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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 진우스님 2018.6.1~6.14
6월 1일 [오늘의 명상] . .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꼼꼼히 정독(精讀)하면서 제대로 읽는 분이 몇이나 될까?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남의 글을 읽는다는게 그리 간단치는 않을 것 같다. 소납 또한 큰 기대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읽고 불심(佛心)과 신심(信心)을 조금이나마 증장시켜 나갔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언젠가 밝혔듯이, 고귀하고 거룩한 부처님 법(法)을 단 하루라도 놓치고 잊어버림으로써, 잠시나마 고락(苦樂)의 업(業)이 작동하게 될까 봐,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매일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오늘 하루를 다짐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업(業)을 고치거나 돌리거나 바꾸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 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의 습(習), 나의 고집, 나의 집착, 나의 고정관념(固定觀念), 나의 고락(苦樂) 감정, 나의 인과(因果)가 그야말로 고래 심줄보다 더욱 질기어, 이를 바로 잡기란 참으로 힘들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자신의 업(業)을 모른다는 것은, 칠흑같은 밤에 등불없이 길을 가는 것과 진배없다 할 것이다. 물론 아직 업연(業緣)이 닿지 않아서 구제받지 못할 일천제(一闡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야말로 쇠귀에 경읽기와 같이 무슨 말을 해도 귀와 가슴에 전혀 닿지 않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이들도 고업(苦業)이 다한다면 기회는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되돌아볼 때 가능하면 기회를 잡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희망사항이다. 이를 권고하는 소납 또한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스스로 마음이 곤하게 된다면, 이 또한 소납의 고업(苦業)이 작용하는 것이므로 오롯이 소납의 몫이다. 이렇듯,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나의 마음으로 귀결되는 것이므로, 다시 한번 간절히 말하지만, 마음 밖에 보이는 일체의 현상을 보고 시비고락(是非苦樂)을 일으킨다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남으로 간주하여 시비(是非)하는 것과 같이, 우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소납의 글이 그리 준수하지는 않으나, 너그러운 아량으로 이해하시고, 그러나 허투루 읽지 마시고 가능한 시간을 좀 할애하시어 꼼꼼히 읽고 이해할 정도가 된다면, 장담하건데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 영혼없이 흘려 읽지 마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금강경 강의}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맑은 마음으로 선법을 행함) 1. 부차 수보리 시법 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阿縟多羅三貘三菩提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 즉비선법 시명선법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러한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나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도 없고,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오래 산다는 것, 즉 사상이 없이 모든 선법을 닦는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선법이라 말한 바를 여래께서 설하시되, 곧 선법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그 이름을 선법이라 하느니라." [붙임] 일체(一切)가 선법(善法)이면 곧 청정자성(淸淨自性)이다. 왜냐하면 청정자성은 일체 악법(惡法)까지도 버리지 않거니, 항차 선법(善法)을 버리겠는가. 이는 역설적인 말로서, 선법(善法)을 택하는 즉시 악법(惡法)이 따라 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법(善法) 악법(惡法)을 모두 여의게 되면, 이를 이름하여 진정한 선법(善法)이라 할 것이므로, 곧 청정자성(淸淨自性)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법(善法)이든, 악법(惡法)이든 사상(四相)만 여의면 곧 자성(自性)이요, 자성이든 보리법(菩提法)이든 사상(四相)이 있으면 곧 선악법(善惡法)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선법을 행하되 사상(四相)이 없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지니, 이는 선법(善法)에서 사상(四相)을 여읨으로써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는 까닭이다. 만약 선법(善法)을 행하여 아상(我相)이 없어지면 남의 허물을 보지 않을 것이요, 남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인상(人相)이 없을 것이요, 인상(人相)이 없으면 중생(衆生)이 있을 수 없으니 중생상(衆生相)이 없을 것이다. 중생상(衆生相)이 없으면 선법(善法)이 없을 것이요, 선법(善法)이 없으면 청정(淸淨) 선법(善法)인 수자상(壽者相)이 될지니, 수자상(壽者相)이 없으면 다시 선법(善法), 악법(惡法)을 여의지 아니하고 청정(淸淨) 자성(自性)을 나투게 될 것이다. 이 같이 해 나가게 되면 필경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일체법(一切法)이란 무엇인가? 일체법(一切法)은 정한 법이 없는 것을 말한다. 사상(四相)을 여의려 할 때의 일체 선법(善法)일 뿐이다. 선법(善法)은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배일 뿐이고 피안(彼岸)은 아닌 까닭이다. 선법(善法)이라면 설사 피안(彼岸)에 도달케 해 주는 선법이라 하더라도, 선법(善法)이 아니어야 피안(彼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선법(善法)이 없다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말한 바 선법(善法)도 곧 선법(善法)이 아니니 여래가 선법(善法)이라 함은 이 이름이 선법(善法)이니라” 하시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만 없다면 저절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청정하게 되는데, 그 어떤 삼업(三業)일지라도 분별(分別)하지 않으면 완벽히 청정한 행이 된다. 이를 이름하여 선법(善法)이라 하고, 선법(善法)을 행(行)하는 것이라 한다. - 진우스님 -
6월 2일 [오늘의 명상] . . 세상의 직업 가운데 가장 좋은 업종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경우는 공무원을 가장 선호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 중에서도 선생님을 꼽는다 한다. 삶에 있어서 직업이 주는 영향은 지대하다.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직업에서 오는 행(幸) 불행(不幸)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 모양인 업장(業障)에 따라, 아무리 좋은 직업도 좋은 직업이 아닐 수 있고, 아무리 힘든 직업도 나쁜 직업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업장(業障)이 좋은 사람은 좋은 직업을 만나게도 되는 동시에, 나쁜 직업도 불행하지 않게 된다. 또 업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나쁜 직업을 만나게도 되지만, 설사 좋은 직업을 만난다 하더라도 결코 좋은 직업이 되지 않는다. 이는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업장(業障)이 좋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업장(業障)을 어떻게 좋게 할 수 있을까? 우선 전생(前生)부터 쌓여 져온 좋지 않은 업장(業障)을 좋은 업장(業障)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는 것이다.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기가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복(福)을 지어야 한다. 최고의 작복(作福)은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행(布施行)을 해야 한다. 내 것이라는 아상(我相)은 복을 까먹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내 것이라는 아상(我相)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보시(布施)하라는 것이다. 보시 가운데는 불사(佛事) 보시가 최고다. 법보시(法布施)라 한다. 부처님의 법을 널리 전하는데 홍보(弘布)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일주문(一住門)이라는 무분별심(無分別心)의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안케 하기 위한 보시가 법보시(法布施)이다. 따라서 그 어떤 직업의 인연을 만나던 그 직업에 대해 좋다 싫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한다는 것은 욕심을 더 이상 부리지 않는다는 의지다. 그러므로 싫은 것과 나쁜 것이 피해가게 된다. 불만 갖지 않고 감사하며,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고, 보시(布施)와 법보시(法布施)를 통해 복(福)을 짓고, 그리하여 싫고 나쁜 것을 피하게 되니, 따라서 직업의 좋고 나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업장(業障)을 소멸시켜 나가는 것이 결국 좋은 직업을 갖게 하는 선법(善法)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맑은 마음으로 선법을 행함) 2. 부차 수보리 시법 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阿縟多羅三貘三菩提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러한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나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도 없고,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오래 산다는 것, 즉 사상이 없이 모든 선법을 닦는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붙임] 앞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여래께서는 본래부터 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었다고 하실 뿐이지 별달리 얻음이 아니시라는 말씀이시죠?』 이 말에 부처님은 옳다고 인가(印可)를 하신 후, 『나는 조금의 법도 얻은 바가 없다』 고 하신 것이다. 일체 선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용적(用的)’ ‘체적(體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체적(體的)’이라 함은 ‘관심있는 하나의 법이 모든 행을 갈무리한다.’ 고 한 관심법(觀心法)이 그것이니, 그렇다면 이 마음을 어떻게 관(觀)할 것인가? 이 법은 지극히 평등하여 모든 하늘에 대해 더 함이 없고, 일체 축생에 대하여 덜함이 없으며, 성인에 있어 늘어남이 없고, 어리석음에 있어서 줄어듦이 없으며, 예와 지금이 다르지 않고, 멀고 가까움이 차이가 없으며,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고, 남자와 여자가 구분이 없으며, 귀함과 천함의 차별이 없어서 오직 일심(一心)으로 관(觀)하는 것을 말한다. 