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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집 제3권 / 보유(補遺) / 정 효자(鄭孝子)에 대한 시서(詩序) 및 서(書)
3월 21일에 사마재(司馬齋)에서 대곡(大谷)에다가 잔치를 열고
원기(圓機) 선생 -오상(吳祥)으로 판관(判官)이다.-
명종 | 3 | 1548 | 무신 | 嘉靖 | 27 | 37 | 사간이 되다. 陳復昌 무리의 무함으로 체직, 內贍寺 副正이 되다. ○ 겨울, 羅州 牧使로 나가다. |
을 초청하였는데, 모인 사람들이 수십 인이고 정 효자도 자리에 있었다. 정 효자는 나이가 80세(1552,명종7)로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고 의관(儀觀)이 매우 훌륭하여 모두가 우러러보았다. 이때 상사(上舍) 김정언(金廷彦)도 함께 자리에 있었는데 수염과 머리가 모두 희고 나이가 이미 60세였다.
김정언(金廷彦) [생원]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1위(61/100) 자(字) 공미(公美) 본인본관 광산(光山) 거주지 나주(羅州) |
효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군(君)의 선공(先公)과 동갑(同甲)인데 지금 동갑인 사람의 아들이 오히려 이와 같은 모습이니, 내가 정말 늙었구려.” 하니, 사람들이 더욱 존모하였다. 내가 외람되이 이 제현(諸賢)들 속에 끼게 되어 이러한 성대한 일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효자가 젊은 시절에 문장에 힘쓰고 학식을 배양해 장차 이 세상에 힘을 다하려고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백발이 되도록 영준(英俊)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축하여 공명(功名)을 이루게 하였더라면 당세의 사대부보다 반드시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재주를 거두어 품고 초야로 물러나 부모를 봉양하는 데 종사하고, 물고기 잡으며 낚시질하는 것으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비록 벼슬을 하지 않고 궁색하게 집에서만 지내어 봉양함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능히 절약하여 물건을 마련하여 부모의 몸을 편히 하였는데 부모도 편안히 여겼다. 부모가 병을 앓으시면 몸소 약을 조제하고 죽을 올렸으며, 음식을 차리고 화기롭게 봉양하는 것을 한결같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하고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거상(居喪)함에 미쳐서는 효자의 나이가 이미 70세였다. 예(禮)에 “나이가 60세인 사람은 거상할 때 지나치게 애훼(哀毁)하지 않고, 70세인 사람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최마복(衰麻服)을 입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지만, 효자는 거적자리에서 자고 흙덩이를 베는 것을 스스로 지키며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지내어 재기(再朞)에 이르도록 일찍이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편하게 한 적이 없었다.
공자(孔子)께서 살아 계셨을 때부터 노(盧)나라 사람 중에 삼년상을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자가 있어 문하 제자들이 이로써 공자께 질문하였는데, 더구나 후세의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국가가 효로써 정치 이념을 삼고 무릇 상례(喪禮), 장례(葬禮), 제례(祭禮)를 모두 주자(朱子)의 제도를 준행하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 여막을 짓고 지내지 않는 자가 없지만,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모시고 법령보다 더 마음을 다해 행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그 수가 적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그 봉양을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 슬픔을 다하며, 자신이 늙어 혈기(血氣)가 쇠했어도 예를 어기지 않고 세월이 오래 흘렀어도 정성이 덜해지지 않은, 효자와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보다 앞서 관찰사가 장계(狀啓)로 효자의 덕행을 아뢰고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해 주기를 청하자 성상께서 청한 대로 상전(賞典)을 내리도록 윤허하였으니, 국가에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도록 권면한 것이 지극하였다.
중종실록 / 중종 39년 갑진(1544) 4월 17일(을유) 39-04-17[02] 이조가 전 전라도 관찰사가 계문한 효행자들의 상직 문제를 아뢰다 |
그러나 효자처럼 연세가 높고 덕이 성대한 분이 있는데도 녹봉(祿俸)이 이르지 않고 벼슬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선행을 숭상하고 악행을 막아서 백성들을 이끌어 간다면 쇠퇴한 속습(俗習)의 고질병을 거의 치료할 수 있을 터인데, 선행을 숭상하기를 지극히 하지 않고 악행을 막기를 깊이 하지 않는 것은 또 어째서인가?
