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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金宗直) 20
출생-사망 1431 ~ 1492 본관 선산(일선) (善山;일선 一善)
字 계온(季昷) ·효관(孝盥) 號 점필재(佔畢齋) 시호 문충(文忠)
활동분야 정치, 학문 출생지 경남 밀양
주요저서 《유두유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후일기》
143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부친 김숙자의 막내로 태어났다. 성리학에 밝았던 부친에게서 학문을 익히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453년(단종1) 23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김종직의 벼슬은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조선초 성리학을 이룬 대학자로 평가되었다.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김종직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도학정치를 펼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훈구파 세력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훈구파의 거물급이었던 이극돈(李克墩)에게 발각되었고 같은 훈구파 세력이었던 유자광 등이 주도하여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는 글이었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들과 사림파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되자 김종직의 신원이 회복되고 숙종(肅宗) 때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 조선 전기 훈구파에 대항한 참신한 정치 세력이었던 사림파의 영수. 이처럼 김종직(金宗直, 1431~1492)에게는 ‘사림파의 영수’라는 명예가 늘 따라다녔고,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이미지는 꼿꼿한 선비이자 학자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크다.
물론 김종직은 그 문하에서 후배 사림파들을 두루 배출하여 조선 전기 영남 사림파가 정치와 사상의 중심에 진입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였고, 세조에서 성종대에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지낸 관료이기도 했다.
1431년 6월 밀양부 서쪽 대동리(大同里)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김숙자는 선산에 은거한 길재(吉再, 1353~1419)에게 성리학을 배우면서, 정몽주 - 길재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는 기틀을 닦았으며, 김종직 또한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사림파의 학문적 전통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종직은 은거의 길을 고집하지 않고 출사의 길로 나섰다. 1446년 과거에 낙제하는 아픔을 겪었으나, 1453년 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겨울에는 창녕 조씨(曺氏)와 초례(醮禮)를 올렸다. 1456년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낙향을 하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 무렵 그의 인품과 학문에 감화를 받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459년의 연보에 ‘선생은 사문(斯文)을 진작시키고 후인(後人)을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으니, 쇄소(灑掃)의 예를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는 제자들이 앞에 가득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1459년 형의 권유로 문과(文科)에 합격한 후 중앙 관직에 진출한 김종직은 승문원의 저작, 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글 잘하는 선비 10명을 선발하여 예문(藝文)을 겸하게 할 적에는 형 김종석(金宗碩)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집현전의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의 인원을 늘려서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충당시켜 모두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김종직은 수찬(修撰)에 선발되었다. 이후 김종직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지방 관직을 자처하였고, 함양군수(咸陽郡守)로 나가게 되었다. 1471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관내의 정자에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쓴 시를 걸어둔 것을 발견했다. 김종직은 “그 따위 자광(子光)이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하고는, 즉시 명하여 거두어서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 사건은 1498년 무오사화를 주모한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복수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1475년 김종직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문원 참교(參校)에 제수되었지만,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영남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1479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는 금산(金山)에 있다가, 1482년에 왕명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다. 이후 성종의 깊은 신임 속에 승진을 거듭하여 홍문관 응교,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등 중앙의 요직을 두로 거쳤다. 당시 경연당상(經筵堂上)은 다만 조강(朝講)에 참여하여 모셨을 뿐이었는데, 성종은 특별히 김종직을 주강(晝講)에도 참여하게 하였다. 1485년 55세로 이조참판으로 있던 중 남평(南平) 문씨 문극정(文克貞)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때 부인의 나이 18세였으니, 그보다 무려 37살이나 어렸다. 새로 결혼한 이듬해에는 늦둥이 아들 숭년(崇年)을 얻는 기쁨을 얻었다. 1487년 전라도관찰사, 1488년 공조참판을 지냈고, 1489년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이 심해져 사직을 하고 밀양의 옛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곳에서 1492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성종실록]의 김종직 졸기(卒記)에는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고쳤는데, 문학이 넓고 본 것이 많은 것이 문(文)이고 경(敬)에 거(居)하여 간소(簡素)하게 행동함이 간(簡)이다. 김종직은 자호(自號)를 ‘점필재’라고 하였으며, 저술한 글이 몇 권이 있다. 찬집(撰集)한 [청구풍아(靑丘風雅)]ㆍ[동문수(東文粹)]가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종직을 다시 불러낸 <조의제문> 흔히 조선 성리학의 학통은 정몽주에서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과 정여창, 조광조로 이어지는 학맥으로 공식화되었다. 이들은 사림파 혹은 도학파로 불리는데, 길재와 정몽주의 학문을 이은 인물들이다. 김종직에 대해서는 사림파의 영수로서, 평생 재야에서 은거의 삶을 선택했을 것 같은 선입견을 갖지만, 실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세조, 성종대에 관료로서의 삶을 살아간 관료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남 사림파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부친인 김숙자가 길재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김종직의 사림파적인 입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학]의 이념이었다.
