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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8일 자그레브한인교회 주일예배
요한복음 2:4-11
“잔치의 주인, 예수님”
서론
영국의 한 목사님이 한 동안 교회에 뜸한 노인이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심방을 가서 그 노인과 대화를 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노인은 고개를 돌리고 누워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더랍니다. 집안을 좀 살피다보니, 그 집은 난방이 되지 않고, 먹을 것도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돌아가면서 그 집에 고기 두 덩이를 배달시켰습니다. 다음에 심방을 갔더니 그 노인이 전보다 좀 다정해졌습니다. 그 날도 고기 두 덩이를 배달시켰습니다. 다음에 심방을 갔더니 이제는 마음 속 이야기도 하고,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그 목사님은 타 지역으로 부흥회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틈에 그 노인이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 노인이 목사님께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전해주시오. 젊은 목사 양반, 나는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오. 그런데 그거 아시오? 그렇게 완고하고 꽉 막혔던 나를 변화시킨 것은 당신의 설교가 아니라 그 고기 두 덩이였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노인은 과연 목사의 설교보다 고기가 더 좋았을까 과연 그게 더 좋았을까 그 고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났을까? 아마도 그 노인은 그 목사님의 설교도 좋았을 것입니다. 단지 이전의 목사님들은 설교만 했었다면 이 목사님은 마음으로 정말 안타까워하며 복음을 전했다는 차이일 것입니다. 그 노인의 삶을 돌아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고기에 담아서 표현하였고, 그 노인의 가슴에 와 닿은 것은 고기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보게 하기위해서 고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을 잠시 나누겠습니다.
배경
이스라엘의 잔치 집에 꼭 필요한 것이 포도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의 혼인잔치는 한 가문이 치러야할 실로 대단한 축제였습니다. 이 축제를 보다 더 성대하고 규모 있고 짜임새 있게 치르기 위해 연회장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오늘 말씀도 혼인잔치를 총 관장하는 연회장이 있습니다. 잔치를 잘 치르려고 당시에 아주 유명한 혼인잔치 전문 MC까지 초빙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면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라 비밀리에 신속히 조치를 취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밀스럽고 중요한 일을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알게 됩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마리아가 그 잔치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제자들까지 초청받은 것이나,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으로 보아 인척관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리아와 예수님은 이 혼인잔치의 중심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범함을 알고 있던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립니다. 그 말에 예수님의 대답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입니다. 어머니의 걱정과 권면을 무색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대답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지시대로 할 것을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하인들에게 할 일을 지시합니다. 그것은 두 세통 드는 돌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을 연회장과 하객들에게 가져다주게 합니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로 변한 그 기적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두 가지만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본론
① 먼저 예수님은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결혼식이 있어서 전라도 광주나 전주로 가본 적이 있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얼마나 성대하게 차렸는지 과연 남도 음식이구나 싶었습니다. 음식 드시는 분들이 유독 찾는 게 있는데 바로 홍어였습니다. 홍어 없으면 잔치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남도 잔치에는 홍어가 꼭 있어야 되듯이 이스라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꼭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것이 그 지방의 문화이고 풍습입니다. 혼인잔치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수님은 꼭 필요한 그것을 채워주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채우는 방법에 있어서는 사람의 기대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필요한 곳에 포도주를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질병이 있는 곳에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고, 가난이 있는 곳에 부요함이 필요하고, 깨어진 관계 속에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방법대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필요가 정말 우리에게 유익한 것일까요? 때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신대원 입시를 다섯 번이나 본 분이 있습니다. 왜 다섯 번을 보았을까요? 4번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성경의 지식에 있어서는 최고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어 점수가 신통치 않아서 그런지 늘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분은 낙방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과연 목회의 길이 내 길이 맞는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절이 지나고 5년 만에 신대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신대원에 입학하고서는 성경 박사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남에게 강의를 할 정도로 성경을 꿰뚫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도 성경 강의하는 것이 주특기가 되어서 성경공부도 얼마나 잘 인도하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그렇게 말합니다. 5년 동안 성경을 봤으니 1-2년 성경 본 사람보다 더 잘 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기대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나에게 부어주십니다.
포도주가 필요한 곳에 맹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맹물로 뭘하라는 말입니까? 여기는 지금 잔치자리란 말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 맹물이 포도주가 됩니다. 꼭 필요한 것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신 그 상황이 나에게는 꼭 필요한 상황이고 그 상황이 하나님의 최고의 응답인 줄 믿습니다.
② 예수님은 죄에 묶여 있는 인생을 잔치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돌 항아리라고 하면 아마도 값비싼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돌을 깎아서 항아리 모양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은 그 돌 항아리를 귀한 용도로 씁니다. 그 용도는 유대인의 정결예식입니다. 유대인의 정결예식이라는 것은 구약 율법이 정한 정결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외출하고 들어오거나 손님을 맞아들이거나 화목제를 함께 나누거나 하면 반드시 돌항아리에 있는 물을 떠다가 씻었습니다.
그 집에는 그런 돌항아리가 6개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물을 담아둘 수 있었는데 아마도 그 집 사람들은 구약 율법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거나, 그 율법을 제대로 지켜보겠다는 의지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돌항아리가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그 항아리가 비어있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비어야 채우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굳이 순종한다면 이 돌항아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지 않아도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는 분)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단지 잔치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주어야겠다 생각하셨습니다.
돌항아리는 구약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은 모든 유대인들이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최소한의 기준인 정결예식 정도는 행하면서 살아야지 합니다. 그래서 집에 항아리를 준비해둡니다. 그리고 이 율법대로만 살면 나도 하나님께서 복주시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항아리는 비어있습니다. 구약율법은 비어진 항아리처럼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삶에 족쇄가 됩니다.
예수님은 비어있는 항아리와 같은 무능한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단순하고도 확실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결예식에 쓰는 거룩한 항아리를 술독으로 만드십니다. 포도주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빈 항아리가 새 포도주로 채워지듯이 이제는 구약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복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복음으로 잔치를 벌이게 하십니다. 질이 떨어지는 저급한 포도주가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포도주, 전혀 맛본 적이 없는 포도주로 우리를 즐겁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잔치에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과거의 죄악된 삶에 얽매어있는 인생을 잔치의 자리에 초대하셔서 행복하고 능력 있게 하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에 우리는 맘껏 취할 수 있습니다.
결론
다원적인 사회에 살다보니 많은 신들이 있는데 유독 기독교만이 한분 하나님을 주장하느냐는 질문을 숱하게 받습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이에 대한 대답을 줍니다. 그는 800만의 일본 신들을 신심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신들은 대개 한두 가지 금기가 있다. 신들에 따라 들, 산, 강, 바다를 싫어한다. 콩이나 계란을 금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800만의 요구와 금지를 지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구와 금지가 너무 많고, 심지어 서로 충돌하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지키려면 어디라도 가면 안 되고, 무엇도 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신들의 벌이 두렵고, 이도 저도 못하게 된 믿음 깊은 간조는 점차 성마르고 소심한 소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가장 위대한 한 신만 섬기면 다른 신들이 정한 금기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많은 신이 아닌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은 내 작은 영혼에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라고 말입니다. 그후 쾌활해졌고, 지적으로 건강해졌습니다. 많은 신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이 전인적인 구원과 자유를 준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