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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 박지원(朴趾源)생년1737년(영조 13)몰년1805년(순조 5)자미중(美仲), 중미(仲美), 미재(美齋)호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冽上外史)본관반남(潘南)시호문도(文度)특기사항북학파(北學派) 실학자(實學者).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
燕巖集卷之一 潘南朴趾源美齋著 / 煙湘閣選本○記
咸陽郡學士樓記
咸陽郡治東距百武。臨城而樓凡幾楹。歲久荒頹。榱桷摧朽。丹雘昧䵝。上之十九年甲寅。郡守尹矦光碩。慨然捐廩。大興修治。悉復樓之舊觀。仍其古號曰學士。屬不佞爲文而記之。咸陽。新羅時爲天嶺郡。文昌矦崔致遠字孤雲。甞爲守天嶺而置樓者。葢已千年矣。天嶺民懷矦遺惠。至今號其樓曰學士者。稱其所履而志之也。初孤雲年十二。隨商舶入唐。僖宗乾符甲午。裴瓚榜及第。仕爲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淮南都統高騈奏爲從事。爲騈草檄召諸道兵討黃巢。巢得檄驚墜牀下。孤雲名遂震海內。唐書藝文志。有孤雲所著桂苑筆耕四卷。及光啓元年乙巳。充詔使東還。所謂巫峽重峯之歲。絲入中原。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者是也。國史孤雲棄官入伽倻山。一朝遺冠屨林中。不知所終。世遂以孤雲得道爲神仙。此非知孤雲也。孤雲甞上十事諫其主。主不能用。伽倻之於天嶺。不百里而近。則其超然遐擧者。豈非在郡時耶。嗟乎。孤雲立身天子之朝。而唐室方亂。斂跡父母之邦。而羅朝將訖。環顧天下。身無係著。如天末閒雲。倦住孤征。卷舒無心。則孤雲所以自命其字。而當時軒冕之榮。已屬腐鼠弊屣矣。乃後之人。猶戀其學士之啣。不幾乎病孤雲而累斯樓哉。然而郡人之慕孤雲者。不曰崔矦。而必號學士。不曰孤雲。而必稱其官。不頌于石而惟樓是名焉。不信其遺蛻林澤之間。而彷佛相遌于是樓之中。若夫月隱高桐。八牕玲瓏。則依然學士之步曲欄也。風動脩竹。一鶴寥廓。則怳然學士之咏高秋也。樓之所以名學士。其所由來者遠矣夫。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0
연암집 제1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함양군 학사루기(咸陽郡學士樓記)
함양군(咸陽郡)의 관청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백 걸음쯤 떨어져 성벽 가에 몇 칸짜리 누각이 하나 있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퇴락되어 서까래가 삭아 부러지고 단청은 새까맣게 되었다. 지금 임금 19년 갑인년(1794)에 군수인 윤광석(尹光碩)이 개연히 녹봉을 털어서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일으켜 누각의 옛 모습을 모조리 복구하고 옛 이름을 그대로 써서 ‘학사루(學士樓)’라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부탁하여 글월을 엮어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함양은 신라 시대에 천령군(天嶺郡)으로 불렸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은 자가 고운(孤雲)으로 일찍이 천령의 수령이 되어 이 누각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미 천 년이 지난 것이다. 천령의 백성들은 문창후가 끼친 은혜를 생각하여 지금도 그 누각을 학사루라 부르고 있으니, 이는 그가 이곳을 거쳐 갔음을 들어서 기념한 것이다.
