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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조선일보 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조련사 k
조련사K
- 한명원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심사평] 치밀한 관찰과 묘사… 섬뜩한 시적 투시력 보여
본심에 올라온 8명 응모자들의 작품을 읽고 선자들은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 본연의 길을 추구하는 시로서 시의 고전적 규범이라 할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3명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먼저 ‘창밖이 푸른곳’등 3편을 투고한 김은지의 경우 ‘뿔의 냄새’가 눈길을 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과거에 응모했던 동일 시를 계속 투고하고 있다는 점이 신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과 다른 두 편의 시적 사유도 평면적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조련사k’ 등 3편의 작품을 투고한 한명원의 경우 산문적 진술을 꾀하며 그 안에 극적 구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거슬리지만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응모자 중에서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을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불통을 어루만지다’외 3편을 투고한 정지우의 경우 시적 표현은 응모 시 중에서 가장 세련되어 보였지만 ‘뒷문의 형식’이나 ‘사춘기’와 같이 시를 거의 관념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두 선자는 당선작을 최종적으로 가리는 과정에서 유형화된 시적 틀에 갇힌 시라는 다소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관찰하는 한명원의 ‘조련사k’가 보여준 힘없는 맹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단단한 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의했다. 시라는 것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문정희·조정권 시인
◆ 2012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나의 고아원
나의 고아원
-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식탁에서
- 안미옥
내게는 얼마간의 압정이 필요하다. 벽지는 항상 흘러내리고 싶어 하고
점성이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냉장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문을 닫는 손으로.열리는 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옆집은 멀어질 수 없어서 옆집이 되었다. 벽을 밀고 들어가는 소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 위에서. 팔꿈치를 들고 밥을 먹는 얼굴들. 툭. 툭. 바둑을 놓듯
[신춘문예 2012]시 ‘나의 고아원’,‘식탁에서’ 심사평
.남다른 상상력 때묻지 않은 목소리
장석남(왼쪽) 장석주 씨
두 심사자가 예심에서 넘어온 16명의 시 80여 편을 각각 읽고 난 뒤 정지우의 ‘납작한 모자’, 김복희의 ‘매일 벌어지는 놀랄 만한 일’, 윤종욱의 ‘서툰 사람’, 김양태의 ‘흐르는 돌’, 종정순의 ‘알람들’, 조선수의 ‘분홍손’, 안미옥의 ‘나의 고아원’ 등을 당선작으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를 “어떤 것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그것을 읽기 쉽게 유지하는 몸짓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일 테다.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섞이고 스민다. 그렇게 상호 삼투하는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적 현존을 세우는 데 상상력이라는 화학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까닭이다.
두 심사자는 안미옥을 당선자로 세우는 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다만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두 작품 ‘나의 고아원’과 ‘식탁에서’를 골랐다.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렸다.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춘문예라는 통과의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더하게 한다. 험난한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린다.
