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1장은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의 긍휼을 말씀합니다. 8절을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명합니까? 이스라엘은 원래 애굽에 있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단어 “아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부자 관계로 묘사합니다. “아들”은 입양 모티브입니다. 근본이 종인데, 즉, 태어날 때부터 자격이 없는 이방 왕의 종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여”(아하브) 불러냅니다. 입양의 근거가 “아하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공로도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러냅니다. 즉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의 공로를 보고 선택하심이 아닙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지만 반응이 따릅니다. 즉, 책임적 반응이 따릅니다. 순종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2절을 보면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앞부분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들을 불렀으나 그럴수록 그들로부터 떠나갔다”입니다. 즉,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합니다.
3~4절을 보면 “입양”이라는 양육 모티브가 나타납니다. 3절 앞부분을 직역하면 “그러나 바로 내가 직접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쳤다”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셔서 부르셨기에, 입양하였기에 부모로서 양육 책임이 있습니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로 안았다”, “고친다”라는 말씀은 양육에 있어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위험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플 때 질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다 해 주었는데 “알지 못했다”입니다. 일명 배은망덕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났다고 해서 끝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 아기가 처음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세상에 아기가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에는 성장이 필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장인데, 혹여나 종교의식에만 머무르고 있거나, 칭얼거리며 하나님이 다 채워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4절을 보면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라고 말씀합니다. 직역하면 “내가 사람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으니 사랑의 끈이라”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험에서 지켜주시고, 아플 때 질병을 치료하여 주었지만, 이런 양육의 은혜를 알지 못해서 하나님을 떠납니다. 계속 떠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떠나면 멸망하니까 그의 품에 돌아오라고 사람을 보냅니다.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람을 계속 보냅니다. 사사, 선지자들을 계속 보냅니다. 그 이유는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많이 보내서 “사람의 줄이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줄은 사랑의 끈입니다.
누군가가 “당신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라고 말할 때, 당장은 쓰라리지만, 그것은 사랑의 줄, 즉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회개의 메시지가 과연 강력하게 선포되고 있습니까? 회개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선포되고 있고 찔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회요, 증거인 줄 믿습니다.
4절은 부모의 마음을 짐승의 주인, 임자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주인이 짐승의 줄을 붙잡고 끝까지 놓지 않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직역하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들어 올리는 자들처럼 되었으며, 내가 그들에게 구부려 내가 그들로 먹게 하였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짐승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지웠던 멍에를 느슨하게 풀어 음식 먹게 하기 편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멍에”를 의미하는 단어와 “~ 위로”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이기 때문에, 같은 단어를 중복해서 필사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몇몇 번역본들은 “멍에”라는 단어를 삭제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부분이 아이를 올려서 뺨에 비비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NIV, NRSV, 카톨릭 성경). “구부려 먹게 하셨다”라는 표현은 아이를 위해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새번역).
5절을 보면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라고 말씀합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정말로 그들은 애굽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입니다(NRSV, 가톨릭 성경, 새번역). 1절에서 이스라엘의 근본이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불러내어 아들, 즉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은혜를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배은망덕합니다. 그래서 다시 원래의 상태인 종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애굽”이란 말은 애굽 나라가 아닌 원래 종의 상태로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합니다.
8~9절은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을 설명합니다. 5~7절을 보면 애굽, 즉 종으로 돌려보내겠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찢어지지만,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분의 애끓는 탄식이 소개됩니다. 에브라임, 이스라엘을 아드마, 스보임과 대조시킵니다. 아드마, 스보임은 신명기 29:23절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로 나옵니다(창세기 10:19, 14:2, 8).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 도시로 소개합니다.
비록 매로 때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려보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설명합니다.
8절을 보면 네 번 하나님의 일인칭 동사가 나오고, 네 번 이스라엘을 향해 “너”라고 부르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러한 일인칭과 이인칭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애틋함과 간절함을 절절하게 표현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온통 뒤집어졌음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돌이키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하파크”)는 창세기 19장에서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엎어 버리신 것을 표현하는 동사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9:25절을 보면 “엎어 멸하다”라고 말씀합니다. 요나 3:4절의 니느웨의 뒤엎어짐을 표현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으로 인해 이들을 당연히 엎어버려야 하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엎어 버립니다.
