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6>
깨달음 이룬 나한의 내면 엿볼 수 있어
전쟁·가뭄 극복 위해
왕실 차원에서 조성
모델은 당시의 스님들
16·500·100 나한상…
다양한 표정과 자세로
깨달음 경지 형상화
창령사지 출토 석조나한상, 조선시대 초기, 국립춘천박물관.
이색(李穡, 1328~1396)은 복을 구하고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황해도 서흥(瑞興)의 자비령(慈悲嶺) 나한당(羅漢堂)을 중수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 나한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자신의 깨달음(아라한과, 阿羅漢果)를 얻기 위해 수행에만 전념하던 나한(아라한)이 중생을 도와주는 성격까지 가지게 된 것은 중국 당나라 7세기 후반부터이다. 고려시대 나한 신앙은 이러한 영향 속에서 왕실 주도로 전개되었는데, 왕실 발원 나한상들은 가뭄과 외침을 극복하고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열렸던 나한재(羅漢齋)와 백좌인왕도량(百座仁王道場, 이하 인왕도량)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나한재는 십육나한재(十六羅漢齋)와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로 구분되며,이 때 봉안된 16나한상과 500나한상의 존명(尊名)은 경전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고려의 나한상은 대동소이한 모습이어서 어느 그룹에 속하는 지에 대하여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인왕도량에 봉안된 100존의 나한상은 존명마저 확인되지 않아 구체적인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비록 이들 나한상 간의 조형적인 차이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고려의 나한상들은 모두 “깨달음을 구하는 성자(聖者)”의 이미지에 걸맞게 붓다의 말씀을 경청하는 성문(聲聞)이나 스스로 공부하는 독각(獨覺, 연각緣覺)의 모습을 띠고 있다.
금동빈두로존자상, 고려시대 11세기 전반, 크기 42cm, 국립중앙박물관.
사실 고려 나한상의 모델은 당시의 승려들로 추정되는데, 개성 넘치는 얼굴 표정과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우리나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900~975)이 꿈에 나타난 500명의 승려를 972년(광종 23)에 화공에게 오백나한으로 그리게 하여 안선보국원(安禪報國院)에 봉안하였다는 기록과 충청남도 서산의 보원사(普願寺)에 있을 때, 보령 성주사(聖住寺)의 승려 500명 중 한 사람이 밤에 홀연히 나타나 그에게 문안을 드렸는데, 탄문이 이를 오백나한이 빛을 나투며 절(사원)에 온 것으로 여겼다는 기록도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한편 중국에 왔던 인도(印度)와 서역(西域)의 고승들을 “나한동유(羅漢東遊, 나한이 동쪽에서 노닌다)”라고 기록한 경상북도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의 비문은 고려 초기에 인도와 서역 승려를 나한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실제 나한상을 조성한 고려의 장인(조각가)들은 석가모니 붓다의 제자인 나한을 직접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나한으로 인식되었던 승려들을 그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의 나한상은 나한재의 16나한상과 500나한상, 인왕도량의 100나한상으로 구분된다. 이 중 16나한은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에서 사대비구(四大比丘)로, 다시 16대성문(大聲聞)으로 존자의 숫자가 확대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6나한은 당나라의 현장(玄奘)에 의해 654년에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密多羅所說法住記)>가 번역되면서 석가모니 붓다의 부탁을 받아 미륵불이 인간 세상에 올 때까지 정법(正法)을 지키고 중생들을 도와주는 보살과 같은 대승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는데, 고려의 나한상도 이러한 기능적 역할을 기대하면서 조성되었다.
예천 남본리 출토 소조나한상, 고려시대 11세기 전반, 복원 크기 56cm, 국립대구박물관.
고려 왕실에서 주도한 십육나한재는 개경(송악, 황해도 개성)의 외제석원(外帝釋院)과 흥륜사(興輪寺)를 중심으로 열렸는데, 이곳에 봉안되었던 16나한상은 현존하지 않아 그 전모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장안사(長安寺) 나한당 16나한상, 복령사(福靈寺) 소조십육나한상, 묘광사(妙光寺) 16나한상, 금골산(金骨山) 서굴(西窟) 16나한상, 송나라 휘종(徽宗)이 1118년(예종 13)에 보내어 안화사(安和寺)에 봉안한 16나한상 등에 대한 기록은 고려 전 시기에 걸쳐 16나한상이 활발하게 조성되었음을 알려 준다.
