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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 김포문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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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詩♤추천수필 스크랩 신춘문예 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민병기(창원대 교수)
김포문학 추천 0 조회 42 13.01.03 14:1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 글은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계신 민병기 교수님의 글로, 신춘문예의 폐해를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신춘문예 당선시 목록은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민교수님의 허락을 얻어 게재하니 읽어보시고 우리 문학현실을 함께 고민해 봅시다. 의문이 있는 분은 아래의 주소로 연락하시면 되겠습니다.
우편번호:
경남 창원시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민병기 교수
이 메일:bkmin@sarim.changwo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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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문예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민병기(창원대 교수)
                 


1. 신춘문예 제도의 의미와 한계

  신춘문예 당선은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등단 절차로 공인된 지 오래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매년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각 신문사에 응모한다.
이 제도를 운영하는 신문사가 서울에만 여덟 곳이며, 대구, 부산, 광주, 경
남 등의 지방지까지 합치면 열 곳이 훨씬 넘는다. 98년도 응모 기간 중 한
신문사의 시 분야에만 1만 통이 넘게 접수되었다고 하니, 이 제도에 대한 예
비 문인들의 높은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 제도는 한국 문학의 발전에 진정으
로 기여하고 있는가. 비전문 기관인 신문사가 운영하는 데 따른 문제점은 없
는가. 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매년 많은 석·박사 학위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그 중에 이 제도의 운영과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신
춘문예 당선 소설의 어휘를 분석한 석사 논문 두 편이 고작이다. 평론도 사
정은 비슷하여, 그 해 당선된 시의 경향을 논평한 것이나 당선자와 담당 기
자들의 좌담회 정도가 전부인 실정이다.
  연구의 필요성이 높은 데 비해, 이에 대해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는 사실
은 우리의 문학 연구가 실제 작품의 생산이나 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
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즉 연구의 성과가 실제 창작자나 독자에게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연구가 지극히 자족
적인 데 있다. 자족적 연구란 오직 연구를 위한 연구로, 그 사회적 가치가
전혀 없는 연구를 말한다. 이런 연구물은 독자가 전혀 없다. 사회 발전에 아
무런 기여를 못 하는 연구로, 사회에 대해 <닫힌 연구>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의 문학연구도 <닫힌 연구>에서 <연린 연구>로 연구의 패러다임
이 변해야 한다. 사회를 향해 <열린 연구>란 명작의 생산과 유통에 기여하는
연구를 말한다.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고, 이를 독자가 읽도록 도와주는 연
구이다. 이로써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이 사랑 받는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
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연구이다.
  <열린 연구>란 쉽게 말해 일반 독자들을 위한 연구이다. 예를 든다면, 독
자들이 책을 선정할 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좋은 작품을 고르는 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가 잘 이루어지면, 책
광고의 비리는 자연 사라질 것이다. 
  한국은 지나친 책 광고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손실이 크다. 내용보다 투
자한 광고의 액수에 비례하여 책이 팔린다면, 그 막대한 광고비는 모두 독자
의 몫이다. 또 광고를 하지 않는 양서보다 광고를 많이 하는 악서가 오히려
잘 팔린다면, 이는 큰 모순이다. 이런 모순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독자층이
다. 출판사의 상술에 독자도 문학도 지배를 받게 된다.
  평론가들도 출판사와 손을 잡고 판매 전략으로 그들의  지식을 은밀하게
제공하게 된다. 각종 문학상도 판매 전략의 상표로 활용되고, 서평이나 문학
관련 기사문의 내용도 <위장된 광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비
리를 바로잡기 위해 <열린 연구>가 참으로 절실하게 요청된다.
  과대한 책 광고의 비리를 없애기 위해 신뢰성이 높은 독서 안내서가 필요
하다. 독자층이 신뢰할 만한 객관적인 독서 정보를 담은 책이 계속 발간된다
면, 독자들을 엉터리 광고에 현혹되어 악서(惡書)를 선택하지 않고, 그 정보
에 따라 양서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 연구가 바로 <열린 연구>이다. 그러면
광고에 따르는 비리는 자연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독자들이 믿을 만한 독서 정보 파일을 누가 만드느냐이다. 그것을 
출판사가 맡으면, 공정성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만들
곳은 대학뿐이다. 대학에서 독자를 위한 명작과 신간 안내서가 매년 발간된
다면, 책에 대한 과대 광고의 비리는 사라질 것이다.
  독서 정보 파일을 한 대학이 맡아 하는 것은 힘들고, 여러 대학이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별로 영역과 지역을 분담하여 만든다면, 그 효과가 더
클 것이다. 그 내용을 공개하는  발표 창구로 대학에서 운영하는 사이버 잡
지나 대학의 학과 홈페이지가 이상적이다. 예를 든다면, 경상대 국문학과에
서 개설한 <지리산 글방>이나 창원대 국문학과에서 개설한 홈페이지나 황국
명 교수의 홈페이지 같은 사이버 공간이 바람직하다.
  <열린 연구>의 하나로 신춘문예 제도의 의미와 기능을 검토하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당선되는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연구 대
상이다. 시의 경우, 당선작 대부분이 독자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다. 많은 역
대 당선작 중에 독자들에게 애송되는 시가 없다. 이 사실은 신춘문예 제도가
독자 반응이 좋지 않은 작품과 작가를 양산한다는 것은 의미한다.
  신춘문예 당선은 문학적 사건은 될 수 있어도, 문학성 그 자체일 수는 없
다. 그것이 동일시 된다면, 문학성은 무의미해지고, 문학성에 대한 독자들의
