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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원문] 全集에 없는 박인환의 詩와 산문
“목멘 사람과 고달픈 역사 안고 큰물이 흐른다”
정리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밤이면 아내와 함께 거닐며 암송
⊙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밤의 죽음, 나는 술이 활짝 깼다
⊙ 여류작가가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선 최소한의 생활비와 방이 있어야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박인환문학관 전경.
요절시인 박인환은 생전 앤솔로지 형태의 동인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을 펴냈지만 개인시집으론 1955년 간행된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이 유일하다. 그러나 출판사의 화재로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사후 유족들이 시인의 작품들을 추가로 모아 《목마와 숙녀》(1976)를 펴냈다. 이 시집은 1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시인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작품 발굴이 꾸준히 이뤄졌고 시인의 30주기(週忌)인 1986년 《박인환전집》(문학세계)이 나왔다. 20년 뒤 50주기가 되는 2006년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박인환 전집》(예옥)이 나오고 2008년 다시 《박인환전집》(실천문학)이 간행됐다.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세 차례나 전집이 출간된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월간조선》 4월호가 소개하는 시와 산문은 이들 전집에서 모두 빠진 작품이다. 이 가운데 〈버지니아 울프의 인물과 작품〉은 내용이 길어 일부만 발췌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 〈목마와 숙녀〉의 둘째 행에 등장한다.(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표기법은 원문을 따르되 현대어로 수정했다.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金鍾旭)씨가 자료를 제공했다.
대하(大河)
1956년 1월 29일자 《國都新聞》에 실린 박인환의 시 〈大河〉.
큰물이 흐른다
역사와 황혼을 품안에 안고
인생처럼
그리고 지나간 싸움처럼
구비 치며 노도(怒濤)하며
내 가슴에 큰물이 흐른다.
신비도 증오도
피라미드도 불상도 그 위에 흐르고
내가 살던 아크로폴리스 마을에
큰물이 흐른다.
어느 산줄기에 그 수원이 있는가
어느 가슴 아픈 인간의 피눈물인가
나는 보았다
썩은 다리와 고목들이
큰물에 씻겨 나가는 것을
벼루와 서책이 출렁거리는 것을
큰물이 흐른다
목메어 우는 사람과
고달픈 역사와 황혼을 품안에 안고
침울한 큰물이 흐른다.
과거는 잠자고
오직 대하가 있다.
(출전=《國都新聞》 1956년 1월 29일)
회상/우리의 약혼시절 - 환경에의 유혹
《女苑》 1956년 2월호에 실린 〈회상/우리의 약혼시절 - 환경에의 유혹〉 첫 장.
1947년 초겨울에 약혼을 하였습니다. 4~개월간의 교제 끝에 두 사람은 앞으로 결혼을 함으로써 지나간 과거에 성실할 수 있다는 믿음 밑에 그 약속으로 약혼을 한 것입니다.
실상 약혼이라는 것은 생각지 않는 의무와 책임을 마음에 초래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 막연히 사랑을 속삭이던 입에서 이제는 결혼을 하면 어떻게 하자든가, 또는 생활에 있어서의 경제적 문제는 어떻게 타개해 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 4월 결혼을 하기까지 약혼시절을 5~개월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매일 만난 것이 몹시 신기하고 힘든 일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웃고 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나로서는 앞으로 아내가 될 사람에게 나의 환경이라는 것을 아르칠 필요가 있었고 상대편에서도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선배에게 소개도 하고 인사도 시켜서 여럿이 함께 어울려 유쾌한 시간도 보냈습니다.
당시 가까이 지낸 분은 박영준, 이봉구, 송지영씨 등이며 박 선생은 우리 결혼식에 들러리를 섰습니다. 지금도 내 아내는 이분들을 제일 좋아하며 그때 여러 가지로 듣고 이야기해 주신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 그리 풍요한 것이 못 됩니다. 하지만 내 아내는 그러한 장려가 되어도 참아 살아갈 것을 약혼시절에 이미 각오한 모양이고 정신의 존귀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을 부러워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을 상기한 여러분한테서 배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무렵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책은 반드시 상대에게 빌려주고 남자를 이해하고 함께 오래 살아가려면 내가 본 책을 반드시 읽어달라고 권했습니다.
