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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불교현대화 초석 다진 실업가
특집 |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이한상의 불교적 삶을 되돌아보며‐평전을 위한 첫걸음
한 사람의 인생을 추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 사람의 행적을 두고서 잘잘못을 논하는 평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사람이든 그가 속한 사회의 분위기와 관습 아래 다른 사람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갔던 것이기에 그 시대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고서는 그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한 사람에 대한 공적 평가는 이렇게 신중해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유보되고 가능한 한 미뤄두는 게 고금의 관례이자 또 그러해야 마땅한 태도였다.
덕산(德山) 이한상(李漢相, 1917~1984)이 우리 불교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었던 때는 대략 1963년부터 1972년까지 1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현대불교사에 남을 만한 여러 중요한 일을 해냈다.
지금 이한상의 생애를 되짚어보며 그가 보여준 불교적 삶의 의미를 말하려는 것은 우리 불교계가 누리는 기름진 토양의 바탕에는 그가 흘린 땀과 노력이 아주 깊고 넓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애써 거름 뿌려준 사람의 노고를 기억하는 것은 훗날 그 곡식의 풍요를 누리는 이들의 미덕이자 의무일 것이다. 먼저 그가 이룬 불교 관련 공적을 연대순으로 나열해 보며 글을 시작하겠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수백 단어의 현란한 말보다 때론 무채색의 한 줄이 훨씬 뚜렷하게 다가갈 수 있다.
이한상이 불교계에 이룬 공적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들자면, 1964년 당시 폐간 위기까지 몰렸던 불교계 최대 언론사인 《대한불교》(현 〈불교신문〉) 사장을 맡아 신문을 정상화시키고 주간지로 거듭나게 했던 일을 가장 먼저 꼽게 된다. 이어서 재가 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삼보학회 및 삼보법회 창립, 불자 대학생 장학금 지급과 같은 젊은 인재 육성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비록 미완의 업적인 되고 말았지만, 현대불교 100년사 집대성을 위한 한국불교백년사 편찬사업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외에도 한국 현대불교의 지평을 넓혀주었던 여러 가지 일 중 상당수가 그의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그의 삶을 이 정도로만 요약해 봐도 지금 이한상의 불교적 생애를 되짚어보려는 까닭은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건설 산업의 초석을 놓다‐실업가 이한상
이한상은 1917년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에서 아버지 이태호, 어머니 이희전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 이씨(全義 李氏)2)이고 태사공(太師公) 31대손이다. 시조의 종묘(宗墓)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에 있는데 1968년 3월 3일 문중에서 ‘종인한상송덕비(宗人漢相頌德碑)’라는 송덕비를 세웠을 만큼 이한상은 문중의 주요 인물로도 꼽히고 있다. 이는 그가 문중에서 단순히 부유한 실업가 정도로만 인식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품과 사회에 대한 공헌이 남달라 문중을 빛냈다고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국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농사를 짓는 부모의 만류를 무릅쓰고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용산구 용문동에서 지냈으며, 1938년 경기공립공업학교를 졸업했다. 경기공립공업학교는 1910년 개교한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를 모체로 한다. 1944년 경성공립공업학교, 1946년 6년제 경기공업중학교, 1974년 경기공업전문학교, 1979년 경기공업전문대학, 1988년 서울산업대학 등의 개편 과정을 거쳐 2010년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되었다. 1938년 경기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동안 사업 실무를 익힌 이한상은 1946년 비교적 젊은 나이인 29세에 풍전산업주식회사를 창립,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사실 이한상의 삶에서 불교를 떼어놓고 보면 그는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 사업가로 기억되어야 한다. 풍전산업주식회사가 번창하자 1961년 대한전척공사를 창업하여 직원 3,000명이 넘는 한국 최대의 토목건축회사로 키웠다. 이후 그는 사업가로서 전성기를 맞아 각종 건설사업을 성사시켰다. 광화문 네거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해, 서울 광교 옛 조흥은행 본점, 서울 인현동 풍전상가 같은 건물과 섬진강댐, 팔당댐, 경부고속도로 등의 건설이 대한전척공사가 시행한 건설사업이었다.