공신력은 사라질 것이며, 결국 문학은 생명을 잃게 된다. 이는 신춘 제도가
문학의 생명력을 높이기 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매년 신춘문예로 많은 스타들이 탄생한다. 그들 중에는 지금도 찬란한 빛
을 발하는 시의 성좌가 있는가 하면,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성이 훨씬 많
다.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자의 작품들을 분석하여 그 성격과 특징을
언론의 속성과 관련시켜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문학과
저널리즘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요, 시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한 기초 연구
가 되기 때문이다.
  신춘문예 제도의 역사는 길다. 이를 처음 시행한 곳은 동아일보이다. 동
아는 1925년 1월말까지 원고를 모집하여 이듬해 3월 초에 당선작을 발표했
다. 그래서 명칭이 신춘문예가 되었다. 모집 장르는 소설, 시, 동요, 동화
극, 가정소설의 5개 분야였다. 상금은 각분야 1등 1인에 50원, 2등 2인에 각
25원, 3등 5인에 각10원으로 총 750원이었다. 이 해에 부문별로 1등과 2등
의 당선작을 거의 뽑지 않았다. 시 분야에 3등만 2편 있었는데, 그 중 하나
가 김창술의 시[봄]이었다. 다음 해엔 시행되지 않았고, 27년에 김해강 박아
지 등 4명의 시인이 등단했다. 조선일보는 좀 늦게 28년에 시행했다. 첫 해,
'시가' 분야에 7명의 입선작과 8명의 가작이 뽑혔다.
  시행 초기에 당선작을 거의 뽑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원인은 작품의 수준 미달보다 재정적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모집 광
고의 화려함에 비해 당선 편수는 빈약했다.
  그러나 발표 무대가 열악했던 당시 이 제도는 30년대에 유능한 신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대표적인 시인으로 황순원([우리의 새 날은 피바다에 떠서],
동아, 33)과 조명암([동방의 태양을 쏘라], 동아, 34)과 서정주([벽], 동
아, 36)와 김광균([설야], 조선, 38)과  함형수([마음], 동아, 39) 등이다.
이 제도는 일제 말기 동아 조선의 폐간으로, 시행이 중단되었다가 55년부
터 다시 이어졌다. 두 신문사와 함께 50년대에 한국·서울·경향신문사가 가
담했다. 이어 60년대 중앙과 대한이 합세했고, 뒤에 세계와 문화 그리고 지
방 신문의 확대로, 이 제도는 20세기 한국 문인 등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
다.
  이 제도는 역사가 길고, 배출한 문인이 많고, 가장 화려한 등단 코스라는
점에서, 문학 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당선을
노리고 있으니, 이 제도의 현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시행 초기와는 달리 이
제 문학 전문지도 많고, 발표 무대도 다양해진 지금도 이 제도에 대한 문학
지망생들의 관심이 큰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제도가 지니고 있는 장점
때문이다. 이를 다음 둘로 정리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신문이 지니는 대량 전달 효과에서 비롯된다. 현대는 대중 매체의
시대요, 특히 정초 휴일이라는 시기의 매체 효과는 아주 크다. 전국에  배달
되는 신년 특집호에 실리는 작품, 더구나 치열한 공개 경쟁에서 당선된 작
품, 이는 그  자체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둘째는 공모 제도로 경쟁과 심사의 공정성이 보장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추천제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추천제는 選者가 사전에 알려져, 그의 문학
적 경향을 따르는 아류가 생겨나 종속관계가 이루어지기 쉽고, 그것이 문단
파벌의 근원이 된다는 결점이 있다. 이에 비해, 신춘문예는 심사위원이 사전
에 공개되지 않아, 인맥 관계에 따르는 부작용이 없다. 따라서 참신하고 우
수한 작품이 뽑힐 수 있으니, 당선자도 작품 자체로 공정하게 인정을 받았다
는 긍지를 가질 수 있다. 이들이 모두 장점이다.
  화려하고 공정한 등단 절차로 알려진 이 제도는 과연 완벽한가. 결코 그
렇지 않다. 신문사가 주도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결점 또한 크다. 신문사
에는 여러 부서가 있다. 문화부는 그 중에 하나요, 문학은 문화부의 일부일
뿐이다. 그 비중도 또한 社內 사정이나 시대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이다. 한
겨레나 국민일보처럼 신문사 중에는 이를 운영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전문 문예지나 출판사도 많은데, 굳이 비전문 기관인 신
문사가 작가 배출의 공식 제도를 운영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주장도 가능하
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전문 기관의 운영에 따르는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접근하는 데에 아주 유익한 자료가 있다. [신춘문예를 말한다]
(신춘문예 '89당선 작품집, 도서출판 예하, 1989)란 글이다. 이 글은 좌담
회 기록문인데, 참석자가 모두 문화부 기자들이란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경
향·서울·조선·중앙·한국의 신춘문예 담당 기자와 이 제도에 비판적인 글
을 발표했던 한겨레 기자(조선희)가 참석했다. 김훈 기자를 비롯한 그들은
모두 실무 경험을 토대로 이 제도 전반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솔직히 털어
놓았다. 그들이 말하는 <신춘문예 운영상의 문제점>을 다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심사의 불공정성 문제였다. 공모의 생명인 공정성을 그들 스스로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정성은 전적으로 심사위원에 달린 것인데, 그
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참석자들의 주장 속에는 심사위원의 선정 과
정과 자격 그리고 심사 과정에 대한 불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심사위원
선정 권한은 문화부 데스크에 있는데, 그것이 객관적 검증 없이 그의 임의로
행사되어, 근원적인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것이 要旨였다.
  둘째, 짧은 기간에 심사를 종료해야 하는 促迫性의 문제였다. 참석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심과 본심을 별개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예심 기간은 3-4일,
본심은 6정도 걸린다고 했다. 이 기간에 예심 위원들은 철야로 진행하는데,
시간은 부족하고 읽어야 할 양은 많아서, 대부분의 작품을 일부분만 보고 탈
락시키고, 남는 작품(시 50여 편, 소설 30여 편)을 본심에 넘긴다는 것이다.
셋째, 당선작에 공통된 유행성의 문제였다. 참석자들은 소설이나 시 등의
장르에서 그것이 존재함을 시인했다. 이는 응모자들이 지나치게 당선에만 연
연하여, 좋은 작품보다는 당선작을 만들려고 하는 지나친 의욕에서 비롯되었
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신춘문예 특유의 스타일이 암암리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언론 제도가 신춘문예 양식과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주
장이다.
  넷째, 당선자들의 작가적 단명성 문제였다. 당선 이후에 왕성한 창작 활