며칠 후면 독후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제가 되어 우리는 서적의 인물이나 작가의 의도와 사상에 관해 참으로 진지한 의견도 교환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약혼자들도 그러할 줄 아오나 좋은 일을 나도 했고 나하고 자찬을 합니다.
얼마 전 내 아내는 “요즘 나는 당신과 거리가 멀어진 것 같소.”
하기에 나는,
“당신은 어린애도 기르고 살림이 고된 까닭에 책을 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요?”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아포리겔’(기욤 아폴리네르를 말한다. 기욤은 박인환이 좋아한 ‘마리 로랑생’의 연인이었다.-편집자註)의 시를 많이 읽었습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나의 청춘이 흐른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라는 그것이 좋아서 밤이면 함께 거닐 때 암송도 했었습니다. 나는 그를 되도록이면 정서의 세계에 접근시키려고 애썼고 그러한 것을 아내 될 사람이 또한 즐겼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행복했었습니다.
남보다 유달리 오랜 약혼 기간이었기 때문에 피차 상대를 알기에 참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보다 내가 달라진 것은 술을 많이 마시게 된 것뿐이고 아내는 의외에도 살림에 열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회상하건대 약혼이라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기간이 참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된 사람은 대체적으로 앞으로 자기가 어떤 생활과 의견으로서 살아갈 것을 미리 알아채어서 그것을 형성할 환경과 정신적인 품속에 여자를 끌어들여야 하며 또한 서로 융합해 가지고 속히 이해의 길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약혼시절의 글은 한 20년 후에 쓸까 했더니 불과 7~8년이 된 오늘 그 일단을 적게 되었습니다.
(출전=《女苑》 1956년 2월호)
크리스마스와 여자
크리스마스라고 하지 않아도 여자… 라고 생각할 땐 나는 눈 내리는 시베리아 들판으로 유형되는 카츄사(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인물-편집자註)를 생각한다. 또 눈이 내린다. 내 가슴에 가볍게 눈이 내린다 하면 크리스마스를 역시 연상케 하는 것이다.
실상 나와 크리스마스와 여자와는 웬일인지 나에게 인연이 깊은 것 같은 지나친 나의 리리시즘의 정신이라고 하여야만 되겠다.
겨울 날 밖에는 눈바람이 쌩쌩 부는데 따스한 방안에서 처음 만나는 여자와 손이라도 잡고 시인 ‘구르몽’의 시몬의 이야기라도 하고 싶다. 그리고 이야기가 멈출 때 양주라도 한 잔 마시며 창 밖 풍경을 내다보는 것도 정서적일지 모르나 요즘과 같이 준열한 시대에서는 요만한 낭만도 있을 성싶지가 않다.
겨울은 외로운 계절이다. 무척 마음을 상하게 하는 밤들이 이어온다. 그럴 때 여자를 만나 크리스마스 이브의 종소리를 들으면 잠들지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고요한 거리… 절대 눈이 내려야 하는 거리를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공상이나 잡념을 고만 두고 좀 더 절실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암만 마음속으로 크리스마스와 여자에 관한 달콤한 얘기를 한댔자 기분이 아울러지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년 전 그곳은 부산이었다. 부산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눈이 오지 않았다. 이것부터가 우습다. 내가 일을 보고 있었던 회사는 가톨릭계였기 때문에 나를 빼놓은 사원의 대부분은 초저녁부터 교회에 가는 것이다. 나는 혼자 이 집 저 집의 아는 주점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혹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나 만나면 용돈이나 달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밤은 깊어졌다. 교회의 앞을 지난 때 요란스럽게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찬미가가 들린다. 마치 술 취한 나를 비웃는 듯이….
《新太陽》 1955년 2월호에 실린 〈크리스마스와 여자〉 첫 장.
