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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가내소폭포~한신바위~세석대피소(점심)~창불대~영신봉~좌고대~비로봉~기도터~영계~영신대~아리왕탑~옥청~좌고대~바른재(한신)능선~백무동
<개요>
이번 산행의 주요 포인트는 창불대와 영신사인데 그중에 영신사는 유람록에 자주 나온다.
좌고대,석가섭,비로봉,아리왕탑... 참 볼께 많은 곳이다.
영신사터는 박산행도 해보고 몇번이나 왔지만 매번 비슷한것만 보았지만
몇달간 여러편의 유람록을 통해 절터 부근에 미답지를 찾고 짧은 동선을 그려서 좀더 편안하게 리딩 할수있었다.
하산길에 천왕봉이 가까이 보였다는데 그것한 이번 산행을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2주 연짱 단풍객들로 번잡한 중산리를 갔는데 한산한 백무동에서 마지막 편을 이어간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 1472년 8월 17일, 신사일(양력 9월29일)
<전략>
산의 등성이에 위치한 이 평원은 5, 6리쯤 넓게 탁 트인 곳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흘렀으므로,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기에 적당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치고 온돌〔土炕〕도 놓았다. 이것은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잡는 막사였다. 나는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언덕과 산 곳곳에 설치해 놓은 매잡이 도구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보아왔다. 아직은 가을이 깊지 않아 매 잡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은하수〔雲漢〕사이를 날아간다는 매가 어찌 이 빼어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두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노끈에 매이게 되니, 이것으로도 사람을 경계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바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재미있는 놀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밤낮으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니, 어진 마음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너무 높아서 그 아래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 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이한 광경이었다.
해공이 여러 산골짜기가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장영기는 개나 쥐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략과 용맹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곳이 옛날에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그렇다면 호사가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던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노닐었던 곳으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었다. 기개를 지닌데다 난세를 만났으므로, 중국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고고하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산천은 모두 그가 노닐며 거쳐간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영신사(靈神寺)에서 머물렀는데 여기는 승려가 한 사람뿐이었고, 절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한 구(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는데, 그 석가섭의 목에도 갈라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구는 참으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칼로 베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형상을 닮은 까닭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서로 다투어 돈과 베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 거의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는데,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 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匪懈堂 李瑢안평대군)
頭陁第一。是爲抖擻。: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內已離垢。: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 離垢의 경지에 오르셨네
得道居先。入滅於後。: 앞서 道(아라한과)를 깨달으시고 뒤에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千秋不朽。: 눈 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 몽산 : 원나라 고승 몽산화상. * 贊(讚) : 다른 사람의 書畵를 기리는 글. * 匪懈堂 : 안평대군의 호, 三絶 ; 시서화. * 雞山 : 계족산 영신봉을 가리킴)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곱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개의 층은 유실되었다.
○ 1472년 8월 18일, 임오일(양력 9월30일)
일찍 일어나 문을 여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넘쳐났는데, 자세히 보니 남기(嵐氣)가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밥을 먹고 절의 서북쪽으로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다하여, 구경하고 싶어도 억지로 할 수가 없어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돌아 내려오는데, [徑由直旨而下 :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直指로 봄]
길이 나아갈수록 가파랐다. 나무 뿌리를 잡고 돌 모서리를 디뎌 가며 내려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이와 같았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듯 하였다. 이곳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따서 가져갔다. 백 아름이 될만한 큰 소나무들이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골짜기의 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숲과 산줄기를 진동시킬 만한 물소리가 뿜어 나왔으며, 백 자 정도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들은 여기서 손에 물을 떠서 양치질을 하고 비탈길을 따라서 지팡이를 짚 갔는데 즐거운 여정이었다.
골짜기 입구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마부가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에 이르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에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는 사이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드립니다.”