동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신문사가 작가를
배출은 해놓고 키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선작이 최후의 작품이
되어버린 불행한 작가도 있다.
  이상의 문제점들은 그 운영의 실무를 맡고 있는 기자들의 경험적 발언이
란 점과, 제도의 개선을 위한 그들의 솔직한 제언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크
다.  또 이 문제들은 서로 필연적인 관계가 있어서, 문인은 물론이고 응모자
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문제점들 상호간의 필연성을 밝히는 데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즉 촉박
하게 진행되는 심사이니, 그 공정성이 보장되기 힘들고, 공정성이 불확실한
심사이니, 당선만을 노려 유행적 기교에 치중한 작품이 뽑힐 가능성이 높고,
그런 당선자는 단명하기 쉽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촉박성>, <불공
정성>, <유행성>, <단명성>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는가. 
  역대 당선작품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 또 당선 작가 중에는 많은 업
적을 쌓은 훌륭한 작가가 얼마든지 있는데, 근거도 없이 단순하게 논리화하
는 것은 지나친 단정이라는 비판이 예상된다. 이 단순 논리는 문화부 기자들
의 좌담 내용을 정리한 것일 뿐이니, 필자가 해명해야 할 몫은 아니다. 그러
나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간접 인용했고,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객관적 사실
을 토대로 필자의 견해 몇 가지를 덧붙인다.
  첫째 심사의 불공정성에 관한 것이다. 담당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심
보다 본심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예심위원들이 작품의 일부만을 보고 감으
로 뽑지만, 좋은 작품이 예심에서 탈락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그들은 믿
을 수 있으나,  본심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심사위원의 고령
을 들었다. 젊은 세대의 시를 심사하기엔 원로 문인은 적합하지 않으니, 본
심 위원의 연령을 낮추어 선정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본심을 없애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담당 기자들이 폐지론까지 내세우며 본심에 대한 강한 불
신감을 표시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좌담에서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조사한 자료 한 가지를 제시하고 싶다. 그 하나가 본
심 위원들이 반복(연속)과 중복(겹치기) 심사를 하는 점이다. 특정인에게 계
속 심사를 의뢰한 대표적인 신문사가 조선일보이다. 이 신문사는 박두진·조
병화에게 연속 맡겼다. 그들은 73-90년 사이 17년 계속 함께 심사를 했다.
공모의 생명이 심사위원의 비공개인데, 이렇게 같은 사람에게 연속 심사를
맡긴다면, 비공개의 의미는 없어진다.
  또 심사위원의 겹치기 심사도 큰 문제였다. 시 분야에서 중복 심사를 가
장 많이 했던 시인은 박남수였다. 그는 69년부터 72년까지 4년 동안 계속 4
번씩 중복으로 중앙지의 심사를 했다.(신춘문예 당선 시 목록 참조.) 당시
심사를 맡을 만한 원로 문인의 부족과 촉박한 일정 때문에 중복은 불가피했
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적 사정이 풍부해진 90년대에도 중복은 그대로 답습되었다. 김
주연은 94년에 조선·동아·중앙·대구매일 등 4번 중복 심사를 했고, 유종
호는 97년에 경향·서울·세계를, 같은 해 신경림은 경향·세계·한국의 심
사를 각각 맡았다. 그들 이외도 3번 이상 중복으로 심사한 문인은 적지 않
다.
  심사 기간이 다르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중복 심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
다. 그러나  모든 신문사가 거의 같은 시기에 촉박한 일정으로 심사를 진행
한다. 그 기간은 예심과 본심을 합해 10여일 정도, 그것도 예심이 끝난 뒤에
본심이 있다. 예심은 시간이 부족하여 철야를 한다. 그래도 작품을 다 읽지
못하여, 그 일부분만 읽고 작품 심사를 하는 촉박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4
곳의 심사를 겹치기로 맡는다는 사실, 또 4 신문사가 한 사람에게 중복으로
심사를 맡긴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신문사 담당자와 심사위원 양편 모두에 대해, 과연 그들이
심사를 공정·정확하게 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묻고 싶다. 동일한 기
준으로 모든 작품을 심사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예심제는 편법이요, 예심에
서 응모작의 일부분만 읽고 추리는 것도 편법이요, 편법으로 이루어질 수밖
에 없는 촉박한 일정인데, 대외적 책임을 져야할 심사위원들이 여러 곳에 중
복으로 심사하는 것은 더욱 편법이다.
  편법 심사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심사평을 보면, 좀 차이가 있
지만 많아야 50여 편의 시가 본심에 오른다 하니, 수 천 편의 응모작 중에
약 99%가 예심에서 탈락된다. 본심에서 검토되는 것은 응모작의 1% 미만에
불과하다. 심사를 대표하는 본심 위원은, 비록 예심을 거쳤다고는 하나, 총
응모작의 1% 정도를 심사하고, 당선작과 낙선작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
다. 심사는 예심 위원들이 거의 다하고, 책임은 본심 위원들이 지는 셈이다.
얼마나 큰 모순인가. 
  편법 심사의 모순이 촉박한 일정에서 비롯된다면, 마감일을 당기고 심사
기간을 늘리면 된다. 그런데 6-70 년대보다 8-90 년대의 일정이 더 촉박해졌
다. 응모작은  갈수록 많아지고, 응모 마감일은 오히려 더 연장되어, 촉박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그렇게 악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을 신문사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일간 신문이란 그날 발생한
사건을 그날 보도하는 것이 생명이다. 따라서 촉박한 일처리는 신문사의 생
리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의 결합으로 태어난 것이 신춘문예 제도이다. 이 제
도가 저널리즘 주도로 운영되는 과정에서 문학성의 손실이 크다. 그 희생을
막기 위해 촉박한 졸속 운영은 반드시 시정되든지 아니면 폐지되어야 한다.
문학적 손실이란 작품이 기교에 치우쳐 재미와 감동을 잃게 되는 것을 말
한다. 즉 편법 심사로 당선만을 노리는 유행적 작품이 많이 뽑히게 되고, 이
들은 내용의 깊이보다 기교의 현란함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 경향은
신춘문예 스타일을 형성하여, 현대 문학의 흐름을 기교에 치우치도록 유도하
여 결국 감동력을 잃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춘문예 스타일에 대
해 기존 문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하여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어 주목하게 된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역대 시편들 속에 내재한 공통점이 있는가에 대하여,
홍신선교수는 [한국시의 논리](동학사,1994)에서 '신춘시의 스타일'이란 용
어를 사용하며, 문인 사이에 공공연한 사실로 그것이 인정되고 있음을 지적
했다. 그 특징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그는 설명했다. 형식적으로 시가
길어졌다는 것, 내용상 신춘시 특유의 상투성이 많다는 것이다. 상투성이란
내용상 빈번히 반복되는 것으로, 50년대에 비극적 현실 반영, 6-70년대에 바
다나 겨울 이야기 또는 힘찬 출발의 이미지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자신과 유사한 견해를 가진 두 사람의 주장을 인용했다. '현실
반영 의식이 높아지고 長詩化된 경향'이라는 이근배씨의 주장을 인용, 신춘
시의 스타일을 설명했다. 또 "신춘문예 시를 읽다보면 거기엔 기성 시인들이
갈기갈기 찢겨져 누워 있다."란 김현 교수의 말을 인용, 모방적 유행성이 신
춘시에 존재함을 지적했다. 신춘시 스타일의 존재를 시인하는 그들은 모두
문단 사정에 밝은 분들임을 고려하면, 비록 객관적인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주장들이다. 그것을 바로 신
춘문예 제도의 한계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신춘시를 분석하여 이 제도의
의미와 한계를 밝히는 작업의 필요성을 높여주는 주장으로 볼 수는 있다.
           