이 중 풍전호텔(현 호텔 PJ)을 포함한 풍전상가는 10층 건물로 세운상가 8개 동의 일부로 지어졌는데, 지금은 부근의 인현상가 등과 함께 서울 중구의 역사문화자료가 되어 있다. 그는 이 같은 성과와 건설업계에서 얻은 신망을 바탕으로 1964~1968년까지 대한건설협회 회장을 맡았고, 사업 공적이 인정되어 1966년 정부로부터 5 · 16 민족상(산업 부문), 1970년 고속도로 건설 유공자로서 석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실업가에서 불교계의 후원가로
이한상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서울에 와서 고학할 때 송광사의 구산(1910~1983) 스님을 알게 되면서부터라고 나온다. 그런데 구산 스님이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때가 1937년,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때가 1939년이므로, 구산 스님이 출가 후 한창 공부에 정진하던 이 무렵에 당시 20대 초반의 이한상이 구산 스님과 잦은 교류를 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뭔가 정확한 정보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보다는 구산 스님이 안거 등 오랜 수행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교단정화 운동 등 불교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인 1954년 여름 이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여하튼 이후 이한상은 오랫동안 구산 스님과 가까이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 달마회의 지도법사 행원 스님 등과의 친교를 통해서도 불교 공부를 착실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문〉의 재건‐침체된 불교계에 구원투수로 나서다
이한상이 재가불자로서 불교계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시점은 1964년 《대한불교》 사장을 맡으면서부터다. 《대한불교》는 1960년 월간으로 창간되었으나 처음부터 재정난이 심했고, 5년도 되지 않아 폐간이 논의될 만큼 사정이 악화되자 종단의 적극적인 권유로 이한상이 직접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신문사 인수 조건으로 기자의 인사 및 논설 방향 같은 회사의 핵심 방침은 종단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보장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업가가 왜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 적자 신문사의 경영을 맡았던 것일까? 성공한 기업인으로서의 자만인가, 언론사 사주가 되어보겠다는 명예욕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을까? 그는 사장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영 인수의 각오를 취임사답게 다분히 겸양 되고 수사적(修辭的) 표현들을 써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포교와 교단의 발전에 신문이란 꼭 필요한 존재인데, 교단에 하나뿐인 신문사의 존속이 어려워진 현실을 보고 고민 끝에 참여하게 되었던 심정이 행간에서 읽힌다. 그가 신문사 인수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동기는 《대한불교》 1965년 7월 15일 자 지령 100호 기념사에서 좀 더 솔직한 언어로 구사되고 있다.
취임사와 비교하면 문장으로서는 오히려 더 투박해졌지만 그의 본심은 더 솔직히 드러나 있다. 아마도 주변의 윤색을 사양하고 자신의 육성을 담아 《대한불교》의 경영을 맡았을 때의 심정과 속마음을 직접 전하려 한 것 같다. 그는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대한불교》는 우리나라 불교계 유일무이한 보도기관이고 공기(公器)임을 자부”하며, 그가 신문사를 맡은 것도 “궁극으로는 종단 3대 사업의 하나인 포교를 위한 것”이었다고 하여 신문사 경영을 맡게 되었던 목적을 분명히 했다.
《대한불교》는 이한상이 취임한 직후 열악한 취재진을 보강하고 보급망을 일신하여 서울 본사 외에 부산 등 주요 도시에 지국과 지사를 설치했다. 또 기자 외에 국내 12명의 특파원과 14명의 통신원을 별도로 둘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하며 빠른 속도로 신문사로서의 골격을 갖춰 나갔다. 해외에도 3명의 기자를 특파하여 보도 기능도 대폭 강화했다(1967년 당시). 극심한 경영난으로 존폐의 갈림길에 섰던 신문사를 맡아 얼마 되지 않아 명실상부한 신문사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정비하여 《대한불교》는 불교계 최대 신문사로서 위상이 확립되었다. 이렇게 지면 혁신을 단행하며 일간지 못지않은 양질의 편집과 신문사 체계를 갖춰 50여 년의 불교신문 사사(社史) 중 가장 안정되고 알찬 신문을 발행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이 나중에 오늘날 교계 최대의 신문사로 꼽히는 〈불교신문〉이 되었으니, 이런 비약적 발전도 그때 이한상의 용단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1972년 3월 26일 자 제447호를 끝으로 사장직에서 물러나며 신문사 지분은 조계종단으로 돌려놓았다.
