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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를 여는 나의 집 § 원문보기 글쓴이: pinetree
투철한 시대정신과 사명감으로, 제국주의와 맞선 혁명가, 강인한 정신력과 굳은 의지로 어둠 속에 민족을 이끌었다.
박걸순/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많은 의열단원이 신채호 선생이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을 품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것을 강령으로 삼았습니다.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단순히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전체 우리 항일운동의 방향과 새롭게 건설하려고 했던 사회까지도 제시한 명문장이죠.
독립을 향한 칼날 같은 사상을 정립하고 실천한 사람,
중국에서: 이쪽에 해당화 나무가 있었어요.
어떤 고난도 꺾이지 않은 의지,
책에서: 여기 나오지요 申友, 采浩
역사를 통해 민족을 깨우고,
만주에서: 저 앞에 보이는게 바로 광개토대왕 비석이네요.
독립을 향한 민족의 의지를 좇는 주장과 외국의 힘을 싣는 세상에서 그는 정의를 좇았던 민족의 스승이었다. 민족의 내일을 설계하는 행동하는 사상가 신채호,
대전광역시 신채호 생가터에서 열린 역사체험프로그램,
교사: 조선의 독립, 대한독립을 위해서 그렇게 고생을 하셨던 것이에요. 일본이 조선사람들을 괴롭혔어요. 우리의 말도 못하게 하고~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단재 신채호(1880~1936)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 그의 독립정신과 정의를 실천했던 삶, 굽히지 않았던 조국에 대한 사랑을 체험해 본다.
학생일동: (한복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특별한 해에 1일 독립운동가가 되어 본 아이들, 과연 소감은 어떨까?
초등학생1: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시고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초등학생2: 신채호 선생님의 독립운동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임순정/백제문화재단 부원장: 지금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숨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주셔도 감사할 것 같아요.
충남 예산에 있는 고즈넉한 고택, 이곳은 대한제국 말기, 우국지사 수당 이남규의 생가다. 고택 옆에 지난 2008년 수당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고려말 충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1882년 문과에 급제해서 관직에 오른 이남규, 구한말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구국의 길을 선택한다.
이문원/수당기념관장: 수당집의 중요한 내용인데 광화문에 나가서 일제와 일전을 할 것을 강조하는 ‘청토적소’를 써놓으신 일부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 상소를 올리며 일제와 결전을 주장하는 이남규, 고종실록에도 이남규의 상소투쟁이 나올 정도로 항일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선 지도자였다.
청토적소(請討賊疎)
1905년 11월
“불의로 사는 것은 의로움에
죽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원수의 나라
(중략)
일대 결전을 벌이게 하여 주십시오”
이문원: 수당 선생이 다닐 때는 체포될 당시에도 300여명의 주민들이 따라 다녔다는 거에요. 일제가 수당 선생을 서울로 압송한다고 해서 가는데 연행해봤자 소용이 없어 통역을 시켜서 물어본 거죠. ‘네가 귀순을 하면 높은 벼슬과 작위를 줄 것이라’ ‘만약에 말을 듣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하니, ‘그러면 내가 굽힐 것 같으냐? 죽일테면 죽여봐라’
지속적인 상소투쟁과 의병활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로 한다. 결국 1907년 9월, 친일파의 밀고로 일제경찰에 붙잡힌 이남규, 압송되어 가던 중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맏아들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당시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이남규의 순교는 수많은 의병과 우국지사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전참판 이남규 부자가 일병에게 살해당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8일). 항일운동과 6.25 전쟁에서 순국한 증손자까지 4대에 걸친 구국활동의 중심에 있던 수당 이남규(1855~1907), 수당 이남규가 성균관 교수로 있을 때 단재 신채호는 그의 제자였다. 신채호는 당대의 유학자였던 이남규를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민족의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이문원: 수당집 영인본 1권 95페이지에 여기 나오잖아요. 申友 采浩 신채호, 옛날에는 갓머리가 있었는데 근래는 갓머리가 없습니다. 간기미 취부하고 명민 유수하니~
이남규는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 주변 학자에게 신채호를 소개하기도 한다. “신채호가 명민하고 지조 있으니 함께 한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수당 이남규가 친척에게 보내는 편지中-
이문원: 수당 선생과 신채호는 꼬장꼬장하고 똑 같았죠. 한치의 양보도 없죠. 수당 선생은 절대 굽히지 않았거든요. 그걸 배우셔서 단재 신채호나 산강 변영만이나 이런 양반들이 꽤 흠모하셨던 것 같아요. 그 분들은 한 번 더 발전해서 애국계몽사상까지 발전한 거죠.
