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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사도가 되자
2017년 4월 17일 / 정기노회예배 / 마태복음 16:21-28
지금도 ‘제자’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잘 가르치는 목회자, 잘 배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들을 하지만 실제로 깨닫고 배운 말씀대로 살아가는 제자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제자의 삶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며, 일평생 하나님 말씀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삶이기에 악하거나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새에게 있어서 날개는 십자가가 아닌 하늘을 날게 하는 지체인 것처럼 십자가는 아닌 천국에 갈 수 있게 하는 날개입니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영생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적입니다(마 13:23-24).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영생에는 관심도 갖지도 않거니와 관심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인 좁은 길을 걷기 위해서 먼저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올바른 교회관을 확립하여 주십시오.
▶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그릇된 생각을 하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인 ‘에클레시아’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신약 성경에는 115번 나옵니다.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헬라어는 본래 [일반적인 모임]을 뜻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공동체]라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종교적인 전문용어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가 임재하셔서 머리가 되어 주시고, 성령께서 다스리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시는 신인공동체(神人共同體)이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 그렇다고 예수님이 건물교회를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 21:12-13 / 예수께서는 성전뜰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 있던 장사꾼들을 다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큰소리로 꾸짖으셨다. “성경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느냐?”
예수님께서 만일 건물교회를 강조하셨다면,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 16:16-19)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바른 정체성을 가져야만 합니다.
※ 이에 몇 목사님의 교회관을 보려고 합니다.
■ 2011년 3월 6일 높은뜻 숭의교회 창립 10주년에서 외쳤던 김동호 목사의 설교 일부분입니다.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요? 건물이 크고 좋은 교회일까요? 교인들의 수가 많은 교회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교회란 믿음이 좋은 교인이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누구를 믿는 것일까요?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Lord) 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처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삶을 무너트리기 위하여 유혹한 단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이심을 부인하고 피조물인 자기 자신을 주(Lord)로 인식하게 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 2007년 7월 8일 한국교회대부흥 백주년기념 상암서울대회에서 옥한흠 목사의 설교 한 부분입니다.
사데 교회는 평판이 꽤 좋았던 것 같습니다(계 3:1-3)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아! 그 교회, 대단하지. 대단해.’ 하고 인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데 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후광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뭐 하나 흠을 잡을 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교회의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 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데 교회 안에는 몇 사람을 빼고는 그렇게 사는 자들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데 교회를 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기적 같은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5만이 넘는 교회, 천 만이 넘는 성도, 세계 제일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대단한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만 명이 넘는 선교사들, 많은 헌금, 큰 교회당 등 자랑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를 다녀 보십시오. 한국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우리를 쳐다봅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목사보다 더 힘쓰는 평신도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자존심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고 행위가 죽었다는 소리를 하면 나는 그 말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러한 확신을 흔들어 놓는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도덕성, 가치관, 처세관을 놓고 보면 세상 돌아가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세상 앞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짠맛을 잃으면 우리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도록 내던지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시고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하시지 않으실까요? 누가 “아니오!” 하고 변명할 목사가 있고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땅의 복도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할렐루야!”하면서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집니다. 듣기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로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절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 .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 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엄히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답답한 일은 우리 힘으로 회개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 해보셔서 아시잖아요? 우리 힘으로 회개 잘 못합니다.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은 수없이 할 수 있지만 죄를 끊어 버리고 단호하게 돌아서는 거룩한 결단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 년 전에 하디 선교사가 하던 회개, 길선주 장로가 하던 회개, 무명의 성도들이 밤새도록 추운 겨울 밤 찬마루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회개를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죄를 더 짓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회개는 점점 한국교회에서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암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 … .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란? / 대부분의 현대 크리스천들은 초대교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행 2:42-47), 심지어는 교회 이름을 초대교회(서머나교회, 빌라델피아교회, 예루살렘교회)로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보인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좋은 모습은 성도 각자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이 건강하게 성장할 때 삶으로 드러나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속사람의 변화이기에 바울은 ‘새사람이 되라’(엡 4:21-24)고 당부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겉으로 보기에 인격이 훌륭한 사람 즉 거듭나기 전의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겉으로 자아를 드러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은 그 인격과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결국 속사람의 표현이기에 - 아무리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다양하게 드러나며, 바른 믿음의 고백이 있고, 어려운 교회를 위한 헌금이 있어도 - 건강한 속사람의 변화, 즉 영적 성장이 없으면 머지않아 고린도교회처럼 문제들이 발생하여 결국은 분열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으며 우리 교회는 아니라.”고 말하기보다는 철저히 고린도서신을 통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배워가면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초대교회가 될 것입니다.
