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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중국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까? 성경을 보면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자주 성경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은 원래 아브람이란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아랍권에 흔히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 삶을 보시고 새 이름을 주셨는데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라는 축복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누구나 이름대로 살면 좋지만 이름대로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는 고기잡는 어부었습니다.
어느날 동생 안드레가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야를 만났다며 시몬 형을 데리고 예수님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시몬을 평범하게 보시지 않으셨는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께서 시몬을(뜻:들으심)보시고 이름을 바꿔주시는데 게바 즉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시몬은 유대인 사회에서 아주 평범한 이름입니다. 시몬의 삶은 우리와 다를봐 없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연약한 인생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듯이 감정이 풍부하고 의욕이 앞서 작은 비바람에도 흔들려 무너지는 그런 모습이 예수님 만나기 전 원래 시몬의 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꿔지는 새로운 전환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주님을 만나면 부르심의 소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에게 새로 지어진 이름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돌)인데 헬리어로 게바를 베드로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시몬의 이름을 게바 ‘단단한 돌’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시면서 반석이란 별명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하면 반석이 떠오릅니다. 어느 날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고백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그만큼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한 그 자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정도로 아낌없이 칭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예수님 말씀대로 이름이 게바 ‘반석’으로 바꿔졌다고 해서 시몬베드로가 한 순식간에 단단한 반석이 되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쉅게 부서지는 약한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일을 저지른 실수 투성이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이 함께 있는데 믿음을 자랑하고 싶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 버리지 않겠습니다!"(마26:33) 장담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여종인 한 비자앞에서 그런 말을 들고 대답하는데 보십시오 “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여종의 말에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부인하는데 무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였습니다.(마26:69-75)
이처럼 베드로는 잘난체 했고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하여 자신의 힘으로 단단한 돌이 되려 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쉽게 깨지고 부서지는 '생명 없는 죽은 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인생이 쉽게 부서지는 돌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권세 깨트리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엣 직업 어부로 다시 돌아간 베드로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식사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순간 부활하신 우리예수님 베드로를 부르시는데 예수님 만나기전 엣이름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부르시며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내 양을 치라 네양을 먹이라!!~~ 그리고 베드로가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를 예수님께서 예언하셨습니다.
요 21: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어렸을 때에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순간 베드로는 성경에 그렇게 표현된 것은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앞에 어찌 할봐를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을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180도 변화된 반석같은 베드로가 되어 초대교회 감독이 되지 않았습니까?
2세기 교회사와 전승에 따르면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 박해 시절, 베드로가 십자가형을 선고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바르게 매달려 돌아가셨는데, 어찌 종인 내가 감히 주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겠는가. 나를 거꾸로 매달아 달라."
그가 진정으로 예수님 닯은 산돌이 되어 초대교회 감독으로 성도들에게 편지하는데 먼저 4절를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광주도시는 잘 꾸며진 곳이기에 흔한 돌을 밟거나 만지는 일이 자주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포장, 건축 현장을 지나다 보면 길가에 뒹구는 흔한 돌들이 많아요
그래서 거칠고 모난 돌들을 보면 날카롭고 쓰임을 받지 못해 버려진 돌은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외면 당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습니다.당시 유대인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버린 돌처럼 “사람에게” 버린 바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우리 예수님은 철저히 고향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셨고, 심지어는 가족들로 통해 미친 사람으로 오해도 받았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배척당했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당했으며 3년을 함께 먹고 자던 제자에게 은 삼십 전에 팔리셨습니다.
그리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장 차갑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라는 틀 위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이런 모습을 본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치 없고 쓸모없는 버려진 돌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세상이 버린 버려진 돌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버린 그 돌을 들어, 온 인류를 구원한 ‘보배로운 머릿돌(모퉁잇돌)’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모퉁잇돌’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모퉁잇돌은 공사현장에 가면 볼 수 있는데 단순한 건축 자재 하나가 아닙니다. 건물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돌입니다. 모퉁잇 돌 하나가 기준이 되어 건물의 방향과 높이, 전체적인 균형이 결정됩니다. 만약 모퉁잇돌이 1도라도 틀어지면 그 위에 쌓이는 전체 건물이 기울어지거나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건물이 모퉁잇돌 위에 세워지듯, 인류의 구원의 역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초 위에만이 설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6절 하반절 베드로는 힘주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편지합니다.
그렇습니다. 보배로운 산돌이신 우리 예수님 세상이 버렸지만 모퉁잇돌이 되신 우리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내가 땀 흘려 세워놓은 것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세상의 기준에서 낙오했을 때, 혹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내가 겨우 이것 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때가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지난 과거 삶을 보아도 ‘부끄러움’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산돌이요 모퉁잇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써 반석이된 베드로는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사도로써 삶을 살기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당당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돌이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8절 말씀입니다. ...... "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고 하였느니라 이는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2000년전 초대교회 때나 오늘날에도 버린 돌을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가장 중요한 머릿돌로 삼으셨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은 말씀 앞에 순종하지 않은 죄는 결국 그 돌에 부딪쳐 넘어지고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나를 살리는 '구원의 모퉁잇돌'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심판의 걸림돌'이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님을 닮아 오늘 예배의 자리로 나온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저와 여러분은 신령한 집을 지어가야 하겠습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예수님만이 홀로 ‘산 돌’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아갈 때, 죽어 있던 돌과 같던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 ‘산 돌같이 생명력 있는 존재로 살아감을 믿습니다.
돌은 본래 차갑고 딱딱한 무생물이지만, 그리스도의 피와 부활의 생명이 흘러들어올 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성전을 이루는 살아있는 거룩한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르켜 5절 상반절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라고 했습니다.
건축현장에서 보지만 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으면 아무런 집도 되지 못합니다. 돌과 돌이 서로 연결되고 쌓여야 비로소 안전하고 평안한 ‘집(성전)’이 됩니다.
산돌이신 우리 예수님은 교회의 몸이요 우리는 그의 지체로 분리가 아닌 함께 세워져 가는 연합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총알의 파편처럼 동서사방으로 흩어져 홀로 높아만 질려고 하는 모습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산 돌이신 예수님 모퉁잇돌 위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산 돌’들이 연합하여 거룩한 공동체 신령한 집을 계속해서 지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혼자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고 받쳐주며 함께 신령한 집을 지어가며 세워 가는 것이 성도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구경꾼으로 성전에 앉아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5절에 권면하기를 우리가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갈 뿐만 아니라, 신령한 집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흠 없는 양의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산돌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마음껏 언제 어느 때든지 구원의 감격으로 신령한 삶의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은 예배당 의자에 앉아 설교와 찬양을 평가하고 감상하는 자가 아닙니다..... 나의 몸을 제물로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주체적인 예배자입니다.
참된 예배에 대해 D. L. 무디 (D. L. Moody)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순간,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감격이다." 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제사 거룩한 제사장으로 이제 말씀 듣고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직 "산 돌이신 예수님으로 내 삶의 모든 기준을 삼으십시오........ 세상에서 버림 받아도 모퉁잇 돌이 되신 예수님과 신령한 집을 지어가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