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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님의 사천 나들이
(2014년 5월 어린이날 하루)
노산공원 입구
호연재
❍ 호연재 주련(浩然齋柱聯)
• 四書五經耽讀齋(사서오경탐독재) 사서오경을 탐독하는 호연재
• 琢磨仁義禮智信(탁마인의례지신) 어짊, 의로움, 예의, 지혜, 믿음을 갈고 닦음
• 拂拭末文八文章(불식말문팔문장) 말문을 떨치고 팔문장에 이름
• 浩然之氣皆魯山(호연지기개로산) 넓고 큰 기개를 노산에서 함께함
• 義俠達道民族魂(의협달도민족혼) 의협심에 이른 도리 겨레의 혼
• 鄕土新學瑤藍齋(향토신학요람재) 향토 신학문 요람의 호연재
• 己未萬歲天地動(기미만세천지동) 기미독립만세 함성 천지를 진동함.
• 實學東學欣然接(실학동학흔연접) 실학과 동학이 흔연히 접함.
박재삼 문학관
박재삼 시인
생졸 : 1933.04.10.(일본)~1997.06.08. 신체 : 168cm, 58kg 학력 : 고려대학교 국문학 (중퇴) 데뷔 : 1955년 현대문학 '정적' 등단 수상 : 1987년 제2회 평화문학상 1986년 중앙시조대상 경력 :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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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문학관 옆(뜰) 그네
노산공원 해변
조․명군총
6․25전쟁 월남전쟁참전유공자기념비
◎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
웹 자료 사진 사천선진리성 답사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74호 ▪ 지정일자 : 1998년 9월 8일
▪ 소재지 : 용현면 선진리 공원 일원 ▪ 규모 : 76,637㎡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 지점의 선진리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東岸) 중간지점에 있다. 구릉을 이용하여 구축(構築)한 평산성식(平山城式)의 토축(土築)으로 된 창성(倉城)이다. 이곳은 서남북의 삼면(三面)이 바다에 임하고 동쪽 일면(一面)만 육지로 통하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수륙요새(水陸要塞)이다.
지금은 간척사업(干拓事業)으로 남북 이면(二面)이 모두 농경지(農耕地)로 변하고 서쪽 일면만 바다에 연해 있으며 성지(城址)는 모두 밭으로 개간되었고 고지(高地) 일부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오늘날 이 성(城)은 왜성(倭城)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倭軍)이 사천지역을 장악한 후 이곳을 중요 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왜장(倭將) 모리길성(毛利吉成)이 성(城)을 구축했다는 일본 측 기록 도진가기(島津家記)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성에 관한 우리의 많은 관계 문헌을 바탕으로 고적(古跡)을 살피면 왜성이 아님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먼저 이 성이 위치한 지명(地名)부터 살펴보면 고려 초(高麗初) 남도수군(南道水軍)에 설치한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자리한 곳에 조창이 설치되자 이곳 지명을 통양포(通陽浦) 또는 통조포(通潮浦)라 하였다. 조선초기에는 통양포가 다시 통조포로 개칭되었고 조창명도 통양창(通陽倉)이라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는 태종(太宗) 3년(1403) 이후 통양창은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으로 조운(漕運)이 폐지되고 조세(租稅) 운송은 육로(陸路)로 전환되었다고 적고 있다. 임진란 이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곳 지명을 법질도(法叱島), 선창(船倉), 신채(新寨), 동양(東陽), 동양창(東洋倉)으로 적고 있다. 이 가운데 동양(東陽)과 동양(東洋)은 전사(傳寫) 과정에서 혼용 또는 오사(誤寫)인 것으로 여겨진다. 신채(新寨)라 함은 사천(泗川) 고성(古城)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의 울로 된 왜채(倭寨)를 뜻한다. 조선 후기에는 수군(水軍)의 진보(鎭堡)인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고, 구한말(舊韓末)에는 화계(花溪)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병합에 따라 연포동(蓮浦洞), 통양동(通陽洞) 일부를 편입시켜 오늘의 선진리(船津里)가 되었고, 성의 이름도 선진리성(船津里城)이 되었다.
다음은 조창지(漕倉地)로서 선진을 지키기 위해 창성(倉城)이 축조되었다는 내용이다. 동국여지지 사천현 고적조에는 고려초(高麗初)에 설치한 고통양창(古通陽倉)은 현(縣)의 남쪽 17리, 통양포상(通洋浦上)에 있고 부근(附近)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당시 개성(開城))으로 조운(漕運)하였던 12조창(漕倉) 중의 하나로 지금도 둘레가 3,086척이 남아 있다. 즉『古通陽倉 在縣南十七里 通陽浦上 高麗初設倉 收府近州縣租稅 漕至京十二倉之 一今有土城基址 周三千八十六尺《東國輿地志》泗川縣 古跡條』라고 하였고, 사천현여지승람 고적조와 전선소조에는 통양창성(通洋倉城)은 현의 남쪽 17리에 있고 토성(土城)의 둘레가 3,086척이며 옛날에 조세(租稅)를 거두어들인 곳이다. 전선소(戰船所)는 현(縣)에서 남쪽 17리인 통양창성(通洋倉城) 안에 있다『通洋倉城 在縣南十七里 土築周三千八十六尺 卽舊收稅之地. 新增戰船所 在縣 南十七里 通洋倉城中《泗川縣輿地勝覽》古跡 및 戰船所條』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기록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다. 첫째 거리가 17리(里), 둘째는 조세(租稅)를 거두어들인 창고, 셋째는 토성지(土城址)의 둘레가 3,086척(尺)의 규모라는 점이다. 여기서 17리(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1리는 지금의 거리로 약 540m)는 지금의 9.18㎞가 되므로 당시 현청(縣廳)의 소재지인 사천읍에서 조창지 선진까지는 약 10㎞가 된다. 그리고 셋째의 토성지(土城址)는 창성(倉城)으로 지금 그 형적(形跡)의 일부가 제대로 남아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태껏 이 토성지(土城址)가 옛 당병성터, 또는 왜성으로 잘못 알려져 온 것이다.