2.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槪念)을 바르게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시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2:1-2).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제안이 싫을 수도 있었습니다. 현재의 삶이 자기가 보기에 복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재산도 있고, 아름다운 아내도 있습니다. 물려받을 재산도 있었습니다. 아직 자식이 없는 게 아쉽기는 해도 자식이 필요하면 후처(後妻)를 얻으면 됩니다. 그는 얼마든지 세상 복을 누릴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새로운 복을 제안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① 그가 누리고 있는 복은 현세적인 것이나 하나님의 복은 영세(永世)까지 이어질 복이다.
② 지금의 복은 순간적이나 하나님의 복은 영원한 것이다.
③ 지금의 복은 개인적이나 하나님의 복은 자손만대로 이어질 복이다.
④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나 이후의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제안하시는 새로운 복을 좇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집을 떠난 것은 단순히 장소만 바꾼 것이 아니라 복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꾼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복을 받지 못할까요? 장소만 바꾸기 때문입니다. 복을 좋아하는 자들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까? 복 받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면서 여기저기 찾아다닙니다.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니까 헌금도 합니다. 주일성수 잘 하면 복 받는다니까 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오려고 합니다.
▶ 진정한 복을 누리려면 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복의 개념에서 떠나 바른 복의 개념을 정립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소유를 통하여 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소유가 복이 되어서 뭐가 잘 되면 복이 들어오고, 뭐가 안 되면 복이 나가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듯이 예수님 자신이 참 복이십니다. 우리는 성도로서의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망과 저주에 얽매어 있는 인간에 가장 귀한 복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시는 것(마 1:21)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마 1:23).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로 이 땅에 내린 저주와 사망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이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겠다는 자체가 참된 복인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복 있는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로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인 가문이나 학문이나 종교적인 열심 등도 모두 배설물로 여기며 버린다고 고백하고(빌 3:7-9), 그뿐 아니라 사도 바울은 또한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세상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갈 2:10, 6:14). 그리고 자기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갈 6:14).
▶ 세상 부귀영화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도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살전 5:15-24 /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언제나 서로 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 또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십시오.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언제나 기도에 힘쓰십시오. 18) 어떤 처지에 있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십시오. 23)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 김명혁 목사님의 칼럼 / 지금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십자가의 길”보다는 세속화와 인간화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기보다는 즉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기도‘와 ’십자가 복음‘의 말씀에 전력하기보다는,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길선주 목사님께서는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시고 울면서 회개하시면서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고 애를 쓰셨는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면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들고 있다고 방지일 목사님께서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피하지 말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 16:24) 이제부터 십자가를 교회에 걸어놓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사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십시다.
베드로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만류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제자가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많은 사람들은 본문에 언급된 제자의 도가 목사나 장로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짧은 판단이나, 유익 또는 영광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세상 부귀영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교회에 다니면서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적당히 세상의 향락과 자기 정욕을 좆으면서 주일 예배에만 참석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성도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결코 이러한 자세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부인하는 크리스천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지 않았다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제자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기에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는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입니다.
예수님은 늘 십자가를 생각하셨습니다. 12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며 천국 백성으로서의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교도 해 주셨고, 행동으로서도 보여주심으로 제자로 훈련하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제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시고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마 16:21).
그렇다고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기들도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마음에 무장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강림하여 제자들에게 충만해지지 않는 이상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날 우연히 준비되지 않는 자의 어깨에 지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져야 하는 것은 마치 소나 말이 멍에를 매어야 자유스러운 것처럼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지는 의무로 알아야 알고 스스로 자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멍에를 맨다는 것이 자신을 억제시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결코 그것이 아님을 곧 깨달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사도가 되고, 나아가 많은 교인들을 제자로 삼아 사도가 되도록 양육하십시다.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무릎을 기도하며 진리를 외치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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