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피서철 해운대 해수욕장 모습=
널뛰기를하는 여학생의 모습 대단한 실력에 감탄
널을 뛰면서 공중돌이를 하다니~~~
조선비치 호탤앞에서 달맞이 쪽으로보며 찍은사진
안다성-(安多星), 그 부드러운 저음의 美學
부드러운 低音, 고즈넉한 詩를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의 노래로 먼저 떠올려지는 가수안다성.'안다성'이라는
이름은 본인 스스로 지은 예명이다.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 그리고 잭 앤더슨 등의 이름에서 착안한 것으로
많은 이들로 부터 부드럽게 불려지고 싶어 '앤더슨'과 비슷한 발음, '안다성'이라 이름 지었다.
安多星.(처음 표기는 安多成이었다.)본명은 安泳吉.31년, 충북 제천 청전리 태생.
지금까지 몇차례 만나오면서 그에게는 늘 변함 없는 것 한가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그 것은 약속장소에
항상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는 점과 늘 구김 없고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옛날 가수들은 항상 먼저 와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괜시리 불안하지, 허허...""이종철씨 알지? 그 냥반 꽤나 엄했어.
분장한 채 대기실 밖에라도 나갈라치면 가차없이 귀싸대기야. 어떻게 연예인이 무대에 서야 할 얼굴을 함부로
내보이느냐구..."-분장한 얼굴을 함부로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을 금기시 여기고 살았듯 그 이면에는
일상에서 조차 맨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며 '책'잡히고 '흉'잡힐 일을 되도록 삼가려함도 그가 연예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몸에 밴 것들이리라.처음 그가 무대와 연을 맺은 것은 51년 9월, 당시 전쟁으로 인해 임시로 청주에 내려와
있던 '신흥대학교(현 경희대)'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었을 때였다. 전쟁은 예외없이 누구에게나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그 역시 휴학계를 내고 군예대에 지원했다. 그리고는 군예대 지원의 댓가로 받은 쌀 두가마니를 집에 메어다놓고
군예대로 향했다.송달협, 고대원, 유춘산, 임노설 등의 가수들과 7인조 악단, 그리고 무용수들. 쇼단원을 모두 합쳐봤자
고작 25명이 전부였던 '1102 야전공병단' 소속 군예대는 강원도 강릉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 곳에서 그의 첫 무대
활동이 시작되었다. 무대에서 동료 임노설은 남인수의 노래를 도맡았고 그는 현인과 고복수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다.
군용트럭으로 1백여리 길을 두시간, 혹은 그 이상씩 달려 이동하는 도중에 포격 세례를
받기도 수차례였고 비포장도로의 흙먼지를 뒤집어 쓰며 천신만고 끝에 공연장에 도착하면 도랑물로
흙투성이만을 겨우 떨궈낸 채 이내 웃음 띤 모습으로 무대에 나서곤 했다.
예고 없는 무차별 폭격은 공연장에도 예외일 수 없어 공연은 수시로 중단되었다.말 그대로 목숨을 건 공연이었다.
이 전장에서 그는 2년 9개월 동안 무려 1백여 차례의 공연을 치렀다.
목숨을 건 사투의 시간에도 일순간이나마 노래가 공포나 두려움으로 부터 얼마나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는가
하는 사실이 생생하게 현실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이 때의 경험이 그의 오랜 가수생활 동안 노래에 대한
'신념'으로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 쉽사리 짐작되어졌다.그가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 때는 9.28 수복 이후
서울로 복귀한 대학 3학년 때, 즉 55년도였다. 친구 생일자리에 초대 받아 간 곳이 당시
화신백화점 골목 20m 지점에 위치한 '旅情카바레'였다.사교춤이 한창 유행하던 당시 '旅情카바레'는
풀멤버 밴드가 있던 일류 카바레였고 명성만큼이나 무대 또한 근사했다. 물론 그가 이전에 섰던 야전무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 때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친구들이 그를 무대로 끌고 올라간 것이다. 이 돌발사태를 제지하던 웨이터와
친구들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이윽고몸싸움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무대에 오르자 그는 버릇처럼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서울야곡'.
야전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가수 현인의, 노래. 노래가 시작되자 아수라장이던 장내가 일순간 잠잠해졌다.
순간 그는 더욱 긴장했다. 이 때까지는 그리 대중적인 노래가 아니었음에도 이내 악기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노래를
따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삼절까지 노래를 마쳤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의외로 악단장이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방송국 전속가수 시험에 응시할 것을 제의해왔다.명함에는
'中央放送局 輕音樂團 團長 孫夕友'라고 적혀 있었다.
"솔직히 당시 대학생 신분에서 봤을 때 유행가 가수가 된다는 게 그리 매력적인 일은 아니었지. 허나 방송국의 전속가수
시험제도라는 것이 묘하게 도전의식과 경쟁심을 자극하더군."결국 그는 이듬 해, 노래와 악보 테스트를 거쳐 권혜경,
박노흥 등 20여명과 함께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그리고 몇달 뒤 비로소 첫 취입할 노래의 악보를
건네 받는다.이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연속방송극 주제가 제1호, '청실홍실'이다.그는 악보를 훑어내려가면서
난감해졌다. 노래가 지극히 짧고 단순해 감정을 이입할 부분이 도무지 없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작곡자 손석우를 찾았다.
"선생님, 이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이에 작곡가 손석우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그냥 쉽게 불러요,
동요부르듯..." 취입이 시작되었다. 1,2절은 송민도와 듀엣으로, 그리고 3절은 서울시 소속의 40인조
'시온성(詩溫城)혼성합창단'이 맡았다.취입 과정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스스로도 근사했으며 반응 또한 예상 밖이었다.
이 노래로 실력을 인정 받게 된 안다성은 곧바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된다.
오아시스는 당시 이재호, 손석우, 박춘석 등 작곡가들이 활동하던 메이저급 회사로써
그는 전속되자마자 박춘석 작곡의 '아주까리 주막집'을 비롯해 이재호, 손석우의 곡을
고루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한다.“모나리자,”비극은 없다,“꿈은 사라지고,”보헤미안 탱고,
“굿바이 탱고,”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 등. 이미 가요 명곡으로 자리매김된 그의 초창기
노래들은 발표 당시만 해도 이전 가요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안다성은 이 노래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유감없이 표출해 보였다.그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곡들을 발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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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성씨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추 잡아도 5백여 곡은 족히 불렀던 거 같은데 말이지, 이상하게도 난 아직까지
무대에서 내 노래를 부르는 후배들을 보질 못했어. 그만큼 내 노래가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 안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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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 안다성 (1958년)
작곡: 박춘석
작곡: 박춘석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대 내곁을 떠나 멀리있다 하여도
내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아~ 새소리만 바람타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백사장이고요해
파도소리 들리는 슬쓸한 바닷가에
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홀로 있네
아~ 새소리만 바람타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백사장이고요해
파도소리 들리는 슬쓸한 바닷가에
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홀로 있네
바닷가에서 ( 파도).mp3 (선계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