장석주 시인, 장석남 시인
◆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물푸레 동면기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李如苑)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201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치밀한 묘사력·견인주의적 시각 돋보여
대개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전적으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은 꽃의 개화(開花)도 후에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읽히지 않는 시라고 하여 다 난해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가 난해하기는 해도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에서 상관관계를 보는 참신한 시각과 그에 따른 보편성의 획득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패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나가는 신인들의 미래 문법이 각축을 벌이는 축제의 장이다.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논의된 것은 이재흔의 '크라이오닉스', 이해존의 '유목의 방', 이여원의 '물푸레 동면기'와 '난청' 등 4편이었다. '크라이오닉스'는 발상이 참신하지만 언어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한 은유들이 더러 눈에 띈다. '유목의 방'은 말미의 비약이 아쉽다. 이 시는 고시원이라는 막막한 삶의 공간을 대초원이라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러나 말미의 ‘고시원 휴게실’과 앞에서 펼쳐낸 ‘몽골 사내’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 좀 더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시는 성립할 수 없다지만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능력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결국 이여원의 두 작품에서 하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이견 없이 합의했다. '물푸레 동면기'는 얼음물에 떠 있는 겨울의 물푸레나무를 치밀하게 묘사해가면서 서정시의 깊은 완성도를 보였다. 또한 '난청'은 사물을 포착하는 감성이 신선하다. 그만큼 두 작품 모두 각각 완성도와 참신성이라는 양측면에서 잘 빚어냈다. 그의 두 작품 중에서 '물푸레 동면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포리즘의 도움 없이 세밀하고 실제적인 묘사만으로 새롭게 열어 보이는 서정의 창출이 읽을수록 착착 감기는 감칠맛과 더불어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음물 속에서 동면하는 물푸레에서 견인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라는 성숙한 견자의 시각을 이끌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서정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한다.(도광의`박형준)
예심: 송종규`장하빈
◆ 2012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풍경 재봉사
풍경 재봉사
- 김민철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시 심사평
유행·시류 벗어난 우아한 아름다움 돋보여
예심을 거친 20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이해존의 ‘안락한 변화’, 유정용의 ‘IN 1914 네루다’, 안대근의 ‘샌드위치 인생’, 김민철의 ‘풍경 재봉사’ 등 4편이었다.
‘안락한 변화’와 ‘IN 1914 네루다’는 사실성이 두드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 전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되었다.
정말 좋은 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나친 모호성이 해석의 다양한 물꼬를 막았다.
‘샌드위치 인생’은 ‘벽돌의 무게를 짊어지는 사람의 등은 벽돌보다 벌겋지’라는 첫 행에서부터 개성적 면모가 두드러졌으나 결국 희망이 상실된 어두운 심상으로 시가 종결되고 말았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제목을 정하는 능력이 약했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므로 시 전체를 관류할 수 있는 제목이 요구되나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같은 시를 제목만 바꾸어 중복 투고해 성실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풍경 재봉사’는 신선하고 아름답다. 유행과 시류에서 벗어난 점이 무엇보다 장점이다.
호수에 떨어지는 장맛비를 풍경 재봉사로 인식하는 형상화 과정 하나하나가 자상하고 섬세하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시가 근래 들어 잃고 있는 부분이다. 바로 이 아름다움이 앞으로 이 시인의 큰 덕목이 될 것이다.
- 심사위원 황동규·정호승
◆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월면 체굴기
월면 채굴기
-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신춘문예/시] '월면 채굴기' 심사평"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과 '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와 '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 2012 전북 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철새를 만나다
철새를 만나다
- 홍철기
문득
뭇별들의 제자리걸음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 밤
안개 속 방파제는
육지로 난 길 인양
어서 나아가 보라며
건너가 보라며 나를 부르는데
엉겨 붙어 나를 말리는 바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일 때
빈 껍질만 남아 뒹구는 희망
피난민처럼 몰려왔다
이젠 떠나고 싶은데
갈 곳이 없는지 멍자국 같은 사연
하나 둘 모여 불을 밝히고
마을을 이루고 그래서 한세상
어우러진 잡풀처럼 흔들릴 때
알고 있었다 저마다 소금에 저린
마음 한 다발씩 묶어 쌓아두고 있음을
맨 정신에 타오르지도 못했던
마음 불쏘시개 삼아
한 잔 두 잔 마신 술에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고 끝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다 고꾸라지며
살 아 야 하 나
이어지지 못하고 부서져 되돌아가 버리는 말
담뱃재 떨듯 매일같이 칭얼대는
희망쯤이야 쉬이 떨어내면 그만이라고
말보다 먼저 떠난 파도가
다한 힘으로 와 쓰러질 때.
저기 저 봉두난발한 바닷바람
사이 위태위태하게 날아가는
철새 한 마리
< 심사평 >
시는 궁극적으로 삶 혹은 체험의 기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는 언어예술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 언어예술성을 담지한 체험의 진솔성이 기본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격을 갖춘 작품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에 비해 감동의 진폭이 남달라야 한다.