일찍이 살펴보건대 옛사람은 남의 선행을 보면 모두 좋게 인도하였고 더러 그 선행을 시가(詩歌)로 지어서 후세에 남기기도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남의 선행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악행을 숨긴다면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데 힘써서 천하에 악인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식견이 없는 내가 어찌 감히 옛사람에게 견주겠는가마는, 구구한 내 뜻이 여기에 있기에 감히 서(序)를 짓고 시를 지어서 그 뜻을 다하려고 한다. 아울러 원기(圓機) 선생에게 같이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효자의 휘는 문손(文孫)이고, 자는 광윤(光胤)이다.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에 태어났고,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2)에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아들 강(綱)과 순(純)은 유학(儒學)에 종사하여 가업을 이었고 륜(綸)은 무예에 종사하여 무과에 등제하였는데, 내가 이들 모두와 서로 알고 있다.
鄭文孫 | 1473 | 1554 | 河東 | 光胤 | 慕孝齋 |
지난해 봄에 내가 사마재의 잔치에서 효자를 뵙고 마음속으로 앙모하여 원기 선생에게 이르기를 “효자가 80세에 순후(淳厚)한 덕을 지니셨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입니다. 서로 그에 대한 시를 지어서 그의 덕행을 빛내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원기 선생도 매우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술에 취하고 말아 의리상 대충 짓기가 어렵기에 성취하지 못하였다.
집에 거처하면서 일이 없을 때에 처음의 뜻을 기술하여 원기 선생에게 보였는데, 원기 선생은 내 글을 불가하다고 여기지 않고 궤안(几案) 위에 놓아두고는 함께 시를 짓겠다고 하였으나 끝내 시를 볼 수 없었으니, 이는 어찌 효자를 찬양하기 어렵다고 여겨서 그친 것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스스로 필력(筆力)이 미천하고 구상력도 졸렬하여 효자의 덕을 밝혀서 사람들에게 믿도록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인하여 포기하고 시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또 생각해 보니, 효자의 행실은 반드시 전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당세의 선비 중에 전할 수 있는 자가 없다면, 나 또한 어찌 감히 글이 졸렬하다는 것으로 스스로 변명하여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을 유실(遺失)시킬 수 있겠는가. 후세의 군자 중에 남의 선을 말하기를 좋아하고 그 행실을 인멸하지 않으려는 자가 혹 내 글에서 취함이 있다면 그 용모를 그려 남긴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에 삼가 정서해서 중거공(仲擧公)에게 줌으로써 혹여 조금이라도 가전(家傳)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바이다.
[주-D001] 사마재(司馬齋) : 지방의 생원과 진사의 조직을 이른다.[주-D002]
오상(吳祥) : 1512~1573.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자는 상지(祥之), 호는 부훤당(負暄堂)이다. 문장에 뛰어나 김주(金澍), 민기(閔箕), 정유길(鄭惟吉), 심수경(沈守慶) 등과 함께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부훤당유고》1책이 있다.
[주-D003] 나이가……뿐이다 : 《예기(禮記)》〈곡례 상(曲禮上)〉에 “거상하는 예는 60세인 사람은 지나치게 애훼하지 않고, 70세인 사람은 다만 최마복을 입을 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집안에서 거처한다.〔居喪之禮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 處於內〕” 하고, 〈잡기 하(雜記下)〉에 “60세인 사람은 지나치게 애훼하지 않고 70세인 사람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니, 이는 모두 그가 복상(服喪)하다가 죽을까 두려워해서이다.〔六十不毁 七十飮酒食肉 皆爲疑死〕” 하였다.[주-D004] 원기(圓機) : 원문은 ‘圖機’인데, 앞뒤 글에 근거하여 ‘圖’를 ‘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5] 계사년 : 원문은 ‘癸丑’인데, 한국문집총간 281집에 실린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I》 권16〈태학생 정공 묘지명(太學生鄭公墓誌銘)〉에 근거하여 ‘丑’을 ‘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우 (역) | 2007
정문손(鄭文孫)[생원]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5위(95/100)
UCI | G002+AKS-KHF_13C815BB38C190B1473X0 |
