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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인도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승려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3. 보은 법주사 석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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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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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보화리 석조 이불입상 |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
보물 제915호(1987년 3월 9일 지정).
보물로 지정된 흔치 않은 중층 사찰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당히 거대하다.
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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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 배자예부운략 목판 |
보물 제916호(1987년 3월 9일 지정).
정사각형에 사모지붕을 얹은 특이한 형태의 건물.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으로 남아있는 건물이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법주사가 불에 탈 때 같이 소실되었으나 인조 25년(1647)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또한 원통보전 안에는 보물 제 1361호 목조관음보살 좌상을 모셨다. 복장[8] 안에서 나온 불상 조성기에는 효종 6년(1655)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원래 미륵불을 주불로 모시는 용화보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35칸에 2층으로, 중심 법당의 역할을 맡았으며 내부에 미륵장륙상을 모셨다. 이 용화보전은 매우 화려했다고 하는데 법주사의 중심 전각이었다. 하지만 고종 9년(1872) 당백전 주조를 이유로 장륙상이 압수되면서 건물도 헐렸다.[9] 이후 그 자리 아래에 현재 볼 수 있는 거대한 금동미륵입상을 세웠다.
신라 혜공왕 12년 (서기 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 (서기 1872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산을 몰수해 갔다.
일제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 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
1963년 박추남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다.
1986년 류원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조성 시멘트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일 월드컵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개금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 900m^2에 황금 20Kg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4,500여명이었다.
높이 33 m[10], 무게 160톤. 거대한 미륵상은 청동불상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높이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1993년에 홍콩의 포린 사원에 세워진 34 m짜리 천단대불 좌상이 깨트렸다.미륵입상 설명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흥선대원군이 녹여버린 불상을 다시 만들고자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1939년에 만들려고 했지만 재정문제와 태평양 전쟁 말기 금속 공출 등 문제 때문에 시멘트로 대신했다. 그조차도 조각가 김복진의 요절과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시간이 흘러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 그의 관심에 힘입어 1964년에 완공하였다.
그러나 이후 안전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유로 해체하고는 1990년에 5년간 작업하여 청동으로 다시 주조했고 이후 2002년에 금 약 80 kg을 들여 전체를 개금해서 금동미륵입상이 되었다. 하지만 청동 시절이 더 중후하게 보여서 나았다는 의견도 있다. 판단은 직접 해보시길 바란다. 한편 금이 쓰인 게 맞냐는 논란도 있다 .기사
여담으로, 강원도 홍천의 연화사라는 절에 이 불상과 비슷한 크기의 불상이 있다.[11]
청동미륵대불 시절 | 일제강점기 모습 |
과거 시멘트로 만든 미륵입상일 때에는 '크기는 큰데 시멘트 미륵'이라고 은근히 무시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워낙 오랫동안 '커다란 시멘트 미륵'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후에 가보지 않아 업데이트가 안됐다면 아직도 시멘트로 만든 미륵입상이 법주사에 있는 줄로 아는 중장년층도 은근히 많다.
4. 문화재
법주사는 역사적·학술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 절 자체가 사적이자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며, 법주사가 소장하고 있거나 관련된 문화재로는 국보 3점, 보물 14점, 지방유형 문화재 22점, 천연기념물 2점이 있다.
