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집착을 놓지 못하면
결국 ‘평정심’은 깨지고 말아
게송 81) 단단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이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새김: 커다란 바위 덩어리는 아무리 억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이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그 어떤 굉장한 칭찬에도 우쭐거리거나, 그 어떤 모진 비난에도 마음이 소용돌이치지 않고 칭찬과 비난에 초연하다는 가르침이다.
바위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단단한’ (eka+ghana:에까가나) 이란 하나(eka:에까)의 통짜로 된 커다란 덩어리의 바위를 말함을 알 수 있다. 이런 큰 바위여야 온갖 풍상에도 끄떡없음을 비유하기 위함이다.
게송 83) 덕 높은 사람은 모든 면에서 놓아 버린다.
덕 높은 사람은 쾌락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행복이나 괴로움에 당면해도
지혜로운 사람은 변동을 보이지 않는다.
새김: 덕 높은 사람은 어떤 것이든지 집착함이 없이 놓아 버린다. 어진 사람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고, 감각적인 말 속에서 쾌락을 찾지도 않는다. 그래서 허망한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어떤 희, 노, 애, 락에 부딪쳐도 지혜로운 사람은 우쭐하거나, 침울하거나, 성내거나, 슬픔에 빠지는 일이 없고, 감정에 변화가 없이 초연하다는 가르침이다.
‘덕 높은 사람’은 삽뿌리사(sappuris쮄)의 번역인데 윤리적으로 착하고 어진 사람, 선(善)한 사람, 성자의 뜻을 갖는다. ‘놓아 버린다.’란 짜자띠(cajati)의 번역인데 ‘짐을 내려놓는’ 의미도 있다. 한국 선가에서 ‘내려놓으라’는 말인 방하착(放下著)과 똑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움켜쥐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놓아버리라’는 말은 아주 훌륭한 표현인 것 같다.
끝의 줄의 ‘변동을 보이지 않는다’의 ‘변동’은 웃짜와짜(ucc쮄vaca) 의 번역인데, 원 뜻은 ‘높고 낮은, 다양한’의 뜻으로 감정의 여러 모양을 뜻한다. 상황에 따라 감정이 오르내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감정의 이런 다양한 높고 낮은 모양을 표현하기 위해 ‘변동’이라고 의역하였다.
이 두 개의 게송은 덕 높은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희, 노, 애, 락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평온을 잃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는 감각적 욕망에서 이미 떠났다. 그는 모든 집착의 끈을 놓은 사람이다. 그는 좋고 싫고를 초월한 사람이다.
명상 수행의 4선정(四禪定)에서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고통도 쾌락도, 행복도 불행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평정의 단계를 말한다. 평정은 초기불교가 지향하는 수행의 최고점이다. 평정은 마치 고요한 호수와 같이 감정의 흔들림이 없이 평온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감정의 동요가 없으니 물론 칭찬과 비난에 초연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작은 칭찬에도 기분이 좋아지고, 작은 비난에도 기분이 한없이 움츠러든다. 마치 순간순간 변하는 하늘의 구름처럼 그렇게 감정의 물결이 출렁거린다. 움켜쥐고, 쌓아 모으고 아무것도 놓아버리지 못한다. 행복이 오면 그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좋아하고, 괴로움이 오면 우울함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향점은 부처님을 닮아가는 길이다. 부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아주 조금이라도 그 분의 가르침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무엇이건 집착을 놓아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평정’이 깨진다는 사실이다. 숫따니빠따 5:4에 브라흐민 학인 멧따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세상의 갖가지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모든 종류의 괴로움은 근본적인 집착에서 온다. 어느 곳에서든, 어느 것에라도 집착하지 말라.”
일아스님 ㅣ 원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