곡진한 정서가 튼실한 시적 형상화를 이루고 있어 선자의 손에 최종까지 남은 분들은 홍철기 ‘철새를 만나다’ 김은실 ‘겨울, 민원을 내다’, 임복금 ‘갈대숲에서’, 노원숙 ‘소라보 당신’ 이근영 ‘고추말리기’였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생의 갈피에서 길어 올린 투명하고 절절한 정서를 언어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 하였다. 그러나 김은실과 임복금의 작품은 몇몇 군데에서 노출되는 불투명한 표현 때문에, 노원숙과 이근영의 작품은 안이하고 상식적인 표현 때문에 시적 긴장감이 이완되고 있다. 홍철기는 같이 응모한 ‘금일도’의 작품도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났다.
특히 철새를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철새를 만나다’ 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선명한 묘사력, 구조적 안정감과 더불어 유려한 리듬감을 확보한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철새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 양병호 시인 / 전북대 인문대학장
◆ 2012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시조…암자에 홀로 앉아
암자에 홀로 앉아
- 박상주
날 좀 때려주오
천년고찰 범종 치듯
안으로
다져놓은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
빈 골짜
다 쏟아 붓고
나비 되어 가련다
■ 시.시조 심사평 (고은 시인)청각.시각 대비 살려낸 ‘묘경1'
‘보시(1)-지렁이’의 담담한 고백체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눈물자국’도 덜 설명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제쳐두기 아까웠다. ‘회화나무’의 단단한 솜씨도 그랬다. ‘나를 흔드는 기억들’도 일상의 신산스러움을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다.이런 작품들을 지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세 작품이 시부분 ‘세월에 告함’ ‘분원의 강덴 노을의 소각장이 있다’와 시조부문 ‘암자에 홀로 앉아’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각각 다른 몇편과 함께 보내온 것이어서 그것들을 읽는 동안 그 실력의 속내가 밝혀지는 경험을 했다.결국 시조부문 ‘암자에 홀로 앉아’를 당선작으로 삼았다.
당선작 시조는 종소리와 ‘청태눈물’이라는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을 이루었다. 다만 ‘때려라’라는 거센 표현이 산사 환경을 작위적이게 했다. 하지만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 아쉽게 된 시쪽은 중후한 음조 위에 참신한 언어구사를 한 작품이다. 그러나 한두군데의 휴지부가 거슬리는 현학취미를 자아내고 말았다.
편집국 벗들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면전에 사절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 심사를 맡았다. 바야흐로 흑룡의 새해 <불교신문> 창간시대의 인연을 떠올리며 낯선 선자가 되어 보았다.낙선의 작자들은 더 연마하기 바라고 당선자는 이번의 수준을 뛰어넘는 내일을 지향하기 바란다. 산중이 진언 ‘향상일로(向上一路)’가 왜 있겠는가.
