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 개방기의 교회
2-3. 신앙생활의 전개
개항기 교회는 신자 수가 급증하는 한편 전통 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그렇지만 신앙의 자유를 쟁취한 교회 안에는 새로운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이 활력은 교회 문화와 신심의 고양을 통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개항기 교회는 1882년 교육 사업에 착수하여 인현서당(仁峴書堂)을 창설해서 신자의 자녀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 학교는 흔히 최초의 근대 학교로 불리는 원산학사(元山學舍)보다 1년 먼저 창설되었다. 또한 교회는 1885년 서울 곤당골(美洞: 현재 중구 을지로 1가 부근)에 건물을 구입하여 보육원을 세워 23명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양로원도 건립하였다. 이 보육원과 양로원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적 사회 복지 시설이다.
개항기 교회는 가난한 신자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누에고치의 새로운 품종을 도입하여 보급하거나, 신품종 포도를 비롯한 특용 작물을 보급하고 그 재배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자들 상당수가 무전농민(無田農民)이던 상황에서, 교회는 선교 자금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토지를 구입하여 신자들에게 소작을 주어 경작시킴으로써 교회의 재정을 확보함과 동시에 신자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회와 신자 사이에는 지주`-`소작인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관계는 교회의 토지를 실제로 관리하는 성직자 대 신자의 관계로 이어지면서 그 밖의 여러 복합적 요인들과 결부되어 당시 형성된 성직자의 권위주의라는 폐단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개항기 조선 교회는 순교 전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고,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또한 개항기 교회는 마리아 신심이나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고 있었다. 1888년 로마에서는 조선 교회를 예수 성심께 바치는 봉헌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도 하였다. 1890년 블랑 주교는 조선 교회를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당시 교회는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성체에 대한 돈독한 신심을 드러내 주었다.
그리하여 매월 첫 목요일과 금요일, 토요일에는 이러한 신심을 돈독히 하며 특별한 기도와 의식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물론 당시에 고아들을 돕기 위한 성영회(聖찾會) 등과 같은 교회 단체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신심 운동이나 신심 단체들은 주로 개인 구원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심 운동 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의회(聖衣會)가 있다. 교회에서는 연옥 영혼을 구하기 위한 기도가 간절히 바쳐졌다.
신자들은 전대사(全大赦)와 한대사(限大赦)를 얻기 위한 성사 배령(拜領)과 기도에 열심이었다. 교무금 제도가 시행된 것도 이 시기로, 당시 대부분의 농촌 교회는 추수 후 성탄 판공성사 전에 교무금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성교사규(聖敎四規)에 규정된 연 1회 부활 전 의무적 고해성사가 한국 교회에서는 성탄과 부활 전 연 2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판공성사 때에는 성사표를 발부해서 효율적으로 신자들을 관리하기 위한 방안이 추진되었다.
교회는 한글 활자를 비치하고 일본의 나가사키에 설치된 성서 활판소를 1886년 서울로 이전해서 교회 서적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저렴한 활판본 책자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때 「천주성교 십이단」, 「백문답」 등 기도서와 교리서가 간행 보급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샤를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1874년)가 간행되었고,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년), 「한어문전」(韓語文典, 1881년) 등이 간행되었다. 이 책자들의 간행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한국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