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최저기온이라는 소한을 하루 앞둔 아침이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연말 방학에 들어 그간 하루도 집안에 머물지 않았다. 건강을 챙기고 풍광도 감상할 겸 바깥으로 쏘다녔다. 틈이 나면 지기를 만나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립도서관에도 들려 진득하게 앉아 있을 참이다. 두뇌가 녹 쓸지 않으려고 그날그날 일을 기록함은 나의 습관이 되었다.
바깥은 영하권 날씨임에도 나는 도시락을 챙겼다. 집 앞에서 704번 직행버스를 타고 어시장으로 갔다. 시장에는 골목마다 억척스레 살아가는 상인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좌판을 펼쳐 하루 동안 팔 물건들을 진열하면서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채소, 건어물, 생선, 활어 장터를 차례로 빙글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버스를 내렸던 곳에서 진동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진동은 나의 생활권이 아님에도 가끔 찾았다. 창원근교 산자락을 오르다가 지겹다 싶으면 가끔 바깥으로 나왔다. 그 가운데 택한 장소가 진동이기도하다. 여항산이 뻗친 산자락도 올랐지만 광암이나 수정 바닷가를 걷기도 했다. 나는 상평 산골에서 부재고개를 넘어 서북산 허리를 걸어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어시장에서 상평종점 가는 75번 버스를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상평은 오지라 버스가 하루 서너 차례만 다니는 모양이었다. 아마 내가 어시장을 둘러보는 사이에 그 버스가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평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명주 가는 65번 버스를 탔다. 상평이나 명주는 진동까지는 같은 노선이었다. 상평은 진전면 산골이고 명주는 구산면 갯가다. 어차피 이번 방학 때 나는 두 곳 다 다녀볼 생각이니 순서가 바뀌어도 아무런 상관없다.
나는 진동에서 광암을 지나 다구마을에서 내렸다. 다구에서 멀지않은 배나무골에 있는 제말장군 무덤을 찾아갔다. 제말은 고성 태생의 칠원 제씨로 임진왜란 일어나던 해 조카 홍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웅천, 의령, 김해, 문경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무장이었다. 이듬해 성주목사로 제수되어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인물로 정조 때 병조판서로 추증 받고 시호는 충장이다.
사백년 전 역사인물은 다구마을 앞 진동만을 내려다보는 볕바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나는 무덤 앞 오른쪽 세워둔 비의 음각에서 추증 받은 관직과 시호를 읽어 내렸다. 내 초등학교 동기회 살림을 맡아 사는 친구가 제말장군 집안의 가까운 후손이다. 무덤에서 내려와 산모롱이를 도니 도만마을이었다. 도만까지가 진동면이고 또 하나 산모롱이를 도니 마전이었다. 마전은 구산면이었다.
갯가에 동화 속 그림 같은 학교가 나왔다. 구산초등학교 구서분교장이었다. 교문 좌우 분교장과 병설유치원 문패가 나란히 걸린 것으로 보아 유치원생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호수처럼 잔잔한 갯가 따라 난 길을 걸었다. 포장된 자동찻길이었지만 차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좋았다. 모롱이를 돌아가자 삼거리가 나왔다. 길가 건물에서 금방 건저올린 오만둥이를 세척하여 포장하고 있었다.
나는 고무장화를 신고 일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친절하게도 미더덕 사촌쯤 되는 ‘오만디’라고 했다. 미더덕과 비슷해 나는 식별하기 어려웠다. 둘 다 찜이나 찌개를 끓일 때 넣으면 맛과 향을 좋게 한다고 했다. 명주마을을 앞두고 이미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는 ‘김수로’ 세트장이 나왔다. 김해 분산성 세트장에 이어 해양드라마 세트장으로 계속 보존했다.
세트장 가까이 명주마을이었다. 아까 다구마을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종점까지 곧장 왔을 테다. 나는 중간에 내려서 걸어오길 잘했다. 그새 제말장군 무덤에 들리고 그림 같은 바닷가 학교를 보았다. 오만둥이를 만져보고 드라마 세트장도 구경했다. 명주마을 길가는 할머니 세 분이 오만디를 씻거나 홍합을 까고 있었다. 욱곡 내포 갯가는 아주머니들이 자연산 굴을 까고 바지락을 캐었다. 1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