충절의 유학자 이남규의 곧은 정기는 제자 신채호에게 이어졌던 것이다. 신채호는 20대 초반부터 다양한 저술활동을 펼친다. 그는 어떤 책들을 썼을까.
박정규/前청주대학교 교수: 단재 관련 자료들이죠. 그 동안 제가 수집했거나 복제해서 자료로 남겨 놓은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채호를 연구해온 박정규 교수는 30년 동안 신채호와 관련된 책과 자료들을 수집했다. 세월을 짐작하게 하는 책들 중에 몇 개의 영웅전이 눈에 뛴다. 乙支文德
박정규: 이 책은 1908년도에 나온 ‘을지문덕’ 이라는 책입니다.
신채호는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한국 역사의 세 영웅으로 인정했다.
박정규: ‘이순신전’은 신문에만 게재가 돼서 신문연재소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연재가 끝난 한 달 후 등사판으로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기술적인 한계로 100권, 많아야 200권 정도 밖에 출간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행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08년 5월부터 8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쓴 글을 책으로 엮은 신채호의 이충무공전 단행본, 신채호는 왜 이렇게 영웅전에 힘을 쏟은 걸까.
박정규: 역사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진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시대의 영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신채호, 여기서 영웅이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 또 국민 전체가 영웅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채호의 영웅로는 어떻게 확장됐을까(한양->퉁화시), 1914년 중국으로 간 신채호, 랴오닝성 환런민족 자치현에서 신채호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월배/하얼빈 이공대학 교수: 노학당 가는 길을 알 수 있을까요?
주민: 얼마 안 멀어요. 바로 내려가서 터널을 지나고 새로 난 길을 지나면 나와요.
조선족 주민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오지 마을을 찾았다.
항일유적지를 관리하고 있는 노인을 먼저 만나기로 했다.
정정복/노학당 기념비관리인: 어디서 오셨어요?
주민: 한국에서 왔대요.
김월배: 노학당 비석 볼려고 왔습니다. 정정복 할아버지시죠? 어르신 반갑습니다.
노인의 안내를 따라가 보니 밭 가운데 비석 하나가 서 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1912년 세워진 민족교육기관 노학당, 노학당이 있던 곳에 비를 세운 것이다. 비에 새겨진 글자 중 눈에 띄는 이름 尹熙順(1860~1935),
정정복: 노학당 비석은 맨 처음 여기서 할머니(윤희순 여사)가 학교를 세운 자리에 세웠어요. 그 목적은 항일을 위해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독립은 해야지 이렇게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형 이후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장이 된 윤희순,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들이 활약할 대 윤희순은 수십수의 의병가를 지어 사기를 진작시키고, 다른 부녀자들과 협력해 의병들을 뒷바라지한다. 또 놋쇠와 구리를 구입해 무기와 탄환을 제조하는 등 의병훈련도 주도한다. 여성 최초의 의병장이었던 윤희순은 1911년 시아버지 그리고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다. 항일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 이곳에 노학당을 세운다. 노학당은 인근에서 운영됐던 東昌學校의 분교였다.
김월배: 동창이라는 말이 무엇이냐면 1911년에 경남 밀양에 대종교를 믿는 윤세복, 윤세용 형제가 가산을 털어 환런현에 오셔서 민족의 혼, 민족의 발전과 독립을 위해 ‘동창’ 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당시 동창학교 학생들은 100여명으로 대부분 이주 동포들의 자녀들 이었으며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우리 사학계의 두 거물 박은식(1859~1925)과 신채호(1880~1936)가 교사로 일한다.
