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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초남이 성지
도로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초남신기길 128-5
호남 고속도로와 전주, 익산이 갈라지는 곳에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柳恒儉, 1756-1801년)의 생가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6년 이곳 초남이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柳重哲, 1779-1801년)은 이순이 루갈다(李順伊, 1782-1802년)와 평생 동정부부로 살았던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들 동정부부는 1797년 혼인 후 1801년과 1802년에 신유박해로 치명할 때까지 4년여 간 이곳에서 동정생활을 했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간,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와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이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유항검 생가터 파가저택지의 야외제대와 야외강당.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또 이승훈 베드로와 정약전 등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웠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내려와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최창현 요한, 이존창 루도비코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가 독성죄에 해당됨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래서 윤유일 바오로가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그의 집에 머물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이에도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유항검은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柳文碩, 1784-1801년), 동생 유관검 등 그의 일가친척들이 거의 다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노복과 친지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고향인 초남이 땅에 묻지 못하고 들 건너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 바우백이에 가매장했다.
1914년 4월 19일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은 바우백이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치명자산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 치명자산의 묘소를 개장하여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破家瀦宅,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로 누구도 다시는 그 터에서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것)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과 사돈 간인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의 생가터에서 약 400여m 떨어져 있는 교리당터도 확인했다. 또한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온 가매장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 생가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1987년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작업이 진행하였다. 유항검 생가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여 동안 동정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인근의 교리당터는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9월 23일 생가터에 피정의 집과 새 제단 및 각종 성인상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2년 6월 23일 교리당터에 종탑과 한옥 형태의 교리당(유항검 사랑채), 당시 사용했던 샘물인 ‘정지샴’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5년 5월 28일 사랑채 옆 교리당 부지에 30여 평 규모로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하여 봉헌했다. 경당 안에는 미사를 봉헌하는 주문모 신부와 유항검과 신자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2006년 10월 23일에는 파가저택지 한편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3칸짜리 한옥으로 지어진 행랑채는 유항검이 왕손을 며느리로 맞으며 황송한 마음에 따로 별채를 지어 아들 내외가 살 수 있도록 배려했던 곳으로 현재 성체조배실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의 시복을 준비하며 생가터에 경당을 마련하고, 교리당터 입구 조경공사 등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했다.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조카 유중성 마태오(柳重誠, 1784?-1802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모두 시복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29일)]
초남리 -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 터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전주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전주 쪽으로 가다 보면 '동정 부부 생가 터'라는 안내 돌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5km 정도를 더 가면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사적지가 나온다. 지금의 형정 구역으로는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 마을이다. 1754년에 류 아우구스티노가 탄생한 곳이자 동정 부부로 유명한 류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가 살다가 체포된 곳이다. 현재 이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동산동 본당에서는 1987년에 그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한 뒤 축복식을 했다.
유항검 생가터의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부부로 살았던 행랑채.류항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전주 일대에 널리 신앙을 전함으로써 '호남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마련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교회일을 열심히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로 이종 사촌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다음해에는 감영에 자수하여 신앙을 벌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류항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유항검 생가터의 경당 제대.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한국 천주교회의 반석이 무너지면서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먼저 류항검의 아우인 류관검과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이 체포되었고, 이어 류항검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가산은 적몰되고 초남리의 집에는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순교로 전주 남문 밖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앞서 류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와 동생 문철(요한), 사촌 동생 중성(마태오)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교리당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는 초남이 성지 교리당터 입구의 기념비.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 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동안 류중성(마태오)은 매우 열렬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순이(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4면).
훗날 다블뤼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누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1756년에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이듬해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며느리이며, 유중성 마태오는 그의 조카이다.
유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는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유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 이승훈 베드로를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유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 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유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 바오로를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이종사촌 윤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뒤,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야고보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유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얻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그에 앞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 요한과 이윤하 마태오의 딸인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유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刑 :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으로, 죄인을 죽인 뒤에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을 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뒷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유중철 요한(1779-1801년)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柳重哲)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 루갈다가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 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유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유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인데도 무게가 있고 점잖은 어른 대접을 받았다.”
유중철 요한은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야고보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 야고보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에게서 동정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주 야고보 신부는 전주에 사는 유 요한을 염두에 두고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마침내 1797년 가을에 유 요한과 이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98년 10월 유 요한은 아내 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유 요한이 갇히게 되자, 동생 유문석 요한이 줄곧 전주를 오가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었으므로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은 그에게 진정한 형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요한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였다.
9월 중순에는 유 요한의 아내 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에 포졸들은 유문석 요한을 가족에게서 떼어 내, 형 유중철 요한에게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요한의 나이는 22세였다.
유중철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곧 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유중철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이순이 루갈다(1782-1802년)
‘유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2년에 순교한 이경도 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는 그녀와 남매 사이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이 루갈다의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그의 학문을 이어 오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부친은 처남인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 베드로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이 루갈다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자신이 배운 교리를 어린 그녀에게도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루갈다는 일찍부터 어머니에게 글도 배웠다.
17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이 루갈다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가면서 오로지 영혼을 구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1795년에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첫영성체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나흘 동안을 집 안에 들어앉아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기 위한 교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루갈다는 오로지 성체를 잘 모시고 덕행을 쌓는 데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 안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 야고보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때 주 신부의 머리에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에 살고 있는 유중철 요한이 떠올랐으며, 이에 곧장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1798년 10월 이 루갈다는 남편의 고향인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유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이 루갈다가 살던 초남이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그들은 이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가장 먼저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 요한도 체포하여 전주로 끌고 갔다.
이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녀는 함께 갇혀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아가자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언니들에게 보낸 서한에 들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뒤, 전주 관장은 이 루갈다와 그녀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바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이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순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이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에 의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순이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이순이 루갈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1760-1801년)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 아우구스티노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 김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그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으며, 교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킬 줄도 알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뒤를 이어 김 안드레아도 그의 맏아들인 유중철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내 감영에서는 김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와 밀고를 강요하였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천애 안드레아의 신앙은 형조에서도 한결같았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십계명을 버릴 수는 없으며, 한 번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또는 8월 28일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 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김천애 안드레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유문석 요한(1784-1801년)
‘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문석(柳文碩)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 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 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유 아우구스티노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유문석 요한은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유문석 요한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그의 형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가 되기로 서약하고 혼인을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남이 마을에서는 유문석 요한의 부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 요한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유문석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중순 무렵에는 유 요한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형수 이순이 루갈다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유문석 요한과 그의 가족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곧장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유 요한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 나와 형 유중철 요한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이때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유문석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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