때는 과자는 식당과 빨래를 담당하시는 자매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 매점 운영을 했고, 기억나는 물품은 당시에 등장한 ‘불티나’라는 라이터와 직접 제작한 학교 편지지와 노트였습니다. 매점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에 선배 신학생들이 가끔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물품을 구매하기 때문에 매일 외출할 수 있는 ‘특권’도 있었습니다. 판매부 열쇠가 있는 곳에 신학생이 많이 모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고 유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학교 매점 운영은 어렵지 않았는데 제게 더 큰 재정 문제가 있었습니다. 1997년 IMF는 저와 가족에게도 큰 파도로 다가왔습니다. 형님의 사업에 어려움이 있었고, 제가 부모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교구 신협에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출이자는 상상 이상으로 높았습니다. 동창 신부들의 도움으로 대출금을 갚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기회와 능력을 주셔서 강의를 많이 하였습니다. 강사료는 부모님의 생활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시고 강의할 기회를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14년부터 교구 신협의 일을 도와서 함께했습니다. 동창 신부님이 교구 신협 이사장이 되었고, 제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교구 신협의 일은 30년 전 신학교 신협의 일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조합원의 수가 많았고, 자산의 규모가 달랐습니다. 본당 신축이 있으면 대출에 대해 심사를 했습니다. 교직원 자녀들의 학자금 대출도 승인했습니다. 주택 자금 대출에 대한 심사도 있었고, 신부님들의 대출에 대한 심사도 있었습니다. 돈은 마치 공기와 같았습니다. 사람은 공기가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돈이 필요했고,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돈 때문에 울기도 했고, 돈 때문에 웃는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재물은 감정이 없습니다. 재물은 발이 없습니다. 재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재물은 하늘은 나는 연과 같습니다. 연은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에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손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왼쪽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의 손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연의 줄이 끊어지면 연이 땅에 떨어지듯이 사람이 재물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재물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재물을 땅에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잃어버립니다. 가족과도 담을 쌓게 됩니다. 함께 한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난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듭니다. 불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싸우고, 돈이 헤어짐의 이유가 되고, 돈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유가 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장학 재단은 힘들고 어려운 학생에게는 희망의 빛이 됩니다. 선교지에 보내지는 돈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난민에게 지원되는 돈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줍니다. 가난한 이에게 전해지는 돈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심한 악취가 날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아름다운 향기가 날 겁니다. 지금 우리의 지갑에는 어떤 향내가 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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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인은 현세(現世)의 목숨을 최대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자기 삶의 최대 보람을 하느님 안에 두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현세의 목숨마저 버릴 수 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중국(中國) 북경(北京)에서 이승훈(李承熏)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입니다. 그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1882년 조선의 정부가 미국과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기까지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참수(斬首) 혹은 옥사(獄死)로 순교한 분들의 수가 만(10,000) 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분들은 온갖 잔인한 형벌을 받고,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족들은 관비(官婢)라는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외국에서 선교사가 파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신앙을 영입하였다는 사실은 세계 그리스도 교회사에 예외적인 경우로 기억됩니다. 신앙이 한국 땅에 들어와서 뿌리도 채 내리기 전에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신앙인이 된 분들은 교리교육도 충분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 명이 훨씬 넘는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천주교 관계 한문(漢文)서적들,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한 한문으로 된 몇 권의 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였습니다. 첫 번 세례레자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 약 15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서학(西學)이라 불렀습니다. 그 시대 그 문서들을 영입하여 연구한 사람들이 실학파(實學派)라 불리던 유교(儒敎) 학자들이었습니다. 유교 국가를 표방하던 조선(朝鮮)의 지성인(知性人)들은 유교의 성리학(性理學) 이론(理論)에 빠져 있었습니다. 실학파 학자들은 합리적이고 현실성 있는 학문(學問)과 사회제도(社會制度)를 찾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시련을 겪은 직후의 일입니다. 그 무렵 실학파가 연구한 천주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새로운 세계관, 사회관이기도 하였습니다.
「홍길동」이라는 소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소설의 저자 허균(許筠)도 이 실학파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허균에 대한 연구서를 쓴 어떤 학자는 그 시대 조선사회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첫째, 무고로 죄 없는 사람들을 고발하여 감옥에 가게 하는 일이 많아서 백성은 불안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풍조가 휩쓸었다. 둘째, 벼슬 팔아먹기와 뇌물과 횡령이 판쳤다. 셋째, 과거시험 문제가 사전에 유출되는 등 부정이 행해지고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는 당연한 것으로 되었다. 넷째, 무리한 토목공사들을 벌려 놓고 관리들은 공사 자재(資材)를 횡령하고, 민생고에 허덕이는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아서 매우 사치스럽게 살았다. 결국 임금으로부터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자기 신분을 보호하기 바빴고, 그것을 위해서는 금력이 필요했다. 임금은 신하들로부터, 신하들은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는 길밖에 없었다.”(이이화, 「허균」 한길사 1997, 45-47) 그 책의 저자가 소개하는 그 시대의 사회상(社會相)입니다.