김월배: 동창학교에서는 고구려의 기상을 토대로 조선의 독립을 세우자 라는 항일 인재배양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창학교 교사로 있을 때 만주의 고구려 유적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신채호의 역사의식은 한 단계 발전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국내성은 현지 지안시(중국 지린성)로 이곳에는 다수의 고구려 유적이 남아있다 (高句麗遺址公園), 오래 전부터 꿈꾸던 민족의 발원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고대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신채호, 거대한 규모의 고분인 장수왕릉 등 한민족의 웅비와 위대했던 시간들을 생생히 느끼며 민족사관이 형성됐다.
김월배: 저 앞에 보이는 것이 광개토대왕 비석입니다. 여기서는 호태왕비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를 찾았을 때는 자신의 팔로 높이와 둘레를 직접 측정하며 꼼꼼하게 그 현장을 기록한 신채호, 好太王碑,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후 신채호는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고대사 연구에 매진한다. 그동안 한반도 남부에 머물렀던 역사인식을 만주와 고구려까지 확장시킨 신채호, 이후 역사에 대한 그의 오랜 집념과 노력의 결정체이며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서술한 신채호의 역작 조선상고사가 탄생하게 된다. (朝鮮上古史-단군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 서술한 역사 책),
김월배: 살아있는 교과서 ‘조선사’ 라는 역사서를 쓰시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대한독립을 쟁취하자는 의미를 부여한 그런 현장입니다.
약1년간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 신채호는 부여, 고구려, 발해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민족사관을 구체화시킨다. (비록 짧은 시간에 외부만 관찰했지만 고구려의 건축, 예술, 경제력 등을 직접 눈으로 보니 ‘집안현에 와서 고구려의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보는 것보다 낫다’는 확신이 들었다-신채호 <조선상고사>중-
만주에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고 신채호는 베이징(퉁화시->베이징)으로 향한다. 베이징에 온 신채호는 그의 삶에서 또 한번 변혁의 계기를 맞는다.
홍성림/재중화북 기념사업회장: 여기 간판 보이시죠? 여기가 의열단 본부가 있던 외교부 거리입니다.
당시 외교부 거리에 있었던 의열단 본부, 신채호는 베이징에서 의열단 관련자들과 만나며 그들의 독립운동과 방략을 접하게 된다. 일제에 무력으로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비밀결사단체 의열단, 의열단 단장은 김원봉이다.
홍성림: 김원봉 선생님이 유자명 선생님을 통해서 신채호 선생님을 소개받고 나서 젊은 생각과 진취적인 가치관에 대해 굉장히 감복을 받았다고 해요.
베이징에서 마주한 열혈 독립운동가 세 사람 김원봉(1898~1958), 유자명(1894~1985), 신채호(1880~1936), 1922년말 신채호가 머물고 있는 집에 의열단의 비밀참모였던 유자명과 함께 김원봉이 찾아옵니다. 당시 25살의 김원봉은 인격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신채호 라고 할 정도로 그의 학식과 지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김원봉은 신채호를 만나자 그에게 의열단의 주장을 글로 작성하여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하게 된 것이 한국독립운동사에 항일선언문 중 백미라는 조선혁명선언, 신채호는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한지 한 달 후인 1923년 1월, 6400여자에 이르는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한다. 의열단의 사상과 방략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 그것은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역사적인 문서일 뿐만 아니라 민중이 중심이 되는 민족독립과 항일정신을 가장 힘차고 확고하게 천명한 선언문이었다.
조선혁명선언
제1장 일제는 한민족 생존의 적이다
제2장 강도정치에 타협-기생하는 자는 우리의 적이다
제3장 외교-준비 미몽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을 선언하노라
제4장 양병 10만이 일 척의 작탄만 못하다
제5장 이족통치 등을 파괴하고 신조선을 건설한다.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립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비평과 평가를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독립운동 방법, 우리가 건설해야 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명문건입니다.