용적(用的)이라 함은, 일체 중생이 맡은 바 직업, 그리고 책임을 말한다. 각자가 맡은 직업 행동은 곧 수행법(修行法)이 되고, 그 장소인 직장은 곧 수도장(修道場)이 되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직업 행동은 곧 불사(佛事) 행동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장소인 직장 즉, 우주 법계(法界)는 그대로 부처님 몸인 불신(佛身)이 된다. 따라서 모든 법은 그대로 불법(佛法)이요, 모든 일은 그대로 불사(佛事)가 되는 것이다. 일체의 사람이 각기 일체 작장을 다니면서 상하 귀천(貴賤)이 없이 대법계를 도량으로 삼고, 자기에게 주어진 맡은 바 일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이는 무상대도(無相大道)를 닦는 대 수행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선상에서 각기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하는 것이 곧 일체선법(一切善法)을 닦는 것이 되니, 이 법이 평등한 이유가 되는 까닭이다. 평등한 까닭에 직업에 귀천이 없는 것이고, 그 어떤 미천한 직업이더라도 일체의 선법이 되는 것이니, 공기를 호흡하는 미물과 곤충에게 있어서 그들이 숨쉬는 공기는 평등히 대자연의 공기인 것과 같이, 미물 곤충이 공기를 자기 것으로 알고 호흡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공기는 평등하여 대소(大小)와 고하(高下)를 가리지 않고 미물과 곤충에게 까지 자기 것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어떤 곳이든 그 어떤 일을 하던, 차별과 분별심을 갖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행동이 곧 자비행(慈悲行)이 되고, 그 마음이 곧 자비심(慈悲心)이 된다. 그러니 제발 가타부타하지 말고,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움직여 지고 그 움직임은 곧 일체(一切) 선법(善法)이 된다. - 진우스님 -
6월 3일 [오늘의 명상] . . 어릴 때 절에 있으면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뛰어 놀거나 오락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조차 어른스님들로부터 제지를 당하기 일쑤였다. 숨어서 잠을 잔다 거나 뛰어노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다.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때는 야속한 생각만 들었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고약하고 못된 스님으로만 생각했다. 만약 요즘의 행자나 사미에게 그렇게 했다 가는 단 한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노동청이나 인권위에 고발당하기 십상이겠다. 왜 놀지도 못하게 하고 작은 오락도 허용하지 않을까? 당연히 분별심(分別心)을 없애기 위함이고,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노는 것에 빠지게 되면 노는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으로 다른 일을 하기 싫어지게 된다. 오락에 젖게 되는 것 또한 큰 노름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는 것이 되었든, 오락이 되었든, 취미가 되었든, 그 어떤 것도 즐거움과 기쁨, 행복을 찾기 위함 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싫고 불행하고 괴로움의 인과(因果)가 따르게 되어 언젠가는 치러야 할 빚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그러니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도 이를 참작하여, 무엇이 되었든 중독으로 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락의 인과로 인하여 반드시 힘들고 괴로운 과보(果報)의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는 옛말이 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경책의 말씀이다. 오락이나 취미를 통해 생활의 활력소를 가지는 것도 좋지만, 자칫 잘못하다가 오히려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것이니, 차라리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는 방법으로서 노는 입에 염불을 한다 거나, 기도 참선, 보시 정진의 행습(行習)을 기른다면, 참 좋은 근사한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 {금강경 강의}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맑은 마음으로 선법을 행함) 3. 부차 수보리 시법 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復次 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阿縟多羅三貘三菩提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 즉비선법 시명선법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러한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나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도 없고,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오래 산다는 것, 즉 사상이 없이 모든 선법을 닦는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선법에 대해 여래는 선법이 아니고, 곧 그 이름을 선법이라 하느니라." 고 하셨다. [붙임] 분별(分別)하지 않는 법(法)이 곧 선법(善法)이라 한다면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없는 수행인 이야말로 산부처가 아닐까? 그런데 산 부처는 물론, 산 부처님의 행동을 하는 이를 눈을 씻고 봐도 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이는 산 부처님을 보려고 하는 자신에게 사상(四相)(아,인,중생,수자상)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모두 분별(分別)된 마음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결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본다 할지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 분별(分別)된 마음으로 보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믿고 싶어 할 마음 뿐,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스스로 사상(四相)이 없고 분별심(分別心)이 없다면, 모든 사람을 볼 때도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려 할 것이므로, 잘되고 못되고 가 없을 것이며, 좋고 싫을 것이 없을 것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로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상(四相)이 없으면 분별심(分別心)이 없을 것이요, 분별심(分別心)이 없으면 언제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걸림이 없을 것이니, 직업이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좋고 싫은 마음이 왜 들겠는가. 곧 자신이 산부처가 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이러한 경지에 들어서 청정한 삼업(三業)의 행을 한다 하더라도, 남이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사람은 사상(四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참다운 수행자는 아니다. - 진우스님 -
6월 4일 [오늘의 명상] . . 6월 2일 김천의 한 터널에서 차량을 운전하던 한 여성이 의식을 잃는 바람에 차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급박한 찰나 이를 본 한 소방대원이 재빨리 차에서 내려 비틀거리는 차를 온 몸으로 막아 섰다. 힘이 부치자 이를 본 시민 두 명도 합세하여 겨우 차를 세울 수 있었다.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했으나 하나도 다친 사람없이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 한다. 대단한 미담(美談)이다. 종종 이런 일이 있긴 하지만, 시민의 용기 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차를 막아 선 소방대원은 급박한 상황에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을 것이다. 만약 생각이 많았더라면 선 듯 용기가 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은 생각하기 이전에 몸부터 움직이는 일이 종종 있다. 이를 불법(佛法)에서는 걸림 없는 행동 무애행(無礙行)이라 한다.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않고 저절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일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도 찰나찰나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 분별심(分別心)이 없으니 집착할 틈도 없다. 이를 부처님께서는 오늘 금강경 강의에서 나오는 일체선법(一切善法)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대상을 보는 것에서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이 붙음으로써 좋은 것을 선택하려 하게 된다. 이를 분별하는 즉시 고민이 생기게 되고 괴로움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선악(善惡)도 미추(美醜)도 고락(苦樂)도 본래는 없는 것이나, 이 가운데 좋은 것을 분별하게 됨으로써 싫고 나쁜 인과(因果)가 생기게 된다. 인간은 본래 선(善)한 존재다. 여기서 선(善)이란 분별(分別)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저절로 선행(善行)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엇이 되었건 좋다 싫다 분별심(分別心)없이 행하고 저질러라. 결과 또한 분별심(分別心)이 없으니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이 없을 것이므로, 고민과 집착없이 여여(如如)함과 무애자재(無礙自在)만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인연(因緣) 연기(緣起) 인과(因果)의 부처님 법에 맡기면 된다. 어차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공(空)으로 돌아갈 것이고,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연기(緣起) 모습으로 이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잘 된다 싶으면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닦아 나갈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3.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맑은 마음으로 선법을 행함) 4.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 즉비선법 시명선법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야! 선법에 대해 여래는 선법이 아니고, 곧 그 이름을 선법이라 하느니라." 고 하셨다. [붙임] 부처님께서는 선악(善惡)의 분별(分別)이 없는 평등성이 곧 정각(正覺)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라 하시고, 이를 증득(證得)치 못한 이는 분별이 없는 평등성을 훈련하여 돈증(頓證)할 것을 말씀하시었다. 즉 점수돈증(漸修頓證)으로써 돈오점증(頓悟漸證)하는 것이다. 