한편, 이한상의 불교계 활동은 1968년 8월 29일 대한불교달마회(이하 ‘달마회’) 회장 취임을 계기로 더욱 힘을 얻었다. 달마회는 그 10년 전인 1958년 7월 8일 보문동 미타사에서 창립된 재가불교 수행 단체다. 회장은 초대 이창호 이후 이한상, 조병일 등으로 이어졌고, 지도법사는 숭산행원 스님에 이어 혜암, 대은, 법인 스님 등이 맡았다. 달마회는 이한상이 회장을 맡은 이후 각종 불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때로는 핵심 추진 주체로서 때로는 외곽 지원 단체로서 그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한상은 회장을 맡기 이전부터 숭산행원 스님의 지도하에 이 단체의 참선수행에 매진하여 이미 ‘한소식’ 터득한 재가불자로서 명성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한상과 불교계와의 인연을 얘기할 때 달마회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연결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적 불교교육 주체 설립‐불교종립학원연합회와 불교교재 편찬
이한상은 평소 불교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60~1970년대 이한상과 함께 불교운동을 했던 이들 중에는 그의 다양한 불교계 활동 이력 중에서도 젊은 불교학도들을 지원한 것을 가장 으뜸으로 놓으면서 오늘날 중고교 및 대학 불교학생 활동의 기반은 그로부터 마련되었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1965년 5월 5일 전국 각급 불교학교들의 협의체 불교종립학원연합회(이하 ‘연합회’)를 창립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광동학원 이사장으로서 이 연합회의 창설과 활동을 주도했다. 전국 31개 종립학교 교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합회는 초대 회장은 당시 동국대 총장 조명기가 맡았고, 이한상은 숭산행원 스님과 함께 공동 부회장으로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 연합회는 불교교육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교육계의 함의를 도출하자는 게 기본 목적이었다. 그 실제적 목표로 각급 종립학교의 종단학교로서 위상 재정립, 교법사 제도의 현대적 개선 및 활성화, 중고교 불교 교재 편찬 계획 수립 등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효과적 포교를 위해서는 청소년들에게 먼저 통합적이고 체계적 불교교육을 해야 한다는 이한상의 지론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단학교로서 위상 재정립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각급 학교가 범종파적으로 단합하여 불교의 이념에 입각한 인재양성을 도모하자는 기본적 목표 아래 추진되었다. 그 결과 불교교재 편찬이라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사상 특기할 만한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불교교재 편찬의 과정을 살펴보면, 연합회는 1965년 불교지도교사연구회와 함께 교재편찬위원회를 구성해 각 종립학교에서 사용할 중고교용 불교교재를 학년별로 1권씩 총 6권을 제작해 1967년부터 채택되도록 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불교교재로 사용하던 《밝은 생활》은 내용이 어려워 중등교육의 교재로서는 적당치 못하다는 게 일선 교사들의 한결같은 의견이었다.
연합회는 이러한 의견들을 적극 반영하여 새로운 교재 제작에 착수한 것이다. 편찬위원으로 대학 측에서 동국대의 조명기 · 김준열 · 서경수 · 박성배 · 김영태 교수, 일선 실무교사로 김윤주(해동고) · 이광현(해동중) · 이인홍(해인종합고) · 라상문(능인고) · 한철수(보문고) 교사 등이 참여해 교재 출판 준비를 순조롭게 진행했다. 이 작업은 말할 것도 없이 이한상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고, 예정대로 1967년 드디어 출판이 성공적으로 완료되기에 이르렀다. 3월 10일 동국대 대학선원에서 출판 고불식을 하고 일반에 선보인 이 책들은 중1 《부처님의 생애》 중2 《밝은생활》 중3 《바른길》 고1 《진리의 생활》 고2 《대승의 길》 고3 《불교와 인생》 등이다. 종전의 교재에 비해 청소년의 감각에 맞는 문장과 종교 일반, 인생, 사회, 과학, 예술 등을 불교와 연관 지어 포괄적으로 기술한 불교계 최초의 현대적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당시 문교부 검인정의 중고등 각종 교과서에서 도외시되다시피 했던 한국 고승의 전기(傳記) 및 사상을 대폭 수록한 점도 특기할 만했다. 여기다가 내용 역시 참신하여, 당시의 일반적 교재가 답습한 것처럼 페이지 전체를 오로지 텍스트로만 채운 게 아니라, 보다 빠른 이해를 위해 군데군데 요긴하게 삽화를 배치하는 편집을 구사하는 등 현대적 교과서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 등으로 인해 이 새로운 불교교재들은 우리나라 교육사의 관점에서도 앞으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1,600년 한국불교 사상 불교교육을 위한 중등교육 교재를 출판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연합회는 이 같은 괄목할 만한 사업을 펼치며 1970년까지 총회를 정례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1972년 이한상의 갑작스러운 도미 이후 동력을 잃고 중단되었고, 그 결과 우리 불교교육 추진의 큰 주체가 사라지게 되면서 불교교육계의 답보가 한동안 이어진 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인재양성의 두 축을 세우다‐삼보장학회와 대학생불교연합회