사적 제312호 보은 법주사(報恩 法住寺)
명승 제61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俗離山 法住寺 一圓)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雙獅子 石燈)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64호 보은 법주사 석련지(石蓮池)
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四天王 石燈)
보물 제216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
보물 제848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新法 天文圖 屛風)
보물 제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16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1259호 보은 법주사 괘불탱(掛佛幀)
보물 제1360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1361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413호 보은 법주사 철솥(鐵鑊)
보물 제141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福泉庵 秀庵和尙塔)
보물 제1417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石造喜見菩薩立像)
보물 제141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福泉庵 學祖和尙塔)
보물 제1858호 보은 법주사 동종(銅鍾)[12]
보물 보은 법주사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 보은 순조 태실(純祖 胎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四天王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보은 법주사 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보은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보은 법주사 석옹(石瓮)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보은 법주사 능인전(能仁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보은 법주사 궁현당(窮玄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 보은 법주사 가경구년명 철종(嘉慶九年銘 鐵鍾)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보은 법주사 선조대왕 어필 병풍(宣祖大王 御筆 屛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보은 법주사 주서무일편 병풍(周書無逸篇 屛風)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大雄寶殿 後佛圖)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보은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汝寂庵 多層靑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福泉庵 極樂寶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5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福泉庵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福泉庵 神衆圖)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福泉庵 三世佛圖)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8호 보은 문수암 산신도(文殊庵 山神圖)[13]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5호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불좌상(水晶庵 石佛坐像)[14]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5호 보은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水晶庵 石造如來坐像)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5호 보은 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上庫庵 磨崖佛像群)
천연기념물 제103호 보은 속리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207호 보은 속리산 망개나무
법주사는 조선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로 법주사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순조의 태실이 있고, 법주사 경내에는 아예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 원당이 있다. 순조의 태실과 관련해서 법주사 입구에 있는 금표(禁標), 화소(火巢), 하마비(下馬碑), 봉교비(奉敎碑)는 꽤 큰 의미가 있는데 조선 시대에 왕족의 태실을 조성할 때는 해당 태실의 등급에 따라 반경 100~300보 안으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표를 설치했다. 또한 능이나 태실 주변에서 불이 났을 때 번지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주변 일정 지대에 나무와 풀을 제거해둔 일종의 완충지대를 두는데 이것을 알리는 표식이 화소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궁궐이나 서원 등 특정 시설이나 장소에 도착하면 어느 지점부터 누구나 말에서 내리도록 하는 하마비를 세우는데 태실 또는 태실의 수호사찰에도 이를 설치했다. 여기에다 법주사의 승려들은 잡역을 면제해준다는 내용을 새긴 봉교비까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법주사이다. 잘 알려진대로 속리산 세조길이나 정이품송과 관련해 세조와 관련이 깊은 절이기도 하다.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
1664년 벽암 각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화엄사에 있는 벽암대선사비와 비슷하다.
법주사의 절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다.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보은(報恩) 법주사(法住寺) 벽암대사비(碧嵓大師碑)
벽암대사비명(碧嵓大師碑銘)(전자(篆字)로 씀)
유명조선국 고속리산(有明朝鮮國故俗離山)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 겸 선교십육종도총섭(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兼禪敎十六宗都摠攝) 비지쌍운 변혜무애 부종수교 복국우세 특사의발(悲智雙運辯慧無礙扶宗樹敎福國祐世特賜衣鉢) 벽암대사(碧嵓大師) 비명(碑銘) 병서(幷序)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정두경(鄭斗卿) 지음
숭헌대부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이우(李俁) 글씨 씀
숭헌대부 복창군(福昌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이정(李楨) 전자(篆字) 씀
화상(和尙)의 성은 김(金)씨, 이름은 각성(覺性)이고 자는 징원(澄圓)이며 벽암(碧岩)은 그 호이다. 보은(報恩) 사람으로 어머니 조(曹)씨가 자식이 없어 칠성신(北斗)에게 빌었는데 꿈에 오래된 거울을 보고 임신하여 만력(萬曆) 을해년(선조 8, 1575) 12월 23일에 태어났다.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4세에 설묵(雪默)장로를 따라 머리를 깎았다. 부휴(浮休)대사가 선사를 한 번 보고는 뛰어나다 여겨서 데려다가 제자로 삼았다. 을미년(1595)에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誠)이 왜장을 ▨에 책봉하는 사신으로 왔는데 해인사(海印寺)에서 대사를 만나 감탄하며, ‘불도징(佛圖澄)과 도안(道安)을 해외에서 다시 보는구나’ 라고 하였다. 선사가 일찍이 몇 명 사문과 함께 밤길을 가는데 큰 호랑이가 포효하며 나타났다. 여러 승려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나 선사는 웃으면서, ‘이 놈은 다만 우리를 위해 앞길을 인도해 주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였다. 20여 리를 갔는데 호랑이가 따라 오다가 절 문에 이르렀다. 선사는 호랑이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멀리서부터 와서 서로 헤어지게 되니 너 또한 애썼다’라고 하였다. 호랑이가 선사 주위를 세 번 돌고는 거듭 울부짖으며 떠나니 절의 승려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송운 유정(松雲 惟政)이 부휴 선수(浮休 善修)에게 편지를 보내어, ‘법을 이을 사람을 얻었으니 축하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세속의 일을 잊었고 새들이 손바닥 위에서 모이를 쪼아도 어루만지며 겁먹지 않게 하였다. 광해군 임자년(1612)에 부휴선수가 미친 중에게 무고를 당해 붙잡혀 서울로 보내졌다. 선사도 함께 옥에 구금되었는데 안색이 태연자약하였다.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여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곧바로 묶인 밧줄을 풀고 비단 옷 두 벌을 내어 각기 하사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갑자년(1624)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았는데 선사를 임명하여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으로 삼았다. 공역이 끝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내렸고 또 의발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어주(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를 하사하였는데 선사는 합장하고 절하며 말하기를, ‘산승(山僧)은 음주를 금하는(不飮酒) 계를 지켜야 하지만 이는 성왕이 하사한 것이니 어찌 감히 한 잔 마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중사가 이를 보고하니 (▨▨▨) 칭찬하였다.