이는 돈오(頓悟) 없이는 점수(漸修)가 있어도 돈증(頓證)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선악(善惡)의 분별이 없는 평등성을 행함으로써 자성(自性)을 밝히게 되는 것이므로, 자성은 본래 죄와 복이 없어서 선악을 밝힐 것이 없는 까닭이니, 이를 깨달은 연후에 행이 닦아질 것이요, 따라서 증득(證得)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얻음도 없을 것이요, 다함도 없을 것이며, 얻을 수도, 닦을 수도 없는 탓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행할지라도 믿음은 곧 사라질 것이요, 의지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하므로 점수돈증(漸修頓證)을 하기 위해서는 돈오점증(頓悟漸證)의 뜻이 붙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없는 평등으로 정각(正覺)을 삼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이해 못하는 이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즉 머리로는 아직도 분별 문제가 남아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가령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법(一切法)이 일체법이 아닌 줄 모르고 선법(善法)으로 알고 있거나, 또 일체 세간법(世間法)이 일찍이 불법(佛法)인 줄 모르고 악법(惡法)으로 간주하는 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이러한 이들은 아직도 악(惡)을 싫어하고 선(善)을 좋아하는 근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기 근성에 적합한 일체선법(一切善法)으로써 이 법을 얻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여 부처님께서는 선악경계(善惡境界)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점수돈증(漸修頓證)의 법이자 돈오점증(頓悟漸證)의 법문을 열어 주시되, 아(我)가 없고 인(人)이 없고 중생이 없고 수자(壽者)가 없음으로써 일체선법(一切善法)을 닦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고 하시었다. 그렇다면 일체선법(一切善法)이란 어떤 것인가? 맡은 바 직책에 충실한 행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과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체법(四諦法), 삼십칠조도법(三十七助道法) 등을 행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행하는 것이다. - 진우스님 -
6월 5일 [오늘의 명상] . . 어제는 무척 더웠다. 인사동에서 새문안교회 옆 내일신문빌딩까지 약 35분 정도 걸어서 갔는데, 한낮 땡볕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걸어갔다가 볼일을 본 후 다시 걸어서 돌아왔다. 나름 무척 괴로운 시간이었다. 더구나 8상체질이어서 땀을 흘리면 안 좋다는 진단을 받은 바였기에 더욱 힘이 들었던 것 같다. 크게 부담이 없는 걸음이었기에 언급한 만큼 큰 괴로움을 느낀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육체적으로 느끼는 싫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느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나름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이를 고통이나 괴로움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이보다 천 배 만 배 힘든 경우에 비한다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매우 사치스런 앙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고통도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고통과 괴로움을 느낄 때, 동시에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은, 내가 원하고 탐했던 즐거움과 기쁨을 느낀 만큼의 대가요, 그의 과보(果報)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러하여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果報)가 나타나게 된 원인 즉, 나의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에 의한 과보(果報)에 대하여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러하여 고통과 괴로운 마음을 재빨리 전환하여 스스로 마음을 편안케 해야 한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못마땅한 것에 대한 원인은, 바로 내가 지었던 과거의 잘못된 분별심(分別心)으로 인하여,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업(業)을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대상에게도, 불만을 가지거나 분풀이를 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물론, 수행(修行)에 있어서도 항상 남과 대상을 탓하지 않는 습(習)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업(業)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행(行)이 된다. {금강경 강의} 제24. 복지무비분 (福智無比分 - 복과 지혜는 견줄 수 없음) 1.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 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 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喩 所不能及 수보리 약삼천대천세계중 소유제수미산왕 여시등칠보취 유인 지용보시 약인 이차반야바라밀경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 위타인설 어전복덕 백분 불급일 백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모든 수미산 만한 칠보 덩어리로 보시하더라도, 또 다른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경에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알려준다면, 앞 사람의 복덕으로는 이 공덕의 백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온갖 계산이나 비유로도 능히 다 미칠 수 없느니라." [붙임] 부처님께서 얻음이 없는 것을 정각(正覺)이라 하셨으니, 이러한 정각(正覺)을 이룸에 있어서 복덕(福德)이 필요할 것인가? 필요치 않는 것일까? 이것이 대중들의 의심할 바가 되는 것인 즉,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경전의 공덕으로 돌려 말씀하심이다. 삼천대천세계에 널려 있는 수 없는 수미산(須彌山)들로 된 칠보(七寶)로서 조불조탑(造佛造塔)의 불사도 하고, 공익과 중생 구제사업 등으로 일체 선법(善法)을 행하는 큰 선업을 짓는다 하더라도, 금강 반야바라밀의 뜻과 내지는 사구게(四句偈) 등으로 세상을 깨우치게 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니, 칠보(七寶)로 된 온갖 보시(布施)를 끝없이 한다 해도, 전법(傳法)의 복덕(福德)에 비하면 십만억분의 1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선법(善法)을 행하는 보시(布施)로서는 아름답고 많은 보시를 한다 할지라도, 다함이 있고 사상(四相)이 있으므로, 자성의 미혹을 부르게 될 지니, 그 복덕(福德)은 모래성과 같을 지어다. 이 경의 내용대로 선법(仙法)을 행하는 복덕(福德)은, 비록 사구게(四句偈)에 그친다 할지라도, 무위(無爲) 무상(無相) 무루(無漏)에 통하는 것이 되므로, 이 법이 저 혼자 스스로 생사(生死)를 벗어 던질 뿐만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일체의 미혹함을 깨우쳐 주게 되는 것이니, 어찌 자타(自他)가 일시(一時)에 불도(佛道)를 이룸이 아니라 함이겠는가. 정리하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너무나 많다. 한마디로 이것 저것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원하면 반대의 저것이 반드시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아채어, 더 이상의 의존함이 없이 무소의 뿔처럼 홀로서 개척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남을 돕기 위하여 많은 돈과 물질로 보시(布施)를 한다 한다면, 그 보시를 주는 측에서는 준다는 생각으로 기쁨을 맛볼 것이요, 받는 측에서는 받는다는 생각으로 기쁨을 맛볼 것이지만, 이에 의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가 발생하는 고로, 조만간 슬픔과 괴로움으로 이어 지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보시(布施)와 복덕(福德)은 한계가 있으므로, 아무리 많은 보시(布施)와 공덕(功德)을 짓는다 하더라도, 업(業)이 다하는 그날까지 업보(業報)를 치루고 난 연후에, 좋은 인연이 다가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 진우스님 -
6월 6일 [오늘의 명상] . . 가끔은 잘 아는 지인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가 많다. 때로는 낯 모르는 사람들 과도 어울릴 때도 있다. 지인이 되었건 모르는 이가 되었건, 의견이 서로 맞을 때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견해가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의기투합하여 서로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견이 안 맞아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고 기분을 잡칠 때도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는 것은 일종의 매너고 예의다. 설사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 하더라도 일단 들어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습관이겠다. 때로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한다거나 또는 강하게 반박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상대의 주장이 너무나 확고하다고 판단되면, 다소 내 견해와 다르더라도 굳이 강하게 되받아 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본질을 벗어나기 일쑤고, 결국 본말(本末)이 전도되어 서로가 기분이 좋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때는 조용히 참아주는 것이 낫겠다.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의 말에 따라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감정이 요동치게 된다.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기본이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 처리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있다 하겠다. 내가 말을 하던, 상대의 말을 듣던, 항상 여여(如如)하고 중도(中道)로운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중의 기본이겠다. 그러므로 옳고 그른 말을 잘 구분하되, 그 말에 대하여 좋다 싫다는 고락(苦樂)의 감정을 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즉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 대한 집중하는 것은 좋으나, 절대로 좋고 싫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싫고 나쁜 인연의 업(業)을 만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성취를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기분이 좋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좋은 것은 싫은 것 때문에 존재하게 되고,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해 좋은 것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지만, 좋은 것을 찾을수록 싫은 것 또한 똑 같은 분량으로 생겨나고 따라붙는 것이 마음 감정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도, 내 마음안에 싫은 마음 감정이 있는 한, 싫고 나쁜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좋은 것을 찾는 것보다는 부처님께서는 좋고 싫은 분별(分別)을 없애라 하셨다. 