골목길을 지나 막 다음 골목으로 빠지려고 할 때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물어볼 필요도 없었지만 술의 힘을 빌려 왜 우는가를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날 밤의 죽음 나는 술이 활짝 깼다. 집이라고는 말뿐 판잣집 속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그의 어머니도 역시 흐느껴 울고 있다.
그래서 지나가는 행인의 친절로 주머니 속에 있던 돈을 모조리 꺼내어 조위금으로 털어 버렸다. 그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던 사람인가. 그 소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이 나는 그들이 거절하는 것을 뿌리치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세월이 갔다. 벌써 4~5년은 되는 것 같다. 그 소녀는 성숙했을 것이며 또한 미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솔직히 말하면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라고 청탁을 받기 전까지 그런 일을 또 소녀를 조금도 생각지도 않았으며 사실상 잊어버리고 말았다.
크리스마스와 여인 하면 무슨 신비스럽고 아기자기하고 흐뭇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이런 제목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크리스마스와 여인을 관련해서 생각해 보려니 역시 구미를 돋굴 만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잊어버린 기억에서 몇 해 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였던 이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에 별다른 여인도 추억도 떠오르지 않은 채로 나는 좋다.
크리스마스 날 밤 아버지를 여의고 흐느꼈던 그 낯모르는 소녀의 애처롭던 모습을 생각해 내는 것만으로서도 나에게는 흡족한 것이다.
올겨울의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오셨으면 한다. 나는 그다지 흥취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좀 심이 펴져 집에 양주나 몇 병 사다놓고 좋은 친구와 술을 나눌 때 그때의 소녀가! 아니 지금은 성장한 여자가 되어 점잖고 출중한 청년과 함께 크리스마스 날 밤에 작고한 아버지의 이야기나 하며 걸어가는 것을 들창으로 바라다 보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나의 지나친 환상도 아니며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크리스마스와 여자… 너무도 즐겁고 너무도 서러운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시베리아로 간 카츄사의 청춘의 날과도 같이….
(출전=《新太陽》 1955년 2월호)
세계의 여류작가 群像/ ‘버지니아 울프’의 인물과 작품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1920년대에서 30년에 걸쳐 신리주의 문학이 낳은 극히 중요한 여류작가이다. 그는 총명하고 남성에게 적지 않는 교양과 재능을 구비하고 특이한 작품을 남겼으나 결국 여류작가였기 때문에 더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유명한 문예비평가인 L.스티븐의 딸이다. ‘스티븐’은 일시 《곤힐 매거진》지의 주필을 하고 19세기 후반의 영국 문단에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살롱에는 당대 일류문학자, 예술가가 출입했다. 소녀시절 울프는 그러한 가정의 분위기에서 감득(感得)한 것이 적지 않았다.
1904년 부친이 사망하고 그는 언니와 함께 런던의 중심부인 블룸즈버리로 거주하게 되면서부터 이 두 사람의 젊고 아름다운 영양(令孃)의 주위에는 새로운 지식인이 모이게 되어 ‘블룸즈버리’ 클럽을 만들었다. (중략) 그 후부터 차차로 창작력이 강해져서 일작일작(一作一作)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20세기의 영문학에 오리지널한 실험의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소설은 전부가 11편이고 그 외 대소의 에세이가 약 10권이나 달하고 있다.
《女性界》 1954년 11월호 표지.
습작시대의 《항해》(1915, 국내에는 ‘출항’이란 제목으로 소개됐다)와 《밤과 낮》(1919)은 그리 주목할 것은 없으나 전자에는 생생한 감수성이 보이고 후자에는 제인 오스틴의 영향이 많다. (중략) 그 후 《댈러웨이 부인》(1925)과 《등대로》(1927)로 인하여 울프는 그 아름다운 유연한 형식을 연마할 수가 있었다.
특히 《시일은 지나간다》의 1장은 20세기 영문학 중에서도 드문 이름다운 산문이다. 그것과 《등대로》의 청려(淸麗)함은 전면에 넘치는 플라토닉한 이념에서 동경이라고 할까 청명한 정신에 인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등대로》는 울프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조이스의 영향도 물론 있으나 《댈러웨이 부인》과 《등대로》에 있어서의 과거에의 회상적인 수법은 마르셀 프루스트에 배운 것이라고 상상된다.