◆ 2012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시…최호빈 그늘들의 초상
외팔이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는 하얀 레코드판 위로 한 아이가 돌면 걸음마다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오선지에 적힌 외팔이의 과거를 한 페이지씩 뒤로 넘기면 검게 변해버리는 장미, 같은 자리를 다시 지날 때 멈추는 음악, 검은 장미의 정원 줄이 끊어진 듯 문은 닫히고 검은 레코드판 위로 한 줌의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는 갯빛 음악이 무책임한 허공을 읽는다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십시오
안내 방송이 끝나기 전 먼저 도착한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
태어나자마자 걸친 인간의 가죽이 낯설어서 울면 목에서 흘러나오는 짐승의 잡음을 따라 다른 영아들도 울었다
우는 자에게 위안은 더 우는 자를 보는 것 전생과 후생 사이를 감지하는 나의 두개골은 밀봉되기를 거부했고 뒤늦게 나타난 간호사가 기껏 흘린 피를 지워주었다 차지해야 할 자리를 잡지 못한 오감의 무중력 속 나는 갈라진 틈의 눈으로 울다가 낯선 요람에서 잠을 깨기도 했다
울음마저 피곤하게 느낄 때 내게 열리는 것
보일 듯 말듯 소중해지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움직인다
기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말없이 싸운다
젖은 옷을 입은 채 나를 말리기 위해
회의적인 귀를 바닥에 대면
잠든 나에게 속삭이는 누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진 못한 소식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움푹해진 순간으로 흘러든다
예전의 마른 상태로 돌아가는 소매
팔보다 긴 그림자를 흔드는 소매
나조차 없는 느낌의 눈 속엔 아무도 없는데
속삭임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 내 귓속엔 하루를 순환하는 입이 살고 있다
[2012 경향 신춘문예]소설 심사평
-“주제 장악하는 힘, 꾸밈 없는 인물과 주제 탐구 돋보여” 황석영·최인석 소설가
소설에서 장식적인 요소는 언제나 작가 자신에게 재앙이다. 많을수록 더 큰 재앙이 된다. 더구나 삶과 인간에 대한 탐구가 결여된 채로 꾸미는 데 열중하는 것은 아주 좋지 않은 습관이다. 멋을 부린 문장이나 부적절한 비유 같은 것으로 생각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본심에 오른 스물세 편 가운데에는 상식적 수준에서 시작되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로 끝나고 마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이국적 배경이나 소재를 끌어들인 작품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파쿠르’ ‘출구’ ‘방’이었다. 각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어떤 점은 새롭고 어떤 점은 낯익었다. 야마카시(고층건물 사이를 옮겨다니는 익스트림 스포츠)나 디스토피아, 실직과 해고 같은 이야기들, 영화를 통해 소설을 통해 무척 자주 마주치게 되는 소재다. 그것을 통해 어떻게 작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는가, 그 지점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드러났다.
◆ 2012 세계일보 당선작/ 시…역을 놓치다
역을 놓치다
-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 2012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저무는, 집/여성민
저무는, 집 - 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서울신문 2012 신춘문예] 시 심사평
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뤄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사건이 있고,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사건이 있고, 시에서는 말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말의 풍경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대로 지평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서 받은 스물세 분의 시는 오랜만에 우리 시의 지형 깊은 계곡으로 우리를 놀게 하고,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며 드넓은 바다에서 서 있게도 하는 행복한 경험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타고 세 분의 시를 골랐다. 일일이 짧은 감상을 달고 토론을 거쳐 힘들게 또는 아쉽게 손에서 터는 작업을 거쳐 남은 세 편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시 부러 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딴 얘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토론에 들어가 최호빈의 ‘고민의 탄생’, 김미영의 ‘상자’, 여성민의 ‘저무는 집’을 골랐다.
최호빈의 시는 시상을 치밀히 전개해 나가며 이미지를 구상화시키는 솜씨가 일단 돋보였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서 다년간 습작을 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미영의 시는 우리 삶의 비루한 것들을 보듬어 소중한 꽃을 피워 내는, 애정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따뜻함이 편편에서 맡아졌다.
아무리 시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시라 할지라도 자기의 바깥을 보는 이런 시선은 이 즈음에는 꽤나 귀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향기는 더 짙었다.
그러나 최호빈의 시는 숲이 울창한 만큼 베어 낼 나무들이 꽤 있었다는 점에서, 김미영의 시는 아직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여성민의 시는 반복되는 말과 말로 공간을 이루고 거기에 막연과 아연의 풍경들을 자리하게 해, 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었다. 좋았다. 축하한다.
◆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2012 신춘문예-시] 심사평 "새로운 어법 통한 도전의식 돋봬"
본심에 오른 것은 총 6편이다. 최은묵의 '알', 권동지의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 권수진의 '과메기', 이주상의 '편두통',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허영둘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등이다. 이들은 수준에 올라 당선작으로 하여도 무방한 느낌이 들었다.
