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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 ~ 100 (목록과 시)
제1편 박두진 -
해
제2편
김수영 - 풀
제3편 이성복 - 남해
금산
제4편
황동규 - 즐거운 편지
제5편 김춘수 -
꽃
제6편
서정주 - 동천
제7편 곽재구 -
사평역에서
제8편 김종삼 -
묵화
제9편
오규원 - 한 잎의 여자
제10편 노천명 -
사슴
제11편
최승호 - 대설주의보
제12편 박용래 -
저녁눈
제13편
기형도 - 빈집
제14편 문정희 - 한계령을 위한
연가
제15편
박인환 - 목마와 숙녀
제16편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제17편
정호승 - 별들은 따뜻하다
제18편 한용운 - 님의
침묵
제19편
김남조 - 겨울 바다
제20편 정진규 -
삽
제21편
천상병 - 귀천
제22편 이문재 - 푸른
곰팡이-산책시1
제23편 백 석 - 남신의주
유동박시봉방
제24편 송수권 - 산문에
기대어
제25편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제26편 조정권 -
산정묘지1
제27편 이육사 -
광야
제28편
오탁번 -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제29편 김종길 -
성탄제
제30편
나희덕 - 사라진 손바닥
제31편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제32편
김기택 - 소
제33편 김경주 - 저녁의
염전
제34편
정현종 - 어떤 적막
제35편 오세영 - 그릇
제36편 임
화 - 우리 오빠와 화로
제37편 고 은 -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제38편
함민복 - 긍정적인 밥
제39편 이용악 - 전라도 가시내
제40편
신대철 -박꽃
제41편 박상순 -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제42편 황지우 - 겨울 ―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제43편 문인수 - 쉬
제44편
김명인 - 너와집 한 채
제45편 정지용 - 향수
제46편
최하림 - 어디로?
제47편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제48편 윤동주 - 서시
제49편
마종기 - 바람의 말
제50편 이성부 - 봄
제51편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제52편 김선우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제53편 김기림 - 바다와 나비
제54편
박목월 - 나그네
제55편 김사인 - 봄바다
제56편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제57편 송찬호 -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제58편
장석남 -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제59편 장정일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제60편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제61편 박노해 - 노동의 새벽
제62편
김현승 - 눈물
제63편 구 상 -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제64편
김용택 - 섬진강1
제65편 유치환 - 생명의 서
제66편
이정록 - 의자
제67편 황인숙 - 칼로 사과를 먹다
제68편
김중식 - 이탈한 자가 문득
제69편 신경림 - 농무
제70편
손택수 - 방심
제71편 김소월 - 진달래꽃
제72편
천양희 - 마음의 수수밭
제73편 김영승 - 반성704
제74편 이
상 - 절벽
제75편 김광섭 - 성북동비둘기
제76편
정완영 - 조국
제77편 조태일 - 국토서시
제78편
최승자 - 일찌기 나는
제79편 이하석 - 투명한 속
제80편
신용목 - 갈대등본
제81편 한하운 - 보리피리
제82편
함형수 - 해바라기의 비명
제83편 김승희 - 솟구쳐 오르기
제84편
김광규 - 희미한 예사랑의 그림자
제85편 조지훈 - 낙화
제86편
이시영 - 서시
제87편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제88편
이형기 - 낙화
제89편 김정환 - 철길
제90편
김광균 - 추일서정
제91편 안현미 - 거짓말을 타전하다
제92편
김준태 - 참깨를 털면서
제93편 이재무 - 감나무
제94편
정끝별 -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제95편 이장욱 - 인파이터-코끼리군의 옆서
제96편
김경미 - 비망록
제97편 문태준 - 맨발
제98편
조병화 - 오산 인터체인지
제99편 정희성 - 저문강에 쌉을 씻고
제100편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1
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뉘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
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
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2008. 01. 01, 조선일보)
(『해』. 청만사. 1949 :『박두진 전집 1』. 범조사. 198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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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모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008. 01. 02,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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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해 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시집『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1986)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7』(국립공원, 2007)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2008. 01. 03, 조선일보)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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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0』(조선일보 연재, 2008)
(『어떤 개인 날』. 창우사. 1961
:『황동규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199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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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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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마지막 행이 다르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의미' 보다, '눈짓' 이 개인적으로 더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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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천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6』(조선일보 연재, 2008)
(『동천』.민중서관. 1968:『미당
시전집』. 민음사.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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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사평역에서』(문학과지성사,
1983)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7』(조선일보 연재, 2008)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6』(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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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묵화(墨畵)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8』(조선일보 연재, 2008)
ㅡ시집『십이음계』. 삼애사. 1969 :『김종삼 시전집』. 청하. 198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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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풀푸레 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룰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978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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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픔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1938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0]
(「산호림」. 1938: 「사슴 --노천명 시전집」. 솔.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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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설주의보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이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다,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다,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983년>
(현대시
100년 -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 중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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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2]
(『먼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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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나,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나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3]
-시집『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시선집 박영근의 시 읽기『오는,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예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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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1996년>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4]
- 시집『남자를
위하여』(민음사, 1996)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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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나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마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거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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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6]
-시집『풀입』(민음사, 1995)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4』(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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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7』(조선일보 연재, 2008)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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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8』(조선일보 연재, 2008)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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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겨울 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데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9]
(『겨울 바다』. 상아출판사. 1967 : 『김남조 전집』. 국학자료원. 200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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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삽/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즘은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 루 ,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0』(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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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1』(조선일보 연재, 2008)
(『귀천』. 살림. 1989 : 『천상병
시집』. 평민사.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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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푸른 곰팡이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구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2』(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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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불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아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3』(조선일보 연재, 2008)
(『사슴)』. 1956. 『백석전집)』.실천문학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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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날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4』(조선일보 연재, 2008)
(『산문에 기대어)』.