그런 사회적 여건에서 서학(西學)을 공부한 실학파 학자들에게나 후에 신앙을 영접한 초기 신앙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은 대단히 신선(新鮮)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습니다. 군주(君主)가 절대적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고, 그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법(法)은 조정(朝廷)이 만들어 임금의 이름으로 반포하면, 백성은 그것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느님이 질서 지어 만드신 자연과 마음의 법, 곧 자연법(自然法)과 양심법(良心法)을 가르쳤습니다. 노예와 같이 법을 지키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의 법을 존중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법(法)은 당시에 자행되던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야(視野)를 열어주었습니다. 무자비한 법과 제도에 한 마디 항의도 못하며, 짓눌려 살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질서, 곧 정의(正義)와 자비(慈悲)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시대 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부조리(不條理)를 한 순간에 걷어내는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조상(祖上) 제사(祭祀)의 거부’라는 당시 순교자들에게 주어진 죄목(罪目)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찾아낸 명분(名分)이었습니다. 조상제사는 그 시대 유교(儒敎)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것을 거부한 것은 유교국가의 근본 질서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권력구조의 절대성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축첩(蓄妾)을 거부한 것은 유교가 가르친, 남녀 차별의 철칙(鐵則)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은 그 시대의 계급차별도 거부하였습니다. 사람은 모두 하느님을 아버지로 당시 순교자들의 심정을 엿보게 하는 고백 하나가 있한 자녀라는 의식은 그 시대의 사회 계급적 차별을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순교자들 중 백정(白丁) 출신인 황일광(黃日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천당이 둘 있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고 또 하나는 양반과 쌍것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존중하는 이 세상의 천당이다.” 그것은 백정으로 멸시당하며 살던 사람이 신앙인이 되어 그리스도신앙공동체 안에서 느낀 사실을 담은 말이었습니다. 계급의 장벽 없이, 모두가 형제자매로 통하는 신앙공동체는 그에게 천당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그들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질서를 열망(熱望)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우리의 순교자들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버리지 못하여 모진 형벌을 감수하고 생명을 잃으면서도 그 사랑을 열망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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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사랑, 기도, 정의, 지혜-
아주 예전 신학교 시절, 지금은 타계했지만 어느 교수 신부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인간답게 산다. 너무 막연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다. 아주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품위 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여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는 미사중 ‘주님의 기도’에 앞선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란 사제의 권고입니다.
이구동성의 말들이 살수록 어렵다고 합니다. 저도 ‘어렵다’, ‘힘들다’라는 말마디를 가급적 쓰지 않으려 하지만 저절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첩첩산중이란 말마디를 기억할 것입니다. 산넘어 산,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처럼 힘든 삶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하여 얼마전 이런 글을 남긴적도 있습니다.
-“첩첩산중/하루하루/날마다/힘겹게/그러나 기쁘게 넘어야 할/산
첩첩산중/하루하루/새벽마다/힘겹게/그러나 기쁘게 넘어야 할/강론의 산
첩첩산중/하루하루/새벽마다/강론쓰는/맛으로/재미로/기쁨으로 산다”-
약간 과장도 있습니다만 진실입니다. 일단 스스로 고백의 덫에 스스로 매이고자 쓴 글입니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로부터 간혹 듣는 말마디중 하나가,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기쁨’으로 사느냐는 물음입니다. 며칠전 강론 하면서 확실한 답을 발견하고 기뻐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두 말마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에게 매일 새벽마다 쓰는 강론은 매일의 영적 양식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맛으로, 사랑하는 기쁨으로 삽니다.”
제발 고백대로 살고 싶은 마음에 용감히 고백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참 재미있는, 참 오래 기억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이기자’란 어느 미사 신청한 자매의 이름에 웃었습니다. 또 ‘현명한’, ‘신중한’ ‘정다운’이란 형제의 이름들이 생각납니다. 정말 현명한, 신중한 처신에 정다운 삶을 살며 ‘이기자!’ 다짐하며 영적 승리의 삶을 산다면 진정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저는 네 측면에 걸쳐 답을 찾아 냈습니다.
