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문제(文帝.전한의 5대 황제이고 한고조 유방의 아들)가 처음 즉위할 때에 세 번 사양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백성에게 거짓 꾸밈을 보여 준 것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능히 예양(禮讓.예를 지켜 사양함)으로써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하였으니 그 사양을 귀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자로(子路)가 대답한 것은 그가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공자는 웃으면서 “ 나라는 예(禮)로써 다스리는 것인데 자로의 말은 사양하지 않았다.” 하였다. 만약 그 일을 마땅히 할 수 있다고 해서 거만스럽게 조금도 사양하지 아니해서야 옳겠는가. 옛적에는 선비들의 상견례(相見禮)가 있었는데 지[贄.예물]는 원래 당연히 가지고 가는 것이고 주인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지만 반드시 손과 주인이 세 번 사양하고, 이미 문에 들어가서는 선후(先後)가 원래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이지만 문마다 계단에서 또한 반드시 서로 사양한다. 그러므로 “큰 사양은 오만한 것 같고 작은 사양은 거짓 같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예(禮)를 제정한 뜻이 이와 같이 곡진(曲盡.간곡하게 정성을 다함)하였다.
문제(文帝)가 임금이 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것이지마는 한 임금이 폐위(廢位)되고 한 임금이 서는 사이에 마땅히 군자는 절절(節節.몹시 간절함)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에 소제(少帝)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종척(宗戚.왕의 종친과 외척)이 아직 많으니, 문제가 처음에는 비록 청함을 받아 장안(長安)에 왔으나 또한 사양하여 국인들의 마음을 본 연후에 즉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였으므로 염치(廉耻)가 흥(興)하고 탐리(貪利.지나치게 이익을 탐냄)가 멎어져서 서경(西京)의 다스려짐이 융성하였으니, 이것은 세 번 사양한 그 가운데서 빚어낸 것이 아님이 없다.
“군자의 도는 바람과 같고 소인의 도는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이 숙어진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 한 것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춘추호전(春秋胡傳)》에 “계찰(季札)이 나라를 사양하여 난을 나게 하였다.” 하여 계찰을 그르다 한 것은, 아마도 의(義)를 해치는 말인 듯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