'알'은 발상이 참신해 눈이 갔으나 아직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가 제기됐다. '과메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바다에 비유해 전개한 참신성이 돋보이나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흠으로 지적됐다. '편두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번득이는 표현으로 포착한 점은 놀라우나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이 문제로 언급됐다.
그리하여 '시미즈 터널'과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이 종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미즈 터널'은 쓸쓸한 삶의 내면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한 점이 장점으로 두드러졌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어 신춘문예로서 가지는 발전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도전의식이 엿보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의 참신성도 갖춰 당선작으로 확정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종해·천양희·김경복
◆ 2012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시…얼룩진 벽지
얼룩진 벽지
-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2012 신춘문예] 시 심사평
절제의 미학과 따뜻한 응시로 잘 표현
늦게 담은 동치미는 익지 않았고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에서 보내온 김장김치도 아직 맛이 들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밖에 내놓은 김치 역시 설익었다. 먹기에 마땅치 않다.
금방 담은 김치는 배추의 고소하고 싱싱한 맛과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싱그러움으로 먹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을 잃게 된다. 양념이 고루 배고 익어서 맛이 든 김치가 밥상에 오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포기 남아있지 않은 묵은 김치를 꺼낸다. 역시 이 맛이야.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막 버무린 김치와 같다면 오래 묵어 양념들이 고루 배고 맛이 든 김치, 그러나 배추의 처음 싱싱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아삭아삭거리는 김장김치는 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종심으로 올라온 두 작품은 '얼룩진 벽지'와 '보도블록'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은 신선한 시선이 돋보였음에도 이를 받쳐줄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얼룩진 벽지'는 김치와 같았다. 푸른 배추의 싱싱함을 가진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절제의 미학과 '동거'와 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깊고 따뜻한 응시를 가진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즐겁게 당선작에 올려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곶감들이 잘 마르고 있다. 곶감은 제 몸의 수분을 햇빛과 바람 앞에 알몸으로 온통 내놓고 말라갔을 때 그 속에 비로소 떫은맛이 변하여 달고 붉은 속살을 갖게 된다.
이제 파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인이 헤쳐 나갈 험난한 여정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시인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정신으로 나는 그 표현을 읽었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어보는 정도 말이다.
심사위원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이상 시인)
[2012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조장/오기석
히말라야는 죽은 자의 무덤이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그 무덤이 우뚝우뚝 선다
나는 오직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한다
치켜뜨고 고원을 배회하는 그 눈과 내 눈이 부딪칠 때
히말라야는 죽은 자가 산자를 배웅하는
묵직한 항구다
길은 벌써 하늘로 뚫어져 덩그렇게 허공에 매달렸는데
지금 막 망자의 검은 눈을 독수리가 정 조준한다
이곳의 주인은
고원을 만들었다 무너뜨리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타고 독수리는 날아들고 또 그렇게 떠난다
남은 것은 바람의 길을 따라 나는 망자의 영혼 뿐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발톱 따윈 쓸모없다
그저 살점을 움켜쥐고 뜯을 수 있는 부리만 튼튼하면 된다
상주도 조문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목숨은 이미 독수리가 움켜쥐고 있다
그 다음 순서는
모두 바람의 지시에 따라 시간이 알아 할 몫이다
장례의식이 끝나고 죽어서 다시 돌아 올 그 산을 내려간다
이제 남은 것은 망자의 시신과 천장사* 뿐이다
천장사가 도끼로 시신을 난도질한다
그러곤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에게 살점을 던진다
덥숙덥숙 받아먹는 독수리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
*히말라야 고원지대 장례에서 시체의 사지를 분해하여 새에게 던져주는 사람.
△1946년 보은 출생.
△전 음성우체국장.
△저서 ‘운율이 흐르는 수상록’
△청주시 흥덕구 사직2동 푸르지오캐슬아파트 402동 1506호. ☏043-266-3433, 016-9597-3433.
