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의 베이비부머는 6·25전쟁 후인 1955년에서부터 가족계획 시행 다음 해인 63년 사이에 태어난 810만 명을 일컫는다. 60년대 중반까지도 출산율이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65년에 태어나 이제 40대에 접어든 인구까지 포함할 경우 약 1000만 명이 베이비부머에 해당한다. 전 인구의 20% 가 ‘중년’인 셈이다.
이들 ‘베이비부머’ 중년의 과거를 들여다보자. 이들은 중·고교 시절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검은색 교복을 입고 지냈다. 유신과 긴급조치로 엄혹한 대학 시절을 경험했거나 5·18민주화 운동을 직·간접으로 겪었다. 사회는 전체주의적이고, 집에서는 가부장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일종의 문화적 고아였던 이들에게 허용된 문화적 경험은 흑백 TV와 통기타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 30년이 서구 자본주의 역사 300년을 압축해놓은 것처럼 한국의 ‘베이비부머’ 중년의 삶에는 전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3세대의 특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베이비부머 중년은 대학 80학번을 기준으로 긴급조치 세대와 5·18민주화 운동 세대로 나뉜다. 긴급조치 세대가 몰문화 및 몰상식의 ‘암흑기’를 포복으로 통과했다면, 민주화운동 세대는 자발적인 조직화를 통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는 동시에 민중문화 운동을 통해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한 경험도 지니고 있다.
집에서는 도덕 강조, 밖에선 도덕 무시 ‘이중성’
현재 7080 문화의 소비자가 바로 이들이고, 뮤지컬과 오페라를 먹여 살리는 것도 이들이다. CJ엔터테인먼트 공연팀의 양혜영 씨는 “몇 년째 대형 뮤지컬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중년층이 스케일이 크고 화려한 공연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맘마미아’의 흥행 성공이 좋은 예”라고 말한다.
문화마케팅도 젊은 층보다 베이비부머 중년을 겨냥한다. 한 건설업체의 문화마케팅을 맡고 있는 전윤초 씨는 “중년은 어느 세대보다 문화에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 통기타든 라이브 콘서트든 민중극이든, 젊은 시절 한번쯤 공연장에서 감동받아 본 추억을 가진 세대”라고 분석한다.
한국 사회의 특성상 입시제도에 따라 중년층의 특징을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 ‘뺑뺑이’, 본고사와 학력고사 등 입시 형태가 중년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 그중 하나가 ‘58년 개띠론’. 고교평준화 원년인 1958년 개띠 중년들이 선후배들로부터 배척받는 ‘낀 세대’가 되면서 선후배에게 인정받기 위해 개처럼 열심히 뛴 결과 개성 있는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는 설명이다. ‘58년 개띠론’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베이비붐의 절정기에 태어난 중년층이 먹고살기 위해 어느 세대보다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나이를 먹어왔다는 사실이다.
성의학자 설현욱 박사는 고교평준화 이후 치맛바람 속에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며 대학에 합격했던 세대가 지금 자기중심적이고 ‘나르시시즘에 빠진 중년’으로 컸다고 말한다. 이들, 즉 ‘개띠 이후’ 중년들은 결혼이나 사랑, 성에서도 뚜렷한 의식 변화를 보인다. 결혼을 양가의 관계로 보는 개념은 희박해지고 내가 사랑하는 상대와 결혼한다는 근대적, 낭만적 결혼관이 확고해진다. 사랑하지 않으면 섹스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혼은 하나의 ‘선택’이 되고, ‘사랑하니까’ 다른 상대와 섹스 하는 불륜도 합리화한다. 80년대 역사의 비극을 다룬 후일담 소설의 맥을 90년대 불륜의 비극을 다룬 소설이 잇는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한 ‘개띠 이전’ 중년은 “우리는 룸살롱이나 2차를 갈 때 싫고 좋고가 없었다. 다 같이 가는 거였다. 그러나 지금 40대는 매매춘은 거부하지만 바람은 피운다. 참 다르다”라고 말한다.
한국의 근대화를 학교와 결혼, 가정 등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 유하 감독(1963년생)의 최근 개봉작 ‘비열한 거리’에서 주인공 병두(조인성)는 ‘식구’, 즉 조직 내 동생의 칼에 맞아 죽는다. 유하 감독은 이것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만, 결국 가족에게 버림받으리라는 한국 중년 가장들의 강박적인 공포”라고 말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황 회장(천호진)이다. 비열함의 순환고리에서 혼자 살아남은 황 회장은 룸살롱에서 ‘올드 · 와이즈’라는 알란파슨스프로젝트의 명곡을 부른다. “잘 들어봐, 가사가 참 좋거든.”
“황 회장은 조폭이 아니라 45~47세 정도의 엘리트 사업가다. 중년이 된 386세대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운 세대, ‘식구들과 먹고살려면’이란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중년의 전형이랄까.”
다양한 가능성의 삶 ‘인생 이모작’ 도전
집에선 가족들에게 도덕을 강조하는 아버지(어머니)면서 밖에선 자신의 출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없애버리는 이중성, 집에선 배우자에게 정조를 요구하면서 밖에선 ‘접대업무상’ 성을 사는 이중성,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 기준 사이의 이중성, 가족으로서 책임과 자유로워진 성의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딜레마의 ‘이중성’이야말로 전근대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중년에 이른 베이비붐 세대의 고민과 성격을 가장 잘 특징짓는다. 한 중년(44) CEO는 “음주문화도 이중적”이라고 말한다.
“요즘 중년층에서 와인 파티가 유행이죠. 재미있는 건 와인 파티의 끝에 양주를 섞어 폭탄주를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겁니다. 그때쯤이 돼서야 와인만 마시는 파티가 불편했다고 털어놓는 사람들이 많고요.”
이중적인 가치관 사이에서 베이비부머 중년들은 적어도 ‘절대적’이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이진 못해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베이비붐 세대는 ‘정년 퇴직’을 최고의 삶으로 생각했던 이전의 중년과 달리 자의든 타의든 중년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인생이모작’에 도전한다. 또한 청년기를 관통한 역사적·정치적 경험으로 인해 중년에 접어들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 새롭게 눈뜨기도 한다.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한국의 5인 작가전’에 참여 중인 사진작가 김우영(46) 씨는 3년 전부터 ‘아름다운 재단’에서 활동하고 장애우들의 히말라야 등반에 동행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열심이다.
“우리 세대의 특징은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관심, 부채의식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부문화가 자리 잡은 것은 우리 세대가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배들은 딴 짓 하지 말라고 하지만, 먹고사는 건 마음먹기에 따라 별거 아닐 수도 있다.”
일본 작가 소노 아야코는 ‘계노록(戒老錄)’에서 “중년이란 이 세상에 신도 악마도 없이, 단지 인간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기”라고 말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 가속도를 붙여 달려온 베이비부머들에게 이 같은 중년의 깨달음은 낯설지만 멋진 경험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