처음 고운의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따라 당 나라에 들어가서 희종(僖宗) 건부(乾符) 갑오년(874)에 배찬(裴瓚)의 방(榜)에 급제하고 벼슬이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에 올랐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회남도통(淮南都統) 고변(高騈)이 황제에게 아뢰어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자, 고변을 위해 제도(諸道)의 군사를 소집하여 황소(黃巢)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지으니, 황소가 그 격문을 보고 놀라서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고운의 이름이 마침내 중국을 뒤흔들었다.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고운의 저술로 《계원필경(桂苑筆耕)》 4권이 있다고 되어 있다. 광계(光啓) 원년 을사년(885)에 당 나라에서 보내는 조사(詔使)의 일원이 되어 본국에 돌아왔으니, 이른바 “무협중봉(巫峽重峰)의 나이에 포의(布衣)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은하열수(銀河列宿)의 나이에 금의(錦衣)로 동국에 돌아왔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국사(國史)에 의하면 고운이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갔다가 하루아침에 관(冠)과 신을 숲 속에 벗어 버리고 훌쩍 떠나, 어디 가서 생을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 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고운이 도를 얻어 신선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이는 고운을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고운이 일찍이 열 가지 일을 상주하여 임금에게 간(諫)하였으나 임금이 능히 쓰지를 못했다. 가야산에서 천령군까지는 백 리가 못 되는 거리인즉, 그가 초연히 멀리 떠났다는 것은 어찌 이 고을에 있을 때가 아니겠는가.
슬프다! 고운이 천자의 조정에서 입신하였으나 당 나라가 그때 한창 어지러웠고, 이를 피해 부모의 나라로 돌아왔으나 신라 왕조가 장차 수명이 다해 가려 하였다. 그리하여 천하를 둘러보아도 몸을 붙일 데가 없는 것이 마치 하늘 끝에 한가한 구름이 게을리 머무르고 외로이 흘러가서 무심히 걷히락펴지락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스스로 자(字)를 외로운 구름이란 뜻의 ‘고운(孤雲)’이라 지은 것이며, 당시 벼슬살이의 부귀영화에 대해서는 이미 썩은 쥐나 헌신짝처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학사라는 직함에 연연하고 있으니, 아마도 고운을 욕보이고 이 누각에 누를 끼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운을 사모하는 고을 사람들은 그를 사후의 호칭인 최 문창후(崔文昌侯)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생전의 호칭인 학사(學士)라 불렀으며, 관직을 떠났을 때의 이름인 고운이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그의 관직을 불렀으며, 송덕비를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누각에다 이름을 붙였다. 이는 그가 산택(山澤)의 사이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관과 신을 남기고 사라져 신선이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이 누각 안에서 서로 만날 듯이 여겼기 때문이다. 예컨대 높은 오동나무에 달이 어른거리고 사방으로 트인 창문에 달빛이 영롱하면 마치 학사가 굽은 난간에서 거닐고 있는 듯이 여겼으며, 대숲이 바람에 흔들리고 한 마리의 학이 공중에 날면 흡사 학사가 하늘 드높은 가을을 시로 읊는 듯이 여겨 왔으니, 누각의 이름을 학사루(學士樓)라 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하겠도다.
[주-D001] 지금 임금 19년 갑인년(1794) : 정조 19년은 을묘년(1795)이고 갑인년은 정조 18년에 해당되므로 어느 한쪽에 오류가 있는 듯하다.[주-D002] 윤광석(尹光碩) : 1747~1799. 본관이 파평(坡平)이며, 병자호란 때 순절한 충헌공(忠憲公) 윤전(尹烇)의 후손으로 당색은 소론이었다. 《연암집》에 이 글을 포함하여 그의 부탁으로 지은 기(記) 2편과 그 밖에 주고받은 편지 2통이 실려 있다.[주-D003] 문창후(文昌侯) : 최치원은 고려 현종(顯宗) 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문창후란 시호를 받았다.[주-D004] 배찬(裴瓚)의 방(榜) : 당시 예부 시랑(禮部侍郞)인 배찬이 주관한 과거를 말한다.