자(字) | 광윤(光胤) |
호(號) | 모효재(慕孝齋)【補】(주1) |
생년 | 계사(癸巳)(주2)【補】 1473년 (성종 4) |
졸년 | 갑인(甲寅)(주3)【補】 1554년 (명종 9) |
향년 | 82세 |
합격연령 | 35세 |
본인본관 | 하동(河東) |
거주지 | 나주(羅州) |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
전력 | 훈도(訓導) |
부모구존 | ○○하(○○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승서(鄭承敘)
품계 : 수의부위(修義副尉)
[처부(妻父)]
성명 : 신계규(申季糾)【補】(주4)
본관 : 평산(平山)【補】
[안항(鴈行)]
제(弟) : 정장손(鄭章孫)【補】
제(弟) : 정간손(鄭簡孫)【補】(주5)
[출전]
『정덕2년정묘9월초7일사마방목(正德二年丁卯九月初七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07)])
정륜(鄭綸)
[무과]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21/28)
UCI | G002+AKS-KHF_12C815B95CFFFFU9999X2 |
자(字) | 중경(仲經) |
본인본관 | 하동(河東) |
거주지 | 나주(羅州) |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 28명 [甲3‧乙5‧丙20] |
전력 | 학생(學生) |
부모구존 | 엄시하(嚴侍下) |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정문손(鄭文孫)[生]
관직 : 셩균생원(成均生員)
[안항(鴈行)]
형(兄) : 정강(鄭綱)
형(兄) : 정순(鄭純)
[출전]
『가정25년병오10월초8일문무잡과식년방(嘉靖二十五年丙午十月初八日文武雜科式年榜)』(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C1241774])
고봉 선생 연보(高峯先生年譜) 〔목판본〕
27년 무신(1548) 선생 22세
○ 나주 충위(羅州忠衛) 함풍(咸豐 함평(咸平) ) 이임(李任)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8년 기유(1549) 선생 23세
○ 일재(一齋) 선생 -성은 이(李), 명은 항(恒)이다.- 을 배알하였다.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와 진사시 )에 모두 2등을 하였다.
29년 경술(1550) 선생 24세
○ 8월 10일, 아들 효증(孝曾)이 태어났다.
30년 신해(1551) 선생 25세
○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다. 급제할 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하등(下等)의 점수를 주는 바람에 낙제하였다. 곧바로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26세, 27세-
33년 갑인(1554) 선생 28세
○ 동당 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다. -봄에 용산(龍山) 정 선생(鄭先生 정희렴(鄭希廉))을 곡(哭)하였다.-
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 오상(吳祥)생년1512년(중종 7)몰년1573년(선조 6)자상지(祥之)호부훤당(負暄堂)본관해주(海州)특기사항김안국(金安國)의 문인
중종 | 37 | 1542 | 임인 | 嘉靖 | 21 | 31 | 江原 都事가 되다. 慕齋, 退溪, 河西의 贈別詩를 받다. |
중종 | 38 | 1543 | 계묘 | 嘉靖 | 22 | 32 | 司書가 되다. 정언, 헌납, 지평 등을 역임하다. |
중종 | 39 | 1544 | 갑진 | 嘉靖 | 23 | 33 | 11월 15일, 中宗의 昇遐로 僉正으로서 大行王의 行狀 修撰廳 郞廳에 뽑히다. 同月 22일, 告訃使 閔齊仁의 書狀官이 되다. |
명종 | 1 | 1546 | 병오 | 嘉靖 | 25 | 35 | 軍器寺 副正이 되다. ○ 가을, 司馬試 試官이 되다. |
명종 | 3 | 1548 | 무신 | 嘉靖 | 27 | 37 | 사간이 되다. 陳復昌 무리의 무함으로 체직, 內贍寺 副正이 되다. ○ 겨울, 羅州 牧使로 나가다. |
명종 | 7 | 1552 | 임자 | 嘉靖 | 31 | 41 | 겨울, 수찬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와 곧 교리가 되다. ○ 11월, 廉謹한 관리로 뽑혀 表裏를 하사받다. |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42 | 1월, 모친상을 당하여 利川에서 여묘살이하다. |
중종실록 / 중종 39년 갑진(1544) 4월 17일(을유)
39-04-17[02] 이조가 전 전라도 관찰사가 계문한 효행자들의 상직 문제를 아뢰다
이조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송인수(宋麟壽).】 가 계문(啓聞)한 효행이 특이한 사람들을 직(職)으로 상을 주라고 명하셨는데, 생원이나 진사인 사람은 자급(資級)이 상당한 직에 서용할 수 있습니다마는, 유학인 사람은 음취재(蔭取才)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 중에 삼관(三館)에 있는 사람 【박한충(朴漢忠).】 만은 차례대로 예천(例遷)하게 되어 있으니, 상직(賞職)은 어떻게 해야 할지 취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곧 권장하느라 하는 일이니 상례에 구애될 것 없다. 음취재의 유무와 예천 같은 것은 모두 헤아릴 것 없다. 해조(該曹)가 살펴서 하라.”