문학과지성사. 198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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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굴게 둥굴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숫시네요
<2005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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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괸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입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 제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비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봄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에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려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희망했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한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6』(조선일보 연재, 2008)
(『산정묘지(山頂墓地)』.
민음사. 199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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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39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7』(조선일보 연재, 2008)
(『문장』. 1939. 8:
『육사 시집』. 열린책들.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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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후략)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8』(조선일보 연재, 2008)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의 생각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 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
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의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침의 예언』조광출판사.
1973. : 『오탁번 시전집』. 태학사. 2003)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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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9』(조선일보 연재, 2008)
이슈포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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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제(聖誕祭)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신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삼애사. 196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조선일보에 연재한 것과 연이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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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2004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0』(조선일보 연재, 2008)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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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
신……, 그대라는 자연과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1992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1』(조선일보 연재, 2008)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6』(조선일보 연재, 2008)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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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소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식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2』(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소』(문학과지성사, 2005)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10』(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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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저녁의 염전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2007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3』(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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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어떤 적막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들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들
손과 더불어.
<2000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4』(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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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릇1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1992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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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히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사랑의 서쪽)』.
미학사. 199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조선일보애 연재된 시에는 제목이 <그릇1>로 되어 있고 한국문학선집에는 제목이 <그릇>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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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우리 오빠와 화로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1929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6』(조선일보 연재, 2008)
(『현해탄』.동광당 서점. 1938
:『임화전집』풀빛. 198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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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을
Qje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이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주(註) : 문의(文義)-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1974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7』(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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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1996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8』(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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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1947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9』(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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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두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쉬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오랭캐꽃』.
아문각. 1947 : 『이용악 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조선일보 연재에는 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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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은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1977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0』(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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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첫번째는
나
2은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1993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1』(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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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목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끈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2』(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
<겨울-나무로 부터 봄-나무에로> (198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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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3』(조선일보 연재, 2008)
쉬/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
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
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
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
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쉬」,
문학동네, 2006년
-반경환 명시1,2 제1권
102쪽
-제49회
現代文學賞수상시집. 2004. 현대문학
-도종환, 안도현 시인이 추천한
<국립공원 시인의 집>에 비치 돼 있는 시집(자연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제2편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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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
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
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
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나희덕 시인이 엮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에 실린 시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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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3』(조선일보 연재, 2008)
-출처 : 조선일보 입력 :
2008.02.26 00:12 / 수정 : 2008.02.28 11:12
*시집마다 행과 연이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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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질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은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4』(조선일보 연재, 2008)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25/17]
-시집『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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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927년>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5』(조선일보 연재, 2008)
(『조선지광(朝鮮之光)』.65호. 1927.
3:『정지용 전집)』. 민음사. 1988[개정판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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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어디로?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서랍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6』(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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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을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닿은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7』(조선일보 연재, 2008)
*마지막 행이 한 연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시집에는 다르게 나와 있다(아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을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닿은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開闢)』. 70호.
1926 : 『이상화 전집』. 새문사. 198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48
서시/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8』(조선일보 연재, 200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 『정본 윤동주 전집』. 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49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9』(조선일보 연재, 2008)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전집』.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
50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누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50』(조선일보 연재, 2008)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