[주-D005] 《계원필경(桂苑筆耕)》 4권 : 실제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계원필경 이십권(桂苑筆耕二十卷)’으로 되어 있다.[주-D006] 무협중봉(巫峽重峰)의 …… 돌아왔다 : ‘무협중봉’이란 중국 장강삼협(長江三峽)의 하나인 무협의 대표적인 산 무산(巫山)의 12개 봉우리를 말하는 것이며, ‘은하열수’는 천체의 28개 별자리〔二十八宿〕를 말한다. 즉, 무협중봉의 나이는 최치원이 중국에 들어간 12세를 뜻하며, 은하열수의 나이는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온 28세를 뜻한다. 이 말은 《고운집(孤雲集)》 가승(家乘)에 보인다.[주-D007] 열 가지 …… 못했다 : 최치원이 894년에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린 일을 가리킨다.[주-D008] 신라 왕조 : 원문은 ‘羅朝’인데, ‘羅祚’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주-D009] 썩은 쥐 : 《장자》 추수(秋水)에, 혜자(惠子)가 양(梁) 나라의 재상이 되자 장자가 그를 만나러 갔다. 이 소식을 들은 혜자의 측근이 혜자에게 “장자가 오면 그대의 재상 자리를 달라고 할 것이오.”라고 귀뜸을 하자 혜자가 겁을 먹고 장자를 잡기 위해 사흘 밤낮 동안 나라 안을 수색하였다. 그러자 장자는 혜자를 만나 썩은 쥐의 우화를 들려주었다. 즉, 남방에 원추(鵷雛)라는 새가 있어 북해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그 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쉬지도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으며, ‘단술 같은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았다. 이때 소리개 한 마리가 썩은 쥐를 물고 있다가 마침 그 위를 날아가는 원추를 보고는 제가 가지고 있는 썩은 쥐를 빼앗길까 봐 꿱 소리를 질렀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썩은 쥐란 소인들은 귀중히 여기나 군자는 하찮게 여기는 관직을 가리킨다.[주-D010] 학사 :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한 직후 헌강왕(憲康王)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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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제1권 / 시(詩) 윤식(允植)이 고찰하건대, 선생께서는 어려서 시에 재능이 있었으나, 시가 무익하다고 여겨서 즐겨 짓지 않았다. 문집에 수록된 222수의 시는 대부분 약관 전후로 지은 것이고, 30세 이후로는 10년 동안에 한두 수를 짓기도 했으나, 56세 이후로는 다시 짓지 않았다.
〈강양죽지사〉 13수를 지어 천수재 이공의 부임길에 드리다 병서〔江陽竹枝詞十三首 拜別千秀齋李公之任 幷序〕
강양(江陽)은 지금의 합천군(陜川郡)으로 신라 때는 대량주(大良州), 일명 대야주(大倻州)인데 경덕왕(景德王)이 강양군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顯宗)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다가 즉위하자 지합주사(知陜州事)로 승격시켰고, 조선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 지금의 군명으로 고쳤다. 아마 옛날 가야국은 가야산이 동북쪽에 있어 나라의 진산(鎭山)이 되므로 그로 인해 국호를 삼은 듯하다.
맑고 시원한 열두 줄 가야금 / 泠泠一十二絃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12줄의 금(琴)을 만들어서 열두 달의 율을 상징하였다. 이에 악사에게 명하여 열두 곡을 만들게 하고, 가야금이라 명명하였다. 〈하림(河臨)〉과 〈눈죽(嫩竹)〉 두 곡조가 있어 모두 185곡이다. 지금 그 악기와 악부(樂府)가 남쪽 땅에서 더욱 성대하게 전해져 관기(官妓)들 중에 곡조를 이해하고 연주하는 자가 많다.
나는 금관가야의 옛 속음을 이해하네 / 我解金官古俚音
가야국은 일명 가락(駕洛)으로 금관(金官)이라고도 한다.
에워싼 계곡과 산은 태고시절 그대로인데 / 表裏溪山眞太古
호정(浩亭) 하륜(河崙)의 〈징심루기(澄心樓記)〉에 “안팎의 산천 경치가 높이 올라 굽어볼 만한 아름다움을 구비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누각은 군의 남쪽에 있다.
가실 이사금을 매우 그리워하네 / 長懷嘉悉尼師今
신라 유리왕(儒理王)이 즉위하려 할 때에 대보(大輔) 해탈(解脫)이 덕망이 높아 그에게 양위하고자 하였다. 이에 해탈이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 시험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리왕의 치아 자국이 더 많아 드디어 받들어 즉위시켰다. 나라 풍속에 이를 계기로 임금의 칭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 하였는데, 방언으로 치아를 이(尼), 자국을 금(今)이라 한다.