조선 전기 사림파 학자를 특징짓는 요소 중 하나가 성리학의 실천이며 그 중심에 [소학]이 있었다. 김종직은 제자들에게 늘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소학동자’로 평가 받는 김굉필의 문집인 [경현록(景賢錄)]에는 ‘일찍이 점필재 김 선생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소학]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니 김굉필이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고 게을리 하지 않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종직을 사림파의 영수로 확실하게 기억시켜준 것은 그의 사후에 일어난 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사관(史官)으로 있던 그의 문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였고, 이것이 연산군 대에 필화 사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이름 석 자에 ‘영남 사림파의 영수’라는 칭호가 늘 따라붙게 하는 대표적인 근거가 되었다. <조의제문>은 1457년, 김종직이 27세가 되던 해에 쓴 글이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1498년) 7월 17일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찬수한 사초(史草) 내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고 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정축(1457년) 10월 어느 날에 나는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으로 향하여 답계역(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 패왕(西楚霸王)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하고, 드디어 문장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 오상(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 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쓴 것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서였는데, 숙부인 서초패왕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제자인 김일손은 스승의 이 글이 사림파의 의식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판단하여 사초(史草)에 실었다. 그러나 이 사초 문제는 1498년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러나 이 희생은 역설적으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의 이름을 후대까지 널리 기억하게 만들었다.
김종직은 관료로 활약하면서도 사림파로서의 입장을 수시로 피력하였다. 세조 때에는 잡학(雜學)을 비판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은 [세조실록](1464년 8월 6일)에 실린 당시의 정황이다.
김종직이 아뢰기를, “지금 문신(文臣)으로 천문ㆍ지리ㆍ음양ㆍ율려(律呂)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시사(詩史)의 7학(學)을 나누어 닦게 하는데, 그러나 시사(詩史)는 본래 유자(儒者)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雜學)이야 어찌 유자들이 마땅히 힘써 배울 학(學)이겠습니까? …… 그 능통(能通)하는 데에 반드시 문신이라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학(諸學)을 하는 자들이 모두 용렬한 무리인지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뜻을 이루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김종직은 경박(輕薄)한 사람이다. 잡학(雜學)은 나도 뜻을 두는 바인데, 김종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은가?……파직을 시키라.”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들은 [소학]을 중심으로 하는 도(道)의 개인적 실천과 교육 활동에 힘쓰게 되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향촌 교화의 노력으로도 이어진다. 김종직은 [주례(周禮)]의 향사례ㆍ향음주례의 시행 보급을 목적으로 유향소(留鄕所) 제도를 부활할 것을 주장하고, 학규를 만드는 등 평생을 도학 이념의 전파와 그것의 일용에서의 실천을 보급하는데 힘썼다. 김종직이 사림파 학자로서 지방민을 위해 애쓴 모습은 [점필재집] 연보 45세(1475년)의 다음 기록에서도 볼 수가 있다.
함양성(咸陽城)의 나각(羅閣)이 모두 243칸(間)이었는데, 한 칸마다 세 가호(家戶)가 함께 출력(出力)하여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왔다. 그런데 해마다 비바람에 지붕이 걷힐 때면 비록 한창 농사철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이 반드시 우마차에 볏짚과 재목을 싣고 와서 수리를 하곤 하였다. 역대에 걸쳐 계속 이렇게 해오다 보니,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기었다. 그래서 2월 어느 날에 선생이 부로(父老)들과 상의하여 다시 전지(田地) 10결(結)을 비율로 삼아 한 칸마다 거의 열 가호씩을 배정해서 그 썩은 재목을 바꾸고 또 기와를 이게 하였더니, 한 가호에 겨우 기와 10여 장씩만 내놓아도 충분하였고, 일도 5일이 채 못 가서 마치게 되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졸속하게 경장(更張)시키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으나, 일이 완성된 뒤에는 모두 기뻐하며 좋다고 일컬었다.
함양군수 시절 김종직이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힘을 쏟은 점은, ‘김모(金某)는 군을 잘 다스려서 명성이 있으니, 영전(榮轉)시키라.’고 할 만큼 성종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문장가 김종직
점필재문집책판(佔畢齋文集冊板) 및 이존록(彛尊錄). 무오사화로 소실된 원고를 모아 김종직의 조카 강중진(康仲珍)이 중종 12년(1517)에 선산에서 [점필재문집]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책판은 1789년 이관하여 현재 예림서원에 소장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5로 지정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흔히 사림파 학자라고 하면 경서나 성리학 이론에 해박하고 문장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사림파와 훈구파를 구분할 때도 사림파는 경학을 중시한다고 해서 경학파(經學派), 훈구파는 문장을 중시해서 사장파(詞章派)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종직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구분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 김종직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며, 세조~성종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이기도 했다.
[점필재집] 연보에 의거하면, 김종직은 기억력이 좋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일찍부터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날마다 수만 마디의 말을 기억하여 약관이 되기도 전에 신동이라 알려졌다. 15세에 이미 시문에 능하여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20세가 못 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의 나이 16세 때 과거 시험에서 지은 <백룡부(白龍賦)>는 낙방이 되었으나, 이를 본 태학사(太學士) 김수온(金守溫)이 “이는 후일에 문형(文衡)을 맡을 솜씨이다.”라며 크게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30세에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을 때 승문원의 선배였던 어세겸(魚世謙)은 그의 시를 보고 탄식하며 “나보고 말 채찍을 잡고 하인이 되라 해도 달게 받아 들이겠다.”라고 한 기록도 있다.