그래야 일체 모든 것이 평등하여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의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을 멸하는 방법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 중도(中道)의 마음이라 하고 피안(彼岸)과 해탈(解脫)이라 이름한다. 분별심(分別心)을 지우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멸도(滅度)의 대장정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5. 화무소화분 (化無所化分 - 가르쳐도 가르친 바 없음) 1.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 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수보리 막작시념 하이고 실무유중생 여래도자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 라고 여래가 생각한다고 보지 말지어다. 수보리야! 그러한 생각을 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어떠한 중생도 여래가 제도할 자가 없느니라. [붙임] 사상(四相)을 여읜 선법(善法)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 법(法)이 평등하여 좋고 싫은 고락(苦樂)과 높고 낮은 고하(高下)가 없으므로 정각(正覺)이 된다. 고 하셨다. 그렇다면 평등이라는 것에는 고락(苦樂)과 고하(高下)가 없으므로 부처와 중생이 없을 것임에도, 부처님께서는 여전히 중생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제도를 한다는 것은 곧 중생이 있음이고, 중생이 있으므로 사상(四相)이 없을 수 없으며, 사상(四相)이 있음에는 얻음이 없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까닭이니, 부처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심려하시어 수보리를 불러 말씀하신 것이다. 『수보리 네 뜻은 어떠하냐? 여래가 과연 사상(四相)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여래가 중생을 제도한다고 보는가? 수보리야 이러한 생각을 하지 말아라.』 하신다. 그러면 여래께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수보리에게 ‘이러한 생각을 짓지 말아라’ 라고 볼 것인가? 둘 다 아니다. 이 말씀은 수보리와 여래 자신까지 이러한 생각을 짓지 말 것을 말씀하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생각을 지음이 애초에 없었다 라고 하심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인아상(人我相)을 모두 떼어낸 상태 즉, 인아(人我)가 본래 없는 평등성(平等性)이므로, 이러한 생각을 지음이 본래 없음이니, 나와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음으로 제도할 대상도 없다 할 것이다. 저 평등자성(平等自性)에는 여래가 멸(滅)할 중생이 있지 아니함이다. 즉 평등자성 자체에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지 아니하여 제도할 대상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청중의 중생심에서는 자꾸 평등이라고 하면서도 부처와 중생을 분별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고정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고락(苦樂) 고하(高下)를 스스로 지음으로써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평등처에서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부당한 지견(知見)이 생기게 됨이고, 이는 오히려 평등을 사량(思量)함에서 생긴 오류라고 할 것이니, 이러한 오류에서 다시 평등견(平等見)과 중생견(衆生見)과 멸도견(滅度見)까지 생김으로써 결국 평등하지 않는 도로아미타불이 됨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로 여래가 멸도(滅度)할 중생이 없다』 고 하신 이 말씀이, 중생은 평등성품(平等性品)을 헤아림으로써 멸도(滅度)할 중생이 없다는 것에 대해 의심이 생긴 것이요, 여래께서는 평등성을 헤아리는 지견(知見)까지 없음으로써 실로 멸도(滅度)할 중생이 없다 고 하심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짓지 말 것을 전제로 말씀하심 인데, 중생은 평등지견(平等知見)을 두게 됨이고, 여래께서는 평등지견을 두지 않으심이 다르니, 평등성에 대하여 지견을 두지 않고 평등을 그대로 깨달을 때, 중생과 멸도(滅度)가 적멸(寂滅)해져서 부처와 중생이 모두 사라지게 됨이다. - 진우스님 -
6월 7일 [오늘의 명상] . . 출가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절절한 편지를 썼다. “자식이 어미를 버린다 해도 어미는 자식을 버릴 수 없으니 아들아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노라.” “어머니 저는 목숨이 다하더라도 깨닫지 못한다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터이니 아들에 대한 애착을 버리시고 정반왕(淨飯王) 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본받으십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동구 밖에 나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들인 동산양개(洞山良价) 선사를 매일 기다리다가 결국 눈마저 멀게 되었다. 눈이 멀어지자 집을 절로 개조하여 지나가는 객승(客僧)을 묵게 하면서 발을 씻어주었는데, 아들의 왼쪽 발 복숭아뼈 옆에 사마귀를 찾기 위해서 였다. 양개선사는 깨달음을 얻은 후, 어머니에 대한 소상한 이야기를 듣고 집에 당도하여 오른쪽 발을 담구어 씻은 다음, 왼쪽발을 담그는 대신 다시 씻었던 오른쪽 발을 담구어 어머니를 속였다. 그리고는 동구밖을 빠져나오는데 마을 노인이 알아보고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을 부르며 뛰어 오다가 강물 가운데 이미 이른 아들을 보지 못하고 그만 강물에 빠져 죽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양개선사는 조용히 삼매(三昧)에 들어 어머니를 천도(薦度)하였다. 같이 간 도반(道伴)이 이 모습을 보고 왜 어머니를 구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양개선사는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의 한 생은 남의 집 머슴으로 지낼 업(業)이고, 다음 생은 눈먼 봉사로 지낼 업(業)이며, 그 다음생에는 물에 빠져 죽을 업이나, 이 업(業)들을 이제 한 생에 끝냈으니 다음생엔 천상에 올라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소위 팔자(八字)라고 하는 업(業)의 모습이란, 자기 스스로의 고락(苦樂) 분별(分別) 인과업(因果業)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 저런 모습, 그런 저런 모습들은, 모두가 자신의 팔자(八字) 업(業)에 의해 철저히 스스로 만들어진다. 사실은,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어떤 모습이든 별로 상관이 없다. 자신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 업(業)의 분별(分別)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가 절대적이니, 빈부(貧富)나 미추(美醜), 권력과 명예의 관계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보통의 생각으로는, 잘 생기고 건강하고 수명이 길고 돈을 잘 벌고, 권력과 명예가 높으면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세상과 마음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아무리 잘 살아도 고락(苦樂) 업(業)이 크면 괴로움도 크게 되고,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고락(苦樂) 업(業)의 분별(分別)이 작으면 괴로움도 작아진다. 이는 욕심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자신이 지은 업(業)은 스스로 받고 스스로 멸(滅)해진다. 스스로 받는다는 것은 욕심을 부릴수록 즐거움도 크게 되지만, 그에 따른 과보(果報)인 괴로움도 똑같이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약 사고를 당하거나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 이는 자신의 고락업(苦樂業)과 깊이 인연 지어 진다. 자신의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업(分別業)이 크면 클수록 언제 어디서 어떤 불행을 당할지 모른다. 반대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업(分別業)이 작으면 작을수록 언제 어디서 어떤 행운이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 행운에 집착하지 않는 무분별심(無分別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도 모르게 오는 행운에 도취되어 즐거움을 만끽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크게 노력하지 않고 오는 행운은 지나가는 인연의 모습일 뿐인데, 이를 대가없이 덜컥 받아서 즐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소위 부모덕에 엄청난 상속을 받는 재벌 2세 3세들은 특히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로또에 당첨된 1등들이 사후 삶의 행적을 보면 패가망신(敗家亡身)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당장의 업보(業報)를 받는 것이다. 이렇듯 업(業)이란 한치의 오차없이 다가오는 것이므로, 억울하다고 화를 내거나, 재수가 없다고 분을 삭이지 못하거나, 하물며 부모와 조상을 탓하거나, 남의 탓을 하는 경우들은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현명한 삶의 방법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고, 내게 다가오는 모든 현상은 나의 업보(業報)라고 받아들이며,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고, 좋은 것을 너무 찾지 말고, 나쁜 것을 무조건 멀리하지 말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니, 매일 기도 참선 보시 정진으로 업장(業障) 소멸(消滅)의 긴 시간과 경험(經驗)을 통해 여여(如如)한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금강경 강의} 제25. 화무소화분 (化無所化分 - 가르쳐도 가르친 바 없음) 2.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 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수보리 막작시념 하이고 실무유중생 여래도자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 如來度者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 라고 여래가 생각한다고 보지 말지어다. 수보리야! 그러한 생각을 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참으로 어떠한 중생도 여래가 제도할 자가 없느니라. [붙임] 만약 여래(如來)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함은, 여래는 그 즉시 아(我)와 인(人)과 중생견(衆生見), 수자견(壽者見)이 붙어 있음이고, 따라서 제도할 능력이 없다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我)와 인(人)이 있으면, 곧 부처와 범부가 분별이 끊임없을 지니, 이를 있다 하심은, 곧 나의 아(我)가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이 또한 인연의 소치로 생각한다. 범부들의 아(我)는 언제든지 범부들의 아(我)요, 여래의 아(我)는 아니다. 중생을 제접함에 있어서 방편이 소용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여래는 경에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설하는 것은, 곧 여래가 아(我)가 있음이 아니요, 범부들이 아(我)가 있기 때문에, ‘저들의 경우로 내가 아(我)라고 칭함이니라’ 고 하신다. 이 말뜻을 잘 알고 보면 이번에 또 말씀하신 바, 범부(凡夫)라 함에 여래께서 또 범부를 범부라고 보실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위에서 말씀하신 바 뜻을 잘 알지 못 함이니, 여래가 범부를 말씀하심은 곧 범부가 아니요, 범부의 경계를 쓰는 속간(俗間)의 그 범부로 하여 여래께서도 범부를 말씀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아무리 중생이다 범부다 말씀하시더라도, 중생과 부처를 어느 것이 더 좋다거나 싫다는 분별을 하지 않음이요, 범부와 천재를 구분할 줄은 알되, 실제로 범부와 천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이 생기게 되면, 아무리 선악(善惡) 시비(是非)의 경계에 머무른다 해도, 마음은 물론 일체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참다운 수행자의 자세라 할 것이다. - 진우스님 -
