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11. 스물네 번째 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1장)
신앙고백
찬송 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기도 박이순 집사(549)
성경말씀 골로새서 4:7~18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불쌍한 사람
찬송 469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광고 새 가족- 최윤희 선생님
가족방문 – 석문분 큰 아들 부부(서울) 김복순 대전 따님, 이도재 집사님 가족,
이정석 집사님 둘째 아들, 임명화 권사 아들 부부 손녀
찬송 376 내 평생소원 이것뿐
축도 아프니까 그만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지난주 이야기는
단연코 우리 석문분 권사님 큰아들 부부 이야기입니다.
석 권사님 며느님께서
목사님, 현충일에 어머님께 가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시집간 딸 기다리듯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오시는데
12시 50분경에 익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20분 전부터 익산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서 있는 목사님을 보더니
친오빠를 오랜만에 만난 듯 막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붙들고 반겼습니다.
남편과도 반갑게 악수를 두 번씩이나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가 제 차 뒤 자리에 앉자마자 점심은 드셨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부부께 맛있는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7절입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8절,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절,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0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절,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 하노라
14절,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절,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절,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절,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신약성경이 별거겠습니까?
사도바울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목사님의 보잘것 하나 없는 삶을 설교합니다.
7절입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8절,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두기고는 사도바울의 비서관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랑받는 사람이고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니 틀림없겠습니다.
그러나 믿는 도끼에 발등도 찍힙니다.
9절입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오네시모는
과거를 뉘우치고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빌레몬서 1장 9입니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절,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절,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절,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절,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 이리니
16절,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절,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절,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당대 최고의 율법 학자이자 실천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도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사랑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마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보는듯합니다.
장발장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조카들 때문에
빵 한 덩이를 훔친 혐의로
19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갑니다.
감옥을 탈옥하여 도주하다가 신부님을 만나고
신부님의 용서와 사랑에 감동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탈옥한 장발장을 죽어라 쫓아다니는
쟈베르 경감의 끈질긴 추적이 손에 땀이 날 지경입니다.
경감 자베르는 경관의 아들로 감옥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바울처럼 뼛속까지 법치주의자입니다.
결국, 레미제라블은
율법과 사랑의 문제를 감동적으로 다룬 이야기입니다.
진정 사랑은 자기이기를 넘어서야만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예 오네시모 이야기를 하려다 장발장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장발장을 보면서,
성경의 오네시모를 보면서,
인간의 본성이 과연 변할 수 있는가? 의 문제까지도 들여다본 듯합니다.
10절입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왜 이런 말 있잖습니까?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함께 갇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옥에 갇힌 바울을 보고
네가 뭔가 잘 못했으니 감옥에 갇혀 있지 않겠냐?
이렇게 욕이나 하고 손가락질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달랐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히브리서 13장 3절입니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다시 서두에 말을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석문분 권사님 큰아들 부부가 오셔서
느티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서 2시간여 오순도순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어쩜 어머니와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도 90이 넘었고
큰 아드님도 67세고 거기에 치매 증상도 있어
며느님은 아픈 두 분을 보면서
얼마나 더 아프고 더 슬펐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익산역까지 마중 나가고
익산역까지 배웅을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딸 떠나보내듯 아쉬워서 한 아름 선물도 드렸습니다.
그 부부 초라한 뒷모습을 보면서
목사인 제 마음도 많이 쓸쓸했습니다.
15절입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눔바 여인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에도 여인의 역할이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립니다.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눔바는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가이오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로마서 12장 13절입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영화,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장발장이 굶주린 조카들을 위해서 빵 한 조각 도둑질하다가
19년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얼마나 죄 많은 인생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이 감옥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언젠가
외딴집에서 사는 집사님이 우리 요양원에 오셨습니다.
외딴집에서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면서 누워 있다 보니
넌 절 머리가 난 것입니다.
하루도 아니고 1년 365일, 평생을 그렇게 홀로 살았습니다.
자녀들이라고는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찾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입에 하얀 화장지를 잔뜩 물고 죽겠다는 시늉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119가 달려가고.
그래서 결국 우리 요양원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요양원에서도 외딴집에 가신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외딴섬 같은 집에 가면 외로워서 죽고.
우리 요양원에서는 외딴집일지라도 집이 그리워서 죽고.
이것이 우리 불쌍한 인생입니다.
목사님도 이렇게 외롭고 고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외롭기만 한 우리가
우리보다도 더 아프고 더 고독했던 예수님을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2,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