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승부처는 기술이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이다
AI는 더 이상 산업정책의 한 분야가 아니다. 국가 생존을 좌우하는 운영체제(OS)다. 기술 경쟁을 넘어 국가 운영의 경쟁이며, AI는 경제·사회·안보를 동시에 재편하는 전략 자산으로 떠올랐다. 2025~2026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똑같은 구조적 위기(저성장·고령화·인구감소)를 마주했지만, 해법은 분명히 갈라졌다. 한국은 규범과 집행력으로 속도를 끌어올리고, 일본은 합의와 조정으로 다음 판을 설계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정책 기술이 아니다. 국가전략의 성격, 그리고 국가 운영 방식의 차이다. AI 경쟁은 단지 기술 개발의 문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각 국가가 AI를 어떤 ‘도구’로 보느냐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려 하는가를 드러내는 전략 선택의 문제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I 전략의 분기: 대한민국은 AX 확산 ‘속도전’, 일본은 Physical AI 준비 ‘지구전’
대한민국은 AX(AI Transformation), 즉 전 산업의 AI 전환을 전면에 세운다. 제조·국방·행정·의료 전 분야에 AI를 빠르게 이식해 생산성과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전략이다. 한국의 강점은 단순히 ‘AI 모델’이 아니라, AI를 국가 시스템에 빠르게 확산시키는 실행력이다. 메모리 반도체(HBM) 경쟁력, 데이터센터 기반, 공공·산업 적용 능력까지 묶이면 한국은 ‘속도전’을 수행할 최적의 무기다. 정부가 2026년 AI 예산을 전년 대비 3배나 늘린 10조 1천억 원으로 편성하고, 이를 GPU 확보와 전 산업 AX(AI 전환)에 쏟아붓는 것 역시 이 속도전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병참 지원이다. 이는 단순한 조급함이 아니라, 압축 성장과 위기 극복을 반복해 온 발전국가형 경험에서 형성된 속도 중심 전략문화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다. 지금 한국은 “기술을 개발하는 단계”를 넘어 “국가를 AI로 재구성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일본은 결이 다르다. 흔히 일본이 소프트웨어·플랫폼 역량이 상대적으로 취약해 AI 모델 경쟁에서 정면승부를 피한다고 평가한다. 일정 부분 타당한 지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학자적 관점에서 한 단계 더 들여다보면, 일본의 선택은 단순한 ‘능력 부족에 따른 지체’라기보다 전장의 이동에 가깝다. 일본은 지금 당장의 AI 모델 성능 경쟁보다, AI가 제조·로봇·사회 인프라에 깊숙이 스며드는 다음 단계의 AI, 즉 Physical AI 시대를 선점하려 한다. 일본은 AI를 모니터 속에 가두지 않고, 로봇과 기계라는 ‘몸’을 입혀 현실 세계로 끌어내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Physical AI 전략의 본질이다. 이는 승부의 장(場)을 자신들이 구조적 강점을 가진 물리적 세계로 재배치하기 위해 시간을 확보하며 기초체력을 축적하는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움직임은 묵직하다. 일본 정부는 2026년 반도체와 AI 분야에만 역대 최대인 1조 2천3백억 엔(약 11조 원)을 배정했다. 라피더스(Rapidus, 첨단 논리반도체)를 통한 첨단 칩 자급과 피지컬 AI 실증에 투입되는 이 막대한 자금은 단순한 “추격” 비용이 아니다.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자립 기반을 만들고, 다음 세대 산업 패러다임에서 역전의 조건을 쌓는 체력전이다. 일본의 AI는 지금 ‘뒤처짐’이 아니라 ‘재정렬’이다.
법과 거버넌스: 한국은 ‘규정-집행’, 일본은 ‘원칙-조정’
한국은 AI 기본법을 중심으로 위험을 분류하고, 고영향(고위험) 영역을 규정하며 신뢰를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불확실성을 통제한다. 장점은 예측 가능성과 집행력이다. 기준이 명확하면 시장은 움직인다. 실행 주체가 분명하면 속도는 붙는다. 한국은 컨트롤타워 중심의 수직적 통합으로 자원을 집중하며, 발전국가 모델의 강점을 AI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식 속도전의 구조다.
일본은 처벌로 다스리기보다, 원칙과 가이드라인을 통해 민간의 시행착오를 용인하고 자율을 유도한다. 기술 변화가 빠른 환경에서 법의 경직성이 혁신을 묶을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일본의 유연성은 방임이 아니라 조정 능력이다. 규제를 늘리는 대신 장애물을 걷어내고, 이해관계자의 합의를 통해 정책을 업데이트한다. 다시 말해 일본은 규정의 힘이 아니라 운영의 기술로 싸운다.
한국의 정책적 과제: 속도는 유지하되, 유연성을 장착하라
한일 AI 전략 비교가 한국에 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한국은 속도전의 무기를 이미 쥐고 있다. 그러나 AI는 법보다 빠르게 변한다. 따라서 한국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규정을 세우는 능력”만큼 “운영을 기민하게 조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법은 명확하게, 집행은 유연하게. 기준은 분명히, 업데이트는 신속하게. 이것이 한국형 AI 국가전략의 다음 과제다.
더 중요한 것은 안보다. AI 거버넌스와 공급망은 이제 동맹의 핵심 의제가 된다. 한미일 협력은 군사협력의 연장이 아니라 AI 기반 억제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다. 한국의 제도 기반 신뢰 모델, 일본의 표준·조정 역량, 미국의 기술·시장 역량이 결합될 때, AI 협력은 ‘협조’가 아니라 ‘억제’가 된다. 경제안보·기술표준·공급망 조기경보라는 현실의 전장에서, AI는 국가의 방패이자 창이 된다. 이는 단일한 통합 체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준, 공급망, 신뢰 모델을 분업적으로 결합하는 느슨하지만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가 현실적인 해법이다.
AI 시대의 승부는 코드만이 아니다. 국가가 움직이는 방식에서 결정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다. 정교한 설계, 유연한 실행, 그리고 전장을 읽는 전략적 상상력이다. 속도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결국 AI 경쟁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속도는 빠르지만 방향이 틀리면 재앙이다. 한국이 10조 원의 엔진으로 ‘속도’를 낼 때, 일본은 그 에너지를 담을 ‘그릇(구조)’을 빚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빠른 엑셀러레이터가 아니라, 변화하는 판을 읽고 유연하게 핸들을 꺾을 수 있는 ‘조향 장치’다.
* 필자 소개 *
신치범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로서, 사단법인 미래학회 대외협력이사와 미래군사학회 사이버/네트워크 상임이사를 겸하고 있다. 『비대칭성 기반의 한국형 군사혁신』, 『한미일 안보협력 메커니즘 중층적 구조의 기원』 등 저술. 『국방환경과 군사혁신의 미래』, 『시그널 코리아 2026』 공저. 한미일 안보협력, 군사혁신(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 RMA), 미래 전쟁과 대한민국의 미래 담론, 테크늄 전략, 그리고 전략적 자율성을 아우르는 학제적 연구와 정책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 샌드타임즈(https://www.sand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