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록 :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요 개념들 2
-아이러니, 역설, 부조리 -
아이러니 (irony, l’ironie)
키르케고르의 초기 사유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 서로 유사하지만 구분되는 세 가지 개념들이 있다. 그것은 ‘아이러니’, ‘역설(파라독스)’ 그리고 ‘부조리’의 개념이다. 이 중 아이러니는 키르케고르의 박사 학위 논문의 제목에서 등장하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에게 끊임없이 나타난 아이러니 개념」 이었다. 아이러니의 사전적 의미는 ‘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혹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실제 사실 사이의 괴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좋아서 죽겠다’ ‘사고를 피하려 그렇게 노력했는데 사고로 죽었다’는 등의 ‘반어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소크라테스가 처한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였던 이유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바로 그 생각 때문에 그가 가장 현명한 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철학자들은 ‘무지(無知)의 지(知)’라는 말로 대변하고 있다. 반면 당시에 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사용하여 계속 질문을 던지자 결국 스스로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다’라고 고백한 상황이 또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아이러니의 개념을 통해 당시 소피스트들을 비판하였다면, 키르케고르는 아이러니의 개념을 사용하여 헤겔의 사상을 비판 하였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는 인류의 전 역사가 ‘변증법의 원리에 의해’ 이미 완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역사의 처음과 끝이 어떤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이라는 이유로 이는 너무나 확실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키르케고르는 바로 그런 이유로 이러한 역사철학은 인류나 역사(개별자의 역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이론만 아는 수영강사’에 비유하는데, 수영하는 법에 대해 이론적으로 장황하고 완벽하게 설명하지만 단 한 번도 수영을 직접 해 본적이 없는 사람, 그리하여 수영장에 들어가면 전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곧 ‘아이러니한 사람’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외에도 그는 청빈과 고행에 대해 감동적인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설교가 끝난 뒤 곧바로 호화로운 대저택으로 가서 안락의자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상황을 ‘아이러니한 사람’이라고 규정하였다.
역설 (paradox)
역설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맞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혹은 이해하는 그 방법을 말한다. 역설은 이성의 영역을 초월하면서 두 개의 모순된 것을 연결하는 존재론적인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같은 역설이 인식론적인 방법론으로 요청되는 이유는 인간의 이성이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특정한 진리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순되는 두 가지의 사실이나 사태를 연결하거나 일치시키는 일은 ‘역설’이나 ‘부조리한(absurde)’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3자가 개입한다. 이 제 삼자가 기독교에서는 ‘믿음’이다. 시간적인 존재와 영원한 존재, 한계를 가진 존재와 무한한 존재, 상대적인 존재와 절대적인 존재 즉, 신과 인간이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그 자체 모순으로 ‘말이 되지 않는’ 즉, ‘부조리한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역설 혹은 부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이즘은 본질적으로 역설의 종교로 나타난다.
이성의 이해력은 인과관계의 일련의 진리들의 과정을 거쳐서 결론에 도달한다. 반면 믿음은 이해할 수 있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일 믿음도 하나의 방법을 요청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역설’에 기초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내용 그 자체는 이성에 입장에서는 ‘말이 되지 않는 것 (부조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은 영원한 진리와 인간의 실존 사이에 절대로 약분이 불가능한 관계를 산출한다. 다시 말해 역설은 영원한 진리와 인간의 실존이 함께 (나란히) 놓일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반대되는 것을 일치시켜야만 하는 순간이 오는데, 이때 역설의 방법 외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성의 진리란 본질적으로 역설의 진리로 나타난다. 인간은 한편으로 육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이다. 한편으로는 선하고 다른 한편으로 악하며, 한편으로는 세상에 집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초월하고자한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고자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외면하거나 초월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간성의 역설적인 진리는 그 최종적인 목적인 ‘영원한 것(절대자, 신)과 유한한 것(실존, 인간)의 일치’에서 극에 달한다. 물론 영원성이나 신성의 관점 혹은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역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최종적인 것, 단순한 것, 하나인 것에 수렴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한한 인간의 이해력의 관점에서 이를 고려할 때는 항상 역설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설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실존하는 인간정신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부조리(absurd, l’absurd)
말 그대로 ‘말이 되지 않는 것’ ‘논리적 이해 불가능한 것’ 등을 의미한다. ‘역설’과 함께 키르케고르의 사유에서 중심 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부조리’리는 이해력의 바깥에 있는 것이며, 진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겠지만, 믿음의 영역에서는 오직 부조리의 힘에 의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인 자, 실존적(시간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자인 그리스도의 존재는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나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는 인간의 이성의 관점에서는 ‘부조리의 범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이를 이해하거나 긍정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오직 부조리의 힘에 의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역설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조리는 역설의 방법으로 도달하게 되는 진리의 그 내용을 말하거나 이를 이루게 하는 힘 (믿음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간적인 세계를 살면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크리스천의 진리는 이성의 관점에서는 (그 내용 자체가) ‘부조리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게는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또한 ‘부조리의 힘’이다.
자아가 된다는 것은 곧 ‘정신(spirit, l’esprit)’을 가진다는 것이며, 육체와 영혼의 대립을 일치시키는 제 삼자가 정신이다. 대립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정신의 이 힘이 곧 ‘부조리의 힘’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정신의 목적(télos)은 이 유한한 세계 안에 위치하고 있지 않으며, 초월적인 세계,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욥, 아브라함 등의 예를 통해서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정신의 목적이 ‘부조리의 힘’의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희랍의 세계에서 ‘이성’을 의미하던 ‘로고스(logos)’가 크리스천들에게는 ‘존재론적인 힘’ 즉, 모순되는 것을 일치시키는 내적인 힘인 ‘부조리의 힘’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