홍성림: 이번에는 1923년에 조직된 다물단의 창단식이 있었던 곳을 갈 건데요. 애석하게도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고 기록상 베이징대 홍루 뒤쪽에 있었다고 하니까 이 건물 뒤쪽이 아닐까 추정을 하고 있는 거죠.
신채호는 1925년 무렵 독립운동 무력행동단체인 다물단에 참여한다. 다물이라는 뜻은 북송시대 사학자 사마광이 그의 책에서 고려의 말로 옛 땅을 찾는 것을 다물이라고 한다는 데에서 기원했다.
홍성림: 신채호 선생님은 꾸준하게 무장 독립투쟁에 대한 의지를 망명 초기부터 보이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단체의 조직에 대해 찬성하셨습니다.
신채호는 우당 이회영(1867~1932), 심산 김창숙(1879~1962)과 함께 다물단에 참여한다. 젊은 단원들에게 다물단의 정신을 지도한다.
반병률: 단재 신채호 선생 입장에서는 1923년 독립운동이 침체돼 있었던 거에요. 독립운동을 새롭게 부활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의열단 같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의열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민중이 새롭게 주체가 된다는 거죠.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민중이 직접적으로 혁명의 담당자가 되면서 폭력에 의해서 일제 식민 통치를 타도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거죠.
그러던 1925년 4월, 다물단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발생장소는 와우적가 23호, 다물단은 조선총독부 밀정으로 10년간 비밀리에 활동하던 김달하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김달하는 당시 베이징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며 우리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었다.
주민1: 저 보이는 문이 지금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저것은 문 입구인데요.
주민2: 저거요?
주민1: 네, 문 입구고요. 두개의 받침돌이 있었는데 다 없어졌습니다. 옆에 이것은 할아버지가 해방 전에 만들었어요.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총독부의 밀정인 것이 탄로난 김달하, (1925년 3월 30일, 독립운동가 매수 혐의로 다물단에 의해 처단되는 밀정 김달하), 살려줘! 쾅! 다물단은 밀정 김달하를 처단한다 (“북경에서 밀정 김달하가 피살당했다” 동아일보 1925년 4월 4일), 일제는 김달하 처단을 다물단과 의열단 지도부의 합작품으로 보았다. 그 무렵 국권상실 후 줄 곳 무력항쟁을 외쳐온 신채호는 민족해방 이념으로 아나키즘을 받아 들인다.
홍성림: 당시 멍루이 후퉁이 여기 있어요. 지금 이 거리가 진청팡제 거든요. 이쪽이 남이니까 동서로 있는 곳이 진청팡제입니다.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과 권력을 부정하는 사상 아나키즘, 신채호는 아나키스트가 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다.
홍성림: 예전에 세계어(에스페란토) 전문학교 설립이 이곳 멍루이 후퉁에서 되었다고 기록이 남아 있어요.
당시 아나키스트들은 세계 공용어를 통해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을려고 했다. 신채호는 중국-대만의 아나키스트들과 세계공용어를 배우며 피식민지 국가간 연대를 도모한다. 아나키스트 신채호가 부정했던 권력은 일본제국주의였다. 신채호는 의열단과 다물단의 무장투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나키즘을 통해 직접 혁명과 그 실천에 나선 것이다.
홍성림: 여기 첸용캉 후퉁이라고 표지판이 보이시죠?
신채호는 왜 아나키스트가 되었을까? 신채호를 베이징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우당 이회영이었다. 명문 사대부 집안 출신의 아나키스트였던 이회영은 신채호와 사상적인 동지였다. 그들은 베이징의 이회영 집에 모여서 혁명을 설계 한다.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동아시아 반일국제연대를 구축해 나갔던 베이징의 한국 아나키스트들, 이을규, 이정규, 신채호, 백정기, 김풍진, 유자명, 정화암, 이회영-그 중에서도 신채호는 더 강하게 반일을 외친 인물이었다.