【계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全州)에 사는 유학(幼學) 유승적(柳承績)은 효성을 타고났다. 3세에 자모(慈母)가 세상을 떠났었는데 5세에야 어머니가 죽은 것을 알고서 애통해 하며 끊임없이 사모하였었다. 장성해서 항시 그제라도 복을 입으려고 했는데 풍병이 들어 여러해가 되도록 낫지 않았다. 나이 50이 되자 여년(餘年)이 짧아 당초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신축년에 이르자 어머니의 묘소에다 여막(廬幕)을 치고 제복(祭服)을 갖추고서 아침 저녁으로 한결같이 초상 때처럼 곡읍(哭泣)하고 3년 동안 죽을 먹었으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복을 벗자 부모의 화상을 그려놓고 더욱 근신스럽게 제사하여 종신토록 하려고 기약했었다. 지난 연산조(燕山朝)에 김숙원(金淑媛)의 아비 생불(生佛)이 세력을 믿고서 아버지의 전답과 노비를 빼앗으려 하여 결박해 놓고 난타하여 장차 죽게 되었는데, 승적이 몸을 솟구쳐 상대를 치고서 탈출시켰었다. 이런 효행(孝行)은 고금에 드문 것이다. 유학 최응사(崔應泗)는 전주 사람인데 천품이 온화하고 순탄하여 누구와도 다투는 일이 없고, 효심(孝心)이 순수하고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똥을 맛보며 울부짖었었는데 병이 드디어 나았다. 어머니가 죽자 자기가 친히 염습(斂襲)하여 모든 것을 한결같이 예법대로 하였고, 친히 제물을 마련하여 아침 저녁으로 영위(靈位)에 곡을 했었다. 여막이 집과의 거리가 겨우 1리였는데도 3년을 죽만 먹으면서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늙은 아버지를 기쁜 안색(顔色)으로 봉양하여 곁에서 모시며 정성(定省)하고 처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자 애통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여 한결같이 어머니 상사 때처럼 하였고, 전후 6년간 여묘살면서도 한 번도 여막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는데, 비난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유학 김익한(金翼漢)은 역시 전주 사람이다.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몸가짐이 단아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성인(成人)처럼 애통해 하였고, 어머니를 섬김에는 안색과 뜻을 살피어 맞추었으며, 자기 집에 대한 정부(征賦)를 서둘러서 처리하여 어머니가 모르게 했다. 어머니가 풍병을 얻어 오래 병상(病床)에 있었는데 약 시중을 조금도 게으름없이 하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기거(起居)할 때 반드시 친히 부축하였으며, 병이 위독하게 되자 똥을 맛보아 위태하게 된 것을 알고서는 눈을 맞으며 목욕하고 울부짖으면서 기도하니, 병세가 또한 조금 뜸했었다. 어머니가 죽어서는 죽만 먹으며 거상(居喪)했는데 본디 병이 많은 사람이라 너무나 쇠약하므로 친척들이 물러가 보호하기를 권했지만 또한 듣지 않았었다. 모든 상사 일에 힘을 다해 성심으로 마련했고 장사지내고 난 뒤에도 처자가 의탁할 데가 없어 추위와 굶주림으로 절박한 지경에 빠졌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상(大祥)을 치른 뒤에는 신주를 종가(宗家)로 보내고 별도로 지방(紙榜)을 만들어놓고 아침 저녁 상식(上食)을 올리며 한결같이 거상할 때처럼 슬퍼했다. 그 아버지가 가난하다고 종가의 텃밭을 아들에게 나누어 주자, 김익한이 동복(同腹) 형제들에게 말하여 모두 장손(長孫)에게 주고, 또한 따로 받은 밭을 내어 형들에게 주었으며, 봉사(奉祀)하는 종들이 모두 죽자 건장한 종으로 채워주고 자신은 노약자만 차지하였다. 참으로 독실한 효성과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 난 것이었다.