6월 8일 [오늘의 명상] . . 요즈음 애완견이라 하여 개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개 뿐만이 아니다. 소위 반려 동물 등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키우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옛날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광경들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단적으로 예뻐 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예뻐 한다는 것은 사랑스러운 감정이 생겨나서 이다. 예뻐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스스로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기분이 좋다는 것은 곧 기분이 좋지 않은 감정을 대신 채워 주고 없애기 위함도 된다. 소위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반려동물을 키우든, 반려식물을 키우든, 이 모든 취미 생활들은 스스로 좋은 감정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감정 놀음이라 할 것이다. 다만, 정(情)을 주는 대상들이 때에 따라 선택되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위들을 좋다 나쁘다로 구분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형제 간에 싸우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특히 돈이 많은 재벌들이 그렇다. 하물며 부모 자식지간 에도 다투는 현상이 많아졌다. 이는 재산과 재물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부모형제보다도 재산과 재물이 더욱 소중하다는 반증(反證)도 된다. 돈과 재산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정(情)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가족이라는 개념이나, 취미 또는 일의 개념에 있어서도, 결국은 나의 기분 좋은 감정을 극대화 시키려는 대상, 바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하겠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가 좋으면 그 어떤 것도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고, 자기가 싫으면 부모 형제나 그 어떤 대상도 배척할 수도 있다는 서글픈 현상이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결론을 내어 주셨으리라. 결론적으로 모든 것은, 결국 좋고 싫은 고락(苦樂) 감정의 분별심(分別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상이 무엇이던, 기분 좋은 감정을 갖기 위해 온갖 수단으로서 행위 하고는 있지만, 그 인과(因果)로 인하여 싫고 나쁜 감정이 생기게 되고, 또 싫고 나쁜 감정을 없애려고 좋은 것을 찾게 되는 탐욕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을 끊기 위하여 分別心을 없애고 중도심(中道心)을 깨치라는 간곡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깊이 깨달을 시점이다. 따라서 반려견이 되었건, 부모 형제 가족이 되었건, 또는 재산이나 돈이 되었건, 그 어떤 대상을 막론하고 정(情)을 쏟는 행위는, 물론 틀린 것은 아니겠으나, 정(情)의 인과(因果)가 계속 악순환 된다는 측면에서는, 그 어떤 무엇에 집착하기 보다, 먼저 자신의 고락(苦樂) 감정의 인과(因果) 업(業)을 잘 다스려서,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평안하고 편안한 중도심(中道心)을 갖출 수 있도록,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정을 다스려 나가야 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5. 화무소화분 (化無所化分 - 가르쳐도 가르친 바 없음) 3. 약유중생 여래도자 여래 즉유아인중생수자 若有衆生 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수보리 여래설 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 須菩提 如來說 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수보리 범부자 여래설즉비범부 시명범부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 라고 한다면 여래에게는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사상이 있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는 나라는 것은 곧 나가 있지 않음이니, 다만 범부들이 내가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범부라 하는 것도 여래가 설할 때는 곧 범부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니, 그 이름만을 범부라고 하느니라." [붙임] 여래의 입장에서는 ‘있다 없다’ 고 하는 분별(分別)이 없음으로, 만약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제도하지 못한 중생이 생기는 것이므로, 영원히 제도하지 못한 중생이 생기고 마는 것이다. 이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결코 여래라 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범부(凡夫)라 한다면 분별상(分別相)이 없는 가운데 범부인 것이니, 이는 그 이름만을 범부(凡夫)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분별을 한다면, 동시에 싫고 나쁜 사람이라는 분별상(分別相)이 생기게 됨이니, 분별상이 없는 가운데서는 그냥 그 이름만이 사람일 뿐인 것과 같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등성(平等性)에서 평등이라는 생각의 지견(知見)을 지으면 안되는 것이니, 이러한 분별된 지견(知見)을 갖지 않는다면, 중생이 스스로 적멸(寂滅)하여 여래가 멸도(滅度)할 중생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래가 멸도(滅度)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지견(知見)이 생긴 것이므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이 생김이다. 이는 여래의 성품이 아니다. 그러나 여래께서는 이 사상(四相)을 말씀하시지만, 이 사상(四相)에 머무름은 아니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아(我)를 말씀하시는 것은 곧 아(我)가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래의 경계에서는 본래 아(我)가 없는 것이지만, 범부의 지견에 맞추어 아(我)라고 하심이다. 그러니 여기서의 아(我)는 곧 범부들의 아(我)인 것이요, 여래의 아(我)는 아닌 것이다. 비유하면 원숭이의 음성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원숭이와 접촉할 때, 원숭이의 언어를 사용했다 하여 이 사람이 원숭이가 되는 것은 아님과 같다. 따라서 여래께서 범부라 한 것은 곧 범부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니, 그 이름이 범부(凡夫)일 뿐이라는 말씀이다. - 진우스님 -
6월 9일 [오늘의 명상] . . 스스로를 소심(小心)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혈액형으로 보면 A형을 가진 이들이 주로 생각이 많고 뒤끝이 있다하여 소심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물론 의학적으로나 통계적으로 증명되진 않았다. 아마도 A형이 인구의 절반을 넘으니 그런 속설이 생긴 것 같다. 소납의 생각으로는 욕심이 작은 이들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아닐까 싶다. 역설적으로 큰 욕심이 없다는 반증도 된다. 매사 돌다리도 두드리는 조심성과 함께, 상대의 뜻 없는 말에도 자주 오해를 하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배짱이 약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는 자신감이 떨어져서 일 수도 있으나,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부처님법에 대한 신심(信心)이 부족하다 할 수 있다. 인과(因果) 인연(因緣), 그리고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분별심(分別心)이 원인이기도 하다. 소심하다는 의미는 걱정 근심이 많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 배짱 있게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과(因果)에 대한 확고한 신심(信心)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달라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를 원하면 원하지 않는 하나가 생기게 되고, 열을 원하면 원하지 않는 것 또한 열이 생기는 것이 인과(因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하는 것이 없으면 원하지 않는 것 또한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인연 연기에 맡기고 마음을 놓아버리면 걱정 근심과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문제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잘되야지 하면 잘 되지 않는 것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현실로 이어지게 된다. 잘되는 것을 굳이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잘되지 않는 것도 나타나지 않게 되고 보이지 않게 된다. 잘되는것과 잘되지 않는 것을 분별(分別)하지 않으면 연기(緣起)의 모습만 보여 질 뿐이다. 연기(緣起)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이고 정토(淨土)이다. 거기에 분별심(分別心)을 얹게 되면 생사(生死) 생멸(生滅)이 생기고 사바세계가 펼쳐진다. 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가 정토(淨土)임에도 불구하고,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얹어 집착하면 예토(穢土-괴로움의세상)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배짱 있게 살아야 한다. 여기에서 배짱이란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으로 불법(佛法)을 잘 믿으면 배짱이 생긴다. 