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눈보라 속에서 푸르른 송백(松柏)을 보았는가
이도환
오순택 동시집 『달 도둑』
1.
추사 김정희는 흔히 명필 서예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를 단순히 서예가로 인식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는 역사학자요 인문학자였으며 정치가이며 화가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은 그가 남긴 서예작품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것인데 마치 어린이가 그린 듯한 단순함이 주는 고졸미(古拙美)가 일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세한도’는 “한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 松栢之後凋)”는 공자의 말에서 가져왔다.
당시 김정희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립된 김정희였지만 그의 제자였던 이상적(李尙迪)은 김정희를 잊지 않았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서 김정희에게 보냈으며 청나라의 최신 정보까지 전해주었다. 초라해진 자신에게 정성을 쏟아준 그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그려준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였다.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게 있다는 생각의 표현이었다.
김정희가 ‘세한도(歲寒圖)’를 그린 시기는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었다. 상상 속의 나무를 그렸다는 뜻이다. 현실(現實)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진실(眞實)을 담아낸 것이다.
김정희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직접 그림으로 남겼지만 그림조차 남기지 않고 이를 드러낸 사람도 있었다. 김정희의 스승은 박제가(朴齊家)이며 박제가의 스승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朴趾源)이다. 박지원이 남긴 글 속에 ‘그림조차 남기지 않고 이를 드러낸 사람’이 등장한다. 박지원에게 학문을 가르친 이양천(李亮天)과 그의 친구 이인상(李麟祥)이 그 주인공이다.
이양천은 시·서·화에 뛰어난 이인상에게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난 뒤 이인상이 족자를 보내왔는데 펼쳐보니 잣나무 그림은 없고 눈 내리는 날의 풍경을 묘사한 시(詩)가 적혀있었다. 이양천이 까닭을 묻자 이인상은 ‘분명 그 안에 잣나무가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시에는 잣나무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휘몰아치는 눈보라 이야기뿐이었다. 이양천은 의아했지만 끝까지 캐묻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난 후, 이양천은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흑산도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유배지로 가던 중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금부도사가 우리 일행을 찾아오고 있는데 아마도 사약을 가지고 오는 것이라고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모두 깜짝 놀라 울부짖기 시작했다. 눈은 폭설로 변해 앞이 보이지 않게 내리는 중이었다.
발걸음을 멈춘 이양천은 폭설로 인해 어른거리는 먼 산을 바라보다가 무릎을 치며 이렇게 외쳤다.
“아, 이인상이 말하던 눈 속의 잣나무가 바로 저기 있구나!”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만 어지러이 날릴 뿐이었다.
박지원은 이런 일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글을 마무리했다.
“이양천 스스로가 눈 속의 잣나무로다.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어찌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김정희는 여름에 겨울 송백(松栢)을 그렸고 이양천은 눈보라 속에서 자신이 송백(松栢)임을 기억해냈다. 이인상이 ‘분명 그 안에 잣나무가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나의 깨우침이다. 새로운 개안(開眼)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귀에 들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밀입자들이 존재한다. 우주는 온통 원자와 전자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한다. 수많은 파장이 세상에 존재하며 다양한 소리를 내고 있지만 우리의 귀는 20Hz에서 20kHz 대역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그것보다 작거나 큰 주파수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오순택의 동시집 『달 도둑』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들리지 않지만 확연하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2.
산 너머 과수원엔/복사꽃 망울지고//도랑물 조잘조잘/징검다리 적시겠다.//멧새는/봄 햇살을 물고/온 마을을 돌겠다.
(오순택, 「멧새의 봄」 전문)
길을//동그랗게 감으며//시골 다녀온/아버지의 자동차 바퀴에서/코스모스 향내가 난다.
(오순택, 「자동차 바퀴」 전문)
산 너머를 누가 보았는가. 도랑물의 조잘거림은 누가 들었는가. “~겠다”라는 표현은 보지 않았음을, 듣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자동차 바퀴에서 어찌 코스모스 향내가 나겠는가.
시인은 보지 않았고 듣지 않았고 맡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아는가. 김정희가 여름에 송백을 그린 것과 같은 이치다. 이양천이 눈보라 속에서 잣나무를 본 것과 같은 이치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눈으로 귀로 코로 확인하지 않아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수소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처럼.
아기 염소 두 마리/순한 뿔 마주 대며/장난을 치고 있다.//먼발치에서/엄마 염소가/이윽히 바라보고 있다.//노랑턱멧새 한 마리/엄마 염소 뿔에 앉아서/삐빗삐빗 노래하고 있다.
(오순택, 「염소 뿔에 앉은 노랑턱멧새」 전문)
이제는 조금 다르다. 이제는 “~겠다”가 아니다. 분명히 보고 있다. 듣고 있다. 장난을 치고 있는 아기 염소 두 마리를 보고 있고 노랑턱멧새의 노래도 듣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단순하고 뭉툭한 읊조림이 왜 작품이 되어야 하나. 이 정도는 누구나 들로 산으로 나가면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시(詩)가 한 작품으로 있을 때와 시집(詩集)으로 묶였을 때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염소 뿔에 앉은 노랑턱멧새」의 의미는 시집 속에 함께 묶여 있는 다른 작품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태양과 지구는 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으로 연결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력으로 묶여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이는 것보다 더 강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다.