고운의 종적 외로운 구름과 같으나 / 孤雲蹤迹似孤雲
아직도 《당서 예문지》에 글이 실려 전하네 / 尙有書傳唐藝文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으로 신라인이다. 나이 12살에 상선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희종(僖宗) 건부(乾符) 갑오년(874)에 배찬(裴瓚)이 주관한 시험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이 되어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회남도통(淮南都統) 고변(高騈)이 황제에게 아뢰어 그를 종사관으로 삼자, 고변을 위해 격문을 지어 황소(黃巢)를 토벌하는 군대를 모았는데, 황소가 격문을 보고 놀라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그 뒤 조사(詔使)에 뽑혀 우리나라로 와서 십사(十事)를 올려 임금께 간하였는데, 그 속에 “곡령에 솔이 푸르고 계림엔 잎이 누르다.〔鵠嶺靑松, 鷄林黃葉.〕”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왕이 그를 미워하니, 이에 온 집안을 이끌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알지 못하였다. 고려 시대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는데,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실려 있다.
학사루 높이 솟은 천령군 / 學士樓高天嶺郡
승려들 아직도 옛 수령을 이야기하네 / 金魚猶說舊夫君
지금 함양(咸陽)은 신라 때 천령군(天嶺郡)이다. 문창후가 일찍이 이곳의 수령이 되어 누각을 건립하니, 지금까지 그 누각을 학사루(學士樓)라고 부른다. 왕고 연암공(燕巖公)께서 중수기를 지었다.
천 그루 긴 대나무에 촌마을도 담박하니 / 千竿脩竹淡村容
유사눌(柳思訥)의 〈강양시(江陽詩)〉에 “땅이 외져 마을 모습도 예스럽네〔地僻村容古.〕”라는 구절이 있다.
이끼는 새긴 시를 덮고 시냇물만 넘실대네 / 苔沒題詩逝水溶
해인사(海印寺)는 가야산 속에 있는데, 골짜기 이름은 홍류동(紅流洞)이다. 문창후가 바위에 쓴 시가 있으니, 그 시에 “첩첩한 돌 사이 미친 듯이 내뿜어 겹겹 봉우리에 울리니, 사람 말소리 지척에서도 분간키 어렵네. 항상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싸게 했네.〔狂噴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고 하였다. 후대 사람이 그 바위를 치원대(致遠臺)라고 불렀고, 학사대(學士臺)라고도 한다.
신선이 될 기약이 있는 듯하여 부질없이 슬피 바라보는데 / 若有佳期空悵望
진인이 떠난 후에 달만 봉우리에 머무네 / 眞人去後月留峯
가야산이 서쪽으로 뻗어 월류봉(月留峯)이 되었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이르기를 “돌 기세가 가팔라 사람이 이를 수 없는데, 늘 구름기운이 덮고 있다. 나무꾼이 때로 그 위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를 들었고, 절의 중들은 안개 속 산 위에서 수레와 말의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하곤 한다.”라고 하였다.
가야산 절반이 서리에 물들고 / 渲染伽倻一半霜
산 깊어 구름이 패다라 향기를 감싸네 / 山深雲擁貝多香
푸른 이끼엔 청학이 다닌 자취가 없고 / 莓苔靑鶴行無迹
단풍잎 흩날리는 독서당만 있네 / 紅葉繽紛讀書堂
세상에 전하기를 문창후가 하루아침에 관과 신발을 숲 속에 남겨두고 어디로 간지 알 수 없자, 해인사 중이 그 날마다 명복을 빌어주고 초상화를 그려 그가 독서하던 건물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강양땅에 가을이 되어 물결도 일지 않고 / 秋入江陽水不波
하늘 높이 석탑만이 깨끗하게 솟아 있네 / 凌空石塔皓嵯峨
온 숲의 가랑비는 홍류동 길을 적시는데 / 一林疏雨紅流路
누가 다시 소 타고 찾아가 도롱이 벗을까 / 誰復騎牛訪脫蓑
세상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보은(報恩)에 있는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 고을 수령인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이 자리를 함께하였다. 남명이 동주와 처음 인사를 나누고선 그를 놀리기를, “형은 내구관(耐久官 오래 벼슬하는 관리)이시군요.”라고 하였다. 이에 동주는 대곡을 가리키며 웃으면서 사과하기를 “바로 이 늙은이가 붙들어서 그렇게 되었지요. 그렇긴 하나 금년 팔월 보름에는 해인사에서 달이 뜨기를 기다릴 테니 형께서 오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명은 그러마고 약속하였다. 기약한 날이 되자 남명이 소를 타고 약속을 지키러 가다가 도중에 큰비를 만나 간신히 앞개울을 건너 절문에 들어서니, 동주는 벌써 누각에 올라 막 도롱이를 벗고 있었다. 조식과 두 성씨는 모두 징사(徵士)였다. 단릉처사(丹陵處士) 이윤영(李胤永)이 그린 〈해인탈사도(海印脫蓑圖)〉가 있다.
