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간정 (강원 고성군)
위 치 : 강원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 지 정 : 유형문화재 제32호 土城面 淸澗里 81번지 동해안 산록에 위치한 淸澗亭은 설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淸澗川과 만경청파가 넘실거리는 기암절벽 위에 팔각지붕의 중층누정으로 아담하게 세워져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월출시의 장엄함과, 밀려오는 파도가 마치 뭉게 구름이 일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가는 황홀경으로 관동팔경중 수일경으로 손꼽히고 있다. 정자의 바깥쪽 청간정 현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인 청간정(淸澗亭) 유형문화재 제32호 지정된 청간정의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미상이나 조선조 중종 15년 (1520년)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측 된다. 1884년 갑신정변에 소실되었다가 1928년 당시 토성면장 金鎔集의 발기로 재건 하였고, 그 후 1980년 8월 1일 前崔圭夏대통령이 동해안 순시중보수 정화지원한1억 3 천만원으로 정자를 완전 해체 복원하여 명실공히 문화재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청간정은 천후산과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청간천이 동해와 연접한 산록의 기암절벽위에 아담하게 건립되었다. 정자를 에워싼 울창한 송림사이로 넘실대는 동해 의 만경창파와 군집한 해조의 한가로운 몸짓, 그리고 청간천을 따라 펼쳐진 농경지의 풍요로움과 연이은 해안선 백사장의 시원스러움은 가히 관동팔경의 수일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속초에서 유명한 물곰탕 맛집 "사돈집"
외옹치항 횟집
설악산 들어가는 입구 밤과 낮 풍경
건 봉 사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 금강산 건봉사와 석가여래 진신 치아사리 1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의 봉안배경 건봉사에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는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636년(선덕왕 5년)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중 일부이다 자장법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월정사,법흥사,정암사,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하여 갔다 그 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에 잡혀간 포로 송환등의 문제로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통동사 사리를 되찾아왔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동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셨는데, 그 가운데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의승군을 규합하였던 인연이 있는 건봉사에 봉안하였다(석가여래치상탑비) 이것은 귀중한 진신사리가 다시 약탈될 경우를 우려해 분장한 것이다. 그런데 사명대사에 의해 봉안된 진신 치아사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6년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부터다.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에서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한다.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지만, 관리 또한 어렵다는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임을 사칭한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났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 그들은 이틀간 ‘사적 조사단’ 운운, 유유자적하면서 제초작업을 벌이는 척 했다. 일당은 12일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다.하지만 잘못 가져간 것이다. 6월 하순부터 모든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것이었다. 일당은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한달여에 걸친 7월14일, 일당 중 주범 ㄱ씨는 결국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ㄱ호텔로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다. 건봉사 측은 결국 되찾은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법당에 봉안하여 참배불자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한다. 사리4과의 행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건봉사 진신 치아사리의 의미 국내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찰은 더러 있으나 건봉사처럼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건봉사 진신 치아사리는 사명대사가 봉안한 사실이 분명하므로 그 가치가 더욱 높은 셈이다. 치아사리는 세계에 15과 뿐인데 건봉사에 12과 스리랑카(불치사)에 3과가 보관된 희귀한 보물이라고 한다 | 사명대사의 승군과 샘물
사명대사가 건봉사를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건봉사가 임진왜란 당시 700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전국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쓸 수 있는 물과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니 건봉사의 규모가 어느정도 였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승군들이 군사훈련을 하면서 마셨다는 샘터가 있는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바위틈에서 나오는 암반수이며 약수라고 전해진다, 훈련에 지친 승군들은 이 물을 마시며 갈증을 풀었으며, 상처입은 부위를 이 샘물로 씻어내면 통증이 가라앉았다고 하고, 치료약을 다릴 때 이 샘터의 물로 약을 다리면 빨리 나았다고도 전해진다. 건봉사 주위에 사는 분들은 이 샘터의 물은 비가와도 늘지않고 가뭄에도 줄지않으며, 한달이상 두어도 물맛이 한결같다고 한다. 건봉사 대웅전지역의 동쪽 끝에 위치한 샘터에 가면 400여년의 시간을 이어 사명대사의 고매한 호국정신을 이야기하듯 맑고 차가운 물이 변함없이 흘러 나오고 있다.
건봉사의 소나무 1500여년의 고찰 건봉사는 왕실의 원당으로써 그 규모나 세가 전국 최대의 사찰이었다. 번성기때는 3,183칸의 전각이 있었던 건봉사의 웅대한 규모도 1500년의 세월동안 산불과 전란등으로 인해 여러번 소실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하였다. 산내의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되는 과정에서 산천초목들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수십그루의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재로 변하기를 수십번.. 그런데,극락전 지역의 왼쪽 산등성이에 용케 화마를 피해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전각과 가까이에 위치해있어 불길을 피해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불길을 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건봉사의 번성과 아픔을 이야기하듯 300여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웅전 지역 봉서루에서 보면 소나무 전체가 보이는데, 그리 크게 보이지 않지만, 소나무에 다가가면 성인 2명이 껴안아도 손이 닿지않는다. 요즘 이 멋진 소나무를 보기위해서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해지고,소나무의 정기를 받느라 소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잠기는 분들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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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 석탑 미실령 입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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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주 보는 사람 눈에 안보이는 것을..............
속초야 가끔 이러 저러한 이유로 점심 먹으러 가지만 무신경하게 지나치는 것들을 멋지게 담아낸 그대의 혜안
그래요.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앗습니다.
그대가 이를 증명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