병자년(1636년) 겨울에 청나라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선사는 의승(義僧) 3천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하고 관군과 함께 군대를 나누어 진격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더욱 가상히 여겼다. 임오년(인조 20, 1642) 조정에서 천거하여 일본행 사신으로 삼았는데, 선사는 서울로 가다가 (▨▨▨) 사퇴하였다. 효종대왕이 즉위하기 전에 선사가 안주(安州)에서 뵙고 화엄(華嚴)의 종지(宗旨)를 논하여 밝혔는데, 효종이 크게 칭찬하며 벼루(龍眉)와 붓(畵管), 장식용 조개(硨𤦲) 몇 알, 유리(琉璃)와 도서(圖書), 황금으로 된 사자(獅子)를 상으로 주었다. (▨▨▨) 상서(尙書) 이시방(李時昉)에게 ‘각성 노선사가 병환은 없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으니 그 후대함이 이와 같았다.
기해년(1659) 12월에 이르러 가벼운 질병을 보이다가 다음 해 경자년(현종 1, 1660) 1월에 대중을 모아 작별을 고하고 게송 하나를 썼다.
염송(拈頌)이 30편이요 새겨진 경전(契經)이 8만 게송이로다. 어찌 뒤섞여 갈등을 일으키겠는가? 웃을 만 하도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
바로 붓을 던지고 앉은 채로 입적하니 나이는 86세였고 법랍은 72년이었다. 다비하는 날 장례에 모인 이가 만 여명이었는데 막 불을 놓자 상서로운 바람이 홀연히 일어났고 날짐승이 슬피 울어댔다. 사리 3알을 얻었는데 모두 흰색이었다. 영골(靈骨)을 나누어 부도(方墳)를 세운 것이 모두 네 곳이었는데 조계산(曹溪) 송광사(松廣), 지리산(頭流) 화엄사(華嚴), 종남산(終南) 송광사(松廣), 속리산(俗離) 법주사(法住)이다.
선사의 사람됨은 용모가 단정하고 기상이 맑고 높았으니 만나 본 자는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귀천에 상관없이 공경하고 존중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눈빛은 사람을 쏘았고 치아는 39개였는데 깨끗하고 하나같이 가지런하여 또한 신이한 모습이었다. 저술에는 『도중결의(圖中決疑)』, 『참상선지(叅商禪旨)』 등의 글이 있었는데 동양도위(東陽都尉) 신익성(申翊聖)이 서문을 지어 세상에 유통되었다. 처능(處能)대사는 선사의 전법제자인데 와서 명(銘)을 청하므로 결국 그를 위해 명을 짓는다. 명은,
고려 말에 태고보우(太古普愚) 공(公)이 있어
중국에 들어가 불지(佛旨)를 얻고 해동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선풍(禪風)이 크게 떨쳐져
스님들이 팔방(八葉)에서 고승(龍象)이 되기에 이르렀다.
괴로움의 바다(苦海)에 배를 띄워 중생을 구제하였고
그 본원을 본받으니 실로 임제(臨濟)의 정종(正宗)이도다.
높디높은 속리산(俗離)은 선사가 머문 곳이니
돌에 새겨 그 시작과 끝을 기록한다.
갑진년(현종 5, 1664) 4월 일에 세움
-해석자 정병삼-
2020년 2월 초, 한 신도가 법주사 승려 6명이 상습적으로 도박을 한다며 청주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제보 내용에 따르면 2018년에 이 스님들은 법주사의 다각실에서 10여차례 도박을 했으며 판돈이 모자라면 법주사 근처에 있는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빼가며 도박을 했다고 한다. 또 이를 막아야 할 주지는 이를 알고도 방관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 주지는 2016년부터 2019년 사이에 매년 20회 정도씩 마카오, 라스베이거스 등으로 출장을 나갔는데 이는 원정 도박이 의심되는 행적이며, 무엇보다 2008년에도 속리산의 모 호텔에서 카드 도박을 하다 적발돼 벌금형 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 후 법주사의 주지가 됐고 이 사건이 진행중인 와중에도 다시 주지로 재임명됐다.