경제가 매우 어려웠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학을 ‘상아탑’에 빗대어서 ‘우골탑’이라는 우스갯소리로 부를 정도로 대학 등록금은 대학생을 둔 가정이나 당사자에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학금이란 지금으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운 소중한 혜택이었다. 자칫 학업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를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은 그야말로 거센 물살을 헤치고 개울을 건너게 해주는 굵은 동아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해 나중에 사회의 동량이 되었다는 얘기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미담으로 신문에 자주 소개되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불교계의 장학사업으로는 조계종단에서 동국대 불교 관련 학과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종단 장학사업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커다란 규모의 장학사업을 이한상이 주도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청년 인재의 체계적 육성이야말로 이한상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불교계 최초로 오늘날의 장학재단에 해당하는 삼보장학회를 세워 체계적으로 장학사업을 펼쳤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익명의 개인 자격으로 여러 차례 장학금을 희사하곤 했다.
《대한불교》 1965년 3월 14일 자에 “65년도 종비생(宗費生) 10명, 익명의 독지가 희사로 전원 진학”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계종은 1964년부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재학생 중 성적 우수자를 선발해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이를 종비생이라 한다. 첫해 16명에 선발되었고 이듬해인 1965년에는 처음 10명을 뽑기로 했으나, 예산 문제로 5명으로 줄이기로 종회에서 의결되었다. 예정되었던 대상자 10명 중 5명은 갑작스러운 변경으로 장학 혜택을 받지 못해 학업을 잇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한 독지가가 4명분의 장학금을 익명으로 총무원에 기증했고, 이어서 당시 개인으로서 유일한 장학기관을 운영하던 ‘마야부인회’의 장대보화 보살도 힘을 보태 총 5명분의 장학금이 더 조성되어 애초대로 최종 10명이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기사였다. 나중에 그 익명의 독지가는 이한상으로 밝혀졌는데, 그는 그해 5월 2일 삼보장학회를 세워서 본격적인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삼보장학회는 공정한 선발을 위해 공개시험으로 장학생을 뽑았다. 9월 19일 총무원에서 치러진 첫 시험에는 지원자 17명 중 8명이 합격해 등록금 전액이 지급되었다. 이 중에는 서윤길, 고익진, 김선근 등 훗날 우리 불교학계의 중진 학자로 성장한 학생들도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한상의 장학사업이 불교계에 훗날 어떤 결실을 보게 해주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삼보장학회는 1965년 후반기부터 대상자 범위를 대학원생에게까지 넓혀 연 2회 연구보조비를 지원했다. 이민용 전 한국불교연구원장, 송재근 ・ 오형근 전 동국대 교수 등이 이때 선발된 장학생들이다. ‘현대에 생명같이 될 불교를 책임질 젊은 구도자가 나오기를 기대’했던 이한상의 삼보장학회는 충분히 그 목적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삼보장학회는 수혜 혜택의 범위를 더욱 넓혀 대학원생 및 학부생을 포함하여 1966년 25명, 1967년 27명, 1968년 21명, 1969년 28명 등을 지원했다. 이 삼보장학금은 동국대를 비롯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전국 20여 대학 연인원 115명에게 등록금, 연구보조비, 생활보조비 등 3종으로 지급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 젊은 인재들이 더욱 힘을 얻고 우리 불교계가 더욱 발전되었음은 물론이다.