세조, 성종 시기에 김종직은 왕명을 받들어 세조의 왕세자빈 한씨(韓氏)의 애책문(哀冊文)을 비롯하여, 성종대에는 인수대비의 옥책문(玉冊文), 예종의 시책문(諡冊文) 등 주요 문장을 짓는데 두루 참여하였다. 성종은 특히 김종직을 총애하여 왕명으로 수많은 글을 짓게 하고,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맡기기도 했다. 당시 사관의 평가에서도 ‘김종직이 문장을 잘 짓기 때문에 특별히 지우를 입어, 승정원에 들어가 좌부승지로 옮겼다가 차례를 뛰어넘어 도승지에 제수되니, 사림(士林)이 다 눈을 씻고 그가 하는 일을 바라보았다.([성종실록] 성종 15년 8월 6일)’고 하여 김종직이 문장력으로 승진을 거듭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김종직의 행적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는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문집 서문을 쓴 점이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영수로서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대립했을 것만 같지만, 실제 세조, 성종대의 편찬 사업에 함께 참여했고 문집의 서문을 써준 것에서 두 사람의 친분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점필재집]에 기록된 신숙주 문집의 서문인 <신문충공문집서(申文忠公文集序)>에서 김종직은 무엇보다 신숙주가 자신을 이끌어준 데 대해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종직(宗直)은 궁벽한 시골의 만진(晩進)으로서 처음 괴원(槐院, 승문원)에서부터 공의 알아줌을 입었었다. 그리하여 공이 [병장설(兵將說)]을 주석할 적에 내가 외람되이 속관(屬官)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내가 문병(門屛)에서 공의 명령을 받들고 있을 때, 공은 막 손들과 술을 마시면서 한 마디 말로 온 좌중에 나의 장점을 칭찬해 주었으니, 나를 개발시키고 성취시켜 준 그 은혜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신숙주에 대한 찬사는 이어진다.
공(신숙주)은 국량이 넓고 크며 재식(才識)이 매우 해박하여 벼슬을 시작한 이후로 재상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평소 가슴속에 온축된 것들이 발산되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용도가 되었다. 공은 모든 사물이 앞에 이르면 기미를 맞아 응접(應接)하여 좌우로 수작(酬酢)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온축된 것이 나오면 나올수록 더욱 끝이 없어 그 한계를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음을 탄복하였다. …… 사업에 시용(施用)한 것만 이러할 뿐이 아니다. 문장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에 근본하여, 여유 있고 화창하며 탁월하고 광대하여 번거롭게 법칙을 가하지 않아도 절로 법도가 있다.
사림파의 영수가 훈구파의 영수를 평가하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찬사가 넘치는 문장을 보면,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구도가 당대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개 김종직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로 평가를 받지만, 15세기 세조~성종대의 관료 학자이자 문장가로서의 면모도 다분히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문장가, 관료, 사림파라는 그를 대변해주는 키워드 중에서 ‘사림파’가 그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를 잡은 것은 연산군대에 사화(士禍)가 본격화되고, 그가 피화(被禍)의 중심에 섰던 점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과 같은 쟁쟁한 사림파 제자들을 배출한 점은 ‘사림파의 영수’로서 김종직을 기억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김종직은 조선 전기 영남 출신의 사림파 학자였고, 김굉필과 정여창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였다. 또한 뛰어난 문장 능력을 인정받은 문장가였으며, 대부분의 생애를 관직에 종사한 관료였다. 사림파의 영수로만 알려진 김종직에게 이렇듯 여러 측면이 나타나는 것에서 조선 전기 지식인의 다양한 모습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적 영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권력에 아부하는 학문을 경계하라
목차성리학의 나라 조선
학문을 하는 데는 순서가 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학문은 진실을 위한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
공부는 태도가 중요하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주희(朱熹)가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성리학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희를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받들고 주자학을 공부했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이용후생과 실학사상이 퍼지면서 학문의 영역이 다양화되었다. 예(禮)를 숭상하는 성리학은 다분히 교조적이어서 조선에 신분제를 고착시켰고, 그 결과 평민과 천민에 의한 사회 변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성리학은 고려시대에 안향을 시초로 이색, 정몽주 등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정도전과 권근 등에 의해 조선의 국시(國是)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성리학을 정립한 인물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으로, 그의 1대 제자 김굉필(金宏弼)에 이어 2대 제자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웠다.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려면 성리학을 공부해야 했고, 의학이나 외국어는 중인들이 치루는 잡과에 속했다. 김종직이 성리학을 정립시키고 그의 제자들이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학문적 목표가 화려한 시문(詩文)이나 부(賦 : 작가의 생각이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가), 송(頌 : 덕을 칭송하여 넓게 꾸미는 것) 등의 문장에 있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義理 : 올바른 이치)가 앞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직의 이러한 사상은 사림에게서 존경받았고, 당시 학자들은 그를 정신적인 영수로 떠받들게 되었다.
점필재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년) 밀양에서 김숙자의 3남 2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김숙자는 성리학에 상당히 밝은 인물이었고, 김종직에게 어릴 때부터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쳤다.
글을 깨우치고 문장의 내용을 알게 되면 공부하는 즐거움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옛사람들은 이를 문리(文理)를 깨우쳤다고 했다. 그리고 문리를 깨우치게 되면 공부에 빠져들어 일취월장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어린 소년이라면 밖에 나가 뛰어노는 편이 더 즐거울 것이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천자문』을 배우면서 틈만 나면 나가 놀기에 바빠 공부에 소홀했다. 그러자 김숙자가 김종직을 꾸짖었다.
"이놈아, 어린놈이 어찌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에만 바쁜 것이냐? 앞으로 또다시 공부를 게을리하면 회초리를 들 것이니 그리 알거라."
"예." 김종직은 마지못해 대답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뛰어나가 놀다가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놈, 애비가 그렇게 야단을 쳤는데도 아직도 놀기만 하느냐? 매 좀 맞아야겠다. 회초리를 가져오너라."