나주(羅州)에 사는 생원(生員) 정문손(鄭文孫)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를 섬김에 뜻을 살피어 순종하여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의 나이가 90여 세에 항시 누워있고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친히 변기(便器)를 처리하고 종을 시키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돌아간 뒤에는 정문손의 나이 70이 넘었으면서도 아침 저녁의 상식을 몸소 거행하기를 게으름없이 하고 쇠약해지고 병들이었을 때도 일찍이 자제들에게 시키지 않았고, 여묘사는 3년 동안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유학 곽거인(郭居仁)은 고부(古阜)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여섯 차례나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 정성과 공경이 극진하였고 부모의 상사를 만나서는 6년을 여묘살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복을 벗은 뒤에는 삭망(朔望)이면 반드시 제사하였고 새로 난 것을 구득하면 반드시 올렸었다. 형과 아우과 모두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예사로이 슬퍼하지 않았고 상장(喪葬)의 모든 일을 한결같이 부모의 상장 때처럼 했으며, 사당(祠堂)에 부제(祔祭)하였다. 아우 거의(居義)의 아내 조씨(曺氏)가 미처 집이 없었는데 울안에 따로 집 한 채를 지어주고 보호하여 매우 독실하게 돌보았으므로 조씨가 은혜에 감동하여 그의 아들을 양육하여 가업(家業)을 전해주려고 했지만 곽거인이 허락하지 않고서 그의 매부(妹夫) 송충량(宋忠良)의 딸을 양육하기 권하였고, 조씨가 또 밭과 종을 나누어 곽거인의 아들에게 주려고 해도 곽거인이 굳이 사양했었다. 흉년을 만나서는 이웃 사람들을 구제하여 돌보기를 자기 가족처럼 하고, 전답이 없는 곤궁한 족속이 있으면 자기 밭을 빌려주고서 오래도록 찾지 않았었다. 생원(生員) 나응허(羅應虛)는 김재(金堤) 사람이다. 성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평소에 효도와 우애를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어버이를 섬김에는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아우 3명이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돈독했으며, 아버지 상사를 만나자 아우 3명과 함께 여묘사는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또 어머니의 상을 만나자 여묘살았다. 여묘살 적에 어린 아들이 병으로 장차 죽게 되어 아버지가 보고 싶어 매우 애처롭게 불렀었지만 그래도 가보지 않았고, 전후의 초상과 장사를 한결같이 예법대로 준행했었다. 그의 아버지 안세(安世) 및 조부 보중(甫重)이 대대로 효도와 우애하는 가법(家法)을 전해 왔었는데, 나응허 때에 와서는 더욱 독실하므로 온 고을 안이 효우 세가(孝友世家)라고 했었다. 진사(進士) 구두남(具斗南)은 능성(綾城) 사람인데, 아버지가 죽은 이튿날 태어났다. 장성하자 애통과 사모가 더욱 극진하여 매양 기신(忌辰)을 만나면 10일 전부터 목욕 재계하였으며, 어머니 오씨(吳氏)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뜻과 안색을 살피어 봉양했었다. 손위 누이 둘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이미 노쇠하여 재산과 전답을 분배할 적에 구두남을 치우치게 사랑하여 더 많이 주려고 했지만 구두남이 굳이 사양하며 자기 몫의 전답을 나누어 누이들의 생업(生業)을 돕게 하였고, 두 누이들이 먼저 죽자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여 두 생질을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 교회(敎誨)했다. 어머니의 상사를 만나서는 애통해 하다 뼈만 남았고 초상 장사를 예문대로 하였으며, 여묘사는 3년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복을 벗자 신주(神主) 받들기를 생존한 이 섬기듯 하여 나아갈 적에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뵈었으며, 모든 제사 때면 기일 전부터 목욕 제계하기를 오래갈수록 더욱 삼가서 했다. 또 수업(受業)하던 스승을 위하여 그의 기일(忌日)에 반드시 제사하였고, 관아(官衙)의 문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기를 비록 눈이 내리는 어두운 밤이라도 더욱 경건하게 하고 변하지 않으므로, 향리(鄕里)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다. 전 군기시 봉사(軍器寺奉事) 박한충(朴漢忠)은 진원(珍原)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박씨(朴氏)가 몹쓸 병을 얻어 온갖 약이 효과가 없자 오른손 네째 손가락을 끊어 술에 타 드렸는데,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진사 정언충(鄭彦忠)은 태인(泰仁) 사람인데, 성질이 본디 순진하고 효성스러우며 행신이 소탈하고 말이 적고 학술(學術)에 밝았다. 