많고 많은 팔만대장경을 / 裒然八萬大藏經
긴 행랑에 두고 쇠 자물쇠 잠갔네 / 閣置長廊鎖鐵扃
나는 새도 깃들지 않고 먼지조차 없으니 / 飛鳥不棲塵不集
어찌 부처의 혼령이 가호함이 아니리오 / 呵噓豈是佛之靈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에 해인사를 창건했다. 그 뒤에 왕이 기이한 꿈에 느낌이 일자 염원을 발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팔만대장경을 구입하여 배로 실어오게 하였다. 이것을 판에 새기고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하였다. 120칸의 누각을 세워 보관하였는데, 천여 년이 되었어도 새것처럼 질서정연하였고, 지붕과 뜨락에는 새도 날아오지 않고 먼지도 끼지 않으며 낙엽도 떨어지지 않아 늘 물 뿌려 비질한 듯하다고 한다.
원융의 도포와 전립이 누각에 남으니 / 元戎袍笠留高閣
비바람 그치고 용이 돌아가자 구름에 자취 남았네 / 風雨龍歸雲有痕
하룻밤 솔바람에 승려의 꿈 깨어 / 一夜松風僧夢淺
철마가 산문을 오르는가 의심하네 / 却疑鐵馬上山門
해인사에 원융각(元戎閣)이 있어 이여송(李如松) 제독의 전립(戰笠)과 도포 및 그가 지은 시 1편을 보관하였다. 이는 명나라 신종 만력 임진년에 공이 왜적을 치러 조선에 와서 영남으로 군대를 진군했으므로 옷과 모자가 이곳에 남은 것이다.
쌓인 눈 녹아 속으로 물이 흐르는데 / 積雪初消暗水涓
무릉교 밖에 버들가지 아리땁네 / 武陵橋外柳嬋娟
무릉교(武陵橋)는 홍류동(紅流洞) 입구에 있는데, 점필재(佔畢齋)의 시에 “그림 같은 무지개다리 급한 물결에 비친다〔虹橋如畫蘸驚波.〕”라는 구절이 있다.
찬 연기 여린 풀에 청명이 가까우면 / 寒煙細草淸明近
태수가 풍속을 시찰하러 가야천을 건너리 / 太守觀風渡倻川
야천(倻川)은 야로현(冶爐縣)에 있다. 그 근원이 하나는 무릉교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거창군(居昌郡) 우두산(牛頭山)에서 나와 월광사(月光寺) 앞에서 합수되는데, 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많으며 산천이 평탄하고 넓어 살기에 좋다.
한가한 날 함벽당을 소요하면 / 暇日逍遙涵碧堂
함벽당(涵碧堂)은 남강(南江) 절벽 위에 있는데, 안진(安震)이 “처마는 날아갈 듯하고, 단청이 화려하게 빛나 마치 봉황이 공중에 나는 듯하다.”라고 기록하였다.
수령의 가슴도 푸른 물결처럼 맑으리 / 使君胸次映滄浪
음풍뢰와 자필암도 모두 이와 같으니 / 吟風泚筆渾如此
음풍뢰(吟風瀨)는 홍류동(紅流洞)에 있는데, 봉우리가 사방을 감싸고 성난 시내가 바람을 뿜어댄다. 자필암(泚筆巖)도 홍류동에 있는데, 거대한 돌이 시내에 놓여 숫돌처럼 매끄럽다.