박걸순: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제국주의로부터 침탈당해서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물론 일본의 하층민들까지 포함해서 연대하자는 주의였고, 신채호 선생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피지배 민족들과는 연대하되 일본인은 누구라도 연대해서는 안된다는 일본을 배척하는 주의였습니다. 아무리 일본의 피지배 계층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름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봤기 때문에 어떤 일본인들과도 연대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일본배척정신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서울 종로의 오래된 골목 한쪽에 베이징을 누비던 혁명가들의 뜻을 잇고 있는 단체가 있다 (국민문화연구소),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 제국주의에 맞서 더 확실한 항일운동을 위해 아나키즘을 선택한 독립운동가들의 투지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문창/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 회장: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이신데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계시고, 우당 이회영 선생, 성재 이시영 선생 의열단의 기초를 마련한 유자명 선생이 계십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체계화 시키기 위해 무정부주의자 단체를 조직한다.
이문창: 베이징에서 1924년에 젊은 동지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입니다.
하지만 피지배 국가간 연대로 일제에 대항하겠다는 희망은 제국주의의 힘 앞에 위축돼 갔다. 신채호 아나키즘 연구의 권위자로 통하는 박걸순 교수, 최근 신채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박걸순: 최근에 새로 발굴된 자료가 있습니다. 나의 일,이,삼,사,오,육.칠 이라는 논설이고, 이번에 이 자료를 통해 신채호 선생께서 사용하신 새로운 호를 찾았는데, ‘연당’ 이라는 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요.
연당이라는 호는 이 글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 신채호가 공산주의를 언급한 글도 눈에 뛴다.
박걸순: 공산주의와 관련된 서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십년 전에 돌아다니던 기사는 모두 애국자였는데 요즘은 모두 공상당이며, 십년전에 배우려는 청년들은 거의 군사교육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문학을 배우려고 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10년전, 1910년대 초에는 무장투쟁 등에 청년들이 나섰는데 지금은 소설이나 시나 쓰려고 하는 문학에 빠져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신채호는 글에서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박걸순: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서 그 수단으로서의 사상을 수용한 것입니다. 특히 아나키즘이 추구하고 있었던 투쟁의 3대 방식이 암살, 파괴, 폭동이었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민족주의 사상을 가장 선명하게 구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나키즘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국가와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강력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신채호는 효율적인 독립운동 방법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했다. 탁월한 사상가였던 신채호는 어떤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세종시 부강면에 있는 한 도서관을 찾았다.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도서관은 前부강면장 부부가 운영하는 것으로 부강면에 살았던 유명인의 자료를 다수 보관하고 있다.
이규상/前부강면장/삼버들 작은도서관장: 이것은 부강초등학교에 남아있는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의 학적부입니다. 보시면 ‘김자문자’로 되어 있잖아요. 가네코 후미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부강초등학교에 다닌 가네코 후미코(1903~1926), 1903년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 모두에게 양육을 거부 당하면서 호적이 없는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불행한 개인사를 겪는다. 일본의 친척 집을 전전하다 1912년 부강면의 고모집에 맡겨지며 한국에서 살게 된다.
이규상: 이곳은 부강파출소인데요. 이 파출소는 1900년대부터 헌병대가 있던 자리입니다. 후에 주재소로 바뀌었지만 이전에 헌병대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약 7년을 사는 동안 그녀는 3.1운동을 목격한다.
기자: 여기는 왜 오셨나요?
이규상: 여기는 가네코 후미코가 다니던 학교 도로입니다. 집이 저기에 있고 학교는 저기에 있었죠. 그래서 가네코 후미코가 항상 이 길로 다니다 보니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이죠. 3.1만세운동했다고 조선인들을 구타하는 그 소리가 바로 저 밤나무 단지에도 들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 거로 봐서는 조선인들이 많이 억압당했던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19년 3월 30일, 부강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보면 부모에게 버림 받은 자신의 처지와 나라잃고 고통받는 당시 조선의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한 가네코 후미코, 특히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그녀가 아나키스트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규상: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혁명선언을 1923년에 썼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팔천, 구천자 가까이 되는데 그 내용이 기가 막히게 좋은 내용이어서, 가네코 후미코가 그 내용을 보고 나서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고 볼 수 있죠.