아버지의 상중에 있을 때 아버지의 묘소에 갈 적이면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고, 어머니의 상사를 만나면서는 삼년을 여묘살며 아침 저녁으로 곡하고 전(奠)할 때 제물을 친히 보살폈고, 집이 가난하여 처자가 굶주렸지만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장구(葬具)와 석물(石物)도 극력 실정에 맞게 하되 모두 혼자 마련하고 동복(同腹)들의 힘을 빌지 않았었는데, 온 고을이 흠모했었다. 전 훈도(訓導) 김칭(金稱)은 금산(錦山) 사람이다. 부모가 생존했을 때는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봉양했다. 나이 20때에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똥을 맛보았고 죽고 나서는 염습(斂襲)과 빈소(殯所)와 제사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하였으며, 삼년을 여묘살며 죽만 먹었다. 아버지의 상사를 만나서는 나이가 60이 다 되었는데도 친히 밥을 지어 먹었고, 치상하는 모든 일을 한결같이 어머니의 상사 때처럼 하였으며, 옷을 풀지 않고서 자고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복을 벗은 지가 지금 9년인데도 삭망(朔望) 때의 제사를 한결같이 거상할 때처럼 했다.】
[주-D001] 음취재(蔭取才) : 음관 취재(蔭官取才)의 약어. 곧 부조(父祖)의 공로에 의해 벼슬한 사람들을 시험보이는 것.[주-D002] 삼관(三館) : 성균관ㆍ교서관ㆍ승문원.[주-D003] 예천(例遷) : 준례대로 전임시킴.[주-D004] 정성(定省) : 혼정 신성(昏定晨省)의 약어. 곧 밤이면 잠자리를 보아 편히 잘 수 있게 하고 새벽이면 편히 잤는지를 살펴보고 묻는 것.
ⓒ 한국고전번역원 | 김주희 박찬수 (공역) | 1985
고봉집 제1권 / [시(詩)] / 정 효자의 시〔鄭孝子詩〕
우뚝한 금성산은 / 巍然錦城山
남쪽 땅 지덕을 누르도다 / 南紀鎭爲雄
이름난 도시 형승을 차지하니 / 名都據形勝
물산만 풍부할 뿐 아니로다 / 物産不獨豐
마을마다 대 물린 나무가 있고 / 村村自喬木
그 아래에는 덕인들의 집이로다 / 下維德人宮
어버이 섬김에 그 효심 지극하니 / 事親極其孝
정성이 하늘과 함께 통하도다 / 精誠與天通
장수를 누림도 끝이 없어 / 耈壽錫無疆
팔십에도 얼굴이 불그레하네 / 八十顔始紅
때로는 시골 노인들과 모이니 / 時從鄕老會
예의가 참으로 공손하였네 / 儀度儘匑匑
즐겁게 옛일을 이야기하니 / 怡怡談故事
백발노인들이 모두 모여든다 / 白叟皆趨躬
태수도 어려워하고 존경하여 / 太守竦且敬
임금에게 아뢰려고 하였다네 / 意欲達黈聰
소자는 아는 것이 없지만 / 小子未有知
높은 행실만 우러를 뿐이로세 / 卓行徒仰嵩
시를 지어 남은 빛 거둬들이니 / 綴詩挹餘光
만고에 높은 바람 드리우리라 / 萬古垂高風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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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렴 (鄭希濂)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정언,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이간(而簡)호동계(東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남성출생 연도미상사망 연도미상본관서산(瑞山)주요 관직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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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펼치기정의
조선전기 예문관검열, 정언,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접기/펼치기개설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이간(而簡), 호는 동계(東溪). 정종소(鄭從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이득(鄭以得)이고, 아버지는 정형(鄭珩)이다.
접기/펼치기생애 및 활동사항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용되었다.
그 뒤 정언·지평 등 언관을 역임하면서 당시 세도를 부리고 있던 김안로(金安老)일당의 횡포를 비판하다가, 그가 주관한 과거시험의 비리를 빌미로 하여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뒤 학문에 전념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자손으로는 기대승(奇大升)의 문인인 외아들 정휴(鄭隳)가 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접기/펼치기집필자
최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