조창의 기능은 원래 국가 경영의 재정적 세원(稅源)인 조곡(租穀)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해로(海路)를 통해 중앙 조정과 조운(漕運)한 기지(基地)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앙에서 판관이 파견(派遣)되어 이를 관장하였고 한편으로는 왜구(倭寇)의 침입과 약탈(掠奪)을 막기 위해 창성(倉城)을 쌓고 수군(水軍)이 방어하였으니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다. 조창이 고려 초부터 이곳을 택한 까닭은 벼의 경작(耕作)이 일찍부터 시작되어 물산(物産)이 풍부하였음과 바닷길을 열어 삼한(三韓) 때부터 포(布), 철(鐵) 등의 물자를 중국과 일본에 교역(交易)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에는 이 성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하나는 이순신의 사천해전(海戰)이며 또 하나는 육전(陸戰)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선조(宣祖) 25년(1592) 5월 29일 함선(艦船)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麗水本營)을 떠난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선진(船津) 앞 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을 앞세워 왜적과 치열한 싸움 끝에 적선(敵船) 13척을 쳐부순 대첩이었다. 이때 거북선이 처음 등장하였다.
선조(宣祖) 31년(1598 : 戊戌年) 10월 초하루 명(明)나라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은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으로 구성된 전병력을 동원하여 이 성을 탈환코자 왜군을 공격했다. 왜군은 8,000여 병력이었고 아군(我軍)은 30,000여 병력이었다. 이때 보병 유격장(遊擊將) 팽신고(彭信古)가 성채를 공격하던 중 진중(陣中)의 폭약궤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란으로 인해 적계(敵計)의 역습을 받게 되었고 아군(我軍)은 큰 혼란에 빠졌다. 뜻밖의 호기(好機)에 성채의 왜군은 곧 역습하며 팽신고의 포진지(砲陣地)를 유린했다. 모국기(茅國器)와 엽방영(葉邦榮)은 성채 북쪽의 고지에서 잔병(殘兵)을 수습하고 성에서 나온 적을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결국 기병(騎兵) 제장(諸將)의 전열이 흩어져 북으로 패주(敗走)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당시 치욕(恥辱)의 전흔(戰痕)이 지금도 선진리성 어귀에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고종 32년(1895)에는 통제영(統制營)을 비롯하여 각 도의 수영(水營) 이하 모든 군영(軍營)을 해체하고 배를 비롯한 모든 장비(裝備)가 군부(軍部)로 넘어가자 선진(船津)의 진보(鎭堡)도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앞서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선진리성 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의 무기(武器)를 탈취하여 하동(河東)과 고승당산(高僧堂山)에서 일본과 싸웠다는 설(說)이 전하고 있다.
선진리성은 일제(日帝) 때 임진란 당시 일본군의 전승지(戰勝地)라 하여 관심을 끌기위해 1936년 5월이 성지(城址)를 고적(古跡) 제81호로 지정(指定)하기도 했다.
무술전투(戊戌戰鬪) 당시 왜장(倭將)이었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후예(後裔)들이 1918년경 이 성터의 일부를 매수(買收) 또는 기부(寄附)받아 공원(公園)으로 조성하고 공원 정상에다 사천신채첩지비(泗川新寨捷之碑)라 새긴 비석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日軍) 장성(將星)들이 그들 조선(祖先)의 전적지(戰迹地)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어오다가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9월 8일 도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비석은 해방되던 그해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만 그때 심은 벚나무 천여 그루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사천시는 1978년 사업비 4,700여만원으로 공원 경내에 이충무공(李忠武公) 사천해전승첩비(泗川海戰勝捷碑)를 세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곳 선진리 앞 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倭船)을 격파한 국란극복사(國亂克復史)의 현장임을 알리고 있다.
또 일본사람들이 세웠던 비석 자리에는 6.25전쟁 때 산화(散華)한 공군(空軍) 장병(將兵) 전몰자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기리는 충령비(忠靈碑)가 우뚝 서 있다.
현재 경내에는 편의시설 2동과 돌계단 70m가 설치되어 있고 공원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 뿐 아니라 공원(公園)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야외공연장도 마련하여 공원을 찾는 단체 및 학생들의 이용 시설이 되고 있다.
- 사천정명 600년 기념지 원고에서 -
모충공원
백천사(百泉寺)
세계 최대의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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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먼 길 하루일정에다 어린이날이라 장시간 귀가에 피곤하셨지요?
보내주신 사진자료를 스크랩 해 보았습니다.
아이쿠, 사진에 관한 자세한 설명, 참으로 고맙습니다.
근데 선생님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보였는데 많이 무리하신 것 같아요.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