조선혁명선언서는 그녀의 사상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 경상북도 문경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가 있다. 1926년 7월, 옥중 사망한 그녀의 유골을 동지들이 몰래 가져와 문경에 묻어 주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묘 옆에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박열(1902~1974) 의사의 기념관이 있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은 1919년 17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스트가 됐고,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도회 불령사 등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며 적극적인 반제국주의 활동을 펼친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인물 박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함께 아나키스트 운동을 하다가 부부가 된다. 두 사람은 1923년 일왕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는데, 박열은 법정에서 한국의 전통 옷을 입고 나타나 거침없는 말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김창덕/국민문화연구소 총무이사: 일제가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두 분께서 벌떡 일어나서 만세를 부릅니다. 내가 비록 육체는 일제에 의해서 없어질지 모르지만 나의 투쟁정신, 독립을 향한 의지는 영원히 남아 있고, 또 일제에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저항정신을 나타낸 모습입니다.
1923년 9월 1일, 동일본을 덮친 대지진, 10만명 이상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위기와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한다 (간토 대학살(1923년)-간토 대지진 때 무고한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한 사건), 조선인이 상수도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폭탄을 던졌다 라는 들의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닥치는 대로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독립신문은 일본 유학생들의 조사를 인용해 조선인 피해자가 6천명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도쿄 752명, 가나가와현 1052명, 사이타마현 239명, 지바현 293명 등), 조선인과 더불어 일제의 목표가 됐던 이들은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왕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른바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판결을 받는다. 두 사람의 재판기록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찾았다. 1924년에 진행된 박열의 재판기록, 박열은 3.1운동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것과 의열단원으로부터 폭탄 반입계획을 세웠으며 의열단이 본인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것을 진술한다.
김창덕: 재판기록을 보면 의열단 선서가 그대로 나옵니다. 그만큼 박열의 일왕 처단사건과 의열단선언서(조선혁명선언서)와는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의열투쟁을 선택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념과 신념을 부여하고 그들을 뜨거운 가슴으로 떨쳐 일어나게 만들었다. 신채호와 박열, 가네코 후미코 모두 아나키스트였다. 세 사람, 이들이 아나키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창덕: 여기 보면 고토쿠 슈스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박열이 아나키스트가 된 첫번째 계기가 고토쿠 슈스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토쿠 슈스이(1871~1911)-일본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 일본의 1세대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 그는 누굴까? 일본 남서부에 위치한 고지현에서 태어난 고토쿠 슈스이, 도시기념관에는 그를 기리는 자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로 20세기 초 일본의 반제국주의 지도자중 한 명이다-그는 1903년 사회주의자들의 단체인 평민사를 결성한다.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주장하는 글을 실었다.
해설사: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에서 박해가 극심했고 몸도 안좋았기 때문에 1906년도에 잠시 요양차 미국에 갔습니다.
당시 국제사회에 만연하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아시아 민족연대를 주장한 고토쿠 슈스이, 제국주의는 소수 지배계급만을 위한 허루라고 주장한다. 군대를 앞세운 일본의 식민지 확장을 비판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는데 고토쿠 슈스이는 이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해설사: 고토쿠 슈스이가 체포된 1910년은 일본이 한국(조선)을 합병한 해입니다.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한반도 병탐 1년전이던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던 조선통감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에게 총을 쏜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현장에서 체포된다. 동양 평화를 염원하며 벌인 안중근 의거, 고토쿠 슈스이는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가 잡혔을 때 품 속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그를 칭송한 한시가 발견됐다.
생을 버리고 의를 취했을 때
몸을 바쳐 도리를 행했다
안중근 의사가 해낸 일에
천지가 진동하는구나----고토쿠 슈스이-----
신채호는 고토쿠 슈스이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상에 감명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한다. 1928년 일제에 붙잡힌 신채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된다. 그러나 출옥을 1년 8개월 남겨놓고 1936년 2월, 그는 뤼순의 차디찬 감옥 안에서 뇌일혈로 쓰러지며 망명 26년만에 유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다. 죽으면 왜놈의 발 끝에 짓밟히지 않도록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말했던 신채호, 하지만 후손들은 청원군 낭성면 그가 살았던 옛집터 자리에 묘를 쓰기로 하고 유해를 암매장했다.