그의 전려(典麗)한 스타일은 어디서 온 것일까? 《월요일이나 화요일》에서 일변한 그것은 생각건대 1915년 전후에 영미시단에 대두한 ‘이미지즘’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등대로》에서 볼 수 있는 리리시즘은 빅토리아 시대 문학에서 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 인물과 작품〉 첫 장.
울프는 지적인 여성으로서는 전 시대의 깊은 인습을 버리고 자유스러운 생각을 하는 두뇌를 가지고 있으나 일면에서는 이와 같은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로맨틱한 심미주의를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중략)
그 후 ‘울프’는 만년이 되어 《세월》(1937)과 《막간》(1941)의 대작을 내놓았다. 거기서는 그의 심리주의적 수법은 일층 원숙하여 또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에게서는 ‘막간’을 격찬하는 사람도 있으나 ‘세월’이 더 큰 가치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세월》은 평면적인 사실과 측의 서술은 일절 피하고 인물 각자의 의식 중에 깊이 잠입하여 상호의 연결과 조응 중에 인생의 모형을 묘출한 것이다. 확실히 ‘울프’ 문학의 일대 집성이라고 하여도 좋다.
울프의 에세이에 대해서는 상세한 것을 기술할 여지가 없으나 그 작품과 불가분의 것이 적지 않다. (중략)
그중 가장 흥미 깊은 것은 《자기 하나만의 방》(1929, 국내에는 ‘나만의 방’으로 소개됐다)이며 여기서는 영국의 과거 여류작가의 고뇌를 설명하고 부인이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활비와 자기가 선유할 수 있는 방이 보증돼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울프는 제1차 대전 후의 새로운 자각을 가진 여성의 대표적인 일인이다. 그리고 그가 《3기니》(1938)를 쓰고 남성이 일으키는 전쟁에 어찌하여 여성이 참가하여야 하는가, 라고 항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대전은 일어났다.
런던은 밤낮 공습을 받고 섬세한 그의 신경은 그것에 이길 수 없었던지 1941년 템스 강에 투신하여 버렸다.⊙
(출전=《女性界》 1954년 11월호)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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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등대(燈臺)에 / 박인환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엣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밴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희 - 세월이 가면
박인환「세월이가면」(노래가된 시)
아픈 이별이 추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하다.이별 바로 뒤에는 미련이지만그 미련 뒤에는 환멸이다.
그러나 다시 세월이 흘러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버릴 때」 그 사람의 초롱한 눈매와 뜨거운 입술의 감촉은 다시 아련한 그리움으로 살아나 때때로 가슴을 적신다.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전후 폐허의 공간을 술과 낭만으로 누비던 박인환(1926∼1956)의 「세월이 가면」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연인을 잃고, 혹은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했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신 화제작이었다.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명동성당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간 명동길을 걷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낡고 앙상하게 묻어나는 3층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놀랍게도 딜레탕트 박인환의 흔적을 기억이라도 하듯 「세월이 가면」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가 들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전후 명동에서 문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하던 「명동싸롱」이었다.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우들과 어울리다가 계단을 내려와 죽음이 휩쓸고 간 세월의 쓸쓸함을 술로 달래기 위해 맞은편 대폿집(은성: 당시 새로 생긴 술집이었다.)으로 향했다.
동석했던 가수이자 배우인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자 끝내 빼는 바람에 역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박인환의 친구 이진섭이 제안을 했다.
인환이 니가 시를 쓰면 내가 곡을 붙이겠다고,그리고 시가 나오자 이진섭은 즉석에서 샹송풍의 곡을 붙여 흥얼겨렸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허름한 대폿집에서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지만 미처 명확한 단어로 규명하지 못한 「그 눈동자와 입술」을 발굴해냈다
이 시에 대하여 강계순은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pp. 168-171)
1956년 이른 봄 저녁 경상도집에 모여 앉은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오늘까지 너무나도 유명하게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이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정식으로 다듬어서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의 리사이틀이 열렸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그것은 마치 낭만적인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그들은 이 노래를 명동 엘리지라고 불렀고 마치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 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잇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을 때 다시 한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고 싶었다
이 시의 유래
1956년 이른 봄이었습니다. 그 날도 막걸리를 파는 "경상도집"에 여러 시인, 예술가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누군가가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한 곡 불러보라고 하였습니다.
