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믿고 은혜 많이 받으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 예수 믿고 복 받으시오" 대한민국 현대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기독신문에서 최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개신교에서는 그려려니 했지만 필자는 최근 재림교회에서도 이와같은 개념의 신앙인을 많이 발견하고는 깜짝 놀랬다..
몇해 전 목회하는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노여집사님 아들 가족이 새로 교회에 나왔다. 가족들을 데리고 한 주일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아무런 알림도 없이 교회에 발을 끊었다. 집사님께 알아보니 큰 시험에 들었단다. 시간을 내어 방문했는데 화가 나서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한참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퉁명스런 반문을 했다.
"교회에 잘 다니면 복을 받는다면서요?" 제가 그랬나요 ? " "글세요 우리 어머니가 그랬지요." "아들아 교회에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면, 틀림없이 축복을 받아" 그러자 "교회는 모두 거짓말쟁이요. 내 아들의 행방 하나도 감시 못하는 그 따위 하나님이 무슨 복을 준단 말이요, 나는 속았소, 나는 절대로 안 믿을 거요." 알고보니 중 3에 다니는 그의 큰 아들이 삼 주일 전에 말없이 집을 나가 행방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대꾸도 못하고 그냥 간절한 마음으로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ㅡ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 났다. 그 다음 예배에 악마 같던 얼굴을 천사같이 미소지으며 예배에 참석하면서 시종 아멘을 외쳤다. " 목사님이 제 집에 와서 기도하고 가신 다음 날 내 아들이 돌아 왔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네요 , 열심히 믿고 교회에 잘 다니면, 틀림없이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이분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요?
그에게는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헌금도 모두 복의 개념과 결부된다. 단지 행복과 축복만을 바라는 신앙을 추구한다면 ,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미신이요 무당이다.
무당은 의뢰한 사람의 유익를 위한 일만 한다. 무당은 의뢰자의 목적 추구와 욕망만 만족해 준다. 왜냐하면 무당의 신앙의 대상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당은 내 명령에 따라서 축복을 내려야 한다.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욕망의 반응이라고 하지,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에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복주심의 신앙의 잘못된 이해이다..
복(한: 福) (히: ברך )(헬: εὐλογία ) 사전: 삶에서 누리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행운
성경에서 복은 히브리어로 ברך(Barakh)며 기본적인 뜻은 "무릎을 꿇다(kneel down)"이다.
시편 95편 6절의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에서 "무릎을 꿇자"가 바로 이 단어이다. 한자로 옮기자면, "복 福"자가 아니라 "엎드릴 伏"자에 더 가깝다.
성경에서 "복을 주다"와 "복이 있다"는 두가지 말씀이 있는데 둘은 개념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둘다 그냥"복을 준다"로 이해한다. 크러나 실제로 성경은 "복을 주다"라고 쓴 용례는 많지 않다.
첫번째 용례는 짐승을 창조 하시고 하신 말씀이다
창세기 1:21-22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짐승들에게 조차 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 이시다. 여기서 짐승에게 주신 복의 핵심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다. 복받는 삶의 목적이 살아서 생활하고 후손을 퍼뜨리고 하나님의 법칙에 순응하여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짐승은 태어남 자체가 복이다,
그리고 사람의 창조 후에 하신 말씀이다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짐승과 같이 사람도 태어나는 순간 복을 받는다. 태어나서 삶의 과정을 누리고 그 삶이 풍요하든 빈궁하든 오래 살든지 짧게 살든지 생이 평탄하든지 복잡하든지 불문하고 태어남이 복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비교하고 탄식하며 물질과 명예가 자신에게 충만하게 있어야 복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다스리는 복을 하나 더 얻었다 "다스리다"는 히브리어로 dabar( דָּבַר) 로서 " 경작하다, 예배드리다"로 번역 되며 짐승과 달리 사람은 생각하고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복을 더하고 있다, 즉 사람은 동물과 달리 생각의 자유를 주어짐이 복이다.
충만(πλήρωμα’ ‘μέλο’) 시편 24:1에 ‘땅에 충만한 것’에서 쓰인다. 요한의 로고스 그리스도론과 상당히 유사성을 갖고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총체적인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이 거하고, 인간에게 계시되고 전달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쉐키나로 나중에 언급된 그의 영광인 하나님의 임재가 성막과 성전을 채웠고,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지혜가 각 개인들을 채웠다. 다시 말해서 ‘충만’은 하나님이 그의 임재와 능력을 느끼게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 예레미야 23:24에서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충만하신다고 말한다. 이사야 6:3과 시편 72:19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신다고 말한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에 대한 이런 주장들이 중요한 배경을 제공할 수 있으나, 이들은 실제로 충만에 해당하는 ‘플레로마’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충만의 주요한 개념은 ‘완전함’이다. 이 용어는 ‘전체’나 ‘충만한 수’(롬 11:25), ‘완성된 것’(롬 13:10) 또는 ‘채워진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7번 나타난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로 풀이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을 뜻한다. 둘째, 그리스도에 의해 채워지는 것을 뜻한다. 셋째, 그리스도를 충만케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교회, 즉 그의 백성들은 다만 불완전한 단편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채워지므로써 하나의 공통된 삶을 공유할 수 있다. 그 공통의 삶 안에서 그들과 그리스도는 마치 머리와 몸이 그렇듯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게 되는 것이다.