불법(佛法)은 인과(因果) 인연(因緣) 연기법(緣起法)이고 중도법(中道法)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걱정 근심할 필요도 없고 화낼 필요도 없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그러면 용기와 힘이 생긴다. 그러하여 불만이 없어지면 욕심도 사라지게 되고, 욕심이 없으면 지나친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순리를 따르게 된다. 순리는 곧 중도행(中道行)이고 무애행(無礙行)이다. {금강경 강의} 제26. 법신비상분 (法身非相分 - 법신은 상이 아니다) 1.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부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삼십이상을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느냐?" [붙임] 삼십이상(三十二相)이란 서른두가지로 보는 상법(相法)이 만점(滿點)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구족상(具足相)은 부처님과 전륜성왕(轉輪聖王)만이 소유한 것이다. 태자시절에 선인(仙人)이 정반왕에게 말하기를, 태자의 상(像)은 삼십이상(三十二相)을 구족(具足)하고 있으니 전륜성왕이 아니면 부처를 이룰 것이라고 하면서, ‘그 가운데 부처님이 되어 무상법륜(無上法輪)을 굴리실 것이온데, 내가 나이가 많아 이 법을 듣지 못할 것 같아 슬퍼하노라’ 고 하신 연유이다. 관(觀)과 견(見)은 뜻이 전혀 다름이니, 견(見)은 눈으로 보는 경지이고, 관(觀)은 지혜로 보는 경지를 말함이다. 앞 전에 수보리가 여쭙기를, 부처님이 얻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은 바가 없습니까? 이때 부처님은 ‘그러그러하다’ 고 인가(印可)하시었는데, 이를 듣는 청중들은 의심이 이는 대목이 있었다. 만일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바 없이 얻으셨다고 한다면, 이는 얻음이 없는 것이다. 얻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본래 그대로가 청정(淸淨)한 본성(本性)이므로, 얻고 얻지 않고 조차 없음이며, 새로이 얻을 것이 없음이다. 그렇다면 본래 얻을 것이 없다 한다면, 청중이나 부처님, 그리고 일체중생이 다 그러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여래만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있을 것인가? 여래만이 얻는 것이 아닌가? 의심함이다. 그러한 고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여래(如來)라고 볼 수 있겠느냐? 되물으신 것이다. 이를 물으신 뜻은, 본래 청정(淸淨) 본성(本性)에 있어서, ‘너희들이 본성(本性)과 색신(色身)을 달리 보고 있구나’ 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본래 구족(具足)한 본성(本性)은 곧 구족(具足)한 법신(法身)이 되는 것이므로,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을 따로 보는 분별(分別) 지견(知見)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법신(法身)이 곧 색신(色身)인 줄 알 때, 삼십이상(三十二相)과 범인상(凡人相)이 함께 실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여래가 삼십이상이 있다는 망상(妄想)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한마디로, 여래가 삼십이상이라는 특별한 상(相)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삼십이상이 없는 범인상(凡人相)이 또 생기게 되는 분별을 일으키게 되므로, 이는 아직 깨치지 못한 마음으로써,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겪게 됨은 물론,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한다는 뜻이 된다. - 진우스님 -
6월 10일 [오늘의 명상] . . 또 하루가 지났다. 과연 어제 하루는 얼마나 보람이 있었으며 또 보람이 없었던가? 얼마나 좋은 일이 있었으며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가? 지난 하루의 잘잘못에 대해, 그리고 좋았고 싫었던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되돌아보며 복기해 보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람이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을 하는 이유, 즉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히 싫고 나쁜 기분을 갖지 않기 위함이고,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는 본능의 발로에서 일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큰 일을 하거나, 교양 있고 덕 높은 삶을 살거나, 역사적인 인물이 되거나, 전쟁의 영웅이 되거나,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거나, 부자와 권력자, 등등의 엄청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된 마음을 갖고 있는 이상, 나머지 현상은 인연(因緣) 연기(緣起)라는 공(空)의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이를 테면 이런 엄청난 일을 함으로써, 그 일에 의한 혜택을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할지라도, 이는 각자의 고락(苦樂) 인과(因果)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닐 뿐더러, 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원시적 삶에 있어서나, 과학의 발달로 인한 현대 문명을 최대로 누리고 사는 현재의 삶에 있어서나, 업겁(業劫)에 있어서의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각 개개인의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물론, 상대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에 있어서의 차이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위 마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감정을 중도(中道)롭게 하지 아니하고, 좋은 것을 분별하는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의 마음 감정을 갖는 이상, 그 질량만큼, 어느 곳, 어느 때, 무슨 일을 하던 이를 막론하고, 싫고 나쁜 고락(苦樂) 인과(因果)의 감정이 항상 따라붙게 된다는 것은, 불멸, 불변의 법칙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만든 괴로움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짓지 않고 이를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대로가 부처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이니, 그 어떤 마음, 그 어떤 감정도, 그대로 놓고 놓아 버림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편안하고 평안케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결코 쉽지 않다. 어렵고도 어렵다. 그러나 이 방법이외에는 평안한 중도심(中道心)을 갖지 못하고 항상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날 길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러니 화두(話頭)를 항상 놓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의 화두(話頭)란 팔만사천의 부처님 법문이다. 즉 좋은 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싫고 나쁜 과보(果報)가 따른다는 인과(因果)의 법(法)을 아는 것이 화두이다. 이를 화두로 삼으면, 이 화두 안에 선(禪)이 들어 있고, 반야(般若), 적멸(寂滅)이 들어있으며, 인과(因果) 연기(緣起) 공(空)과 중도(中道) 열반(涅槃)이 들어있다. 분별심(分別心)을 갖는 이상, 극락에서도 지옥이 생긴다. 따라서 육신통(六神通)을 부리고, 유체이탈의 재주를 부린다 할지라도,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 인과(因果)를 안고 있는 이상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화두를 놓치지 않아야 바로 지금 현재 평안할 수 있다. 지금 편치 않으면 영원히 편치 않다. 우선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서 화두(話頭)를 챙겨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히 한다면, 마음은 항상 평안해질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6. 법신비상분 (法身非相分 - 법신은 상이 아니다) 2.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 관여래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왕 즉시여래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그러하옵니다. 삼십이 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야! 만약 삼십이 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하겠구나." [붙임] 수보리께서 과연 삼십이상을 모르고 여쭈었을까? 수보리가 누구인가? 공과 중도에 대해서는 부처님에 버금갈 만큼의 지혜를 갖추고 있는 해공제일이시다. 그런 분께서 이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바로 미혹한 중생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전륜성왕은 사천하를 관장하는 성왕이다. 그 복업이 비록 복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는 유루복이지만, 그 큰 복으로서 색신만큼은 여래에 비견할 만한 구족신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여래께서는 복과 지혜가 양족하시어 유루복과 무루복이 함께 구족하시기 때문에, 색신에도 구족한 신상을 갖추시고, 성리의 지혜에도 구족한 법신상을 갖추고 계시니, 단순한 삼십이상의 색신만을 구족하고 있는 전륜성왕과는 비교할 수는 없다 하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래가 삼십이상을 구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잘못된 지견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전륜성왕을 예로 들어 삼십이상이 여래가 아님을 알려주시려 하신 것이니, 삼십이상을 여래로 보는 잘못된 지견에 대해 다시한번 강조하고 계심이다. - 진우스님 -