 2. 당선시의 분석과 그 특징

  신춘문예 제도가 한국문학에 끼친 영향과 그 功過는 무엇인가. 이는 운영
상에 따르는 문제점과 문인들의 주장을 검토하는 것만으로 드러날 성질은 아
니다. 역대 당선작에 대한 치밀하고 객관적인 분석을 토대로 밝혀져야 할 매
우 까다롭고 조심스러운 문제이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만 없으니, 그것이 바
로 언론과 문학과의 관계를 밝히는 구체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문학의 생명력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을 말살하는
파괴자가 될 수도 있다. 이 제도의 진정한 의미는 신인을 몇 명 배출했느냐
에 있지 않고, 문학의 생명력을 높이는 데 있어야 한다. 즉 시가 폭넓은 독
자들의 사랑을 받도록 하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많은 독자들의 사랑
을 받는 시를 당선시켜야 되고, 당선 시인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도 제공해
야 한다. 언론사가 그들이 배출한 작가나 그 작품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
는다면, 이 제도를 운영할 의미도 가치도 없다. 
  이 제도가 시의 생명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는가, 아니면 생명력을 잃게
했는가. (생명력이란 시가 독자층에 전파하는 감동의 힘을 의미한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 당선시 전반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해방 이후 금년까지 목
록에 수록된 모든 시편들을 분석 대상으로 했다. 그 속에서 시대마다 두루
나타나는 유사성이나 공통점을 찾아, 그것이 이 제도와 어떤 관계가 있고,
한국시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주목했다.

  1)추상시의 경향

  모든 예술 작품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즉 보는 사람에게 즐거운 느낌
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 논리가 현대에 위협받고 있다. 사
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예술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행인들
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시각 공해가 되는 조각품, 미적 가치를 상실한 추
상화, 해독이 불가능한 난해시 등이다. 이들을 결코 인간에게 즐거움을 선사
하지 못한다. 이들을 대하며, 우리는 예술이 인간을 위한 방향을 이탈하여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 이들을 창작한 예술가들에 대해 일종의 배
신감을 품게 된다. 작자가 유명할수록 그 감정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실망감을 안겨주는 이 작품들은 모두 추상 예술이다. 인간에게 미적 감동
을 주지 못하는 이런 예술이 나타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있다. 왜냐하면, 관객이나 독자는 그들이 싫어하는 예술의 출
현을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예술가에게 있다면, 그들은 왜
추상 예술을 창작하게 되는가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과도한 이윤추구의
경쟁>에서 그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들도 경제적 가치에 치중하여 예술
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추상 예술에 경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추상 예술과
그 경제적 가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술의 가치는 크게 절대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눌 수 있다. 절대가치란 인
간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예술의 본질적 가치요, 교환가치란 예술의
경제적 상품 가치로 환금성을 의미한다. 양자는 서로 일치하는 것이 원칙이
지만, 현대 예술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특히 유명한 예술가의 추상
예술에서 이런 현상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술가가 교환가치에 치중하여 추
상 예술로 전향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여류 화가가 있다.
  그녀는 젊은 시절 한국화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려 세인의 주목을 받
았다. 예를 들면,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 혹은 꽃뱀의 비늘 하나하나 정치하
게 그려, 많은 상을 받았고 명성을 얻었다. 유명해진 뒤에 그녀는 반추상화
로 전향했다. 이렇게 구상으로 명성을 얻은 뒤에 추상으로 전향하는 사람이
많다. 파블로 피카소가 그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들은 일단 구상에서 추상으
로 전향하면 그 다음부터 추상 옹호론을 펴고, 그 아류를 만들며 추상화의
흐름을 주도한다. 이들은 왜 전향했을까. 그 이유를 추적하는 논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이미 명성을 얻었으니, 그들의 그림에 대한 수요는 당연히 많다. 많은 수
요를 공이 많이 드는 세밀한 사실적 구상화로 공급하기가 힘들어진다. 반대
로 공이 적게 드는 추상화로는 공급이 가능하다. 유명할수록 예술가는 추상
에 대한 유혹을 많이 받게 된다. 추상이 구상보다 생산성과 경제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추상은 눈속임이 용이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그림의 상품 가치)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추상화가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쉽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지적되었다.
강세황은 단원의 그림을 평하면서 "닭이나 개를 그리기는 어렵고, 귀신을 그
리기는 쉽다. "고 말했다. 또 明末에 발간된 {新平妖傳} 서문에 "귀신을 그
리기는 쉽고 인간을 그리기는 어렵다. "는 말이 있다. 이들은 궤변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실로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다. 늘 접하는 사물을 그리기는
어렵고, 볼 수 없는 사물을 그리기는 쉽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이
는 바로 추상이 구상보다 그리기 쉽고 또 눈속임이 용이하다는 뜻이다. 그러
니 이들의 비유가 참으로 적절하여,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서양화의 수용 과정에서 한국 화단에 추상화가 유행처럼 번졌다. 예술가
들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교환 가치만를 추구할수록 예술은 점점 절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결국 일반인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로써 인간을 배
신하는 예술이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 예술의 비극적 운명이다.
  한국 시단의 경우도 이러한 예술의 운명에서 결코 예외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한 모순을 안고 있다. 시인들이 절대 가치를 무시하고 시의 교환
가치만을 추구할수록 추상시가 유행하게 되고, 결국 독자를 상실하게 된다.
즉 시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을수록 추상화된다.
  추상시란 대상이 없는 이미지를 묘사하고, 의미를 희생시킨 시를 말한다.
극단적인 언어 유희에 빠져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 같은 시, 관념어를 남발하
며 애매성의 미학으로 독자의 눈을 속이려는 시가 여기에 속한다.
신춘문예 시편들도 절실한 내용 없이 당선만을 겨냥한 난해한 추상시가
많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모두들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까맣게 식은 帳幕속 一標的 없이 心臟에서
心臟으로 피로 通하는 星群.