김숙자는 어린 아들에게 회초리를 가져오게 하고 종아리를 때렸다. 그렇게 매를 맞고 공부하는 시늉을 했으나, 김종직의 눈에는 글이 들어오지 않았다.
'책이 없으면 공부하라고 하지 않으시겠지.'
김종직은 책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외출했을 때 책을 가져다가 풀숲에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상하게 뒤가 허전했다. 책이 풀숲에서 그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김종직은 책이 아까운 생각이 들어 풀숲으로 달려가 책을 다시 가져왔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으시겠지?'
김종직은 그날부터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열심히 책을 읽었다.
"이 아이는 반드시 대가의 유업(儒業 : 유학)을 이을 것이다."
김종직의 할아버지는 크게 기뻐했다. 그렇게 해서 김종직은 어린 나이에 『천자문』과 『소학』을 모두 읽었다.
학문을 하는 데는 순서가 있다. 이때부터 김종직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다시 읽으라고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억지로 읽었지만, 『천자문』을 외우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떼고 나자 공부에 재미가 생겼다. 이른바 문리가 트인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일이 점점 즐거워졌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많았다. 그래서 김종직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특히 『사서(四書)』에는 왕조의 흥망성쇠가 담겨 있어서 밖에서 노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그런 김종직을 보고 아버지는 학문을 순서대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문을 하는 데는 순서가 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학문에 대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김숙자는 김종직에게 공부의 순서를 가르쳤다. 그리고 글자 한 자, 문장 한 줄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정독하고 공부의 순서를 지킬 것을 강조했다.
공부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환경이 중요하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공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하여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고사성어를 남겼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대학자인 김숙자를 아버지로 둔 것은 김종직에게 행운이었다. 김종직은 아버지로부터 학문하는 자세를 철저하게 배웠다.
"글씨는 마음의 그림[心畫]이니, 모해(模楷)를 반드시 단정하게 써야 하고, 초서(草書)와 전서(篆書) 또한 단정하게 익혀야 한다."
김숙자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김종직에게 학문의 순서와 바른 자세를 강조했다. 김종직의 바른 언행은 부친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김숙자는 산가지(대나무 등으로 만든 막대를 늘어놓아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 또는 그 막대)를 잡거나 놓을 때 반듯하게 하라고 가르쳤다.
"일상생활의 사물에 관해서는 이것이 아니면 그 숫자를 쉽게 파악할 수 없으니, 비뚤게 놓아서는 안 된다." 이렇듯 아버지는 일상생활에서도 엄격했다.
김종직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항상 가슴속에 깊이 새겼다.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배우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나 김종직이 성리학의 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숙자의 훌륭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학문에 대한 태도가 또래 소년과 달리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김종직의 학문은 김숙자가 놀랄 정도로 발전했다. 한 글자를 가르치면 열 글자를 깨우치고, 10세가 되기 전에 시문을 짓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빛과 지혜가 남다르다.' 김숙자는 아들의 학문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궁시(弓矢 : 활과 화살)는 몸을 호위하는 물건이니, 익혀두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옛사람은 이것으로 덕을 관찰하였으니, 박혁(博奕 : 장기와 바둑)에 비할 바가 아니다."
김숙자는 김종직에게 활쏘기를 가르쳐 심신을 함께 수양하게 했다. 그리고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幼學字說)』 『정속편(正俗篇)』을 가르쳐주어 모두 배송(背誦 :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외움)하게 한 뒤에야 『소학』을 읽도록 했다. 독특한 교습법이었다. 그 뒤에는 『효경(孝經)』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전(詩傳)』 『서전(書傳)』 『춘추(春秋)』 『주역(周易)』 『예기(禮記)』 등의 순서로 읽게 했다. 김종직은 김숙자의 슬하에서 정석대로 학문의 길을 걸어갔다.
"이제는 네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어도 좋다."
비로소 김숙자는 제자백가를 읽는 것을 허락했다. 김종직은 『통감(通鑑)』을 비롯하여 제자백가의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12세가 되자 김종직은 날마다 수천언(數千言)의 글자를 외워, 근방의 선비들에게 신동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김숙자의 고향에는 고려의 대학자이자 충신인 야은 길재가 있었다. 고려 말에 이색, 정몽주와 함께 3은(三隱)이라 불렸고, 학문과 충의가 높아 사림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김숙자는 이성계가 세운 새로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밀양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길재에게 김종직과 형을 보내서 공부하게 했다.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탓도 있지만,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숙자만 해도 성리학의 대가인데, 또 한 사람의 대가인 길재로부터 학문을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김종직에게는 천운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종직은 길재의 제자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이 아이는 학문하는 태도부터 남다르다.'
길재는 김종직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종직은 공부할 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책을 읽으면 반드시 그 문리를 깨우치기 위해 노력했다. 길재는 김종직에게 주자학의 맥을 가르쳤다.
"너희들의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으니 과거를 보도록 하여라."
김숙자가 김종직과 형에게 말했다. 김숙자는 조선조 개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야인으로 지내는 동안 조선은 안정을 찾았다. 태조 이성계나 태종 이방원은 비록 피바람 이는 난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백성을 안정시켰다. 태종은 몇 년간 왕위에 있다가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곧 자리를 물려주었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는 성군이었다. 김숙자는 고려에 절개를 지키는 것은 자기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두 아들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16세가 되었을 때 김종직은 형과 함께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 그러자 김숙자는 두 아들에게 친히 술을 따라주고 축복했다.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한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너희들을 위해 이 술잔으로 축복하겠다." "아버님, 저희들이 돌아올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그 당시 김숙자는 병을 앓고 있었다. 하직 인사를 올리다가, 김종직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김종직과 형은 문경새재를 넘고 충주를 지나 한양까지 가서 과거를 보았다. "잘 보았느냐?" 과거 시험이 끝난 후, 형이 김종직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백룡부(白龍賦)」를 지었는데 시관들이 어떻게 판단할는지······."