경기도 오산에서 출토된 금동빈도로존자상(이하 금동존자상)은 개경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의 승려가 “제1 빈도로존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명문이 대좌 정면에 새겨져 있어서 분명한 16나한상의 한 존임을 알 수 있다. 금동존자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장삼과 가사를 입은 채 가부좌하고 있으며, 목에는 굵은 염주를 걸고 양손으로 지물(持物) 혹은 주장자(拄杖子)를 들고 있다. 금동존자상은 장방형의 얼굴, 양감이 풍부한 양 볼과 턱, 좁고 둥근 어깨, 긴 상체, 폭이 좁은 무릎을 가지고 있다. 비록 눈썹이 길고 머리가 흰 인도 승려로 묘사된 ‘양고승전(梁高僧傳)’의 빈두로존자상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내면 세계를 직시하고 있는 고승의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깨까지 내려온 두건은 머리띠를 조여 묶은 듯이 그 가장자리가 심하게 굴곡져 있으며, 띠 자락들은 귀를 덮은 뒤 가슴 앞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옷깃에는 작은 원문(圓文)이 일정한 간격으로 찍혀 있으며, 가사는 띠 주름을 이루고 있다. 무릎 폭에 비해 좁은 편인 장방형의 대좌에도 작은 원문들이 새겨져 있다. 금동존자상은 조형적인 특징과 대좌 측면에 새겨진 안상(眼象)의 꽃머리 장식을 통하여 영통사가 창건되던 1027년(현종 18)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도 국화리 출토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상, 고려시대 12~13세기, 크기 22.3cm, 개인 소장
한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경상북도 예천 남본리(南本里)에서 출토된 소조 파편들도 16나한상의 일부로 추정된다. 소조나한상들은 1010년에 건립된 오층석탑이 있는 고려시대 개심사(開心寺) 사역에서 출토되어 원래는 이 사원의 전각 속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복원된 2존의 나한상은 얼굴 모습, 신체 비례, 착의법, 크기가 거의 같다. 이 중 한 존은 긴 상체를 가진 당당한 모습으로서, 두꺼운 목깃과 넓은 소매 깃이 있는 가사를 걸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두 팔은 나란히 들어 올렸으며, 양손은 부서져 없어진 상태이다. 나한상은 마치 특정한 고승을 모델로 한 듯이 솟구친 정수리, 찌푸린 미간, 굵은 눈썹, 비교적 큰 눈, 오뚝한 코, 뚜렷한 인중, 미소를 머금은 입, 깊게 파인 입가의 팔자 주름 등 개성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 가사 주름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소 일률적인 편이다. 또 다른 나한상(53.7cm)은 무엇인가 깨우친 듯 입을 벌리고서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합장하고 있다.
500나한상은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 후, 1차 결집(結集) 때 모인 500상수비구(上首比丘, 우두머리 스님)나 곤륜산(崑崙山)의 황금굴(黃金窟)에 사는 500아라한(나한)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500비구와 나한들의 존명은 인도나 중국의 경전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고려시대 1235년과 1236년에 그린 오백나한도의 화기(畵記)에 기록된 이름이 ‘오백성중청문(五百聖衆請文)’의 존명과 일치하여 500나한상도 이 경전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고려의 오백나한재는 개경의 보제사(普濟寺)에서 주로 열렸는데, 보제사의 나한보전(羅漢寶殿)에는 금선(金仙, 불상)과 문수·보현보살상을 중심으로 500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 나한상은 현존하지 않아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후량(後梁, 907~923)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923년에 가져와 황해도 해주 숭산(崇山) 신광사(神光寺)에 봉안한 오백나한도(혹은 오백나한상)를 비롯하여 단속사(斷俗寺) 동랑(東廊)의 석조오백나한상, 석왕사(釋王寺)의 석조오백나한상에 대한 기록은 500나한상이 고려에서 적지 않게 조성되었음을 추정하게 해 준다. 그러나 한 세트를 이루고 있는 500나한상의 예가 남아 있지 않아 도상적·조형적인 특징은 고려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의 나한상을 통하여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강원도 영월의 창령사지(蒼嶺寺址)에서 출토된 석조오백나한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서 고려시대 500나한상의 모습을 추측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즉 나한상들은 같은 재질의 돌을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몇 가지 형식으로 나눈 다음, 다시 세부적으로 표현하여 각 존상의 개성을 살렸다.
한편 인왕도량은 궁궐에서 3년마다 정기적으로, 국가적인 위기가 있을 때마다 임시로 열렸는데, 이때 봉안된 나한상들은 국난에 의해 궁궐이 소실될 때 대부분 파괴되어 없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도 국화리(菊花里)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상(靑磁鐵彩堆花點文羅漢像, 이하 청자나한상)은 강도(江都, 강화도 천도) 시기(1232~1270)에 왕실에서 주도한 인왕도량이나 나한재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나한상은 두 팔을 모아 경상(經床) 위에 걸치고 오른 다리의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다. 청자나한상은 울퉁불퉁한 큰 머리, 둥글고 넓적한 얼굴, 아담한 몸을 갖추고 있다. 굵게 패인 이마 주름, 부은 듯한 눈두덩, 가늘게 뜬 눈, 크고 뭉툭한 코, 살짝 처진 양 볼, 또렷한 인중, 힘을 주어 다문 입, 작은 귀 등 개성 넘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머리, 가사 주름, 눈썹, 눈동자, 대좌에는 철화(鐵畵) 기법이, 가사 깃에는 백토(白土)로 점을 찍은 퇴화(堆花) 기법이 구사되어 나한상에 입체감을 더해 준다. 청자나한상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지만, 시선(視線)을 통하여 깨달음을 이룬 나한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불교신문3657호/2021년3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