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에 한 사나이가 살았다 서안으로 가려고 말과 마부와 마차를 샀다 길을 나서자 사람들이 말했다 이보오, 그쪽은 서안으로 가는 길이 아니오 사나이가 대답했다 무슨 소리요? 말들은 튼튼하고 마부는 노련하오 공들여 만든 마차가 있고 여비도 넉넉하오 걱정 마시오, 나는 서안으로 갈 수 있소
세월이 흐른 뒤 저문 사막 가운데 먹을 것도 돈도 떨어지고 마부는 도망치고 말들은 죽고 더러 병들고 홀로 모래밭에 발이 묻힌 사나이가 있다
마른 목구멍에 서걱이는 모래흙, 되짚어갈 발자국들은 길 위의 바람이 쓸어간 지 오래
집념도 오기도 투지도 어떤 치열함과 처연한 인내도 사나이를 서안으로 데려다주지 못한다
초나라의 사나이
먼 눈
병든 몸으로 영원히
서안으로 가지 못한다
[한강] 작가 프로필
1970년 11월 27일 (광주광역시 중흥동 출생) 풍문여자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아버지는 소설가 한승원, 전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2007년~2018년)
문단 등단 및 활동
1993년 계간지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소설가 활동을 시작.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가했다.
주요 작품 목록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년 발행, 대표적인 시집), 장편소설:
『채식주의자』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
『소년이 온다』 (광주 민주화운동 배경)
『작별하지 않는다』 (제주 4·3 사건 배경)
『흰』, 『그리스어 수업』, 『검은 사슴』 등
소설집/에세이: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주요 수상 내역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대상 (소설 「몽고반점」)
2016년: 영국 인터내셔널 부커상 (소설 『채식주의자』)
2023년: 프랑스 메디치상 외국문학상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2024년:노벨 문학상 (대한민국 최초 문학상 수상)
<감상평>
— 왜 마차는 북쪽으로 달리는가: 집념의 궤적과 허무의 사막
이 시는 고대 중국의 우화인 ‘남원북철(南轅北轍)’을 현대적 모티브로 서늘하게 변주하여, 주체의 맹목성과 존재론적 소외를 탐구한 걸작이다. 마음은 남쪽으로 가려 하면서도 정작 마차의 채찍은 북쪽으로 부리는 이 어긋남의 서사는, 근대적 이성이 도달한 파국이자 우리 삶의 근원적 비극성을 함축한다.
우화 속 사나이는 남방의 초(楚)나라를 목적지로 삼았으면서도 정작 북방의 조(趙)나라를 향해 마차를 부렸다. 그는 강건한 말과 노련한 마부,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차와 넉넉한 여비를 자랑했다. 행선지가 잘못되었다는 주변의 준엄한 만류에도 사나이는 오직 자신이 쥔 물질적 조건만을 과신하며 호기를 부린다. 수단의 완벽함이 목적지의 정당성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비대해진 자아의 맹목이자, 방향을 상실한 속도에 대한 물신화(物神化)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시선이 당도한 곳은 황량하게 저문 사막의 한복판이다. 양식과 재물은 바닥나고, 마부는 도망쳤으며, 말들은 죽거나 병들어 마침내 홀로 모래밭에 발이 묻힌 사나이만 남겨져 있다. 마른 목구멍을 서걱이게 만드는 모래흙과 이미 바람이 쓸어가 버린 되짚어갈 발자국들은, 그가 그토록 신뢰했던 조건들이 도리어 그를 파멸로 이끈 허울이었음을 폭로한다.
이처럼 시는 인간의 집념과 오기, 치열한 투지마저도 방향을 잃은 주체를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는 실존적 한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한강은 이 눈부신 실패의 연대기를 겨울 사막의 서늘한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타성에 젖어 박제화된 우리의 무감각한 질주를 멈추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는 묻는다. 지금 당신이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그 마차는, 과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