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이성언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3년의 시간동안 인간 존엄의 위대함을 경험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독일 나치의 히틀러는 유대인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유대인들을 기차를 통해 강제 수용소로 모으기 시작한다.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물건을 다 뺏긴 채 알몸이 되고, 일 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된다. 일 할 수 없는 자들은 목욕탕으로 위장되어진 가스실로 보내져 학살을 당하게 되고, 살아남은 이들은 고된 노역에 시달리게 된다.
작가와 수용자들이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 바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는 3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째,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일을 함으로써 얻는 의미. 둘째, 경험과 만남을 통해 얻는 의미.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한 태도를 바꿈으로써 얻는 의미. 정신과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유대인들은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포기하고 자신의 상황을 받아드려 그저 의미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을 통해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태도를 바꿔 삶의 의미들을 찾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방법이 평범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 작고 평범해 보이는 것이 수용소로부터 살아남게 해주고 승리케 해 준 힘이다.
내 삶의 의미와 이유는 무엇일까.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신앙적인 모습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아직은 내 삶의 의미를 잘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삶의 의미를 찾는 3가지 방법 중 내가 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의 태도를 바꾸려는 것도, 경험을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 삶도 그저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있다. 각자 삶의 의미는 다르기에 내가 실현 시키지 않으면 그저 이런 생활이 지속되게 된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내 삶에 책임을 지고 내 삶의 명확한 의미를 찾기 위해, 나의 태도를 바꾸고 노력하자.
‘시련은 값진 것이다.’ 각 사람마다 느끼는 시련의 크기와 고통은 다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련을 통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삶이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 보이지 않는 삶의 의미들을 발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