김종직이 힘없이 대답했다.
"떨어지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나이가 어리니 아직 기회는 많다." "예."
김종직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내 발표가 났는데, 형은 합격하고 김종직은 낙제했다. 이때 당대의 학자인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대제학에 임명되어 시관(試官 : 조선시대 과거 시험에 관계한 관원)을 맡았다. 김수온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당대의 석학인 신숙주, 성삼문 등과 친분을 쌓았다. 김수온의 호는 괴애 또는 식우(拭疣)이고, 영중추부사를 지낸 뒤에 『식우집(拭疣集)』이라는 문집을 냈다.
김수온은 낙방한 시험지들을 응시자들에게 돌려주다가 김종직의 「백룡부」를 읽게 되었다.
"비록 낙방했어도 장차 대제학이 될 만한 글솜씨가 있다."
김수온은 「백룡부」를 읽고 탄복했다. 학문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대제학으로 임명되기 때문에, 문신들은 이를 영의정에 못지않은 영광으로 생각했다. 김수온은 김종직에 대해 세종에게 아뢰었다.
조선시대에 학문을 가장 많이 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는 세종이 김종직의 「백룡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세종은 과거에 급제하지도 않은 김종직에게 영산훈도(靈山訓導 : 고을 시학관)를 제수하여 학문에 더욱 전념하게 했다.
김종직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한강의 제천정(濟川亭)에 이르러 시 한 수를 지었다.
눈 속의 찬 매화와 비 온 뒤의 산은 雪裏寒梅雨後山
바라보기는 쉬우나 그림으로 그리기는 어렵네 看時容易畫時難
일찍이 시인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알았으니 早知不入時人眼
차라리 연지를 가져다 모란이나 그려야겠네 寧把臙脂寫牧丹
나중에 김수온이 제천정을 지나다 현판의 시를 보았다. 김수온은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시를 읽었다. 담백하면서도 대가의 향기가 풍기는 시였다.
"이것은 반드시 지난날에 「백룡부」를 지은 솜씨다."
김수온이 시를 읽고 감탄하며 말했다.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과연 김종직이었다. 이렇듯 인재를 알아보는 것을 식감(識鑑)이라고 한다. 김종직의 학문이 깊음을 알아본 것은 김수온이 그만큼 뛰어난 인재였기 때문이다.
제천정에서 시를 지은 김종직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여러 날이 걸려 고향 마을에 이르자마자,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푸른 하늘이여, 푸른 하늘이여,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술잔을 들고 축복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이런 슬픔을 주십니까?"
김종직은 통곡하며 울었다.
그 후로 김종직은 한양으로 올라와 남학(南學 : 조선시대 남쪽에 있던 4학당의 하나)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학에는 이미 한양의 많은 수재들이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었다.
'모두들 열심히 하는구나. 저들에게 질 수는 없지.'
자극을 받은 김종직은 공부에 더욱 열중했다. 그는 평소 집에서도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에 의관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이는 김숙자로부터 배운 품행으로, 남학에 와서도 그 자세를 잃지 않았다.
결국 23세 때 김종직은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 뒤 울진 현령 조계문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점필재집』
김종직 사후, 제자 조위에 의해 편집된 시문집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성균관에서 김종직은 두각을 나타냈고,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종직은 1459년(세조 5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 젊은 학자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함)를 받았다. 1462년에는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했다. 다음 해 사헌부감찰이 된 뒤 경상도 병마평사, 이조좌랑, 수찬, 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에는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고,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홍문관제학, 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이후 김종직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책을 쓰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1492년(성종 23년)에 세상을 떠났다. 『점필재집(佔畢齋集)』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을 저술하고 『일선지(一善誌)』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했다.
김종직은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과 같은 쟁쟁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김굉필은 다시 조광조를 배출하여 도학정치(道學政治)의 학통을 계승했다.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조종(祖宗)으로 불리며, 이언적을 비롯하여 이황과 조식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김종직의 제자들과 문인들이 조선을 이끄는 대학자들이 되면서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렇듯 김종직은 조선 성리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다. 김굉필과 정여창은 김종직과 같은 일대종사를 스승으로 받들고 공부하여 명현이 되었다.
학문은 진실을 위한 것이다1457년(세조 3년) 10월, 김종직은 밀양에서 경산(京山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 「조의제문」은 훗날 그의 제자 김일손에 의해 사초(史草)에 기록되면서 연산군 시대에 엄청난 사화로 발전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하늘과 땅, 도리와 군주, 오륜을 받들지 않겠는가. 중국이라서 풍부하고 조선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멀리 동방의 조선인이요, 천년 뒤의 사람이지만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고 의제(義帝 : 초회왕)를 애통하게 여겨 제문을 짓는다. 옛날 진시황이 폭정을 하여 사해의 물결이 붉은 피가 되어 흘렀으니 한낱 미물이라도 어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멸망한 6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난민을 모아 봉기했다. 항량(項梁)은 초나라 대장군의 후손으로, 초회왕의 뜻을 받들어 봉기했다. 초회왕이 항우에게 군사를 이끌고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하니 족히 그 인의(仁義)가 다시 일어났도다.