일만 구멍에 서늘한 구름이 피어남을 앉아서 보리 / 坐見雲生萬竇涼
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이 일찍이 홍류동(紅流洞)을 유람하면서 “땅이 이러한데 이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며 드디어 홍류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시를 짓기를 “깎아지른 바위 천 장이나 장엄한데, 구름이 일만 구멍에서 나와 서늘하구나.〔鐵削千尋壯, 雲生萬竇涼.〕”라고 하였다.
옥산의 나직한 옛 궁궐터에 / 玉山低合舊宮墟
방초가 무성하고 연꽃이 그윽하네 / 芳艸萋萋暗水渠
서글퍼라, 대량군이 떠난 후로 / 惆悵大良君去後
수많은 반딧불만 가을 뜨락에 흩어졌네 / 剩多螢火散秋除
옥산(玉山)은 객관(客館) 서쪽 모퉁이의 작은 산인데, 고려 현종(顯宗)이 거처하던 곳으로 지금도 궁지(宮址)라고 부른다.
비석 찾아 반야사로 오니 / 尋碑般若寺中來
반야사(般若寺)는 가야산 아래에 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 원경화상비(元景和尙碑)가 있으니, 고려 추밀지주사(樞密知奏事) 김부일(金富佾)이 지은 것이다.
득검지 머리에서 검무를 추네 / 得劍池頭舞劍迴
해인사 북쪽 5리에 내원사(內院寺)가 있는데, 스님 옥명(玉明)이 절을 지으면서 연못을 파다가 옛날 검을 얻어 드디어 득검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피리 불며 황계폭포 속에 앉으니 / 吹笛黃溪瀑裏坐
황계폭(黃溪瀑)은 합천군 서쪽 30리에 있는데,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월광사 종소리에 골짜기 구름이 걷히네 / 月光鍾響洞雲開
월광사(月光寺)는 대가야 태자(大伽倻太子) 월광(月光)이 창건한 절로 이숭인(李崇仁)의 시가 있다.
춘사는 해마다 정견사에서 열려 / 春社年年正見祠
정견사(正見祠)는 해인사 안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로 대가야국 왕후 정견(正見)이 나중에 가야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석이정전(釋利貞傳)〉에는 가야산신 정견이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와 감응하여 대가야왕을 낳았다고 한다.
한 바탕 씨름판에 자웅을 겨루네 / 一場角戲賣雄雌
이 고장 풍속에 매년 사일(社日)에 모여 굿을 하고 씨름판을 연다.
돌아오는 길에 곱게 단장한 화상의 춤 / 歸途爭像和尙舞
달 그림자 비칠 때 긴 소매 너울거리네 / 長袖僛僛桂影時
내원사(內院寺)에 나월헌(蘿月軒)과 조현당(釣賢堂)이 있는데,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기록에 “해인사에서 몇 리를 가니 산은 더욱 험준하고 골짜기는 더욱 평탄하였다. 일찍이 듣자니 명장로(明長老)가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이곳에서 늙었다고 한다. 명장로는 시를 지을 수 있고 소라를 불기를 즐겼으므로 점필재공이 일찍이 나화상(螺和尙)이라 불렀다. 멀리 봉우리를 바라보니 푸른 연기 속에 절간이 보이기에 걸음을 재촉하여 올라가니 이곳은 나화상이 거처하던 곳으로 왼쪽 편액은 나월(蘿月)이고 오른쪽 편액은 조현(釣賢)이다. 나화상이 일찍이 〈나월독락가(蘿月獨樂歌)〉를 지어 밤낮으로 소라를 불며 노래하고 이어 춤을 추었는데, 까까머리 넓은 소매에 계수그림자가 너울거리니 참으로 호걸스런 승려이다.”라고 하였다. 민속에서 지금도 그 춤을 따라 추는데 화상무(和尙舞)라고 부른다.