 가뭇이 고개를 젖히며 落後한 基點 위에
 너의 노래는,
 또 한번 宇宙를 뒤덮는 흔들림, 나는 不變의 地軸.

되돌아 설 수 없는 360도만의 성한 우유빛 空間.
곤두선 時間의 層階를 밟으며
지금,
우리는 모두 굳어진 表情으로 스스로의 軌道를 상실한 무너진 길 위를 미
친듯이 疾走하는 것이다.- 박응석의 [夜路]

  독자를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난해시이다. 시어가 상징적 의미로 쓰
일 수 있지만, 그 배치가 조화롭고 아름다워야 한다. 위 시어나 이미지들은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다. 시어와 시어, 그 시어에 담겨진 이미지의 연결이
지극히 단절적이고 어색하다. "帳幕속 一標的 없이 心臟에서 心臟으로 피로
通하는 星群" 경우를 보자. 여기서 '표적' '심장' '성군' 같은 시어들은 상
호 연결이 안 된다. 이들이 결합하여 형성된 이미저리 또한 추상적이며, 그
대상이 없는 이미저리이다. 묘사의 대상이 관념이든 사물이든 그것에 대한
상상이 가능해야 한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그렇지 못하다. 상상할 수 없이
난해하고 추상적이다. 그들은 독자의 상상 속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의
미든 이미지든 그것들이 결합하여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는 생명력이 없다.
다음 시구도 사정을 비슷하다.
  ' 가뭇이 고개를 젖히며 落後한 基點'이나 '360도만의 성한 우유빛 空
間.' 등이다. 어휘의 수사가 거칠고, 난해한 추상적 이미지를 혼란스럽게 나
열해서 서정적 감동이나 전달의 힘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표현이다.
앞의 시행에 비해 다음의 끝 행이 비교적 묘사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굳어진 表情으로 스스로의 軌道를 상실한 무너진 길 위를
미친 듯이 疾走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세심히 살펴보면 의미가 반복되어 눈에 거슬리는 시어가 많
다. '우리', '모두', '스스로'는 그 의미가 서로 겹치고 있다. '우리'만으
로 시어의 경제성을 살려야 마땅하다. 또 '괴도를 상실한'과 '무너진 길'에
서 의미가 중복되고 있다. 50년대 전후의 무질서한 사회상을 강조하기 위한
시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시인은 구체적인 세밀한 묘사에 자신이
없는 시인이다. 그러니 자연 추상적인 이미지만 나열했다. 조야한 수사와 난
해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를 무질서하게 나열한 시들이 당선작 속에 상당히 많
다. 한자어를 지나치게 사용하고 있는 것도 또한 특징이다.
  위와 같은 시적 결점은 이 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당시 당선작에 자주
발견된다. 다음 시도 그 하나의 예에 속한다.

大理石 圓周를 돌아
걸어오라.
二十步 쯤,
三十步 쯤만
조금 더 걸어오라.

지금은 十一月 저녁,
남은 건 다만
가지들 뿐
그것들이 우리를 命令할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를
우리를 命令할 수 없다.
어떤 層階위에서는
太陽이 쓰러져서 氣盡하고
어떤 層階 위에서는 太陽이
자리를 걷고 돌아선다.
大理石 圓周를 돌아오라.
조금 더 걸어오라.
이 정밀을
이 自由를 우리는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고
發狂할 수 있다.
나무가지 위에 숨어서 졸던
까마귀가 날아간다.- 朴泰 의 [大理石圓周를] 일부