양과 개를 탐하는 사나운 이리 같은 항우가 군사를 마구 학살했는데 어찌 잡아다가 벌을 내리지 아니했는가. 도리어 잔인하고 사나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니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도다. 강가의 산은 하늘에 우뚝 솟았는데 햇빛은 침침하여 저물녘을 향하였고, 빈 강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데 물결은 넘쳐흘러 되돌아오지 않는구나. 애통하여라! 천지는 장구하여 언제 다하랴마는, 그 넋은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니리라. 나의 충심은 쇠와 돌도 뚫을 만하기에 왕께서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자양의 노련한 필법(주자의 의리와 정통의 춘추 필법)을 따라가자니 마음이 설레고 아찔하며 공경히 사모하여, 술잔을 들어 땅에 부어서 제사를 지내니,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제문이 워낙 어렵게 되어 있어 당대의 식자들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이 "노산군을 위하여 「조의제문」을 지었으니, 사초에 그의 충성스러움을 기록한다"라고 쓰는 바람에 조선 최초의 사화로 발전했고, 피바람의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불러일으켰다.
「조의제문」은 김종직 스스로가 말했듯이 자양의 노련한 필법, 즉 의리와 정통의 입장을 따랐다. 겉으로는 초회왕을 애통해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실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에서 비통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애도한 것이다.
김종직은 조정에 나아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런 말을 세조에게 올렸다.
"지금의 문신은 천문, 지리, 음양, 율려(律呂), 의약(醫藥), 복서(卜筮), 시사(詩史)의 7학을 나누어 학문을 닦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사(詩史)는 본래 선비의 일이지만, 그 나머지 잡학이야 어찌 선비들이 힘써 배울 만한 학문이겠습니까? 또 잡학은 각각 업(業)으로 하는 자가 있으니, 이에 능통하는 것이 반드시 문신일 이유는 없습니다."
김종직은 문신들은 정통 학문인 유학만 공부하고 잡학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종직의 말에 세조가 버럭 화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김종직의 직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세조였다.
"학문을 하는 자들이 모두 졸렬한 무리인지라 마음을 하나에 쏟아 뜻을 이루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너희들로 하여금 이것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비록 비루한 일이라고는 하나, 나 또한 대강이나마 섭렵하면서 그 문호에 며칠 동안 있었다."
이렇게 일갈하며 세조는 김종직에게 대놓고 무안을 주었다. 그러나 김종직은 공맹(孔孟)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신들이 잡학을 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보았다. 김종직이 물러가자, 세조는 이조에 영을 내렸다.
"김종직은 경박한 사람이다. 내가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데, 김종직의 말은 심히 무례하도다. 그를 파직하라."
이렇게 김종직은 정학인 유학을 고집하다가 세조에게 파직당했다. 명분과 절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김종직은 보위를 찬탈한 세조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세조가 죽고 성종이 보위에 오르자, 김종직은 다시 조정에 중용되어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용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보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관심이 없어서 동궁의 관리들이 공부하라고 권하면 노골적으로 싫어했고, 자신의 일에 일일이 반대하는 사림파를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보위에 오르고 말년이 되자 주색에 빠져 포학한 정치를 펼쳤다. 대신, 대간(臺諫), 시종을 마구 죽였고,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를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잔인한 형벌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은 연산군이 재위한 지 4년째의 일이었다. 연산군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고, 당상관으로 이극돈을 임명했다. 이극돈은 세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총애를 받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우찬성에 올랐다.
이극돈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사초를 살피다가 우연히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경악했다. 자신이 전라관찰사로 있을 때 성종이 초상을 당했는데, 서울에 향도 바치지 않고 기생을 데리고 놀러 다닌 일이 적혀 있었다. 사초는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날마다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초고다. 이런 일로 『실록』에 오르면 후손들에게도 치욕스러운 일이 된다.
'김종직의 제자가 이런 짓을 하다니······.'
이극돈은 사초를 읽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치욕을 기록한 사초를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를 모조리 살피다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에 눈길이 멈췄다.
'김일손은 어찌 김종직의 「조의제문」까지 사초에 기록했다는 말인가?'
이극돈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조의제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의제문」은 의제로 불리는 초회왕을 기리는 것이어서 무엇 때문에 사초에 올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밝힌 구절을 보고 깜짝 놀랐다. 노산군은 연산군의 할아버지인 세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된 뒤에 사약을 받고 시체마저 강물에 버려져 찾을 수 없게 된 역적이다. 김종직이 그 역적을 위해 제문을 지었다는 말인가. 이극돈은 손발을 떨면서 몇 번이나 「조의제문」을 읽었으나 노산군과 「조의제문」의 연관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극돈은 실록청에서 일하는 어세겸에게 이를 이야기를 했다. 어세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극돈을 외면했다.
"김종직의 노비 노릇을 하라고 해도 나는 망설이지 않을 거라네."
어세겸은 김종직의 글을 읽고 감탄하여 말했다. 어세겸은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어서, 당시에 세도가들이라면 누구나 두고 있던 첩마저 두지 않을 정도로 청백리였다. 천성이 맑고 검소하여 거처하는 집에 흙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벽에는 흙만 발랐을 뿐, 붉은 칠을 하지 않았다.
이극돈이 어세겸에게 넌지시 말했다.
"김일손의 사초는 선왕을 욕보인 것입니다. 이를 전하께 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초를 고하는 것은 선비의 태도가 아니오. 그것은 직필을 막는 셈이오."
