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과 가라지
(마 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정통성을 갖지 못한 정권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전쟁을 자주 선포합니다. 다른 나라와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나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들과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범죄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불법과의 전쟁’을 하겠다며 대대적인 수사와 단속을 합니다. 사회에서 악을 뿌리 뽑겠다고 하면 국민들은 좋아합니다. 악을 없애고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고 하니까 인기도 올라갑니다. 요즘은 ‘카르텔 척결’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대적인 수사를 하는가 봅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정부의 대책은 부작용을 낳습니다. 80년대초 삼청교육대나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보듯이 인권을 유린하고, 불법 체포, 감금, 구금, 고문 등 수많은 불법이 저질러집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권의 구호만 믿고 불법을 외면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죄가 있으니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불법 정권은 정통성을 얻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민주주의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악과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하면 그 의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집권하는 군사독재든, 검찰 출신이 요직을 차지하며 국민을 수사대상으로 삼는 검찰 독재든 ‘악과의 전쟁’ 이야기를 하면 숨기는 것이 있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면 우리 사회에서 범죄가 사라질까요? 인간의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그렇다고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스스로 조심해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범죄는 법으로 다스리면 됩니다. 전쟁을 해서 뿌리를 뽑겠다는 의도가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깨어서 정권을 감시해야 합니다. 힘 있는 집단이 힘을 합쳐 이익을 독점하고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카르텔 집단을 뿌리 뽑아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말하니까 좋은 세상 올 것처럼 생각하는데, 옛 속담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를 태운다’는 말처럼 민주주의나 인권, 평화, 정의를 파괴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친일세력들이 독립투쟁의 유산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반환경세력들이 지구 환경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냉전사고를 가지고 평화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피와 땀으로 이룬 민주주의와 평화와 생명이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은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악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입니다. 공산주의 이념과 전쟁해서 공산주의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악을 이기는 것은 선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악을 없애려고 애써도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악을 없애는 노력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주님이십니다. 밭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에 좋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밭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원수가 와서 뿌려놓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종들이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이것을 뽑을까요?’라고 말합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으면 알곡만 자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한다’고 말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지만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구분되어 알곡은 곳간으로, 가라지는 불살라질 것이라고 주인은 말합니다. 종들은 아마 우리들일 것입니다.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가라지를 뽑으면 알곡이 더 튼튼하게 자라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밭은 여러 개입니다. 먼저 세상 밭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에 알곡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보입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해서 가라지를 뽑아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악이라고 판단하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혐오하고, 차별하기도 합니다. 논에 벼와 잡초가 함께 있으면 잡초가 빨리 자랍니다. 그래서 눈에 잘 띕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악이 잘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모두 악이라고 판단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뽑아내려고 온갖 수단을 다 씁니다. 교만입니다.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인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악을 뿌리 뽑겠다며 전쟁을 벌이다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 염려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법 집행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불법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알곡을 뽑아버리는 일입니다.
밭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잠든 사이 원수가 가라지를 심어놓았습니다. 우리 마음밭 역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는 왜 잘 믿고 선하게 살고 싶은데 못난 모습을 보일까?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한 일만 행할까?’ 자신에게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래서 악을 없이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내 안에 악이 없어지면 내가 선한 사람이 될까요?
주님은 밭에 가라지가 원래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잘 때 원수가 와서 뿌려놓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악을 뽑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우리가 잠잘 때 원수가 악을 심어놓을 것입니다. 너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악한 것이 자라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 악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밭에는 이웃의 밭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허물을 잘 들추어냅니다. 비웃고, 조롱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서 악한 사람을 내쫓으면 선한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착각도 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데 알곡은 다치지 않고 가라지만 뽑아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합니다. 가라지만 골라서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법에서도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 판단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방법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비록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지만 추수 때가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가려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그냥 두고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좋은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합니다. 곡식과 잡초가 함께 자라더라도 잡초의 기운을 누를 만큼 강해지면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해도 가난하고, 시간이 없고,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 할 수가 없다’고 선을 포기한다면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원수는 알곡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며 가라지를 뿌려놓는 것입니다.
비록 원수가 가라지를 뿌려놓았지만, 좋은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추수 때에 가라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라지 때문이다, 원수 때문이다 하며 변명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원수가 일하도록, 또는 우리를 방해하도록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곧 우리가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들은 ‘악’을 뽑아버리면 사회가, 우리 자신이, 우리 공동체가 선하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악을 뽑아버릴까요?’라는 유혹을 받게 되지요.
악을 뽑겠다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고소, 고발하면 우리 사회가 밝아지고, 깨끗해집니까?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고, 학부모가 교사를 고소하고, 노동자를 고발하고, 시민단체, 언론단체를 고발해서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따뜻해졌습니까?
악을 뽑겠다는 생각은 하면서 선을 행하겠다는 의지는 없습니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물론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기보다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난하고, 혐오하고, 차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다고 우리가 선한 사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 악이 가득하다고 탄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추수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좋은 씨앗을 뿌렸어도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되는 약한 존재(롬 7:19-21)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과 우리의 마음밭을 가꾸시는 농부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변명과 핑계도 선을 포기하는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악과 전쟁하는 것보다 선한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선한 열매를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