1960~1970년대 청년 불교운동의 한 축이 바로 오늘날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이하 ‘대불련’)였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감하고 있다. 대불련은 1963년 전국의 각 대학과 3군 사관학교의 불교학생회가 모여 결성된 단체다. 창립 이후 불교계에 새로운 젊은 바람을 일으켰는데, 대불련 산하 대학생수도원의 건립과 운영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65년 대불련의 구도부(求道部)가 서울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을 건립했고, 그 구도부원 중 일부는 봉은사에 수도원을 두고 기거하면서 학업과 수행을 병행해갔다. 대불련은 대학생 불자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이들을 이끌었던 지도교수와 지도법사의 면면도 학계와 교계의 명망 높은 교수, 스님들이었다. 대불련이 창립된 이후 1969년까지 수도원의 운영과 재정 대부분을 총재인 이한상이 맡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대불련은 1970년 3월 27일 전국 지부를 대표하는 35명의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80개 대학에서 3,000명의 회원이 등록되어 있었다. 또 같은 해 7월 열린 여름수련회에도 100여 명이 참가했을 만큼 건실한 운영을 선보였다. 대학생들이 주요 구성원이라 재정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임에도 운영을 지속적으로 튼튼히 이어나갈 수 있었던 데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한상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실례로, 대불련이 공고한 전년도 회계 결산 공고를 보면 수입 총액 1,472,029원 중에서 90%가 넘는 1,332,980원이 이한상의 지원금이었다. 대불련 재정의 거의 절대를 그 혼자서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할 바 없이 좋은 사업이었지만 견실한 재정의 뒷받침이 없어 잠시 지나가는 일과 구호로만 그쳤던 예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도 불교 활동에 늘 든든한 재정적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이한상은 대불련 발전의 커다란 공로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를 통한 사회참여‐5 · 16민족상 수상과 사명대사 동상 건립
우리나라 각처에 위인의 동상은 많이 서 있어도 고승의 그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만큼 많은 편이 아니다. 도심의 주요 거리에 우뚝 선 동상은 사실 개인의 뜻이 있다고 해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또는 자치단체의 허가 또는 합의가 필요하다. 만일 불교 위인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있다면 그로 인해 우리 불교의 위상도 함께 높아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같은 불교 위인의 동상 중 하나인, 서울 동국대학교 후문 아래 자리한 장충단공원의 사명대사 동상은 바로 이한상의 발원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이한상은 당연히 불교계 인사로 분류되겠지만 더 넓은 시각으로 볼 때는 건설보국을 이룬 기업가였다는 점은 서두에서 말한 바 있다. 그는 건설회사인 대한전척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가장 난공사로 꼽혔던 섬진강댐을 오로지 국내의 기술과 자재로 우리나라의 첫 수풍력(水風力) 댐을 건설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5월 제1회 5 · 16민족상(산업부문)을 받았다. 개인으로 볼 때 큰 영광이었을 텐데, 그는 이 영광을 고승 동상 건립불사로 회향함으로써 많은 불자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사명대사 동상이 세워진 과정을 자세히 보면, 이한상은 5 · 16민족상 수상 직후 상금 50만 원 전액을 서울신문사에 기탁하며 애국선열 동상 건립을 제안했다. 당시 남대문에서 중앙청에 이르는 가도에 선열들의 상이 서 있기는 했으나 모두 석고로 제작되어 보기에 좋지 않았고 동상 주인공의 위의 면에서도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한상은 이 석고상들을 동상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며 신문사에 상금 전액을 기탁한 것이다.
이 일은 신문사를 통해 사회에 알려졌고 이를 계기로 애국선열 동상 건립 바람이 불게 되었다. 정부도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이 운동을 지원하게 되면서 고고학계, 역사학계, 실업계, 예술계 등 각계각층이 망라된 애국선열조각건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이 위원회의 총재를 맡은 것도 곧 이 운동에 범사회적 지지와 함께 국가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위원회는 10명의 선열을 선정했는데 그중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사명대사의 동상 제작을 먼저 착수하기로 했다. 사명대사가 선정된 것은 이 일을 처음 제안한 이한상의 의견이 적극 반영되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의 동상이 먼저 1967년 9월 28일 광화문에 세워졌고, 사명대사 동상은 그보다 조금 더 늦은 1967년 11월 11일 수많은 불교계 인사들과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열었다.