강미원/문화해설사: 이곳이 1936년도 2월 24일날 신채호 선생을 암매장 했던 장소입니다.
많은 애국인사들이 암매장했던 곳에 참배를 왔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고초를 겪을 만큼 일제는 신채호의 묘소 참배까지도 극도로 경계했다. 하지만 이미 죽은 그를 암매장까지 한 이유는 뭘까.
강미원: 신채호 선생님은 무국적자였기 때문에 호적이 없었습니다. 호적이 없기에 매장 허가를 받을 수 없던 상황이어서 당시 낭성면 문중 분의 도움으로 암매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 후에도 방치되다시피 했던 신채호의 묘는 2007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으로 새단장을 할 수 있었다. 새롭게 묘역을 조성하면서 1944년 숨을 거둔 부인 박자혜(1895~1943)도 합장됐다. 냉철했던 역사가, 뜨거웠던 혁명가, 그의 사상은 지금도 빛나고 있다.
장석흥/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만약에 신채호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근대 역사학을 식민사학에 빼앗기고마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끌어간 근대 역사학의 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박걸순: 신채호 선생님의 독립사상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넘어 아시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사적인 의미와 함께 세계사적인 의미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송곳처럼 날카롭고 한치의 굽힘도 없었던 신념과 의지, 평화를 향한 불꽃 같은 삶은 우리들의 잠든 민족정신을 깨우고 있다.
천고송 신채호
나는 하늘 북치는 법을 알지
슬픔과 분노를 담아 낸다네
슬픈 소리 비장하게 노한 소리 장중하게
이천만 민중 불러 일으켜 세워
끝끝내 의연히 죽을 결심으로
역사를 빛내고 강토를 수복하리니
오랑캐 섬의 마지막 피 한 방울로
나의 하늘 북에 제사지내리라. 끝.
(KBS 특집다큐 2부 단재 신채호에서 정리).
① 난 올해로 2019년 74세이다. 학교 다닐 때는 배우지 못했고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 발굴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사학자들의 연구로 구체적이고 자세히 알게 되었다. 기뻣다. 신채호(1880~1936)도 그 중의 하나다. 신채호는 이남규(1855~1907)의 제자다. 신채호는 이남규로부터 민족의식을 체득하였다. 이남규의 순교로 우국지사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② 신채호는 신동이었다. 머리가 좋았다. 고로, 망명 후 역사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진작시키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래서,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같은 영웅의 이야기를 최초로 집필했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영웅이 돼야 한다. 신채호는 망명초기부터 무장투쟁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다 이회영(1867~1932)을 만나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③ 신채호는 일본 제1세대 아나키스트 지도자인 소토쿠 슈스이(1871~1911)의 책을 번역하면서 아나키즘을 알게 되었고 이게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고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은 명문장으로 의열단과 아나키스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거기에 박열(1902~1974) 의사와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1903~1926)가 있다.
④ 신채호는 1928년 10년형에 뤼순감옥에서, 출옥을 1년 8개월 남겨놓고, 1936년 2월, 뇌일혈로 사망, 망명 2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죽으면 왜놈의 발 끝에 짓밟히지 않도록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말했지만, 후손들은 그가 무국적자였기 때문에 유해를 가매장했다가 2007년에 그의 고향에 묘역을 조성, 1944년 숨을 거둔 부인 박자혜(1895~1943)와 합장했다.
⑤ 신채호가 없었다면 우리는 근대 역사학을 식민사학에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신채호의 역사학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송곳처럼 날카롭고 한치의 굽힘도 없었던 신념과 의지, 우리들의 잠든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냉철했던 역사가, 뜨거웠던 혁명가, 그의 사상은 지금도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