당선소감 / 세상을 향해 외칠 시가 있어 행복
나의 그리움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회초리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회초리로 나의 종아리에 아픔을 남기겠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내 사랑의 시를 외치고 싶다.
하늘에 초롱초롱 박힌 별처럼 속삭이고 싶다. 그 속삭임 같은 시를 밤이 새도록 쓰고 싶다.
형광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웃거리는 나의 고즈넉한 서재, 그 곳에는 내 얼이 비단결 같은 시어로 촘촘히 짜여 있다. 늑골을 박차고 쏟아지는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하여 씨줄과 날줄이 베틀 위에서 찰칵 거린다. 이것이 바로 내 열정이다.
아직 첫눈의 추억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쉬지 않고 썼다가 찢어버린 원고지의 구겨진 조각처럼 창밖엔 하얀 눈발이 띄엄띄엄 내린다.
시간이 저만치서 엉거주춤 거릴 때, 나의 기쁨은 어느새 눈물의 진주가 되어 벌써 내 시를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하고 외투의 깃을 세우고 포도를 총총히 걸으며 출렁대는 사람과 사람의 뜨거운 입김을 사랑 한다.
사랑이 거기 있기에 오늘의 영광이 더 보람 있고 행복하다.
그동안 부족한 나를 지도하고 격려해 주신 청주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임승빈 교수님과 문우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덜 익은 글을 덥석 끌어 안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허공을 헤집고 내 이름을 찾아 불러주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정말 감사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싶다.
끝으로 충청지역을 뛰어넘어 우리 한반도 한 복판에서 지역사회 문화 발전에 선구자로 앞서가는 동양일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 한다.
심사평 /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언어감각 돋보여
응모작(356편)들이 예년(421편)보다 적지만 작품 수준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들이 난무하고 난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고뇌)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품으로는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 김소현의 ‘칼’,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와,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이다.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란 작품에서 아무르강의 겨울은 바람이 누워있던 자리에 서서히 결빙이 시작되고 굶주린 야성의 울음소리 속으로 늑대사냥의 시작은 생사를 가르는 고단한 생의 애환 속에서 벌이는 생존의 속성을 확인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김소현의 ‘칼’이란 작품은 칼을 갈아 냉동고기를 썰 때마다 아들(작자)은 먼 잠 속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네 아버지는 개다’란 어머니의 버릇처럼 외치던 말을 상기한다. 썰리는 고기 속에 손을 넣어 어머니를 만져보고 싶은 충동, 도축장의 소의 혀를 씹으며 짐승의 울음흉내와 겨냥할 수 없는 거리(칼)을 겨냥하는 산자의 일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에선 오랫동안 묵혀둔 아버지의 문서를 정리하다 생존 시 외면했던 아버지의 삶을 아무 가책 없이 허물다 그리움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읽어내고 있다.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은 네팔의 중턱 히말라야에서 성행되고 있는 조장(鳥葬)이란 전래적 장례를 통하여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하며 시신을 주거지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해체하여 독수리에게 먹이는 장례이다.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는 이미지 포착이 돋보인다.