8을 보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7절을 보면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이스라엘이 죄를 짓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 심판이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이 작동함으로, 마음을 뒤집습니다(“하파크”, turn over). 자식이 아무리 나빠도 못 내치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호세아 11:8절에서 “내 마음이 마음에서 뒤집힌다(하파크)”, 즉 하나님의 마음이 돌아섭니다. 하나님의 긍휼함이 불붙습니다. 원래 불붙음은 성경에 진노와 짝입니다. 아버지이기에 끝장날 진노의 날에 그 화를 누그러뜨리십니다. 하나님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큰 진노는 큰 수단을 씁니다. 유전이 불탔을 때 어떻게 꺼뜨립니까? 폭탄을 터뜨립니다.
예수는 죄에 빠진 인간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몸소 마십니다(참조, 시편 75:8; 예레미야 25:15-16, 하박국 2:15~17). 예수님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질 진노의 잔을 전달하지 않고 자신이 마십니다(마태복음 26:39, 요한복음 18:10).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방법은 큰 수단을 써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죽음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 진노의 십자가를 예수님이 감당하심으로 우리가 모두 하나님 진노의 잔으로 멸망하지 않고, 회복, 치유, 구원이 주어집니다.
스스로를 엎어 버리신 하나님의 마음에 그분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합니다. 여기서 “온전히”로 번역된 단어는 7절에서 “하나도”로 번역되었습니다. 7절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8절은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매우 대조적입니다.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자가 하나도 없음에 비해,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불붙듯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탄식하며 물으십니다. 내가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예언자들의 부름을 따라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면 살길이 있겠지만 그들이 회개치 아니할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마음을 뒤집으십니다. 진노의 심판 대신 이스라엘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불길처럼 마음을 가득 채우십니다.
9절의 “맹렬한 진노”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 관용구입니다(민수기 25:4, 사무엘상 28:18, 이사야 13:13, 예레미야 4:8, 26, 스바냐 2:2, 시편 78:49, 예레미야 애가 1:12). 이제 하나님은 그 진노를 더 이상 나타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불붙는 듯한 위로의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용서합니다. 9절에서 네 번의 부정어 “않으리라”, “아니라”를 통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죄 용서를 선언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하나님이며,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노릇해 주심, 하나님 헤세드의 은혜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며”에서 하나님은 일인칭,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자니라”에서 이스라엘은 이인칭으로 나옵니다. “나 - 너” 용어에는 출애굽 때의 계약 관계(출애굽기 3:6~10, 6:7)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양자 삼으시고, 아버지로서 양육의 책임을 다하였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계속 거부하고 떠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게 하려고 자기 사람들을 계속 보내고 보내서 사람의 줄, 즉 사랑의 줄이 되었지만 거부합니다.
결국 돌아오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전적인 긍휼하심으로 인해 그들을 돌이키고 회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돌이키고 회복되는 일은 그들의 의지,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뒤엎으심, 불붙는 긍휼에 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에 있습니다. 언약 관계에서 하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 노릇 해 주심, 아버지 노릇 해 주시는 그의 신실함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마셔야 할 하나님 진노의 잔을 주님이 마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엎어 버리려면, 꺼뜨리려면 큰 수단을 써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은혜가 그 백성, 우리들을 회복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즉, 순종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사자를 따라간다는 말은 좋은 의미입니다. 그 사자의 음성을 듣고, 사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1절을 보면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새가 그들의 터전(보금자리)에 옵니다. 미련한 새는 떠돌지만, 지혜로운 새는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아는 새입니다. 철새는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알고 찾아갑니다. 계절이 바뀌면 본 고향으로 돌아가는 새처럼 이스라엘도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즉 여호와께 돌아가는, 슈브하는 이스라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로서 슈브하는, 하나님께 돌이키는, 그래서 여호와의 집에 머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