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경의 남쪽]이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현실적 삶을 성찰하는 기능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힘 있는 매체의 하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국경의 남쪽]이 껴안고 있는 민족 분단의 비극적 삶을 외면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신파적 통속 코드 속에서, 이미 낯익은 관습적 코드를 반복하며 전개된다고 해도, 소재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이야기의 핵심을 끝까지 힘 있게 유지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워렌 비티의 [초원의 빛]에서, 영원히 헤어질 것 같지 않게 그렇게 사랑하던 두 남녀가 각자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는 자신들의 삶을 따라 흘러간 뒤 결국 다른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던 마지막 씬은,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믿고 있던 젊은 날의 나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었던가. [국경의 남쪽]을 보며 우리가 흐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이 거대한 세계 앞에서 우리들은 너무나 왜소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며, 역사의 파도 속에 휩쓸리는 개인의 비극적 삶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굿바이 레닌]의 아이템을 훔친 짝퉁 통일극 [간 큰 가족]의 잔물결이 흘러간 뒤, 이데올로기라는 정치적 장벽과 분단 현실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희생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결합시킨 멜러물이 등장했다. [국경의 남쪽]은 80년 광주의 비극을 잊을 수 없는 우리 세대에게 [박하사탕]이 갖는 당위적 의미만큼,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분단 시대에 꼭 있어야 할 영화다.
조선노동당 창건일에 태어난 선호(차승원 분) 가족은, 조국을 위해 전사한 할아버지의 후광으로 좋은 출신성분을 인정받아 평양에서 살고 있다. 선호는 만수예술단 호른 주자로 김일성 생일을 기념하는 북한 최대의 명절인 4.15 태양절 축제 공연 준비를 하던 중 아름다운 처녀 연화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전사한 줄 알았던 할아버지는 남한에 살아계시고 비밀리에 선호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온다. 그 편지가 발각되어 숙청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들은 비밀리에 남한 행을 결심하는데, 선호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연화(조이진 분)와 이제 막 가슴 떨리는 사랑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호와 연화의 순수한 사랑은 [국경의 남쪽]에사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이 실감나게 전달되지 않으면 왜 연화가 죽음을 무릅쓰고 탈북했을까라는 결정적 의문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평양 대성산 놀이공원에서 관성렬차를 타고 공중그네 위에서 지극한 시선으로 사로를 바라보는 모습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선호와 연화가 첫 키스를 나누는 평양 보통강 유원지의 버드나무 숲길은 우리의 모습과는 다르면서도 닮아 있는 분위기를 적절하게 재현하고 있다.
제작진들은 김일성 광장을 포함한 평양 시내의 모습,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그들이 함께 냉면을 먹는 평양 옥류관 등 북한의 실제 장소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했다. 인공기나 김일성 뱃지, 혁명구호가 적힌 플랭카드 등 그동안 남한 사회에서 금기시되던 북한 체제 내의 다양한 모습들이 영화 속에는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탈북자 문제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북한은 물론 중국에서도 촬영이 금지되었다. 영화 속 장면은 일부는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고 국내에서 셋트를 만들어 제작한 것이다.
한강 고수부지격인 평양의 보통강 유원지는 버드나무가 많은 한강 반포의 서래섬에서 찰영되었다. 평양대극장의 혁명가극 공연에는 뮤지컬 명성황후 팀의 화려한 군무가 참여했고, 4.15 태양절 축제가 펼쳐지는 김일성 광장 씬은 데전 정부청사 앞 광장에서 촬영되었다. 대성산 놀이공원은 경남 김해의 폐쇄된 놀이공원을 한 달 동안 공사한 끝에 북한의 놀이공원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국경의 남쪽]은, 1968년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미워도 다시 한 번]처럼 분단 현실이 낳은 비극적 가정의 해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야기의 마무리는 그동안 시대가 변한 것만큼 차이가 난다. 누구도 죽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한 사랑을 얻지는 못한다. 남한 사회에 무사히 정착한 선호는 북에 두고 온 연화를 불러내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지만, 탈북자들의 아픔을 이용해서 돈을 가로채는 전문 사기꾼들에게 속아 정착금 전부를 사기당한다. 그러나 북에 남은 선화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사고로 가까워진 치킨 집 여자(심혜진 분)와 결혼을 한다.
[국경의 남쪽]이 뛰어난 것은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평양대극장에서 공연된 북한의 혁명가극 [당의 참된 딸]을 5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해서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재현해냈다거나,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펼쳐진 장미꽃 5만 송이로 장식된 4.15 태양절 축제를 사실처럼 보여주는 장면들 때문이 아니다. 남북 분단의 비극이 갖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아픔을,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체감도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배우들이 있다. 개인 통산 관객 2천만을 돌파한 무서운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차승원은, [혈의 누]로 코믹 레벨을 떼는 데 성공하더니 이제는 멜러 레벨까지 점령하려고 한다. 욕심 많은 배우답게 극중 선호가 갖고 있는 딜레마를 섬세하게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볼 배우는 연화 역의 조이진이다. 2006년 스타탄생의 가장 핵심에 위치하고 있는 이 젊은 배우는, 힘과 기교를 모두 갖추지는 못했지만 아직 어느 배우도 갖고 있지 못한 새로운 영역의 매력을 소유하고 있다. 물론 관록의 심혜진은 능구렁이처럼 얄밉게 자기 배역을 손해 보지 않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 괴실을 따먹는다. 차승원과 조이진, 두 배우들이 만드는 연기의 긴장감이야말로 [극경의 남쪽]이 생동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며칠 후면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떠났던 피난길. 수 십 년이 지나도록 다시는 고향땅을 밟을 수 없을 줄 아무도 몰랐다. 그때는. 남한에 정착한 실향민들 중에서는 북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 온 젊은 아버지들도 많았다. 통일이 되면 남쪽의 가족들을 버리고 북에 두고 온 가족에게 달려가겠다고 말하는 실향민 아버지를 나는 만난 적도 있다. 이제 막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피난을 떠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헤어진 북의 부인과 자식들과는 다르게 현재 옆에 있는 남쪽의 부인은 이미 수십 년을 같이 살았으니까 북의 가족들에게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거대 집단에 희생되는 왜소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국경의 남쪽]의 미덕은, 영화 속에서 섣부른 화해도 서투른 증오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호와 연화의 갈라진 인생은 그들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영화는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의 삶을 비춰준다. 쓸쓸하고 허무하며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분단의 상처를 안고 태어난 원죄이다. [국경의 남쪽]은 가장 왜소한 개인사적인 상처를 통해서 거대한 집단적 상처의 원형에 접근하고 있다. 통일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어떤 생경한 구호도 외침도 없지만 광장에 가득 찬 함성보다도 훨씬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