  이 시도 앞에서 언급했던 시와 유사한 점이 많다. 시가 길다는 것, 한자
어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 시어 구사가 세련되지 못한 점, 이미지가 추상적
이란 점, 등이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미지가 덜 난해하고, 그 전개에
혼란이 전자보다 적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다. 예를 들면 "二十步 쯤,/ 三十步 쯤만/ 조금 더 걸어오
라."이나, "어떤 層階 위에서는/ 太陽이 쓰러져서 氣盡하고/ 어떤 層階 위에
서는 太陽이/ 자리를 걷고 돌아선다."같은 곳이다. 여기서 배경이 되는 장소
에 대한 묘사가 지극히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즉 '20보 쯤', '30보 쯤',
'어떤 층계' 등은 모호한 표현으로 구체적이지 않다. 그것은 시에 담긴 시인
의 감정과 생각이 막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시인의 절실한 감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지 않은 시는 결코 독자를 감동시킬 수 없다. 이들은 시인
이 시의 절대 가치보다 상대 가치에 치중하여, 독자를 무시하고 오로지 심사
위원만을 의식하여, 오직 당선만을 노려 쓴 시이니, 독자들에게 불쾌감만 주
는 것은 당연하다.
  대상이 없는 애매한 이미지를 혼란스럽게 나열한 생명이 없는 난해한 추
상시편들이 당선작 중에 의외로 많다. 이 때문에 역대 당선작들이 치열한 경
쟁을 통과하여 화려하게 등단했으면서도 대체로 일반 독자들에게 철저히 외
면당했다. 이 사실은 신춘문예 제도가 시의 생명력을 높이기 보다 상실하게
역작용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신춘문예 제도의 폐지론이 제기될
수 밖에 없다.

  2) 형식과 주제 의식

  당선 시편들이 대체로 행이 긴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당선작이 1편 선정
되는 제도와 관계가 있다. 1편으로 결정되니 당선되기 위해 응모자들이 의도
적으로 길게 쓴 것으로 이해된다. 당선작 중에 가장 긴 것이 신동엽의 [이야
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이다. 이 시는 서화, 본화, 후화 3부로 짜여 있고, 본
화는 다시 6화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시행이 무려 277행이나 되는 장시이
다. 이 시는 행이 길고 많아서 분량으로 쳐도 단편소설에 해당된다. 시인은
극시라는 형식을 시도했다. 이 시뿐만 아니라  5-60년대 당선된 시들이 특히
길었다. 이는 주제 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이 때의 시들이 사회 현실을 반영
한 작품들이 많다.

<第5話>
가리워진 안개를 걷게 하라.
國境이며 塔이며 御用學의 울타리며
죽 가래로 밀어 바다로 몰아 넣으라.

하여 하늘을 흐르는 날새처럼
한 세상, 한 바람, 한 햇빛 속에
萬가지와 萬노래를 한가지로 흐르게 하라.

보다 큰 集團은 보다 큰 體系를 건축하고,
보다 큰 體系는 보다 큰 惡을 釀造한다.

組織은 형식을 강요하고
형식은 僞造品을 모집한다.
하여, 傳統은 궁궐 안의 上典이 되고
造作된 權威는 주위를 浸蝕한다.

國境이며 塔이며 一萬年 울타리며
죽 가래로 밀어 바다로 몰아 넣으라.-신동엽[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大地]

  이 시는 사회 개혁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개혁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 쟁기이다. 쟁기는 딱딱하게 굳은 땅을 갈아서, 새 싹이 태어날 수 있게
부드러운 흙으로 바꾸는 기구이다. 위에서 쟁기의 대용물이 죽 가레이다. 가
레가 쟁기의 의미를 대신하고 있다. 이 시에서 '어용학의 울타리' ,'조작된
귄위' , '일만 년 울타리' 등은 구시대 질서를 상징한다. 강대국에 사대하
며, 나라를 다스려온 지배 이념을 상징한다. 이를 모두 "죽 가래로 밀어 바
다로 몰아 넣으라."는 정신은 바로 혁명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혁명
의식은 사회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한다.
  "한 세상, 한 바람, 한 햇빛 속에/ 萬 가지와 萬 노래를 한 가지로 흐르
게 하라."
  많은 것이 하나로 합쳐 조화를 이루고 서로 동화되는 것이 바로 공동체
의식이다.  복합적인 사회의식을 시에 반영시키기 위하여, 즉 내용적 필연성
에 의해, 시가 길어지는 현상은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내적 필연성 없이 괜히 길어진 시들이 당선작 중에는 의외로 많다. 불필요하
게 길어진 장시들이 유행하여, 그것이 신춘문예 시는 길어야 한다는 인식을
조장했고, 나아가 장시 스타일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山과 山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
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婆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朴鳳宇의 [休戰線] 첫 연

  이 시는 비록 길지만 형식과 내용이 잘 조화된 시이다. 왜냐하면 갈등적
사회 의식을 담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길어졌기 때문이다. 믿음 없는 얼굴이
어둠 속에 마주한다는 것은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의미한다. 이는 또 분단
비극의 민족 현실을 상징한다. 전쟁이 일어날 위험성이 아주 높은 휴전 시대
에, 안일하게 살 수 없는 우리의 각박한 실존의식을 이 시는 잘 드러냈다.
그러한 사회 현실감을 살리는 데는 긴  시형이 필요하다. 그래서 길어진 경
우에는 시의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된다.

  3) 역동적 이미지

  신춘시는 새 해 첫날에 발표된다는 점에서 새 출발의 이미지를 잘 살린
시들이 많다. 아침이나 출발의 이미지를 확대시켜 그것을 활용한 점이다. 출
발을 강조하기 위하여 출항이나 항해 나아가서 바다와 선박 등 동적인 이미
지로 확대된다. 새 해 첫날은 겨울의 이미지와 겹친다. 실제로 당선작을 보
면 겨울을 배경으로 한 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겨울의 확대 이미지로 눈, 빙
하, 강설 등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작품 중에는 유행적인 것도 많다. 그것이
유행이 그치지 않으려면 전체 이미저리에 주제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어야 한
다.