라고 하므로, 나는 그제서야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접어두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조태허, 유극기, 한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유람하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를 넘어 바로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유람한 지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트이고 단정해짐을 갑자기 느끼게 되어,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보더라도 전일과 다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장엄하고 빼어난 산이 중원(中原)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과 태산(泰山)보다 먼저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응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견주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 창려(韓昌黎), 주 회암(朱晦庵), 채 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 흥공(孫興公) , 여 동빈(呂洞賓) , 백 옥섬(白玉蟾) 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중을 노닐며 거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를 모신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피한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으니, 오늘날 우리 들이 한 차례나마 산에 올라 유람하여 그나마 평소에 원하던 것에 보답하기는 했지만, 세속의 일들에 급급하여 두루 청학동을 찾아보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기이하고 그윽함을 찾아보지 못했으니, 어찌 이 산의 불우(不遇)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를 길이 읊조리니, 정신이 날아오름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겠구나.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적양(赤楊) -- 오리나무
손 흥공(孫興公) -- 진(晉)나라 때의 은사(隱士)
여 동빈(呂洞賓) -- 당(唐)나라 때의 도사(道士)
백 옥섬(白玉蟾) -- 송(宋)나라 때 은사(隱士)
▼ 백무동 주차장에서 마지막 인문산행의 기념촬영을 하고 출발~
천왕봉에있는 성모사를 상당,제석당을 중당,백모당을 하당이라하고 이는 천왕할머니(성모천왕) 신(神)인 백모(白母)를 모셨고 이곳을 백모동(白母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모가 영험하기로 소문이나 여기저기 백모를 모시는 사당을 많이 지었고 복을 빌러 무수한 사람이 찾았다고 한다.
백무동은 유래는 여럿 있지만 백모동에서 유래되었다는게 가장 신빙성이 있다.
▼ 마침 천왕할매 봉행제를 올리고 있었다.
▼ 가을빛 완연한 백무동 계곡을 따라 오른다
▼ 예전에 이곳을 바람폭포라고 했던곳이다
▼ 가내소폭포(10:55)
▼ 후미를 기다리며 오층폭포를 살짝 들여다보고
▼ 이후로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된다
▼ 마지막 폭포에서 물을 받고
▼ 꺼비님과 약속한 12:30분을 맞추기위해 부지런히 오른다
▼ 오름길 끝에서 바라본 제석봉 방향인데 천왕봉은 보이지 않는다
▼ 한신바위
▼ 한산바위에서 바라본 촛대봉
▼ 운장바위
▼ 한신바위에선 천왕봉이 살짝보인다
▼ 다시 내려와 일행들과 합류해서(12:29)
▼ 대피소에서 꺼비님을 만나 점심을 먹고
삼송(三松) 임응택(林應澤, 1879~1951) 선생은 세석평전에 대해 상대, 중대, 하대를 언급하고 있는데, 서불(徐市)에 관한 기록이 흥미를 끈다. 상대(上坮)는 영신, 중대(中坮)는 창불, 하대(下坮)는 음양수 샘 기도터로 추정한다. '상대(上坮)의 백척절벽 석면 위에 '徐市過此(서불과차_서복이가 지나감)'한 제명(題名)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서시,서복,서불는 같은 사람이며 서복이 바다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 이름이 봉래산(蓬萊山, 금강산), 방장산(方丈山, 지리산) 영주산(瀛洲山, 한라산)이고 신선들이 거처한다하여 그곳에 있는 불로장생초 찾아나섰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네이처에서 진시왕이 찾던 불로장생초는 황기라고 한다.
▼ 창불대에 도착했지만 김종직선생이 보았다는 동천들은 박무속에 잠겼다 (13:18)
▼ 자살바위
▼ 칠선남능에서 시작되는 일곱신선(神仙)을 세어보았지만 아직 내공이 부족한지 알지못하겠다
▼ 카메라를 피해 영신봉에 올랐다
▼ 영신봉에서 바라본 천왕봉
▼ 영신봉 정상(13:52)
▼ 비로봉이 눈에 들어온다
▼ 좌고대 가는길에 돌아본 비로봉
<도솔산인 선생님이 보내주신 좌고대 관련자료>
1. 1463년 8월 이륙 선생의 유지리산록
뒤쪽의 봉우리에는 기이한 바위가 돛대처럼 솟아 있는데 북쪽으로 만 길이나 되는 벼랑에 맞닿아 있고 상처럼 생긴 돌을 그 위에 또 이고서 반야봉을 향해 조금 기울어져 있다. 부여잡고 올라 사방을 향해 절하는 자는 근기가 잘 잡혀 있다고 여겨지는데 해낼 수 있는 자는 천 명 중에 한 두 명이 있을까 말까할 정도이다.