6월 11일 [오늘의 명상] . . 근대에 들어 성형(成形)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성형이 잘된 사람은 표시가 거의 없지만, 잘못한 사람은 뚜렷이 표시가 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칼을 대는 성형은 아니지만, 주사를 맞아서 주름을 없앤다 거나 피부를 탱탱하게 하는 기술도 많이 있다고 한다. 누구나 젊음이 유지되기를 원한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모든 행위는, 스스로 즐거움과 기쁨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과 기쁨, 만족과 행복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얻은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만족과 행복함은 저기서 과보(果報)가 따르게 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즐거움과 괴로움은 반반이다.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불만족, 행복과 불행은 각각 서로 반반씩 나타나게 된다. 인과의 법칙으로 볼 때, 더 좋거나 더 싫고 나쁜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얻은 행복은 다른 것에서 불행의 과보(果報)를 치르게 되고, 지금 현재 얻은 만족은 다른 것에서 다른 시간에 불만족한 인연 과보를 만나게 된다. 인과(因果)의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어서, 다만 좋은 시간, 싫고 나쁜 시간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이를 인연 또는 시절인연이라 한다. 그러니 마치 풍선효과와 같이 여기서 누르면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게 되고, 다른 곳에서 눌림을 당하게 되면 바로 이곳에서 불러 나오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함은 인과의 과보(果報)를 받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것만으로 그쳐지지 않는다. 거개의 사람들은 무조건 나에게 유리하고 이득(利得)이 되는, 그리하여 기분이 좋아지는 것에 탐닉하게 되지만, 이는 태어나면 죽어야 하고, 생겨나면 사라지게 되는 인과(因果)의 법칙처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불리한 과보(果報)를 얻게 되고, 손해보는 과보(果報)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인연 저런 연기(緣起)작용, 즉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보라 하심은, 좋고 싫은 분별심으로 보게 되면 항상 인과(因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고로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불만족, 불평등, 불행의 과보(果報)가 따르게 된다고 모든 경전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좋은 것과 싫고 나쁜 것에 대한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 인과(因果)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그러니 성형을 하던, 하지 않던, 좋은 기분을 느낀 만큼, 싫고 나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업력(業力), 즉 분별심을 일으키는 동시에, 좋고 싫은 기분이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여 매사에 좋고 싫은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지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완벽한 지견(知見)과 지혜를 갖추게 될 것이니, 항상 분별하지 않는 기분,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 화두(話頭)를 들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좋은 것을 굳이 찾지 말라는 말씀이다. 좋은 것을 찾거나 얻은 만큼, 싫고 나쁜 인연을 만나게 되는 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인과(因果)의 법칙이니, 항상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서 분별심을 멸해 나가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6. 법신비상분 (法身非相分 - 법신은 상이 아니다) 3.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응이삼십이상 관여래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알기로는 삼십이상으로서는 여래를 뵐 수 없습니다. " [붙임] 수보리는 앞에서는 여래를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가, 이번에는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서 여래를 응당히 볼 수 없다고 상반된 말을 한 것일까? 당연히 해공제일(解空第一) 이신 수보리 존자가 이를 모를 리가 없음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은 유루복(有漏福-한계가 있는 복) 이라도 지을 수만 있으면 누구든지 삼십이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륜성왕(轉輪聖王)도 삼십이상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니, 여래만이 삼십이상을 지닌다고 보는 것은 맞지 않다. 설혹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여래(如來)만이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삼십이상이 삼십이상이 아니니, 또 범인(凡人)의 상(相)이 범인의 상이 아닌 것과 같음이다. 왜냐하면 삼십이상과 범인상(凡人相)을 구별하기 이전에, 본래의 상(相)은 이미 구족(具足)해 있는 것이므로, 삼십이상이니 범인상이니 분별한다면, 곧 삼십이상이 아닌 것, 범인상이 아닌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이므로, 마치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생기면, 좋은 것은 상대적으로 나쁜 것이 되는 것과 같이, 좋고 싫은 분별(分別)이 끊임없이 악순환 된다. 따라서 중생 스스로가 구족(具足)하지 못한 상(相)을 본다면, 중생 스스로가 미혹하고 망령된 상(相)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삼십이상을 구족(具足)하게 본다 하더라도, 또한 중생 스스로가 미망(迷妄)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삼십이상과 범인상이라는 분별을 함께 모두 놓아야 하거늘, 여래지견(如來知見)과 범인지견(凡人知見) 또한 함께 놓아야 함이다. 따라서 법신(法身)이다 색신(色身)이다 하는 상(相)을 놓아야, 그 이름이 법신(法身)이 되고 그 이름이 색신(色身)이 되는 것이니, 여래나 삼십이상이나 이러한 미망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이다. - 진우스님 -
6월 12일 [오늘의 명상] . . 세계적인 축구선수 프랑스의 지단은 어릴 때 축구화가 없어서 부모를 원망하며 매일 울었다고 한다. 어른이 되어 다리와 발이 없는 사람을 보고 어릴 때 철없던 생각을 하며 한없이 부끄러워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더 못한 처지의 사람을 잘 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보며 부러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더 못한 것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아 진다. 또 화가 나기도 한다. 시기 질투를 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위로 보고 기분이 좋지 않기보다 아래를 보고 위안을 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물론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보고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도 있지만, 이는 자칫 아래를 볼 줄 모르고 겸손할 줄 모르는 우를 범할 수도 있으니 항상 자신을 살피어 조심해야 한다. 가장 좋은 마음가짐은 역시 위와 아래를 막론하고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위를 분별하면 아래가 생겨나고 아래를 분별하면 위가 생겨나며, 좋은 것이 분별되면 싫고 나쁜 인과(因果)가 생겨남이니, 이는 분별(分別)의 습(習)이 되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낳게 된다. 이런 습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분간키 어렵게 만든다. 오늘의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처럼, 그 어떤 형상과 모양, 모습들에 현혹되면 마음에 지옥이 생기게 된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성실히 살아가더라도, 그 어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도 마음이 머물러서 집착하게 되면 생사고락(生死苦樂)으로 말미암아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육근(六根-눈귀코혀몸머리)으로 나타나고 감지되는 모든 형상과 모습에 대해, 그렇게 그렇게 이름만이 그러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있는 그대로 보고 대하되,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감정을 얹게 되면 인연(因緣) 연기(緣起)에 대해 반항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항상 마음을 비우고 중도심(中道心)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엇이 되었던 인연(因緣) 연기(緣起)의 모습으로만 바라보고, 그 어떤 것도 그대로 그대로 받아들여서 항상 마음을 놓고 놓아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6. 법신비상분 (法身非相分 - 법신은 상이 아니다) 4. 이시 세존 이설게언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시기를, "만일 모양으로 부처를 보거나, 음성으로 부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 함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붙임]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에게 게송(偈頌)으로 다시한번 말씀하시었다. 너희들이 나의 자금색(紫金色) 몸과, 푸르고 맑은 눈동자 등의 구족(具足)한 신상(身相)으로 나를 본다면, 이는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의 색깔과 방원장단(方圓長短)의 공간 등, 모든 모양에 집착하는 바, 그릇된 생각으로 참 성품을 가리고 보는 것으로서, 망령된 생각과 망령된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모양의 상(相)에 머물러서 도(道)를 구하는 까닭으로서, 우치한 생각으로 삿된 도(道)를 행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본래가 상(相)이 없음이요, 본래 집착함이 없는 여래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청아하고 융화(融和)한 음성을 들음으로써 나를 찾으려 하는 것은, 이는 궁상각징우(宮商角徵羽) 오음(五音)과 희로애락(喜怒哀樂) 환오(歡惡) 등의 모든 음성에 집착하는 바, 잘못된 지각(知覺)으로써 나를 구하는 것이 되니, 이러한 망각(妄覺)으로 도(道)를 행하려 하는 것은, 사도(邪道)에 떨어지고 말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래 망각을 여읜 여래의 땅(여래지-如來地)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말씀하시는 것은 여래(如來)가 여래(如來)가 아니요, 그 이름만이 여래(如來)인 줄 알아야 한다. 금강경의 네가지 사구게(四句偈) 중 하나이다. 정리하자면, 육근(六根-눈귀코혀몸머리)으로 보는 대상은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씀이다. 이 또한 분별심(分別心)으로서, 첫째는 육근(六根)으로 감지되는 모든 대상은 모두가 변하고 사라지는 것으로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집착하면 할 수록 속고 마는 것이다. 두번째는, 어떤 하나를 좋다고 한다면, 싫고 나쁜 것이 동시에 생기게 되니, 한마디로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항상 윤회(輪廻)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싫고 나쁜 것이 똑 같이 생기는 인과(因果)가 발생하게 되니, 이 또한 집착할 수록 혹독한 대가를 스스로 짓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이름만이 좋은 것이다. 또 그 어떤 형상과 무슨 모습이라도,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분별(分別)하게 되면 고통과 괴로움의 인과(因果) 대가를 치르게 되니,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거늘, 그렇게 그렇게 그 이름만이 그러할 뿐이라는 뜻이다. - 진우스님 -