아홉 절 세 누각에 장맛비 그치니 / 九刹三樓積雨收
야로현에 풍년 들어 술을 새로 거르네 / 冶爐秋熟酒新蒭
야로현(冶爐縣)은 합천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본래 신라 시대 적화현(赤火縣)으로 군의 속현으로 있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이씨(李氏)의 《택리지(擇里志)》에 “야로현의 논은 몹시 비옥하여 1말을 씨를 뿌려 1백 말을 수확하고, 물이 풍부해 가뭄을 모르고 또 목화를 심기에 가장 좋은 땅이므로 의식(衣食)이 풍부한 고장으론 가장 으뜸이라 칭한다. 동북쪽에 만수동(萬水洞)이 있는데, 깊고 그윽하여 은거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사또께서 오시는 날 권진을 노래하며 / 使君來日歌權軫
다스림의 교화가 대가야주에 거듭 새로우리 / 治化重新大倻州
권진(權軫)은 조선 사람으로 일찍이 이 고을을 맡아 훌륭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권진의 앞에 권진 없었고, 권진의 뒤에도 권진이 없으리.〔權軫之前無權軫, 權軫之後亦無權軫.〕”라고 하였다.
[주-D001] 강양죽지사(江陽竹枝詞) …… 드리다 : 환재의 나이 16세 때인 순조 22년(1822)에 합천 군수로 부임하는 천수재(千秀齋) 이노준(李魯俊, 1769~1849)을 송별하며 지은 민요풍의 시이다.[주-D002] 왕고 …… 지었다 : 《연암집(燕巖集)》 권1에 실린 〈함양군학사루기(咸陽郡學士樓記)〉를 가리킨다. 함양 관청 동쪽에 있던 퇴락한 학사루를 갑인년(1794)에 군수 윤광석(尹光碩)이 사재를 털어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연암에게 글을 부탁하자, 연암이 이에 학사루의 연원과 최치원의 행적을 소상하게 적었다.[주-D003] 패다라(貝多羅) : 옛날 인도에서 패다라나무 잎에 불경(佛經)을 썼으므로 곧 불경을 가리킨다.[주-D004] 비바람 …… 남았네 : 전란이 그치고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간 것을 가리킨다.[주-D005] 점필재(佔畢齋)의 …… 있다 : 점필재는 조선 전기의 시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이다. 인용된 구절은 《점필재집(佔畢齋集)》 권14에 실려 있는 〈무릉교(武陵橋)〉란 시의 첫 구절이다.[주-D006] 깎아지른 …… 서늘하구나〔鐵削千尋壯, 雲生萬竇涼.〕 : 인용된 시는 《사숙재집(私淑齋集)》 권1에 실린 〈세경진춘……(歲庚辰春……)〉이란 절구의 앞부분이다.[주-D007] 이숭인(李崇仁)의 시가 있다 : 《도은집(陶隱集)》 권2에 실린 〈월광사에 제하다[題月光寺]〉란 시를 가리킨다.
좋은 경치 만날 때면 이름을 써놓고 / 每逢佳處便書名
또 쌍계를 향해 지팡이를 짚는다오 / 又向雙溪杖屨行
들의 다리에는 손님 보내는 앞뒤의 그림자요 / 送客野橋前後影
소나무 걸상에는 염불하는 길고 짧은 소리로다 / 念經松榻短長聲
산천은 경개가 좋아 그림 속 풍경과 같고 / 山川地勝如圖畫
수목은 연륜이 쌓이며 절로 노성해졌네 / 樹木年深自老成
북으로 가면 언제나 다시 남으로 내려올까 / 北去何時更南下
이 경치 가장 마음에 어른거릴 줄 알겠네 / 懸知此景最關情[주-D008] 탁영(濯纓) …… 하였다 : 인용된 구절은 《탁영집(濯纓集)》 권3 〈조현당기(釣賢堂記)〉에 나오는데, 원전의 내용을 대폭 재구성하였다.[주-D009] 권진(權軫) : 1357~143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독수와(獨樹窩)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1377년(우왕3) 2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촉망을 받았다. 연해안 지방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자 의창 현령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제거해 선정을 폈고, 정종 대에는 문하부 직문하(直門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가 되었다. 청렴한 처신으로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벼슬이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