고발을 접수한 청주지검은 보은경찰서에 사건을 넘겼고 수사에 나선 경찰은 법주사 사무실과 스님들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하기도 했으나 진척이 없었다. 이에 충북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사건을 넘겨받아 스님들을 2021년 6월 기소의견으로 송치하였으나 검찰은 보완수사를 요구하였고 2022년 5월 증거를 보완, 다시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2023년 2월, 청주지검은 이 스님들을 벌금형으로 약식기소하였다.
팔상전은 이소룡의 사망유희에서 나온 사망탑의 본래 모델로, 팔상전 안에서 촬영이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15], 이소룡이 사망한 뒤에 재촬영-재편집되며 계획이 무산되었다. 실제로 촬영되었다면 이소룡 팬들의 성지가 되었을지도?[16]
교통편은 대중교통으로 올 경우 보은군 읍내에 있는 보은시외버스공용정류장에서 법주사 밑 관광지 주차장의 정류장까지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약 3~40분 정도 소요시간으로 잡고 타고 오거나 서울(동서울이 시간당 1대 꼴로 다닌다. 남부나 센트럴은 1일 4회.)이나 대전, 청주 등지에서 출발하는 속리산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오면 된다. 정류장에서 법주사까지는 다시 3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자가용으로 올 경우 서산영덕고속도로 속리산IC가 가장 가깝다.
법주사 인근에 속리산 세조길이 있다.
군위군 소보면에도 법주사가 있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며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이 문서의 법주사보다 역사가 더 깊은 절이다. 다만 창건 이후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조선 중기에 일부 건물들을 중건해 현재에 이른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최근에 지은 것이어서 오래된 느낌은 없으나 보물 제2005호에 지정된 괘불도(掛佛圖)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에 지정된 1690년에 중수한 보광명전,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 등 옛 문화재 등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지름 115㎝, 두께 15.5㎝ 크기의 대형 맷돌을 사찰 인근에서 발굴해 보관 중인데 국내에서 가장 큰 맷돌이라고 한다.
속리산 법주사 문화재관람료가 폐지된 후 충북 보은군의 관광 경기가 활기를 되찾는 분위기라고 한다. 주말 하루 1만여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폐지 전보다 5000여명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사찰 관람료 폐지 덕일까"…보은 상인들 관광객 늘어 '함박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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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쌍봉사 대웅전도 있지만, 이것은 불에 타 소실된 뒤 복원한 것이다.[3] 捌은 '여덟 팔(八)'의 갖은자다.[4] 도솔천에서 인간계로 하강을 결정함, 룸비니에서 탄생함, 고향 카필라성의 동서남북 네 문으로 나가보면서 생로병사 괴로움과 수행자의 평온한 모습을 목도함, 출가하여 성을 떠남, 고행함, 마라의 유혹을 물리침,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함,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듦 등 8가지이다.[5]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6] 공포를 기둥 위에만 배열한 것[7]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건축양식[8] 불상을 만들 때 그 가슴에 금, 은, 각종 보화와 서책 따위를 넣은 것[9] 참조.[10] 27 m라는 자료도 있는데 뒤의 광배까지 더한 높이가 33 m인 듯?[11] 연화사의 것이 법주사의 불상보다 3m 더 큰데 이쪽은 아미타불이다.[12] 2015년 3월 14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 보은 법주사 중사자암 동종'에서 보물로 승격[13] 현재는 새로 불사를 진행 중인 문수사라는 절에 있는데 원래는 복천암에 있었다.[14] 법주사 수정암에서 발굴된 불상의 파편들을 동국대학교에서 복원해 박물관에 소장 중.[15] 당시는 홍콩영화의 전성기였으나 대륙 중국에서의 영화 촬영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배경으로 찍을만한 전통건축물이 홍콩엔 별로 없으니 한국에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사망탑의 배경이 범어사인 등. 그리고 법주사는 특이한 목탑이 존재하기도 하고 불상도 당대 동양 최대였다.[16] 만약 이렇게 됐다면 법주사는 외국인들한테 매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