첫째, 하느님만을 섬기는 삶입니다.
하느님만을 따르고 사랑하며 섬기는 삶입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섬기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하느님 섬김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섬기는 맛으로,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맛이, 이 기쁨이 영원합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이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 부분이 섬겨야 할 분은 하느님뿐임을 확인해 줍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수는 없다.”
삶에 중심이 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심이 둘이면 마음이 갈려서 복잡하고 혼란해 집니다.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재물을 배척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삶의 중심에 두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노욕老慾, 노추老醜라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탐욕으로 아름답기가 힘듭니다. 하여 저는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해, 아니 노년뿐 아니라 삶의 품위 유지를 위해 세조건을 언급하곤 합니다.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으로 절대 우선순위가 바뀌어선 안된다고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 때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기도에 충실한 삶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테크닉 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는 인간의 영적 본능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섬길 때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의 빛나는 모델이 예수님이시며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입니다.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기도를 강조하는 바오로입니다. 티모테오뿐 아니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강조점은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치유약도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바오로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로 서간을 끝맺습니다.
참으로 기도하여 마음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진 이들은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지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천박하거나 비열한, 냉혹하거나 무자비한 언행도 뚝 그칠 것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때 하느님을 닮아감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도 확보될 것입니다.
셋째, 정의로운 삶입니다.
기도하여 하느님을 닮을 때 정의로운 삶입니다. 정의로운 삶 역시 기도의 열매입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연민의 사람, 자비의 사람입니다. 결코 빈곤한 이를, 가난한 이를 업신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을 사랑합니다. 정의와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정의로운 사랑이 참 사랑이며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정의와 사랑의 예언자 아모스의 말은 그대로 하느님 심중을 반영합니다.
-“빈곤한 이들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들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아모스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엄중합니다. 우리의 정의에 대한 무디어진 감각을 일깨웁니다. 그대로 가진자들, 권력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주님 말씀을 참으로 무겁게, 무섭게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한 교만이요 탐욕이요 힘없는 이웃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무지야 말로 불치의 악이자 죄이자 병입니다. 무지에 대한 유일한 치유는 하느님의 사랑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만을 사랑하여 섬길 때 비로소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과 지혜로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머리는 좋아도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교만과 탐욕, 무자비의 사람들이 널린 세상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니 회개도 없고 겸손도 있을 리 없습니다. 하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끊임없는 기도를, 끊임없는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넷째,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기도할 때 정의로운 삶에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비둘기 같이 순박하면서도 뱀같은 지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갈수록 겸손과 자비,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의 추궁을 예상한 불의한 집사의 처신은 얼마나 신속하고 민첩하고 과감한지요. 생존의 지혜입니다. 때로 삶이 절박할 필요도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부자인 주인이 상징하는 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야 무궁한 부자가 아닙니까? 주님이야 웬만한 손해는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내가 지닌 것은 주인인 주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인색하지 않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복음의 주인은 내심 불의한 집사의 처사를 묵인하며 기뻐하며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주인의 심중을 알아서 주인의 뜻대로 잘 처리해줬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니 알아서 해야하는 것입니다. 절박한 위기에서 발휘된 불의한 집사의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생존의 지혜입니다.
주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은 불의한 집사를 칭한했으니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합니다. 바로 빛의 자녀들인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가 지닌 재물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모두가 주인인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 모두 불의한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성실이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닌 주님의 것들인 유형무형의 불의한 것들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성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그때 주님은 참된 것, 바로 참 보물인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맡길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 만을 사랑하여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것, 바로 참 보물이신 파스카의 예수님 당신 자신을 맡기십니다. 참된 분 주님과 일치함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충만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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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한국 교회는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을 지난 20일(금)에서 이동하여 오늘 경축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영의 원리와 육의 원리를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면서 우리를 주님의 길로 초대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은 이 말씀을 특정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십니다. 제자단에 속해 있건 아직 아니건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이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의무라는 뜻일 겁니다.