2.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 8월 17일, 신사일<중략>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네모난 돌이 얹혀 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였는데,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3. 1487년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
○ 10월 정묘일 <중략> 나는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산의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좌고대(坐高臺)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상, 중, 하 3층이 있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는데 심신이 놀라고 두근거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대의 뒤에는 위험한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좌고대보다 더 높았다. 나는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기이한 풍경이었다. 의문은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 두려워하면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 날 서쪽 방면은 전날보다 훨씬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산 등의 여러 산을 두루 분별할 수 있었다.
4. 1489년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
○ 4월 24일, 임자일. 영신사(靈神寺)에서 묵었는데, 이 절 앞에는 창불대가 있고 뒤에는 좌고대가 있는데, 천 길이나 솟아 있어 올라가면 눈으로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동쪽에는 영계(靈溪)가 있는데, 대나무 홈통을 따라 물이 흘러들었고 서쪽에는 옥청수(玉淸水)가 있는데, 매가 마시는 물이라고 승려가 말하였다. 북쪽에는 석가섭상이 있었다. 당 안에는 찬(贊)이 적힌 가섭도(伽葉圖)가 있는데, 비해당의 삼절(三絶)이었다.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흔적이 있으나 이 진귀한 보물이 빈산에 버려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자 백욱이 말하기를, “사가(私家)에 사사로이 소장하는 것이, (어찌)명산에 공적으로 보관해두고 안목을 갖춘 사람들이 유람하며 감상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가져가지 않았다.
5. 1611년 유몽인 선생의 유두류산록
○ 4월 5일 갑술일.<중략>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 선인들의 유람록에 나오는 세석 명소의 지명
구분 | 좌고대 | 석가섭 | 비로봉 | 창불대 | 영신봉 | 촛대봉 | 비고 |
1463/이 륙 | 奇石削立如檣 | 迦葉臺/迦葉石像 | 東有石峯. 如浮屠狀 | ||||
1472/김종직 | 坐高臺 | 石迦葉/迦葉殿 | 唱佛臺 | 雪衣鷄山 | 甑峰 | ||
1487/남효온 | 坐高臺 | 迦葉殿 | 雞足峰 | 賓鉢峰 | 貧鉢庵/少年臺 | ||
1489/김일손 | 坐高臺 | 石迦葉像 | 唱佛臺 | ||||
1545/황준량 | 千尋迦葉 | 唱佛臺 | |||||
1611/유몽인 | 坐高臺 | 迦葉臺 | 毘盧峰 | 獅子峰 | 1851년 하달홍 中峰(중봉) 1879년 송병선 燭峰(촉봉) |
* 세석평전의 지명에 대한 변천 과정
순 | 유람록 | 세석 명칭 | 음양수샘 | 비고 |
1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綠) | 저여원(沮洳原) | ||
2 | 1545년 황준량의 금계집(錦溪集) | 저여원(沮洳原) | ||
3 |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 적석평(積石坪) | 외적평(外積坪) | |
4 | 1871년 배찬의 유두류록(遊頭流綠) | 세적평전(細磧平田) | ||
5 | 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頭流山記) | 세석평(細石坪) | 외세석(外細石) | 石泉(돌샘) |
6 | 1903년 안익제의 두류록(遊頭流綠) | 세석평전(細石坪田) |
☞ 여기에서 내세석(內細石)은 세석연못 근처 적석동(積石洞)을, 외세석(外細石)은 음양수샘 근처로 추정함.
▼ 추강 남효온이 오른 좌고대 옆 더 높은 추강암 뒷쪽바위
▼ 아리왕탑 방향
▼ 추강암
▼ 추강암에 올라서
▼ 내려다 본 좌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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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기공룡이 누굴 기다리나요?^^
ㅎㅎ
그곳이 좌고대인데 위에서 본 모습입니다
항상 잘보고 가네
한번 가보세요~
@칠성 요즘 바쁜일이 있어 산항을 못하고 있어
아름다운 산행잘보고
귀한트랙도 훔쳐갑니다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실꺼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