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오. 윤선. 조용삼. 조 토마스. 유한숙
또 다른 경기 지역 출신 순교자들
윤유오 : ?~1801, 세례명 야고보•, 양근에서 참수
윤 선 : ?~1801, 세례명 안드레아. 양근에서 매맞아 순교
조용삼 :?〜 1801. 세례명 베드로, 여주에서 옥사
조 토마스 : ?〜1801, 세례명 토마스,양근에서 옥사
유한숙 :?〜 1801. 세례명은 미상, 양근에서 참수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해 그들을 큰길가로 끌고가 참수하였다. 왼쪽은어농리 윤유오의묘
윤유오(尹有五, 야고보)는 조선 최초의 신자 대표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윤유일의 친동생이다.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난 그는,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한강개로 이사하여 살았고, 1790년 봄 형이 처음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 영세하여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후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윤유오는.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윤유일을 찾아 대석리에 왔을 때 주 신부를 극진히 모셨고, 또 주 신부가 유항검을 찾아 전주의 초남이로 갈 때에는 최인길, 인철 형제와 최창현, 최 필 공 등과 함께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이 1795년에 순교한 뒤에도 이웃 사람들과 모여 기도하고, 교리를 연구하며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일가친척 대부분이 순교한 집안
1801년 양근 관아에 체포된 윤유오는 신문을 받을 때 “제 형이 가르쳐준 십계명은 인간이면 누구나 마땅히 실천해야 함 도리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에 관한 책을 밤낮으로 외우고 익혔기 때문에 추호도 배교할 마음이 없습니다" 라고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윤유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박해자들은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1801년 3월 15일(양 4월 27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양근 관아에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고 갔다. 윤유오는 그곳에서 목 잘려 순교하였다.
윤유오는 현재 수원교구에서 시복이 청원 된 상태이며,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 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그의 묘가 모셔 져 있다.
윤유오의 할아버지는 윤사혁이고, 아버지는 신유박해 때 임자도(荏子島)로 유배 간 윤장이며, 삼촌으로는 윤현과 윤선(尹鍺)이 있다. 샤를르 달레는《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 중 한 사람은 귀양 갔고, 윤관수 안드레아라는 또 한 사람의 삼촌은 고문을 당하는 중에 죽었다”고 하였다.
윤유오의 삼촌으로 귀양을 간 사람은 윤현이다. 윤현은 신유박해 때 해남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한편 윤유일의 사촌 여동생인 윤운혜와 아버지가 윤선이라는 기복이 있다. 따라서 윤선의 또 다른 이름이 윤관수일 것이다. 그런데 달레가《한국 천주교회사》를 기술할 때 이용한 다블뤼(A. Daveluy,安敦伊) 주교의《조선 순교사 비망기》에는 윤관수가 아니라 윤관주로 나온다. 그러므로 윤선의 또 다른 이름은 윤관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윤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윤선이 순교자 윤운혜와 점혜의 아버지라는 것은 분명하며. 윤유오처럼 한강개로 이사 와 살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 친척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윤유오와 함께 체포되어 양근 옥에 갇혔으며, 고문을 받는 중에 순교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습니다.
한편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趙龍三, 베드로)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가난하고 심신마저 허약한 데다가 외모 또한 보잘것없어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래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자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조용삼은 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 있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이곳에서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된 그는 정약종을 스승으로 받들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삼을 조롱하였지만. 정약종은 모든 것에 열심인 그를 칭찬하며 차츰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었다.
조용삼은 이후 신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교리를 배웠으나 미처 세례를 받기 전에 그만 박해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1800년 봄 임희영이 아버지의 소상(小祥)인데도 제사를 드리지 않자 포졸들이 그를 잡으러 왔고, 이때 조용상도 함께 체포되었다.
아직 예비 신자에 불과하였지만, 체포되자마자 조용삼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박해자들로부터 혹독한 형벌을 받는 동안 마음이 약해졌으나, 조용삼은 결코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박해자들은 병약해 보이는 그가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더 세게 매질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또한, 여러 가지 회유하는 말로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도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해자들은 이미 배교한 그의 아버지를 아들 앞에 끌어내어 “배교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면서 아버지에게 혹독한 매질을 가하였다.
조용삼은 할 수 없이 굴복하였고, 곧이어 석방되었다.
하지만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난 조용삼은, 그가 타이르는 말을 듣고 다시 마음을 되돌려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관청을 찾아가 배교를 취소하고 박해자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가 전처럼 쉽게 마음을 꺾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박해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한 것보다도 더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그를 경기도 감영으로 끌고 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하였다. 이런 가운데 조용삼은 마침내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약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01년 2월 다시 경기도 감사 앞에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무자비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뒤인 2월 14일(양 3월 27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지막 형벌을 당했을 때, 조용삼은 박해자에게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유배지까지 따라가 수발을 들었던 조 토마스
조 토마스는 조동섬(趙東邊,유스티노)의 아들로 역시 양근에서 살았다.
조동섬은 순교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권일신, 정약종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교회 초기에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1800년 12월 조동섬이 체포되자 토마스는 매일 두 차례 아버지에게 음식을 가져다드리는 등 열심히 옥바라지하였다.
아버지가 서울로 이송되었을 때에는 뒤따라가서 낮이고 밤이고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동섬은 나이가 많은 데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걸려 있었는데, 아들의 극진한 간호로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다. 이렇게 효성이 지극했던 조 토마스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덕행을 쌓고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
한편 양근 군수는 조동섬이 꼭 처형되기를 바랐으나 유배에 그치자. 토마스를 대신 체포하고자
하였다. 토마스는 양근 군수의 관할 지역이 아닌 곳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양근 군수가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근 군수는 중앙 정부의 대신들에게 간청하여 토마스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냈고. 결국 토마스는 1801년 8월 양근의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양근 관아로 끌려간 그는. 순교하는 10월 초까지 두 달간 거의 날마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절대 굴복하지 않다가 반복된 고문으로 육체가 허약해져 마침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느님의 뜻이 자신이 체포되어 순교하는 것이라면, 자기가 잡혔을 때 형벌에 잘 견딜 수 있도록 여러 해 전부터 스스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몹시 때리며 준비하였다고 한다.
윤유오와 같은 날 순교한 유한숙
유한숙(兪汗淑)은 윤유오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순교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유사겸이라고도 불린 그는 양반으로. 양근 동막골에서 살았으며, 이동지의 딸 이 아가타를 윤점혜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