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권기덕
솟구치는 공터 외
죽은 코끼리가 떠 있다
죽은 기린이 쓰러져 있다
담벼락에선 물로 된 비둘기들이 그림자를 쫀다
바닥에는
이미 마흔 살이 된 아들
이미 죽은 아빠
이미 세 번째 결혼한 엄마
미래가 되어버린 꽃들이 피고
미래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웃음소리들이 가득할 때
미래에서 돌아온 친구들은 낙서하느라
바닥이 사라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공터는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절망이 깊어지면 위로 떨어진대
미래에서
아빠가 버린 아들이 있고
전쟁이 짓밟은 아이들이 있고
사람들이 불러온 해일이 있고
그래, 우린 지금 공중으로 떨어지고 있어 팔다리와 머리가 빨려 올라가 연기처럼, 그림처럼
공중에서
죽은 쥐를 불에 태우거나
토막 난 물고기를 버리지 말 것
죽은 코끼리 발에 달라붙는 아이, 죽은 기린 얼굴의 아빠, 얼굴 없는 동생들을 데려온 엄마,
미래에서 가져온 전쟁과 공포, 공터에서 어른들이 절망적인 일을 저질렀을 거야
미래의 몸들은 점점 부풀어 오르고 눈은 작아지고 있다
공터에서 버려진 새와 잎사귀들,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고양이의 그림자들
공터 아래 끝없이 펼쳐진 사막
포클레인이 피라미드를 파헤치고 있었다
우리는 공중으로 계속 떨어졌다
공터에서 바라본 먹구름 지나 하늘 공터에 다다랐을 때 공터는 호수로 변했다
호수는 썩은 사체 냄새로 가득했다
물에 비친 달에서 플라스틱 조각들이 떨어졌다
죽어서 가장 희망적인 것 하나씩을 구름과 함께 날려보내기로 했다 미래의 바람이 불었다 하늘 공터에서 공터가 있던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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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에서 발견된 몇 가지 단서
현숙과 그의 남편 마이클은 결혼 3년 차 원룸에 사는 평범한 부부다. 그들에게 원룸과 모텔은 별개의 공간이 아니며, 개념적인 사랑만 있으면 매일 매일의 물체는 소비해도 된다는 다소 자유분방한 공간관을 가지고 있다. 여태껏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다. 마침 함께 방문한 시립미술관 갤러리의 콘셉트는 원룸이었다. 전시관마다 원룸을 재현해놓았다. 기본적으로 전신거울과 욕실, 침대와 테이블이 다양하게 배치되었다. 어떤 전시관엔 천장이 볼록거울로 가득 채워지거나 구멍이 뚫려있기도 했다. 원룸의 벽면에는 화가의 작품들이 영상의 형태로 전시되었다. 배열된 원룸의 물건들과 콘셉트에 따라 각 벽면에 비친 그림들은 모두 달랐다. 제1전시관 로버트슨의 작품은 움직이는 도형들로 이루어진 추상 작품의 세계였다. 마이클은 사각형 속의 사각형이 한참 동안 반복되는 벽면 영상을 바라보다 졸음이 왔다. 사각형이 다시 삼각형으로 변할 때 깜짝 놀란 현숙은 외투를 던지며 소릴 질렀다. 놀란 삼각형 속에서 원들이 점점 채워지다 폭발했다. 맞은편 벽면에서 타원형의 붉은 눈동자들이 파도의 영상 속에서 난민처럼 둥둥 떠다녔다. 마이클은 겁에 질린 현숙을 데리고 제2전시관으로 향했다. 김병직의 작품들은 색채의 향연이었다. 침대는 파란색, 테이블은 주황색 등 단색으로 배치된 물건들도 그랬지만, 연작 <연인의 흔적>은 광기 어린 그림자들의 탐욕스러운 입을 형상화했다. 대포를 닮은 입에서 죽은 새가 무뇌아처럼 웃고 있었다. 마이클은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피워댔고, 현숙은 욕조에 딸린 샤워기로 얼굴을 씻었다. 벽면에서 개들의 흘레붙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3전시관은 거울 작품으로 구성된 다카시 후토로의 세계가 펼쳐졌다. 볼록거울, 오목거울, 평면거울 그리고 조각거울로 이루어진 벽면들의 작품에서 두 사람은 몽롱한 꿈의 세계에 빠졌다. 특히, 천장 거울에선 두 사람이 단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격렬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마이클은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과 육체를 소비하는 자신과 현숙의 남자들을 상상했다. 자본 계급이 느껴진 거울 속에서 둘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단지 손만 잡고 있었다. 전시관 출구를 겨우 찾은 그들은 제4전시관 관람을 위해 잠시 대화를 나눴다. 도록에는 <비공간 속의 공간>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는 일체 없었다. ‘모든 것은 개개인의 신념에 달려있습니다.’, 문장만 남아 있었다. 둘은 전시관 관람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 통로에 걸린 콜라주 기법의 미술 작품들을 관람하며 서로가 몰래 좋아했던 사람을 말해보기로 했다. 마이클은 자꾸만 이 미술관이 왠지 진짜 원룸처럼 느껴졌고 육체를 소비하고 싶어졌다. 현숙이 5층 카페테리아에 간 사이, 미술관 복도에서 ‘나를 밟아주세요.’, 문구를 쓰고 마이클은 누워버렸다. 지나가던 그림자들이 쌓이며 묘한 쾌락을 느꼈다. 누군가는 머리 앞에 지폐를 남겨두곤 사라졌다. 언제든 머물거나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5전시실, 주제어는 ‘원룸 속의 원룸 밖의 원룸’, 공중은 날개가 없는 새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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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덕 2009년 ≪서정시학≫에 시가, 2017년 ≪창비어린이≫에 동시가 각각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P』, 『스프링 스프링』 동시집 『내가 만약 라면이라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