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매리 셸리의 1818년작 1831년판 장편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에 수록된 브리튼 화가 시어도어 폰 홀스트(Theodor von Holst, 1810~1844)의 삽화이다.
☞ 고독서(孤毒恕)하는 孤獨書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예프스키)와 파트리크 쥐스킨트; 노이로제와 멜랑콜리
☞ 메타문학(Meta-literature) 단독정신 원심력 휘발력 꿈 광기 헬레쓰쁘리(Hellesprit) 유혹 고독
☞ 社會論 資料(3) 세네카 데메트리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코이노니아 본능 개인 짐승 신
잉글랜드 철학자·정치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1625년판 《에세이집(Essays)》의 제27에세이 〈우정론(On Friendship)〉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Aristotle, 서기전384~322)의 《정치학(폴리티카; Politika; Politics)》 제1권 제1253a절에 글쓰인 “사회(코이노니아; koinonia)에서 살아갈 수 없는 개인이나, 자급자족하여 사회에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 개인은, 짐승이 아니면 신(神)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의역하여 “고독을 기쁘게 즐기는 인간은 누구나 야수(野獸)가 아니면 신이다”고 글썼다.
잉글랜드 작가 매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의 1818년작 장편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제15장에서 괴물은 자신을 부실하게 조립한 박사 빅토르 프랑켄슈타인(Victor Frankenstein)에게 “사탄(Satan; 악마)도 동료악마들과 부하악마(部下惡魔)한테서 존중받고 응원받는데, 나는 외톨이일뿐더러 혐오마저 받소이다”고 토로한다.
독일 염인주의 철학자 쇼펜하워(쇼펜하우어; Schopenhauer, 1788~1860)는 1851년판 《부록들과 보론들(Parerga und Paralipomena)》 제1권 제6부 〈처세용 잠언들(삶의 지혜를 권면하는 아포리즘들; Aphorismen zur Lebensweisheit)〉 제5장 〈조언들과 금언들(Paranesen und Maximen)〉 제9절에 다음과 같이 글썼다.
“사회적(사교적; gesellig; sociable) 인간을 만드는 것은 고독(Einsamkeit; solitude)을 견디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 악인들은 언제나 사회적인(사교적인) 자들이니, 실로 애석하다! 그런 한편에서 타인들과 함께 있는 개인의 달갑잖은 기분은 그의 성격에 내재하는 어떤 고귀성의 주요한 징후이다. 그는 고독을 점점 더 선호하는데,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세상에서 자신은, 거의 예외없이, 오직 고독하든지 아니면 속악(俗惡)하든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다고 깨닫는다.”
악인의 사회성(社會性; geslligkeit; sociability)과 사회인(社會人; geselliger Mensh; sociable human)의 고독불능(孤獨不能)을 절묘하게 암시하는 쇼펜하워(쇼펜하우어)의 이런 통찰은 ‘인간의 고독불능은 인간을 사회화(社會化; socialization)하고, 악인은 언제나 사회인이므로, 악인의 지옥은 감옥의 독방이다’는 소견을 파생할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 “실로 애석하게도!” ‘범죄는 반사회적(反社會的) 언행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언행이고, 범죄자도 반사회적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인이며, 대체로 반사회적 인격장애자(反社會的 人格障礙者)라고 번역되는 이른바 소시오패스(sociopath)도, 심리학계에서는 이따금 사회병질자(社會病質者)라고 번역되듯이, 반사회성(反社會性; anti-sociability)의 소치가 아니라 오히려 다분한 사회성의 소치일 것이다’는 소견마저 파생시킬 수 있다.
이쯤에서 으레 발끈하여 “그따위 소견은 악인의 악행(갑질, 따돌림, 괴롭힘, 험담, 모욕, 개슬라이팅, 행패 등등등)과 범죄자의 범죄를 사회탓으로 싸잡아 돌려버리려는 괘씸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히스테리부려버릇할 개체도 필시 없잖으리라. 그런 개체가 “사회와 사회성이야말로, 애석하게도, 고독불능의 소산이요 악인과 악행의 온상이다”는 더 얄궂은 소견을 더 괘씸한 지적으로 인지하여 지적으로 괘념하거나 성찰할 확률은 가뭄에 콩날 확률을 훨씬? 실실? 밑돌아버릴라나말라나.
하물며 사회와 사회성의 악성과 범죄성을 암시하는 이런 소견들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해버릇하는 개체가 정녕 사회와 사회성을 소중히 여겨서 그렇게 반응해버릇한다면, 그런 개체야말로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 socialist)이겠지만, 실제로 그런 반응습성에 찌든 수많은 개체들은, 예컨대 적어도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개체의 팔 할쯤은,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와 사회주의자를 철천지원수처럼 인지하여 증오하거나 적대하거나 터부시하는 동시에, 괴상망측하게도, 개인주의(個人主義; individualism)와 개인주의자(individualist)마저 싫어하여 증오하거나 질시해버릇하는 자본주의개체(資本主義個體; capitalistic individuals)들이다. 물론 ‘이런 개체들이 사회와 개체를 도무지 분간하지 못해서, 아니면 도무지 분간하고프잖아서, 그런 반응습성에 찌들어버렸을랑가말랑가’라는 문제의 정답은 꾀죄한 죡변의 몫이 아니힐리랑 .
독일 고문헌학자·철학자·시인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1888년작 1889년판 《우상들의 황혼: 혹은, 쇠망치로써 철학하는 방법(Goetzen-Dammerung: oder Wie man mit dem Hammer philosophiert)》(《우상의 황혼 ☞ 참조》) 〈잠언들과 화살들(Spruche und Pfeile)〉 제3절에 다음과 같이 글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홀로 살려면 짐승이나 신 중 어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셋째 경우를 누락했다. 홀로 살려는 인간은 짐승 겸 신이 되어야, 요컨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맥락들에서 고독도, 어떻게든 괘념되거나 성찰되는 한에서, ‘사회와 사회성’의 중력장(重力場; 衆力場)을 탈출할 수 없을 것이므로, ‘고독의 사회성’이라는 사뭇 야묘(野妙)하고 어지간히 신괴(神怪)한 연금술용(鍊金術用) 연료 비스무레한 것을 실실? 술술? 분비(分泌)할 수 있을랑말랑하리라.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알퐁스 오스베르(Alphonse Osbert, 1857~1939)의 1897년작 〈크리스트(그리스도) 예수의 고독(La Solitude du Chris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