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말이나 의지를, 좁은 범위이지만 읽어내는 능력을 갖고있다.
개, 고양이를 사육한 사람은 알 터이다.
뱀, 여우가 빙의하면 인간과 똑같이 지껄인다.
빙의되어 있는 사람이 영매현상을 일으키면 신(神)이 한 일을 말하고,
예지, 예언(주로 불행한 사건), 신불의 이름을 밝히기도 한다.
예지 예언은 대단히 잘 맞는다.
그러나 원래 동물이니까 정법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신(神)이라든가 교조라든가 칭하고 있는 사람이
거만하거나 중상, 자만, 선조공양, 욕망이 강한 경우는,
이들 동물령이 틀림없이 빙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3) 피안(彼岸) ;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최종의 피안은 석가가 도달한
우주즉아(宇宙卽俄) 이다.
4. 최초의 제자.
바라나시는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인구 약 10만 명, 지금의 도시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번창한 도시였다.
집은 주로 흙벽으로 밀집되어 지어져 있었고,
도시에서 한 발자국 밖으로 나가면, 들판이 펼쳐져 숲으로 이어진다.
흙집은 창문이 적어 집안은 어둡지만,
더위와 먼지로부터 몸을 지키는 데는, 목조보다 안정되어 있다.
시장은, 도로 양쪽에 노점이 열려, 사람의 왕래가 불편할 때도 있었다.
온갖 일용품이 진열되어, 손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중에서도 비단 제품은 가장 인기있는 거래품이었다.
붓다가 소년기부터 출가하기까지의 의복은, 거의가 캇시산이었다.
바라나시에는 예로부터 정통파의 바라문이 많아서 거리를 걸으면,
흔히 그들이 보였다.
그들은 최상품의 비단옷을 몸에 걸치고, 거리를 유유히 활보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면 사람들은 피해서 다녔다.
바라문에 대해서는 크샤트리야도 상공업자도 시민들도, 특별예우를 바쳤다.
바라문은 특권계급이었다.
붓다는 그런 거리를 묵묵히 걸어갔다.
누가 보아도 겉모양은 바로 거지였다.
의복은 비바람에 낡아, 땀과 먼지로 얼룩졌다.
들판에 눕고, 동굴에 기대었으며 작열하는 햇빛에 그을려 소매는 떨어져 팔목의 속살이 드러났다.
적당한 길이에서 자른 머리칼은 쑥밭이고
가끔 밀긴 하였으나 턱수염은 자랄 만큼 자랐다.
사로몬인지 거지인지 그 초라한 행색으로는, 얼른 구별이 서지 않는다.
거지와 다른 점은, 안정된 눈빛과 침착한 발걸음이었다.
성큼성큼 한눈도 팔지 않고 걸어간다.
누더기를 걸친 물체가,
사람들의 주목도 받지 않고 지나가는 모습은,
범부를 초월한 신선을 연상시켰다.
현재의 붓다에게는, 아첨도, 꾸밈도,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었다.
오로지 팔정도(八正道)를 마음의 척도로 삼아,
보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으로 시종(始終)했다.
일각일각으로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일초 일초는 정도를 척도로 한 사념과 행위의 생활이었다.
목적지인 미가다야는,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었다.
벳사리의 교외 아누프리야의 숲과는 달리 미가다야의 이시나바다(修行場)는,
여러 종족의 출신자들이 모여 도를 닦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육체 중심의 고행에 열중하고 있었다.
당시의 수행은 거의가 육체 고행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타력 신앙의 모습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는 자력(自力)이며
신(神)을 구하는 사람들의 갈망은 열렬(熱烈)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싸움으로 계속되는 전쟁, 안주의 생활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사회환경도 그 한 가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현대인보다 순수했었다.
도시인의 마음과 도시의 풍습에 물들지 않은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감정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실하다.
옛날과 현대를 비교해 보아도 그만한 차이가 있다.
육체 고행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몸을 바쳐 신(神)을 찾았던 그 노력은,
그 나름대로의 평가가 내려지리라.
현대는 어떤가.
불교는 타력으로 되고,
그 타력 신앙도, 대중의 마음과 야합한 현세 이익에 빠져 버렸다.
사찰은 관광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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