나애심이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거절하자, 박인환이 종이를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 시를 받아 든 작곡가 이진섭이 바로 그 자리에서 악보를 그렸습니다. 악보가 완성되자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뒤이어 찾아온 테너 임만섭이 그 노래를 정식으로 불렀습니다.
성악가가 부르는 우렁찬 노래가 명동거리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경상도집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한 자리에서 작곡과 노래로 이어지게 한 그 시가 바로 '세월이 가면'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심장마비였습니다. 박인환을 사랑한 많은 시인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어주었습니다. 그토록 좋아하던 술인 조니워커와 멋 부린다며 피울 줄도 모르면서 가지고 다니던 담배 한 갑과 더불어.
이 노래에 담긴 의미
1950년 한국전쟁은 온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군 폭격을 맞아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어버렸다는 휴전선 북쪽지역은 물론이고, 서울도 중국군과 시가전을 벌이느라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화려한 곳이라는 명동 또한 파괴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꽃처럼 화려한 명동이지만 전쟁이 끝나자 군용 밥그릇을 들고 밥을 빌어먹는 거지아이들과 구두닦이, 실직자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리고 시인, 화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전쟁통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그들은 오라는 데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명동에 모인 예술가들은 같이 차를 마시고, 막걸리를 마시며 시와 예술에 대해 토론하고 얘기했습니다. 보고 싶은 이가 있을 때도 명동으로 가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박인환도 그 명동 예술가들 무리 속에 어울려 지내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연 돋보였습니다. 잘 생긴 얼굴, 훤칠한 키, 그리고 여름에도 정장을 즐겨 입던 박인환은 시인이라기 보단 멋쟁이 신사였습니다.
양복은 외국산 고급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일류양복점 상표가 붙어있었습니다.
흐린 날은 박쥐우산을, 봄가을에는 우유빛 레인코트를, 겨울이 되면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은 진회색 외투를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주머니가 늘 비어있는 가난뱅이였지만, 기죽거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세월이 가면'을 만드는 날 밤에도 돈도 없이 무슨 술을 그리 마시냐는 주인아주머니한테 “꽃 피기 전에 갚으면 될 것 아냐!”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하고 모자도 쓸 거 아냐."
그 말속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나라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으로 부서져버린 온 나라와 가난과 절망으로 얼룩진 세상을 향한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으로 허무하게 죽은 이들과 절망한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헐벗은 거지지만, 겨울이오면 두툼한 외투를 입는 것처럼 풍요로운 시절이 올 것이라는 기원이 담겨있습니다.
'세월이 가면'을 쓰자 경상도집 주인아주머니가, "인환아 니 우짤라고 그런 시를 썼노?" 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합니다. 쓴 까닭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 시 안에 담긴 의미가 서늘했던 것입니다.
내 서늘한 가슴은 전쟁으로 죽은 사람과 사라진 것들을 그리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인 자신이 곧 서늘한 가슴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박인환은 정말로 가슴이 서늘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꽃피기 전에 외상값 갚는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꽃피는 날이 다가오기도 전에 박인환 가슴이 서늘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가슴, 그것도 심장마비로.
3월 20일이면.... 며칠만 있으면 꽃이 필 텐데.
죽기 사흘 전은 박인환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이상 시인 제삿날이었습니다.
그 날 따라 유난히 술을 많이 먹은 박인환은 옆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쓴 종이를 주었습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라는 말과 함께... 박인환은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알았을까요?
사흘 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 온 박인환은 답답하다며 가슴을 쥐어뜯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외침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가면'과 더불어 박인환이 남긴 대표시 목마와 숙녀입니다.
더 진한 허무와 절망이 담겨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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