앞으로 시작활동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탈관념의 사물시 쓰기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 시단에 큰 재목으로 대성하기를 바라며 오기석의 ‘조장’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심사위원 : 정연덕(시인)
[201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온 몸이 글썽거린다 아득한 바다냄새
어쩌면 이 신열은 오래 전의 길 하나 열어줄지도 몰라
세상은 바다가 낳은 미지근한 비망록일거라고
아니, 그 비망록이 낙서들의 끝에 부려놓은 삽화일거라고
네가 나른한 힘을 얘기했던 곳으로
지금 나는 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너의 힘을 빌려 나에게 이르지 못할 때마다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가 아닌
방금 전 내 몸의 한 모퉁이로 들어오던
링거액 같은 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잠깐의 외출로
조회할 수 있는 너를 믿지 않지
너의 웃음이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조난의 느낌 하나만으로
바람을 이끌고 오고 폭풍을 이끌고 와
끝내 범선 같은 고백을 숨겼던 것처럼
나 지금도 먼 옛날의 너를 믿지 않아
기억이란 몇 방울의 망각으로 걸어나갔던
오랜 신열의 발자국들
어디선가 때 이른 저뭄이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 친 것도
네가 나로부터 멀어지던 형식이었음을 기억하는 한 순간
내 통증의 한 쪽에서 고개를 드는 현실 하나
나는 잠시 링거액 건너편에 기대어 놓았던 목발을 챙겨
너의 바다가 보일 것 같은 창가로 절룩절룩 걸음을 옮긴다
[당선소감-치열한 삶의 일부가 시로 흘러
기억의 모퉁이를 돌고 있는 쪽배하나, 포구로 튕겨져나간 조각들, 내 몸 속에서 떠다니며 글썽거리는 흔적들. 이 모두는 긴 겨울의 초입에서 거두지 못했던 시의 자리들이었다.
묵혀 놓았던 시들은 혼자 서러워했을까. 오랫동안 신열을 앓다가 만성이 된 구석진 자리의 염증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불혹을 넘긴 오후에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를 버려야 했다. 그리곤 병실에서 다시 바다를 꺼내야했다.
시대가 고통이었지만 어머니는 통증을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셨고, 아버지는 즐기는 법을 아셨다. 어쩌면 그 분들의 족적이 내게로 이어져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켠에 깃든 통증이 치열한 삶의 일부가 되어 시로 흐르고 있는지도. 가만히 더듬어보면 내 속에 흐르는 몇 겁에 걸친 흔적과 기억들이 내가 기억되는 나보다 훨씬 거대한 것 같다.
봄이 멀리 돌아 앉아 있었지만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창으로 들어온 달빛 때문이었다. 달빛은 우주였고 친구였고 가족이자 스승이었다.
나의 인생을 빚어준 이케다 선생님, 시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해준 손택수 시인, 그리고 차령문학의 박경원 선생님, 온머리 송봉헌 선생님, 오래전 시의 길을 열어준 황금찬 선생님, 최두석 선생님, 문학세계와 영등포문인협회, 부족한 나의 곁에 있어준 현웅, 지원, 승민, 영미, 성남, 정한 모두에게 마음껏 감사하고 싶은 밤이다. 마지막으로 한라일보사에 감사드리며 심사위원님에게도 깊은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1970년 부산 출생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형식적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
작품보다 작품 속의 영혼이 먼저 들여다보여서 감상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가 있다.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선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토록 다른 4인 4색의 영혼과 그 시력(詩歷)은. 고심하며 읽은 작품은 최재우의 '간이역', 김현의 '겨울의 안쪽', 황경철의 '공포의 기록',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였다.
'간이역'에서 최재우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숙함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골대합실", "소달구지", "보따리"와 같은 소재를 통해 드러나듯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정겹다. 그러나 그는 그리 길지 않은 시력의 한계 또한 노정시키고 있다. '간이역'에서의 돌연한 장면 전환이나, 그의 다른 시 '포구'에서 드러나는 이미지 분절 등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의 '겨울의 안쪽'은 세밑에 꼬옥 끌어안고 싶은 시이다. 서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능력은, 차고 낯설게 만연하는 시들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사적일수록 정제된 호흡과 리듬감을 견지해야 하는 법, 몇 군데 군더더기가 눈에 띈다. 따뜻하지만 너무 잔잔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황경철의 시들은 미숙하고 거칠지만 패기가 있다. 다만 추상적인 대상을 추상적으로 풀어내는 일이 그에게는 힘에 부친 듯하다. 자폐적으로 분산된 이미지들이 제어되지 못한 채 범람하고 있다. 시가 아물 수 있도록 그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깊어진 상처가 그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는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의 색채가 부족하고 소품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약점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의 시들은 작품들간의 격차가 드러나서 기우를 갖게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는 어려웠다. 모쪼록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나갔으면 한다. 숙련된 자의 출발점은 지금 다시 놓여져야 한다.