이한상은 상금 50만 원과 사재 500여만 원을 희사했으니 동상 제작비용 거의 전체를 혼자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상의 조각은 송영수(서울대 미대 교수), 동상에 새긴 비문은 불교학자 이종익 · 서경수(동국대 교수)가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국어학자 이희승이 지었고,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이 쓰는 등 사명대사의 위상에 걸맞게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학자들이 참여해 그 의미를 더했다. 이로써 불교계와 불교도들의 자긍심도 함께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이한상의 못다 이룬 꿈‐《한국불교 백년사》 편찬
우리 불교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전하는 일에 무척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문학이나 기행 또는 그 밖의 여러 생활 분야에서 다양한 문집과 저술이 전해지건만 유독 불교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관련 기록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나마 일부 사찰의 사지(寺誌)나 스님들의 문집 등이 조금 전해지는 정도다. 불교계는 이런 과작(寡作)의 경향 아래 근현대를 맞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욱더 기록이나 문서가 일실(逸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진 태평양전쟁 및 제2차 세계대전, 해방 그리고 6 · 25전쟁 등으로 사찰이 큰 피해를 입으며 그나마 전하던 문서들마저 더욱 보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불교계 정화 운동 등으로 인해 문서들의 인계인수도 불확실해져, 시간이 흐를수록 불교계의 사료들은 많은 숫자들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6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불교계 및 학계의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대 한국불교 사료의 총정리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산일(散逸)되어 가는 문서들을 모으고, 이전 100년의 불교 역사를 집대성함으로써 우리 불교가 지나왔던 걸음들을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좌표를 살펴보아 앞으로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겠다는 거창하고 의미 깊은 프로젝트였다고 할 수 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의기가 투합되었으나 워낙 큰일이라서 추진에 필요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이한상은 이 같은 상황을 전해 듣고 쾌히 적극적 후원을 자임했고 드디어 이 사업은 본격적 추동력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사업에 소요되는 일체 경비를 이한상이 전담하였으니, 이 사업은 재정 면에서 이한상의 독불사(獨佛事)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한국불교 백년사》 편찬 작업은 1965년 9월 이한상이 회장으로 있는 삼보학회의 주관으로 풍전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 일은 그 성격이 근대의 각종 신문과 잡지, 비문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방대한 사업이라 전에 없이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되었다. 운허 · 청담 · 대은 · 남래 · 설호 · 운학 스님과 같은 불교계의 존경 받는 원로 스님들과 김동화 · 이재열 · 이종익 · 이재창 · 김영태 · 서경수 · 박성배 교수 등 명망 있는 학자들이 편찬위원으로서 꾸준히 의견을 개진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안진오(후일 전남대 교수), 정광호(후일 인하대 교수), 권기종(후일 동국대 교수) 등의 젊은 학자들이 실무를 맡아 차근차근 자료를 모았다.
사실 이런 면면은 당시 불교학계는 물론 일반 학계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폭넓은 진용의 규모여서 이한상이 이 사업을 얼마만큼 소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즘처럼 복사나 스캔이 쉽지 않은 때여서 실무진은 도서관에서 가 자료를 손으로 베껴 카드에 옮겨 쓰거나, 현장에 가서 자료를 보고 채록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시간과 경비가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국가사업에 필적할 만한 학술출판 사업이라고 할 만했다. 이런 종류 프로젝트의 성패는 대체로 안정적 재원의 확보에 달렸기 마련인데, 이한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질 없도록 모든 후원을 도맡았다. 이 편찬 사업은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1968년 7월 가제본 2권을 내놓음으로써 드디어 1차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한상은 이때의 감회를 이렇게 피력했다.