"자신을 버리고"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 실존은 매순간, 부지불식 간에 영과 육의 갈등과 대립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영의 방향성과 육의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욕구(ego)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일상의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삶의 분기점이 될 중요한 순간까지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를 감지하고 따를 수 있으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에 더하여 자신의 충실한 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하지요. 내가 선택한 것이 주님의 뜻인지 나 자신의 욕구였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부단히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성령께서 터치하시는 감을 익혀나가야 합니다. 그분께 경청하고 순종하는 감각은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쌓여가지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전자의 "목숨"은 육신의 생명이고 후자의 "목숨"은 영원한 생명을 가리킬 겁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자들이 믿음으로 쟁취한 바지요. 그런데 이 승리를 알아보는 눈에도 영의 시각과 육의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지혜서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 고난으로 생각되며 ...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1-2)
하느님 손안에 감싸인 존재의 행복은 세상 사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벌어지는 현상만 육의 눈으로 보고 물질과 힘의 견지에서 판단할 뿐이지요. 그러니 그들에겐 영적 삶이 어리석고 불행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와 영의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는 접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어떠한 육의 힘도 하느님과 우리의 영의 결합을 약화시킬 수 없다고 외칩니다.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이 말씀은 이론에서만이 아니라 바오로 자신의 처절하고 절박한 실존적 체험에서 길어올린 진실입니다. 육의 공격이 육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만 영의 생명에는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는 걸, 동족과 이방인의 배척과 공격으로 생의 끝자락을 오가며 깨달은 뜨거운 고백이지요.
우리 신앙의 역사는 조상들 스스로 진리를 찾고 받아들인 자발성으로 볼 때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또한 짧은 신앙생활과 빈한한 영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피를 흘려 그리스도를 증거한 무수한 순교의 자취는 거의 신비에 가까울 겁니다. 더구나 많은 순교자들이 철학적 신학적 문화적으로 취약한 신분의 단순한 민중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땅에 임하신 성령의 힘이 그만큼 강하고 놀라운 것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오히려 사회 속의 안전지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새롭게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그친 초세기에 교회가 안일함과 풍요에 젖어 진리의 빛이 퇴색되고 말씀의 칼날이 무뎌갈 때, 보다 철저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려 광야로 떠난 이들이 있었지요. 광야는 또다른 순교의 장소이고, 그 안에서 바치는 침묵과 고독은 또다른 순교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가 광야로 나갈 수도, 모두가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매달려 살 수도 없지요. 우리가 각자 삶의 작고 소소한 순간에서부터 성령께 귀기울이고 순종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곧 자아와 욕구 안에 깃든 육의 원리에 죽음을 고하는 일종의 순교가 될 것입니다. 쉽고 편하고 드러나고 움켜쥐고 높아지고 힘을 행사하는 육의 손짓은 당장 달콤할지 모르나 선택을 반복하는 사이 영의 자리, "하느님의 손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답니다.
오늘의 말씀 중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구절이 다가오셔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 3,9)
여러분 모두 이토록 아름답고 복된 영의 사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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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이곳 영산성당은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9.20) 미사를 오늘로 경축 이동하여 지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103위 성인들은 1839년 기해박해와 1845년 병오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분들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부모와 자녀와 재물과 신분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것도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주 기쁘게 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모진 박해를 견디어 냈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견디신 예수님처럼 순교자들은 참고 또 참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힘은 바로 순교자들 마음 안에 있었던 굳건한 믿음과 희망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희망!
말씀에 대한 믿음과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들의 이 믿음과 희망이 그들을 순교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순교 성인들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순교합시다!
우리도 순교자가 됩시다!
그래서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누립시다!
우리가 해야 할 순교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큰 순교가 아니라 작은 순교입니다.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깨어 기도하는 것!
나의 작은 희생과 봉사! 남들이 맡기를 꺼려하는 봉사직을 맡는 것!
따뜻한 말과 미소!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순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쉽지만, 삶으로(행동으로)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은 순교를 합시다!
작은 것에 민감하고,
작은 것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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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후손답게>
'나와 내 말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면 ᆢ'
오늘은 103위 한국순교성인
이동축일로 지냅니다.
피흘린 수많은 희생으로 신앙을 지켜온
선조들이 하늘에서 기뻐합니다.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라'
'배교해라'
그러면 목숨도 건져주고 굶주림도 없게 해주겠다는 꿰임을 떨쳐버린 순교자들!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기에 천상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십자가 긋기 부끄럽다'
'신자라고 말하기가 좀ᆢ'
당당해지십시오! 신앙의 후손답게!
믿음의 증거자로 산다면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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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대축일 경축이동)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믿음과 순교는
함께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도
마음과 몸도
끝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순교는 믿음의
뿌리가 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이 분들의 순교로
이루어진 순교자들의
교회입니다.
이 분들의 순교로
지켜야 할 믿음을
뜨겁게 만납니다.
모든 순교는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순교는 우리의
죽어있는 정신을
다시 살립니다.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 일상의
참된 순교입니다.
자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하느님만이
남을 뿐입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죄많은 우리들
삶을 깨끗이
씻어주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단순한
진리이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숭고한
실천이 순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순교로 바로 세우는
은총 가득한 대축일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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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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