[2012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철새를 만나다/홍철기
문득
뭇별들의 제자리걸음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 밤
안개 속 방파제는
육지로 난 길 인양
어서 나아가 보라며
건너가 보라며 나를 부르는데
엉겨 붙어 나를 말리는 바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일 때
빈 껍질만 남아 뒹구는 희망
피난민처럼 몰려왔다
이젠 떠나고 싶은데
갈 곳이 없는지 멍자국 같은 사연
하나 둘 모여 불을 밝히고
마을을 이루고 그래서 한세상
어우러진 잡풀처럼 흔들릴 때
알고 있었다 저마다 소금에 저린
마음 한 다발씩 묶어 쌓아두고 있음을
맨 정신에 타오르지도 못했던
마음 불쏘시개 삼아
한 잔 두 잔 마신 술에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고 끝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다 고꾸라지며
살 아 야 하 나
이어지지 못하고 부서져 되돌아가 버리는 말
담뱃재 떨듯 매일같이 칭얼대는
희망쯤이야 쉬이 떨어내면 그만이라고
말보다 먼저 떠난 파도가
다한 힘으로 와 쓰러질 때.
저기 저 봉두난발한 바닷바람
사이 위태위태하게 날아가는
철새 한 마리
당선소감-마음의 강 건너는 세상의 시 쓸 터
강을 따라 걷는 사람은 결코 강을 건널 수 없다는 말. 언제나 마음은 강 건너에 있지만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해 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제겐 문학이 그랬고, 시를 쓴다는 것이 그랬습니다. 그런 제가 이제 강을 건너려 합니다. 세상에 시를 써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문학이 따뜻한 밥 한 공기임을, 시가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게 해주는 친구임을 알게 해주고 싶다면 과한 욕심일까요? 그래도 이제 시작했으니 반은 해놓았다고 등을 토닥여 주실거라 믿습니다. 부족한 제 시가 세상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전북도민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대학시절 시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해주신 원광대 정영길교수님, 백제예술대 김동수교수님, 살면서 언제나 문학과 함께 하라고 조언해주신 대진대 서범석교수님, 이병헌교수님 모두 감사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오늘은 맘껏 해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누나가족들, 그리고 당신이 북극이라면 난 북극에서만 살고 싶은 북극곰이 될테니 결혼해달라는 제 말에 웃으면서 결혼해준 내 아내 탁경화, 그리고 우리아들 홍연후, 뱃속의 다복이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언제나 바쁘지만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는 군산시 수송동주민센터 직원과 군산시 사회복지공무원 모두 2012년 행복했으면 합니다.
< 심사평 >
시는 궁극적으로 삶 혹은 체험의 기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는 언어예술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 언어예술성을 담지한 체험의 진솔성이 기본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격을 갖춘 작품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에 비해 감동의 진폭이 남달라야 한다.
곡진한 정서가 튼실한 시적 형상화를 이루고 있어 선자의 손에 최종까지 남은 분들은 홍철기 ‘철새를 만나다’ 김은실 ‘겨울, 민원을 내다’, 임복금 ‘갈대숲에서’, 노원숙 ‘소라보 당신’ 이근영 ‘고추말리기’였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생의 갈피에서 길어 올린 투명하고 절절한 정서를 언어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 하였다. 그러나 김은실과 임복금의 작품은 몇몇 군데에서 노출되는 불투명한 표현 때문에, 노원숙과 이근영의 작품은 안이하고 상식적인 표현 때문에 시적 긴장감이 이완되고 있다. 홍철기는 같이 응모한 ‘금일도’의 작품도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났다.
특히 철새를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철새를 만나다’ 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선명한 묘사력, 구조적 안정감과 더불어 유려한 리듬감을 확보한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철새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양병호 시인 / 전북대 인문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