출렁일수록 바다는
頑强한 팔뚝 안에 갇혀 버린다.
안개와 무덤, 그런 것 속으로
우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溺死할 수 없는 꿈을 부등켜 안고
사내들은 떠나간다.
밤에도 늘 깨어 있는 바다.
燒酒와 불빛 속에 우리는 소멸해 가고,
물안개를 퍼내는
화물선의 눈은 붉게 취해 버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진다. -윤석산 [바다속의 램프]의 일부

  이 시는 바다와 출발의 이미지를 역동적으로 잘 결합시키고 있다. 생성과
소멸, 만남과 이별, 그러한 인생의 본질적인 주제의식으로 바다와 출발의 이
미지를 흡수하고 있어 신춘시의 스타일을 초월하고 있다.
  겨울을 노래한 시 중에도 단순한 신춘시 스타일을 훌륭하게 극복한 시들
이 많다. 다음 시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무가지마다 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行人들.-吳鐸藩의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첫 연

  이 시의 첫 행에 작가의 탁월한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이는' 것이나, "나무가지마다 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등의 이지저리에서 이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둘째 시행을 '나무가지 손
끝마다 純銀으로 빛나는'이 아니고, "나무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으로 묘사해 인상적이다. 이는 상징주의적 감각으로 얻은 표현이다. 시인과
자연이 합일·교감하는 순간의 경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의 성
과로, 그 표현이 구체적이고 세밀하여 시적 효과가 더욱 크다.
 신춘시 응모자는 청년층이 많다. 따라서 젊은이들의 의식이 많이 반영되
어 있다. 이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강한 실험정신
이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저널리즘의 속성이기도 하다. 양자의 자연스런
결합으로 실험의식이 강한 작품이 당선시 중에 많다. 형태뿐만 아니라, 사고
와 논리를 파괴하려는 시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 못하면 극단적인 추상시로
발전해 시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그렇게 치닫지 않고 타협한 양상으로 발전
한 것이 이국정조이다. 이는 시에 이색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효과가 있
다.
 이를 제목에 반영한 시들도 많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신명석의 '나
의 슬픈 친구 [이반 드트리빗치]에게', 최하림의 '빈약한 올페의 회상', 이
인해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남진우의 '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
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홍일표의 '달리의 그림
속에서 사라진 시간의 행방은', 조재영의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김민희의 '폴리그래프 27', 한혜영의 '퓨즈가 나간 숲' 등이다.
외국인 이름을 사용한 제목은 길다는 것이 특징이다. 제목뿐만 아니라 시 속
에서도 이를 활용하여 시적 분위기를 새롭게 한 시가 많다.
 
3. 유행성을 극복한 시

  역대 당선작 중에서 신춘시의 결점을 극복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
한 작품은 없는가. 좋은 시란 상을 받아 빛나는 시가 아니고, 읽히는 순간에
독자의 가슴속에서 빛나는 시가 좋은 시이다. 시가 독자의 가슴에서 빛을 발
하기 위해서는 감동의 자장을 띠고 있어야 한다. 감동력은 시인의 혼이 살아
있어야 생긴다. 시의 혼령이 생생하게 잘 살아있는 대표적인 시로 나태주씨
의 [대숲 아래서]이다. 이시는 다른 당선시들이 대부분 겨울을 노래한 데 비
해, 가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개성적이다. 이 시에서 가을은 단순한 배경
에 그치지 않고 있다. 시인의 영혼이 꽃피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기 때문이
다.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제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 자국,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녘밥 일찌기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나태주의 [대숲 아래서]


  이 시는 시인의 혼이 살아있는 시이다. 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무의식까지 포함한 모든 정신활동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그 속에는 시인의
체험과 개성과 사상 등 모든 것이 반영되어 있다.
  N. 하르트만은 심미 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관조(觀照)로 보았다. 그
는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1차적 관조는 육안으로 보는 것이고,
2차적 관조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심미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2
차적 관조이다. 여기서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N.
하르트만, 전원배역, 미학 , 을유문화사, 1995.)  시에 작자의 혼이 담기는
것은 바로 2차적 관조에 의해서 가능하다.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그것
을 묘사할 때, 비로소 시인의 혼이 살아나고, 감동의 전파력이 생긴다.
이 시에서 시인의 혼이 제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은 "이 가을 /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란 표현이다. 이 중에서도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이란 곳이다. 이는 자연을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표현이다. 이 곳에 시인의 혼이 담겨 있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
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라는 표현에서 몰고 몰리는 이미지는 삶의
현장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시인의 존재를 상징한다. 시인은 현실에서 숙명
적으로 패배적 존재이다.  그 패배감과 상실감과 실연감의 무게가 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절망감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것이 이 시의
장점이다. 인간의 비애와 절망감과 가을 날 자연미을 잘 대비시키고 있다.
자연미가 돋보이는 것이 밤바람 소리, 실비단 안개, 달님 등이다. 이러한 대
상들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묘사했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
는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그래서 시인의 혼이 살아있는 참으로 개성적인 시
이다. 
  시의 의미와 표현이 가장 잘 조화된 대표적인 시로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이다. 이 시는 당선시로는 보기 드물게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시가 소설과 영화로 재창조 된 것이 그 증거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待合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流璃窓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內面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靑色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歸鄕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和音에 귀를 적신다
子正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雪原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呼名하며 나는
한 줌 톱밥의 불꽃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沙平驛에서> 全文

  이 시는 표현이 아름다우면서 의미를 희생시킨 곳이 없다. 양자가 잘 조
화를 이루어 영상미가 극대화되었다. 이 시는 관념어를 극히 절제하고 구체
적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간결·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눈 내리는 밤, 간이역 대합실의 정경)을 보는 것 같
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사실적이며 세밀한 영상적인 이미지들은 < 대
합실>이라는 전체적 공간으로 잘 통합된다.
  사평역 대합실, 눈 내리 겨울 밤, 연착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톱밥
난로를 쬐며, 지루한 기다림을 잊기 위해 잠시 사귀다가 훌쩍 떠나버린 텅빈
대합실, 이것이 시의 공간이다. 인간의 만남과 떠남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소
이다. 이곳은 승객들에게 늘 열린 공간이요, 사회 지향적인 현실 공간이다.
배경이 그렇듯 주제의식도 따듯한 인간애와 공동체적 유대감을 반영했다.
주제의식이 전체 이미지들을 잘 제어한 대표적인 시로 조은길씨의 [3월]
을 들 수 있다. 그 만큼 이 시는 주제의식이 강해 신춘시의 유행성을 훌륭하
게 극복했다.

