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1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십일조와 봉헌물 》
말 3:7~12
〈 계절 장사 〉
관광지에 가면 장사꾼들이 고객에게 상당히 비싼 가격을 받으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름 한 철 벌어서 일년을 먹고 사는 ‘계절 장사’인데, 이 금액 비싼 것이 아닙니다!”
물이 흐르는 산속 계곡을 끼고 산장을 지어서 여름 한 철 ‘계절 장사’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듣고 보면, 그럴듯합니다. 네 계절 중 한 철 벌어야 일년을 먹고삽니다.
그러면 이 계절 장사는 누구 덕에 하는 것입니까?
얼른 생각하면 그 계곡으로 피서를 와서 매상을 올려주는 고객입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만들어주시는 분이 있으니 계절 장사가 가능합니다.
애당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다면 계절 장사도 없습니다.
‘계절 장사로 먹고 산다’면 의당 계절을 만들어주신 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사꾼은 자기가 한 수고만 생각합니다.
음식점 허가를 받고, 건축하여 온가족이 달라붙어 한 계절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래서 계절을 보내주시는 분,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계절 장사 뿐만이 아닙니다. 어부들은 어떻습니까?
요즘이야 양식장이 많지만, 아직도 원양어선을 타는 어부들이 많습니다.
먼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치고, 고기를 건져올립니다.
어부들이 건져 올리는 고기들, 그 고기 어부가 키웠습니까? 아닙니다. 바다가 키웠습니다.
어부들은 배를 만들고 그물을 짓고, 어구를 만들어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누구에게 보답해야 합니까?
바다를 만들고, 거기에 물고기를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계절 장사, 어부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농사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줍니다.
정작 곡식이 자라 열매 맺게 하는 일, 햇볕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수술하는 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을 헤집고 다시 꿰매지만, 그 살은 누가 붙여줍니까?
하나님이 붙여주십니다. “병은 하나님이 고치시고 돈은 의사가 번다”
☞ 세상 돌아가는 이치, 참으로 오묘합니다. 대충 되는 것이 아닙니다.
〈 생육하고 번성하는 생명체들 〉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이렇다치고, 동물이나 식물은 어떻습니까?
강, 바다의 물고기, 공중의 온갖 새들, 땅 위에 사는 동식물…
이러한 생명체들이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제외한 동식물들, 그들은 자연에 흩어져있는 먹이를 찾아서 섭취하면 됩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위해 농사를 짓지도 않습니다. 가꾸지도 않습니다. 그냥 먹기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지만, 생태계의 이러한 생존방식, 짚어보면 그저 놀랍습니다.
☞ 먹고사느라 하늘 한번 쳐다볼 시간도 없지만, 가끔은 돌아봄이 필요하고 절실합니다.
☞ 저는 영화, 드라마를 좋아하고 즐겨봅니다.
영화, 드라마, 참 잘 만든 작품을 만나면, 그것도 대단한 행복입니다.
영화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들 얼굴을 봅니다. 참 잘생겼습니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 누가 만들었습니까?
“성형외과 의사요!”라는 대답이 튀어 나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팩트!! 사람의 얼굴, 누구의 작품입니까? ~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얼굴 잘생겨서 ‘대중의 스타’가 된 사람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 계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러한 묵상과 성찰, 참 의미있는 일입니다!
하나하나 잘 생각하고 잘 따져보면 이 모든 것,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먹여살리십니다. 할렐루야~
☞ 오늘 설교 준비를 하면서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상관없이 먹고 사는 생명체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사계절을 돌리시는 하나님!
시간을 창조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우주 공간을 창조하여 공간 안에 기거하게 하시는 하나님,
해달별, 땅과 바다를 지어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는 모르고 삽니다.
모르고 산다고, 관심없다고, 예수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아니계신 것은 아닙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 여기 있다!”라고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말을 들어보라!” 선포하시는 분입니다.
〈 자기를 드러내시고 오라 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이를 ‘계시(啓示)’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하여 자기 뜻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누군가’ 그를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에게 자기의 뜻을 드러내고 전달하고 선포하십니다.
선지자 중에서 ‘말라기’선지자는 구약시대 끝무렵에 활동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십일조’ 그리고 ‘봉헌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와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면서,
피조물 중에서 유독 사람에게만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에게 ‘내가 너희를 먹여 살리니 고맙다고 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사람에게만 ‘내가 너희를 먹여살리니 고맙다고 해라’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오늘 본문에서 헌금과 봉헌에 대하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라고 하십니다.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뿐 아니라 ‘봉헌물’도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어느 때 하셨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떠나는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돌아오라!” “내 품으로 돌아오라!”