염소 뿔에 앉은 노랑턱멧새는 그걸 알고 있다. 별은 별과 별 사이, 즉 성간(星間)에서 태어난다. 우주의 먼지들이 서로 중력에 의해 수소와 충돌하고 부딪치다가 그것이 점점 강해져 온도가 오르고, 마침내 중심온도가 400만도를 넘어서면 핵융합이 일어나 불이 붙어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된다. 별이 직접 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별과 별 사이의 공간에서 별이 만들어진다.
아기 염소 두 마리가 순한 뿔 마주 대며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아무리 바빠도/뚜벅뚜벅 걷고//밭갈이 하면서/먼 산 바라보며/눈망울 끔벅끔벅//소의 커다란 눈 속으로/산이/통째로 들어온다.
(오순택, 「눈이 커다란 소」 전문)
샛강에 내려가/몸을 씻고//목화밭에 가서/하얀 꽃 피워주고//억새꽃 핀 언덕빼기에서/한나절 놀다가//미루나무 우듬지/까치가 이사 산/빈집에 들러 잠 잔다.
(오순택, 「뭉게구름」 전문)
소도 안다. 눈이 커다란 소는 세상을 부분으로 인식하지 않고 통째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뭉게구름도 안다.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고착된 시선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볼 수 있다. 얽매이면 보이지 않는다. 묶이면 들리지 않는다. 막히면 느낄 수 없다. 잘게 부수어 현미경으로 보면 모른다. 통째로 인식하는 깨우침의 개안이 필요한 이유다.
지구가 자전하면/해가 지고 달이 뜬다//꽃 피고 눈 오는 것도/우주의 섭리다.//팽이는/돌고 돌면서/무지개를 피운다.
(오순택, 「팽이」 전문)
여덟 장/분홍 꽃잎//머리에 얹은/가느다란 꽃대//개구쟁이 바람이 건드려도/발그레한 미소/그냥 그대로//우주를 품은/분홍 꽃.
(오순택, 「코스모스 피는 까닭」 전문)
입에 넣고/톡,/깨물면//햇살이 화르르 쏟아진다.//아,/입안에 가득 고이는/새콤달콤한 우주의 맛.
(오순택, 「포도 한 알」 전문)
오순택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주의 일부분일 뿐이다. 지구를 작게 만들면 팽이가 된다. 팽이를 크게 키우면 지구가 된다. 그래서 포도 한 알이 우주의 맛을 지닌다. 아기 염소 두 마리의 장난질이 별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증거다.
3.
서울 봉은사 ‘판전(板殿)’에는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며칠 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된다. 왼쪽에는 세로로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란 글이 쓰여 있는데, 이는 ‘71세에 과천에서 병을 앓고 있을 때 썼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편액의 글씨가 참으로 묘하다. 기교나 멋들어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처음 붓을 잡은 아이가 서툴게 쓴 글씨처럼 보인다. 게다가 ‘판전(板殿)’이란 글의 뜻도 그냥 밍밍하게 ‘경판(經板)을 쌓아 두는 전각’이라는 뜻을 지닐 뿐이다. 은유나 비유도 없다.
기교는 어디서 멈추는가. 어디서 완성되는가. 기교는 시선을 갖출 때 멈추고 완성된다. 일정한 프레임을 벗어던질 때 완성된다. 정밀한 묘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처럼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갈고 닦아야 한다. 그게 다 완성되면 추상화로 변모한다. 글씨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창문이 아니라 ‘통째로’ 보는 눈을 지니면 창문을 버려야 한다. 나비도 돌도 염소도 꽃도 새도 모두 별에서 온 부스러기들로 만들어졌음을 깨달았는데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눈보라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잣나무를 보았는데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무더위 속에서 눈 쌓인 송백을 보았는데 더위가 느껴지겠는가. 세상의 시작과 끝을 이미 보았는데 무슨 더 이상의 기교가 필요하겠는가. 최고의 기교를 고졸(古拙)이라고 칭한다면, 고졸(古拙)은 이미 기교가 아니라 시선(視線)이다. 새로운 시선을 얻었다면 기교는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뿐이다. 이미 섬에 도착했으면 배는 필요 없으니까.
오순택의 동시집 『달 도둑』은 추사의 송백이며 판전이고 이양천의 잣나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별이 만들어져 진화하면, 그래서 제 생명을 다하면, 별을 빛나게 만드는 수소가 헬륨으로 거의 다 바뀌면, 별은 생명을 다한다. 그리고 스스로 폭발해버린다. 그게 끝이냐고? 아니다. 이때 만들어진 가스와 먼지는 성운이 되고 다른 별과 별 사이의 중력으로 인해 수소와 충돌하고 부딪치다가 그것이 점점 강해져 온도가 오르고, 마침내 중심온도가 400만도를 넘어서면 핵융합이 일어나 불이 붙어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된다. 새로운 별이 되는 것이다.
『달 도둑』 뒤에 새별이 탄생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첫댓글 여전히 품격있는감각적인 시에 매료됩니다. 오순택 선생님!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