어세겸은 이극돈의 말에 반대했다. 이극돈은 어세겸이 자기와 뜻을 같이하지 않자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 기회에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훈구파 대신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의중을 떠본 뒤에, 지혜가 뛰어난 유자광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이 일은 무령군이 잘 알 것이다.'
이극돈은 무령군 유자광을 은밀하게 찾아가 사초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루는 유자광이 함양군에 놀러 갔다가 지은 시를 고을 원님에게 부탁하여 현판에 새겨 벽에 걸게 했다.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이 유자광의 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어떤 자가 감히 이따위 현판을 걸었는가?"
그러더니 나졸들에게 지시하여 유자광의 현판을 떼어내어 불태웠다. 유자광은 그 말을 듣고 분개하며 이를 갈았다.
"「조의제문」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이극돈이 유자광에게 물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를 읽고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세조를 비난한 제문이오. 김종직이 아무리 명성이 높다고 한들 어찌 입을 다물고 있겠소?"
유자광은 즉시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에게 김일손의 사초를 연산군에게 아뢰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대신들은 모두 세조 밑에서 벼슬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사림파가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를 중심으로 자신들을 탄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들은 즉시 연산군에게 달려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했다.
"김종직은 의제를 노산군에 비유하였고, 황공하옵게도 항우를 세조께 비유했습니다. 금성대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세조께서는 노산군을 사사하라 하시고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말라는 어명을 내렸는데, 김종직은 이를 비난했습니다."
유자광의 말에 연산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영을 내렸다.
"사초를 들여라." 그러자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전하께서 사초를 보시면 반드시 작성한 자들을 처벌할 것인데, 이는 직필을 막는 일이니 옳지 않습니다."
"즉시 대내(大內 : 임금이 거처하는 곳)로 들이도록 하라."
연산군이 눈을 부릅뜨고 다시금 영을 내렸다.
"여러 사관들이 드린 사초는 저희가 보지 않는 것이 없고, 김일손이 쓴 글 역시 모두 알고 있사옵니다. 김일손의 사초가 조종조(祖宗祖)의 일을 범하여 그른 점이 있다는 사실은 신들도 들어 아는 바이므로 신들이 망령되게 여겨 감히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사초를 들이라고 명령하시니 무슨 일을 살피시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만일 종묘사직에 관계가 있다면 살피지 않을 수 없사오니, 그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임금이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의(義)에도 합당합니다."
그래서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6조목을 잘라서 올렸다.
"참혹하다! 참혹하다!"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탄식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김종직이 세조를 비난한 사실이 참혹하다는 것이다.
그 앞에 유자광이 사림파 숙청을 맡겠다며 나섰다.
"전하, 이들은 대역무도한 자들입니다. 김종직의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으니, 신에게 맡기시면 조정을 깨끗이 다스리겠습니다."
"경에게 일임할 것이다. 경은 문사(文士)인 체하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가혹한 영이 떨어졌다. 연산군이 그동안 사대부들에게 얼마나 반감이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불었다. 김일손, 이목, 허반, 권오복, 권경유 등이 잡혀와 국문을 당했다.
"신의 사초에 기록한 바 '황보(皇甫)와 김(金)이 죽었다' 한 것은 신의 생각에 절개를 지켜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김일손은 단종 때에 수양대군에게 죽음을 당한 황보인과 김종서가 충성스러운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김일손, 이목, 허반, 권오복, 권경유 등은 처형을 당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김굉필, 표연말, 홍한, 정여창, 이주, 이계맹, 강혼 등은 한결같이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진실만을 추구하여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갔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공부는 때가 있다고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여 포기하는 것보다는 늦었더라도 공부하는 편이 낫다.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를 배출하여 더욱 유명해진 김굉필은 스승의 「조의제문」 사건으로 귀양을 갔다. 그는 이미 당대의 대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김굉필은 1454년(단종 2년)에 서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서흥에서 유력한 집안으로 토지가 많았기 때문에, 김굉필 역시 부유하게 자랐다. 어려서 그는 망나니짓을 많이 했다.
젊을 때 호탕하고 뛰어나서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사람들을 회초리로 때리곤 했으니, 사람들이 그를 보면 곧 피하여 숨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명신록(名臣錄)』을 근거로 김굉필을 호탕했다고 적었으나, 이는 그가 후에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좋게 평가한 것이다. 그는 처가와 처외가가 모두 영남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하면서 선비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뒤늦게 학문의 길로 나섰다. 때마침 김종직이 낙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웠다.
만일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마땅히 이 책부터 시작하라. 광풍제월(光風霽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며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소학』을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했다. 이에 김굉필은 본격적으로 『소학』을 공부했다. 물론 김굉필이 평생 『소학』만 공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서오경에 이어 제자백가를 공부하여 유학의 일가를 이루고,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조광조에 이르게 했다. 김종직에게 사사받은 기간은 짧았으나, 학문을 하는 진정한 선비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하루는 김굉필이 김종직에게 물었다.
"스승님, 제자가 어리석어 뒤늦게 독서를 시작했으니, 과연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학문을 하는 데 늦고 빠른 것이 어디에 있느냐? 나는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다. 네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와 같이 한다면 크게 발전할 것이다."