이렇게 세상에 선을 보인 《한국불교 백년사》는 척불정책으로 수난의 대상이 된 불교가 산간불교로 법맥을 이어오던 1865년을 기점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아래서의 굴욕과 타락, 해방 뒤의 정파 파동을 거쳐 수습 단계에 접어든 1965년까지의 사료를 망라한 방대한 내용의 사료집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완성본은 아니었다. 4년의 작업 끝에 1차로 선보일 당시 철필로 쓴 등사본이어서 정식 출판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다. 아마도 정식 출판에 앞서서 그때까지 수집된 자료들을 모아 분야별로 정리해서 가제본을 먼저 낸 다음, 감수위원회의 감수를 거쳐 보완과 수정을 마친 다음 정식으로 활자화하여 출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제본을 학계에 처음 선보인 이후 약 4달에 걸쳐 운허 · 이남채 스님, 김동화, 이종익, 이재열, 서경수 등이 참여한 감수위원회가 몇 차례 열려 향후 보완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위원회에서는 앞으로 나올 완성본에서는 객관화된 용어 사용, 정화분규 이후 자료에서 대처 측 제공 자료 보충, 1954년 이승만 대통령 정화유시 이전 통도사, 불국사에서 개최된 고승회(高僧會) 내용 보완, 조계종 외에 불교의 각 종파, 내력과 사건을 함께 수록할 것 등의 의견을 검토했다고 한다. 이렇게 막바지를 향해 달려나가던 백년사 출판 사업은 그러나 끝내 완결을 못 본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결국 활자화된 출판물이 아니라 가제본 형태의 책으로만 남은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그 길고 어려웠던 자료수집 과정도 다 마쳤으면서 왜 정작 활자화라는 마지막 관문을 못 넘겼는지 매우 의아하다. 사업에 절대적 영향과 후원을 도맡았던 이한상이 막판에 편찬 사업의 완결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일까? 아니면 이 책의 완성에 뭔가 복잡한 이해가 걸린 부분이 있어서 완성할 수 없었던 것일까? 후세에 전할 자료집이다 보니 객관적 자료수집은 거의 완결되었으나, 어떤 사건에 관련된 관계 종파나 기관 또는 개인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과정에서 자료수집 기간만큼이나 완성을 위한 준비 기간이 길게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은 1972년 이한상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미국에 이민을 떠나면서 이 사업도 구심점을 잃고 중단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에 대해서는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우리 근대 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해보려는 프로젝트가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후 우리 불교계는 이 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이 사업은 사실상 방치되어 버렸다. 우리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 랭카스터 교수가 이 자료에 큰 관심을 보여 1980년대에 가제본에 실린 내용을 한글파일로 입력하며 출판을 시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일 역시 완성되지 못했다. 최근 1960년대 젊은 대학생으로 이한상과 함께 불교운동에 앞장섰던 몇몇 뜻있는 인사들과 단체가 이 가제본을 출판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아직 성사되지 못했다. 근대 한국불교사의 집대성이라는 이한상의 큰 뜻을 지금의 불교계가 이어서 완성한다면 이야말로 인연소기일 텐데,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불교적 삶의 끝자락의 기묘한 인연‐미국 이민과 삼보사 창건
1960년대 중반 이한상은 달마회와 《대한불교》를 맡아 이끌어나가며 불교계의 재가 저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시야를 국제무대로 넓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세계 불교계에서는 19세기 후반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와 인도의 암베드카르에 의해 시작된 불교부흥운동 단체인 대보리회(大菩提會, The Maha Bodhi Society)의 영향력이 컸다. 이한상은 1964년 이 단체의 회원국으로 가입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의 저명인사를 한국에 초청하여 국제 교류를 갖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 덕택에 1967년 태국에 본부를 둔 ‘세계불교도 우의회(友誼會)’의 총재 푼 피스마이 디스쿨(Poon Pismai Diskul) 공주가 이한상을 공보지(誌) 자문위원에 지명함으로써 한국불교가 세계 불교회원국과 더욱 가까이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한상은 이어서 1968년 11월에 열린 총회에서도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1972년까지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며 한국불교가 국제 불교계에서 점점 확고한 위상을 쌓아갈 수 있도록 했다.
사실 이런 활동은 단순히 외국과 불교교류를 했다는 상징적 의미에만 그치지 않는다. 당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이 아직 미약했던 시절이었다. 여러 가지 국제 정세와 질서로 인해 우리 정부가 주도하는 외교는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권위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불교계가 이렇게 해외 불교국가와 잦은 교류를 갖게 된 것은 곧 민간외교의 역할도 톡톡히 한 것이어서 국가의 외교 발전 전반에도 기여했다는 평을 받기 충분했다.