마치 집을 떠나는 자식을 향하여 호소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않는 유다에게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애타게 부르짖는 하나님께 유다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 3:7)
사실 유다는 하나님의 품에 있던 민족입니다.
하나님과 한때는 알콩달콩 잘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변심하여 떠나는 중입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철따라, 절기 따라 제사를 잘 지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서 떠나는데, 뒤에서 부르니, 귀찮은 듯 대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 이때 하나님의 대답이 “십일조와 봉헌물”입니다.
〈 아브람의 십일조 〉
☞ 말라기 선지자의 선포는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잘 믿다가 세상으로 돌아서는 이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기독교 신앙에서 처음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의무는 아닙니다.
말라기서 3장의 배경이 그렇습니다.
※ 아직 믿음이 덜 성숙한 이들과의 나누어야 하는 화두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처음 십일조가 언급된 곳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옵니다.
개선하는 아브람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창 14:19~20a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 ”
이렇게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는 멜기세덱에게 아브람이 답례를 합니다.
창 14:20b “~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은 전리품에서 1/10을 떼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브람은 순전히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로서 드렸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은혜 체험이 풍성했습니다.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갔다가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기화로 아브람에게 엄청난 재물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섭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계절 장사’ ‘어부’ ‘농부’ ‘의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들 모두의 생계를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여 이를 잘 알지 못하지만, 아브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 하나님은 아브람의 십일조를 전례로 삼으십니다.
〈 신자의 십일조 〉
우리 침례교 전통 중에는 ‘신자의 침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기로 결단하고 진심으로 예수 믿음이 분명할 때 침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침례교단에서는 ‘유아세례’를 시행하지 않습니다.
유아는 스스로 신앙을 결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침례교단은 중학생이 된 이후 자신이 침례를 받겠다고 결단할 때 침례를 시행합니다.
이것을 ‘신자의 침례’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십일조’는 매우 뜨거운 주제입니다. 핵심 이슈이기도 합니다.
오늘 십일조 설교를 하면서 ‘십일조’를 성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묵상했습니다.
십일조를 이해하는 길은 둘입니다. 먼저 성경적으로 십일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가 이것이구나~’ 알아야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설교 시작하면서 이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이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이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십일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십일조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십일조 실행이 안 됩니다.
십일조에 대한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절실한 은혜 체험입니다.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이 체험한 은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여기까지 자란다면, “십일조와 봉헌물” 굳이 시키지 않아도 합니다.
신앙이 여기까지 자라고 아브람의 십일조 지경에 이른다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많은 크리스찬이 성급한 생각을 합니다. 과연 십일조가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려 듭니다.
십일조가 옳으냐 그르냐,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율법적이냐 합법적이냐?
이를 두고 다투려 합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일조와 봉헌물” 분명합니다.
〈 십일조에 대한 정리 〉
☞ 첫째,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자!
사람은 물론이고 공중의 새, 육지의 동식물, 강과 바다의 물고기…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동식물,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수고하지 않습니다.
자연에 널려 있는 맞춤한 먹을거리를 찾아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먹고 살기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람이 먹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 있습니다.
☞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감사하기를 바라신다!
감사의 방법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득의 십분의 일과 봉헌물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십일조와 봉헌물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맨처음 십일조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다는 한때 하나님 앞에서 십일조 신앙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풍조에 휩쓸려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부르셨습니다.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께 비아냥거리듯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리이까?”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대답이 십일조와 봉헌물입니다.
하나님은 품에 거하다 떠나는 유다가 다시 돌아오는 증표로 십일조와 봉헌물을 말씀합니다.
☞ 셋째,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에 따른 십일조와 봉헌물을 원하신다!
오늘날 교회들은 십일조를 율법주의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십일조의 의미를 성도들이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먼저 십일조와 봉헌물의 성경적 의미를 이해하고,
자기 신앙의 분량에 따르도록 합니다.
이것이 옳습니다.
☞ 소에게 물을 먹이고자 고삐를 끌고 물가에까지 갈 수는 있습니다.
소가 물을 마시고 안 마시고는 소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맛있고 싱싱한 채소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맘에 달렸습니다.
믿음이 그렇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고, 십일조와 봉헌물이 그렇습니다.
단지,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는 기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