'그래, 나는 늦게 시작했으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는 이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새벽에 일어나기도 힘들었으나, 나중에는 닭이 울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뜨였다. 김굉필은 처절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 결과 정여창 등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 중에 가장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김굉필은 1480년(성종 11년),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고, 1494년 이극균이 산림의 어진 선비라고 천거하여 40세에 벼슬을 시작했다. 이어서 전생서참봉, 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다. 사헌부감찰을 거쳐 1497년에는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바람에 유배를 갔다. 그후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사사되었다. 벼슬은 비록 형조좌랑에 지나지 않았으나 죽은 뒤에 도승지, 우의정,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유학에서는 그를 5현으로 받들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로 성공한 김굉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공부는 결코 늦었다고 포기할 필요가 없다.
김굉필은 학문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소학』에 심취했다. 사람들이 김굉필에게 학문에 대해 물으면 항상 겸손하게 대답했다.
"나는 소학동자(小學童子)이니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
이렇게 김굉필은 『소학』을 수신의 교본으로 삼았다.
학문으로 아직 하늘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는데 學問猶未識天機
소학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小學書中悟昨非
앞으로 밝은 가르침을 좇는 즐거움이 있으리니 從此自有名敎樂
어찌 구구하게 벼슬하고 부귀한 것을 부러워하랴 區區何用羨輕肥
위와 같이 『소학』을 읽고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바로 성인이 될 수 있는 바탕이다. 허노재(許魯齋) 뒤에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김종직은 김굉필의 시를 읽고 이렇게 답했다. 허노재는 원나라 때의 학자 허형(許衡)을 일컫는데, "소학을 부모처럼 공경한다"라고 말한 사람이다.
점필재 종택
1800년경에 세워진 점필재 종택. 무오사화로 김종직 가문이 화를 입었다가 6대손 때 비로소 정착했다고 한다(ⓒdoopedia.co.kr).
공부는 태도가 중요하다스승과 제자에 걸쳐 3대가 학문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김종직은 김굉필을 배출하고 김굉필은 조광조를 배출하면서 우리나라 유교의 역사, 특히 성리학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조광조는 1482년(성종 13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조원강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였다. 어릴 때 학문에 열중하여 글 읽는 소리가 그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했고, 언행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루는 글 읽는 소리를 듣고 흠모하던 이웃집의 여종이 밤에 방으로 찾아와 사랑을 호소했다.
"선비가 글을 읽는데 어찌 계집이 방해하느냐?"
조광조는 호통을 치고 여종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고는 쫓아 보냈다. 이는 후대 선비들에게 학문을 하는 선비의 본보기가 된 일화였다.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희천에 따라갔다가 유배된 김굉필을 만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대가인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워 『소학』과 『근사록(近思錄)』 등을 토대로 경전을 연구하고 실생활에 응용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여파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광인이라거나 화태(禍胎 : 재앙의 근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삼경(三更 :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 되어야 잠을 자고 오경(五更 :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이 되면 일어나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는 시간 외에는 책상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공부했다. 『치재일록(耻齋日錄)』에서 옮긴 『연려실기술』의 기록이다.
학문을 독실히 하여 꿇어앉아 익히고, 언제나 의관을 단정히 한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초저녁부터 삼경까지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맑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기를 아무리 더운 여름의 짧은 밤이라도 조금도 변치 않았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성균관의 쟁쟁한 학생들은 조광조의 학문과 절의에 감동하여 그를 스승처럼 받들었다. 조광조는 성균관에서도 모범이 되었다. 그는 할 말이 있으면 서슴지 않았다.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 성균관 학생 200여 명의 천거로 벼슬을 시작했다. 그는 조정에서도 항상 바른말을 했다. 중종은 조광조가 바른말을 하는 것을 보고 중용했다. 게다가 중종반정으로 권력을 쟁취한 대신들이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어서 이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조광조는 청직(淸職 :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이 맡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본격적으로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조광조로 인하여 신진 사대부들이 대대적으로 관리로 진출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구 세력과 마찰이 일어났고, 위훈(偉勳 : 거짓된 공훈) 문제로 나중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는 중종반정에 아무런 공도 없는 훈구대신들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사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훈구대신들과 중종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임금이 위세(威勢)로 신하를 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조광조는 사림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이를 관철시키려 했다. 중종은 조광조가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광조에게 훈구대신들과 타협할 것을 여러 차례 권했지만, 조광조는 사림을 배경으로 삼아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광조가 왕명에도 따르지 않는구나.'
중종은 조광조에게 실망했다.
"반정이 일어났을 때 일이 황급하여 멀리 내다보지 못했으므로, 바르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녹공을 분수에 넘치게 하여 현저한 공을 세운 신하까지 흐리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를 탐욕의 길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 갈수록 울분이 더해 가니, 내게도 '함께 허물이 있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이 아프다. 내게는 고굉(股肱 : 다리와 팔, 즉 온몸), 이목(耳目)이 되는 어진 신하들이 원대한 계책으로 정성을 다해서 나를 깨우쳐 넘치는 과실을 징계하고 공리(功利 : 공명과 이익)의 근원을 막아서 의(義)를 이(利)로 삼아 국운을 장구하게 하려 하니, 어떻게 이를 따라 오래 묵은 때를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종은 조광조 등이 주장한 위훈 삭제 요구를 들어주면서 분노했다. 그는 이때부터 조광조를 제거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다가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광조가 임금이 되려고 한다는 파자) 사건이 일어나자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하여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정했다. 조광조가 하옥되자 성균관 유생들은 통곡하면서 대궐 문에까지 난입하여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조광조는 불과 38세의 젊은 나이에 능주로 귀양을 갔다가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사대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오로지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반 백성들까지도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지키게 하여 상례(喪禮)를 지키고 과부의 재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개혁정치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실패했으나, 학문을 하는 그의 올곧은 태도는 사대부들의 모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