이처럼 국내 포교에만 머물지 않고 안목을 세계로 넓혀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앞장섰던 이한상은 1971년 갑자기 국내 사업을 접고 신병을 정리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그리고 1973년 캘리포니아 카멜 시에 삼보사(三寶寺)를 창건하여 한국불교를 미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삼보사는 1만여 평의 대지에 대웅전 100평, 선방 200평, 관리사무실 등 4채의 건물을 갖추어 약 300명을 수용하는 넓은 사찰이었다. 미국에 우리 불교를 알리는 가람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큰 관심을 끌었다. 창건에 소요된 경비는 13만 달러(당시 환율로 한화 약 5,200만 원)를 훌쩍 넘겼다고 한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 사정에 비춰보면 이 비용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이한상이 이런 거금을 아끼지 않은 것은 미국에 한국불교를 심으려는 열정이 그만큼 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급작스러운 미국 이민의 배경은 정치적 문제 때문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런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알아보아야 확실히 말할 수 있겠으나, 그의 불교적 삶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의아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이한상은 국내 불교 발전과 함께 한국불교의 국제화에 큰 힘을 쏟았는데, 만년에 자신이 직접 그 현장에 서게 될 줄은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삶을 읽다가 그 끝자락에서 펼쳐진 이 대목을 보다 보면 사람이 맺는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 떠올려지며, 문득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덕산 이한상은 어떤 사람으로 기록될 것인가
오늘날 덕산 이한상은 어떻게 정의되는 게 마땅할까? 1960년대, 낙후한 불교계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이한상과 뜻을 함께하며 활동했던 당시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지금 어언 70대 중 · 후반의 성성한 백발이 되었다. 이한상과 동일한 궤적에서 살지 못했던 지금 세대 사람들로서는 이한상을 실감할 수 없고, 아예 그의 이름마저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살피고, 또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한상은 현대불교계가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는 판단이 확고해진다. 다시 말해 그의 삶은 현대불교사의 한 역사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평전은 개인에 대한 평가를 담게 된다. 평가는 또 분석을 전제로 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삶이든 다분히 복합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므로, 어떤 사람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그의 삶의 궤적을 정확히 따라갈 만한 통찰력이 있어야만 한다.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한 갑자 가까이 되어 가는 지금, 누군가는 그의 행적을 정리해 지금 세대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한상은 1960년대와 1970년대 10여 년 동안에 걸쳐 우리나라 불교계를 위해 적잖은 공을 이뤘던 인물이다. 그의 불교적 삶을 평하면서 어떤 사람은 순전히 불교가 좋아서 한 개인의 선행이었다고 말할지 모르고, 어쩌면 누군가는 한 부유한 사업가가 자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공명심의 발로 정도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 함께 불교운동을 했던 사람들 치고 그의 헌신을 재산이 넉넉해서 내놓은 물질적 보시나 이름 석 자 내기 위한 의도적 선심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보다는 해방 이후 6.25전쟁을 겪으며 모든 면에서 암울했던 그 시대, 불교계를 일으키고 세상에 부처님의 법을 전하려 헌신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곤 한다.
1960년대 초반 그를 처음 만났고, 또 훗날 미국에서의 만년을 지켜보았던 박성배 교수(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는 이한상이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서 만났을 때의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그때 이한상은 당신의 일생이 무상한 꿈을 뒤쫓는 일생이었다고, 자조하는 말투로 스스로를 비판하였다. 속(俗)을 내려다보고 성(聖)을 쳐다보면서 살아온 스스로의 일생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던가를 되풀이하며 자조하였다.”
이한상의 쓸쓸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지금 그의 생애를 반추하는 것은 불교 포교를 위해, 불교적 삶을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에게, 불교계를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의 많은 부분을 내어놓은 사람에게 지금 우리는 정당한 평가를 하고 있는가를 자문해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와 함께 불교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1960년대 불교발전에 기여한 인사들이 많지만 ‘유마 거사’로 불리던 이한상과 견줄 사람은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건만 오늘날 그를 기념하는 행사나, 그의 이름을 기리는 단체는 전혀 없다. 그의 행적을 정리한 자료집으로 《덕산 이한상》(활불교문화단, 2011)이 나왔을 뿐, 그동안 그의 삶을 조명한 학술회 한번 변변히 열린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지금 우리 불교계는 그에게 너무나 커다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이한상은 평소 ‘불교의 현대화’를 주창했다. 그가 말한 불교의 현대화란 곧 “불교가 보다 밝고 참되고 친근한 대중의 등불이 되는 것”이었다. 기묘하게도 신문 지상을 통해 대중에게 한 마지막 이 말이 이한상의 불교적 삶을 정의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 되고 있다. ■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동국대 사학과 및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 졸업. 주요 저서로 《한국의 사리장엄》 《봉은사》 《송광사》 《명찰명시》 《테마로 읽는 우리 불교》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