①벚나무 검은 껍질을 뚫고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따뜻하다
햇살에 안겨 배냇잠 자는 모습 보면
나는 문득 대중 목욕탕이 그리워진다
②뽀오얀 수증기 속에
스스럼없이 발가벗은 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서로서로 등도 밀어 주고 요구르트도 나누어 마시며
볼록하거나 이미 홀쭉해진 젖가슴이거나 
엉덩이거나 검은 음모에 덮여 있는
그 위대한 생산의 집들을 보고 싶다
③그리고
해가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을 시장 구석자리에서 날마다 생선을 파는
생선 비린내보다
니코틴 내가 더 지독한 늙은 여자의
물간 생선을 떨이해 주고 싶다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일어나는 젖비린내 아 -
④어머니
어두운 마루에 허겁지겁 행상 보따리를 내려놓고
퉁퉁 불어 푸릇푸릇 핏줄이 불거진
젖을 물리시던 어머니-조윤희 [3월]일부

  이 시의 이미지 묘사는 정확하게 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장
점이 많다.
  첫째 묘사가 새롭고 개성적이다. 새롭게 묘사하기가 잘 되어 있다. "갓
태어난 젖빛 꽃망울들" 이 "햇살에 안겨 배냇잠을 자는 모습"이라든지, "나
무껍질 같은 손으로 툭툭 좌판을 털면 울컥 / 일어나는 젖비린내" 같은 표현
이 그 좋은 예이다.
  둘째 시상의 전개가 동적이고 전환이 신속하다는 점이다. 이 시는 크게 4
개의 이미저리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 ①햇살에 안긴 꽃망울/②목욕당의 裸
婦들/③좌판 생선장수 할머니/④젖먹이의 어머니이다.
  이들은 때로는 끊어질 듯 연결되어 잘 결합하고 있다. 단조로운 전개를
극복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이어지는 이음매가 ②와 ③ 사이이다. 이 사이에
기발한 착상이 있어 구조미가 한결 살아난다. 즉 이미지 전개에 속도감과 변
화미가 있어 역동적이다. 특히 4 단계 이미저리 모두에 주제 의식의 작용하
고 있어 생명감이 넘친다.
  셋째 주제 의식이 모든 이미지들을 통합하는 제어력이 뛰어난 점이다. 이
시의 주제 의식은 모성에서 시작되어 모성애로 종결된다. ①에서 꽃망울을
태어나게 하는 모체는 태양이다. 태양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며 원
초적 모성의 상징이다. 태양이 자연에 베푸는 은혜의 손길은 햇살이다. ①에
서 따뜻한 햇살로 자연에 대한 태양의 모성애를 강조했다. ②에서 이것은 인
간의 모성애로 발전한다. ③에서 그것은 할머니의 모성애로 심화된다. ④에
서 가정과 천지에 가득한 모성애를 강조하며 시가 끝난다.
  이 시를 色讀하면 주제 의식이 지나치게 노출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
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전체 이미지들을 제어하는 데 필수적임을 발
견하게 된다. 주제 의식은 햇살에 반영되어 있다. 햇살은 태양에서 온다. 태
양은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생성시키는 모체로 모성의 상징이다. 자연에 미
치는 태양의 힘처럼, 모성애는 인간의 출산과 육아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
를 지탱시키는 모든 힘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 시의 주제다. 그 주제 의식이
시의 모든 이미지들에 대한 강력한 제어력을 가지기 위해 필연적으로 강하게
드러나 있다. 또 그것이 박애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어 IMF시대의 문학 정신
으로 아주 적절하다.
  이렇게 시의 주제의식은 시대 정신을 잘 반영해야 독자층에 공감의 지평
을 넓힐 수 있다. 공감의 지평이 넓은 시가 많이 당선되어야 신춘문예 제도
는 의미가 크다. 그렇지 못하면 이 제도는 문학의 생명력을 약화시켜 결국
폐지론자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세 편의 시처럼 좋은 당선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감히 신춘문예 제도의 폐지론을 주장하는 명백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선만을 노려 독자를 외면하고 심사위원만을 의식하여 쓰는 것이 응모시
의 특징이다. 이런 시편들은 작가가 심사위원에게 무엇인가 많이 알고 있고,
기발한 생각과 신선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몇 편의 작품으로 보여주
려는 그의 과시적이고 허위적인 태도가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앞에서 설
명한 시[ ]처럼, 불필요하게 한자어를 남용하거나 잡다한 이미지를 혼란스럽
게 나열한 작품들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들은 필요 이상으로 난해하고 추
상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이들 중에서 우수한 작품을 뽑는 것이 신춘문예 제도였다. 이 제도가 한
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등단 절차로 굳어진다면, 그것은 독자층을 무시하는
난해한 추상시에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격이 된다. 독자들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난삽한 추상시를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한다면, 그 문학성이란 결국
시가 독자를 잃도록 작용하며, 독자에 대한 시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니 이 제도에서 뽑힌 <당선작의 문학성>이란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유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선작들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 장시화
는 필연적으로 시의 산문화를 유도한다. 시가 불필요하게 길어지면 시 장르
의 장점과 개성을 잃게 만든다. 이는 궁극적으로 시 장르의 소멸를 의미한
다.
  신춘문예 제도가 독자에 대한 시의 생명력과 시 장르의 기능을 잃게 만드
는 역작용을 한다면 그 존재의미는 없어진다. 이러한 부작용이 신문사라는
비전문적 기관이 신인 양성을 무책임하고 졸속으로 운영하는 데서 비롯되었
다면, 이 제도는 하루 속이 폐지되고, 그 대신에  문학 전문지나 전문 출판
사가 그 기능을 직접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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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03 15:12

    첫댓글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특히 기성시인의 낱말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누워있다 라는 말/...................저두 반성합니다.^^
    올려주신 박 이사님 감사드려요

  • 13.01.24 17:48

    부천에서 이 글을 읽습니다. 침침한 안경알 닦고 다시 본 풍경. 산뜻하면서도 마음은 무거워지고.
    이런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도록 기회 준 김포문학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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