플레로마는 수동적인 의미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채우며 완성시킨다기보다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되며 혹은 완성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에 의해 채워지시는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가 신자들을 능동적으로 채우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의 속성과 능력으로 채워진다. 에베소서 3:19 기도의 일부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모든 충만(골 1:19)이다. 이는 곧 예수님 안에 구현된 신성의 충만을 말한다(골 2:9). 신적인 충만함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골 1:18 이하)로부터 생명력이 교회에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역사하심에 의해 충만케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의 충만함이다(3:19).
다음에 특별하고 놀라운 말씀이 있다
창세기 2: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여기서 놀라운 개념을 발견한다. 복을 주신 두번째 이유가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
물질이 아닌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함이 복이라 하신다. 인간은 신비로운 건물을 지어 놓고, 부처를 만들어 놓고, 생수를 떠 놓고, 눈부시게 지은 옷을 하얗게 입고, 오묘한 조명을 잘 해 놓고, 거룩한 분위기를 만들어 거룩한 복을 입었다고 우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일상의 때, 즉 밥 짓는 중에라도, 사람을 만나는 중에라도, 대화의 한 가운데에서도, 심지어 잠자는 시간에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바친 후 거룩한 시간이라면 그것이 거룩한 복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시간 속의 지성소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위대함은 공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찰라의 시간에라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더 큰 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시간 속의 성스러움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는 종교다 시간의 건축물로서 안식일을 세운다 시간을 성화하기 위해 공간을 정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우리가 창조해 내는 고품격 특성이다 우리의 과제는 시간을 영원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시간을 영으로기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한주의 엿새 동안은 땅에서 이윤을 짜내며 이 세계와 씨름 하지만 안식일은 영혼 속에 심겨진 영혼의 씨앗을 각별히 보살핀다 이와같은 것을 느끼며 추구하며 사는 것이 복된 삶이다. 우리에게 시간의 복을 선물로 주신 더큰 이유는 시간을 사용해 풍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룩한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도 사물은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순종이 함께 시간속에 공유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태초부터 마지막 때까지 시간을 통해 움직이는 공간의 세계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살펴 보자.
창세기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םשׁ לודג) (gadal sham)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세번째 복은 이름이 창대케 하는 것이다. "창대하다"의 히브리어 gadal (לודג)은 "한번도 쉬지 않고 끊김없이 자람"을 나타날 때 쓰는 말이다. 사람이든 나무든 풀이든 봉황이든 거북이든 자라다가 멈춘다. 인간사에 이 단어에 해당 되는 것은 신앙과 품성과 인격 밖에 없다. 주위에 잘 나가다가 인격 때문에 말년에 고꾸라 지는 많은 사람을 보았다. 잘못 된 신앙으로 명예롭게 은퇴하지 못하고 이름이 더럽혀진 목사들도 있다. 아브라함은 잠간의 실수와 실패를 했을지언정 끊임없이 신앙과 인격이 계발되어 그의 이름이 창대해졌다. 진짜 복은 이것이다. 늙은 장로나 집사 은퇴한 목사에게 가장 영예로운 것은 본받을 만한 신앙인 그리고 귀감이 될 신앙이라는 칭호다. 이게 가장 큰 복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의 원어는 you will be bless 즉 "복이 될지다"이다. 아브라함은 자체가 복이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복이어야 한다.
어떤이는 일전에 기독교를 휩쓸었던 야베스의 축복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역대상 4:9-10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런데 원어에 충실한 개역개정에서는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이라고 조건절로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어도 야베스의 기도의 앞부분은 조건절이다. 이를 살려 충실히 번역하자면 “원컨대 만일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신다면 , 주께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즉, 야베스는 우리가 아는 것 같이 세상적인 풍요로운 삶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 손의 도우심으로 자신이 처한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여러 구절을 살펴보니 복에 대한 확실한 개념이 생긴다.
성경의 하나님께서 복은 주심은 세상에서 풍요와 안위를 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생육하고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복이며, 그 복을 기반으로 오히려 한날의 삶의 풍요의 삶이 아닌 거룩의 삶의 추구가 더 큰 복이며, 나아가 자신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것이 최상의 복임을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복을 준다고 더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다. 복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절을 보자.
다윗은 이렇게 선포한다.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유명한 예수님의 첫번 째 설교인 산상에서 하신 말씀이 우리 귀에 생생하다.
마태복음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도 그의 책 말미에 이렇게 서술했다.
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천국직전에 가져야 할 덕목이 복이 있는자이다.
위의 성경절을 살펴보니 이미 충 만하고 넘치도록 복 받은 우리는 지금 복이 있는 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복을 받을려고 발버둥치며 이미 받은 복 안에서 누리지 못한다 .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는 욕망하고 추구하는 그런 복을 얻어 내려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 성경이 말하는 복은 내게 지금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복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복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하나님은 충만히 계시를 주시고 성도들은 그 계시를 마음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