6월 13일 [오늘의 명상] . . 『스님께서는 고고한 말씀만 하셔요. 요즘 얼마나 살기 힘들고 어렵고 팍팍한데, 잘되는 방법은 말씀을 않고, 맨날 ‘마음을 비우라, 분별하지 말라’, 는 등의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말만 하고 있으니 솔직히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직접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없지만, 여러 의견을 종합해 들어보면 대강 이런 생각을 대부분 하고 계시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어찌 보면 솔직한 생각이기도 하고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은 자비심(慈悲心)이다. 그러나 계속하여 주는 것은 기회를 뺏는 것이 된다. 이때는 대신 스스로 밥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자비심이다. 하지만 또 자비심만으로는 근본적인 굶주림을 해결할 수는 없다. 왜 배가 고프고 고통이 생기는가에 대한 근본 이유를 알아야 배고픔과 고통을 없앨 수 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지금 만약 근심 걱정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에 대한 근본 원인을 알려줌으로써 고통의 씨앗을 없애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고, 전법(傳法)이다. 당면한 문제가 있다 치자. 그 문제만 풀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고통과 괴로움이란 지금 피한다고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더 큰 고통을 모르는 탓이다. 그리고 고통은 외부의 환경 탓으로 생각을 하지, 고통은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를 알게 하는 것이 필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따라서 낙숫물이 돌을 뚫듯이,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똑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금강경 강의}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 끊음도 사라짐도 없음) 1. 수보리 여 약작시념 여래 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 汝 若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수보리야! 만약 네가 생각하되, "여래께서 충분히 갖춰진 모습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할 수 있겠느냐? [붙임] 청중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삼십이상(三十二相)이 여래와는 상관이 없는 줄 알았다. 여래께서 삼십이상을 쓰지 않고서 여래가 된 줄 아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모든 경계에 걸리지 않은 까닭에 여래를 얻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래가 삼십이상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음으로써, 여래지(如來地-여래의땅)를 얻은 줄 아는 이러한 생각조차도, 하나의 망령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즉 상(相)이 없어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조차도, 잘못된 망심(妄心)이라는 말씀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이미 아시고 수보리를 불러 물으셨던 것이다. 이 말씀 가운데는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바 없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씀을 이미 하신 바, 물론 여래께서는 이에 대한 상(相)이 없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삼십이상의 구족상(具足相)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쓰지 않고 여래가 되었다는 생각 또한 일종의 상(相)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런 상(相)마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마저 떼어 주시고자 물으신 것이니, 이를 여실히 알게 되면 활구처(活句處)가 드러나게 됨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활구처(活句處)는 도대체 무엇인가? 상(相)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의 상(相)마저 떼어내야, 비로소 양변(兩邊)과 삼제(三際-과거현재미래)가 떨어지는 고로, 어디에도 걸림이 없음을 말함이다. 이를 활구처라 함이요, 최후의 공(空)에 다다라서 최후의 공(空)마저 떼어내게 되면 드디어 단멸처(斷滅處)를 벗어나서 성성(惺惺)한 활구(活句)가 됨이다. 단멸처(斷滅處)란 모든 것을 멸(滅)해야 한다는 생각에 걸려 있는 상태를 말함이고, 성성(惺惺) 활구(活句)란, 마음을 깨친 상태을 말함이니, 육근(六根-눈귀코혀몸머리)이 청정(淸淨)하여 그 어떤 것을 대하더라도 마음에 고락(苦樂)의 동요가 전혀 없이 한점 걸림이 없으며, 맑디 맑은 마음을 말함이다. 여래께서 염려하시어 다시 말씀하시는 바는, 청중들이 삼십이상을 여래지(如來地-여래의땅)으로 보고 여래를 공경하다가, 삼십이상이 상(相)이 아니고 이름이 상일 뿐, 결국 공(空)하다고 하신 말씀에, 대중들이 공경하는 마음이 풀어지고, 그동안 대중이 알았던 여래지(如來地-여래의땅)가 설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중이 단멸공(斷滅空)에서 헤매이게 됐을 때, 여래께서는 너희들은 이러한 생각을 하되, 여래지(如來地-여래의땅)는 삼십이상을 쓰지 않은 이유로 여래가 깨침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심이니, 양변(兩邊-분별)으로 헤매던 마음을 구해 주심이다. 무엇이 양변에서 구하심인가? 일변(一邊)은 공(空)에서 구해 주심이니, 단멸상(斷滅相)이 여래지(如來地-여래의땅)가 아님을 말씀하시사, 단멸상(斷滅相)에서 구해 주심이다. 그렇다면 여래의 땅은 과연 어디일까? - 진우스님 -
6월 14일 [오늘의 명상] . . [“왜 나 몰래 단지에 여인을 숨겨 두었어?” “왜 나 몰래 남정네를 숨겨 두었어?” 옛날 산속에 한 노부부가 살았는데 한때 큰 독에 술을 담궈 두었다. 술이 익을 무렵 할머니가 술 단지를 들여다보니, 어떤 할머니가 단지 속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왠 여인을 숨겨 두었느냐고 따졌다. 그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가 술 단지를 들여다보니 왠 영감이 들어 있지 않은가. 놀란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왠 영감을 숨겨두었느냐 며 노발대발하였다. 노부부는 종일토록 싸웠다.] 거울이 없던 시절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노부부가 본인의 얼굴이 비춰지는 것을 보고 서로 의심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내용이다. 실제로 세상에 비춰진 모든 모습들은 사실 모두가 내 마음의 모습이 현현(顯現)한 것이다.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의(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矣) 즉,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뜻이다. 결국 내 마음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내 마음에 있는 것이 나타날 뿐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남을 향해 화를 낸다. 화가 난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고 괴롭다는 표현이다. 괴로움은 즐거움을 알고 찾음으로 하여 그 인과(因果)로 생기는 것이니, 행복을 찾을 수록 불행이 동시에 똑 같이 생기는 것과 같다. 좋은 것을 분별(分別)하고 찾는 이상, 좋지 않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지사요, 인과(因果)의 모습이다. 따라서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보이고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하였다. 즉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좋고 싫은 분별심이 없어야, 좋은 모습 나쁜 모습이 사라질 것이요, 좋은 일, 나쁜 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업(業)이 없어지면 동시에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사라져서 고통과 괴로움의 지옥이 없어지게 된다. 좋은 일이 생기던, 나쁜 일이 생기던, 좋고 싫은 인연이 나에게 나타나는 것은, 결국 나의 좋고 싫은 고락업(苦樂業)의 분별심(分別心)에서 시절 인연 되어 현실로 인연 짓게 되는 것이니, 이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항상 나의 분별심이 나타난 것이로구나 하고, 일어나는 일과 자신의 마음을 대조하여 관(觀)하는 행습(行習)을 길러야 한다. 이와 같은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놓치지 말고 늘 화두(話頭)로 삼아서,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 나간다면, 언젠가는 업(業)이 멸(滅)해지고 업장(業障)과 팔자(八字)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금강경 강의} 제27.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 끊음도 사라짐도 없음) 2. 수보리 막작시념 여래 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故 得阿縟多羅三貘三菩提 수보리야! "여래께서 충분히 갖춰진 모습인 구족상을 쓰지 않음으로써 야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 고 생각하지 말지니라. [붙임] 여래께서는 앞에서 구족상(具足相)을 부인하셨고, 지금 와서는 구족상(具足相)을 쓰지 않는 것 또한 공(空)한 것이나, 이 공(空) 함마저 쓰지 말라고 수보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과연 어떤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구족상견(具足相見)을 내지 말며, 단멸공견(斷滅空見)을 내지 말 것이며, 중도지견(中道知見)을 내지 말 것이다. 그럼으로써 본연의 얻음(본성)인 그 마음을 살아내게 하라 는 말씀이다. 구족상견(具足相見)이란 빈틈없이 완전히 충족하다는 상(相)을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즉시 구족(具足)하지 못한 상(相)이 동시에 생기기 때문에 벌써 분별상(分別相)을 냄이 되니, 구족상(具足相)이 구족상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멸공견(斷滅空見)이란, 상(相)을 멸(滅)하여 공(空)하여 졌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또한 멸(滅)하고 공(空)하여 졌다는 생각을 냄으로써 멸(滅)하지 못하고 공하지 못하였다는 분별상(分別相)이 생김으로써 완전한 구족이 되지 못하므로 이름하여 단멸공견(斷滅空見)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얻음이 아닌 진정한 여래의 땅 여래지(如來地)인 것인가? 여래는 구족상(具足相)을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이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말씀이시다. 이쯤 되면 말과 생각으로는 도리어 구족상과 단멸상만 생기게 되므로, 이 정도의 경계에 다다르게 되면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어, 움직이던 움직이지 않던 또 어떤 현상이 닥쳐와도 감정의 흔들림 없이 항상 평안하고 평안 해진다. 만약 이론과 뜻은 이해를 하겠지만, 감정과 마음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면, 달마선(達磨禪)이든 화두선(話頭禪)이든 참선과 함께 관심법(觀心法)으로서 수행(修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진우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