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경 시인의 시집 『미나리도 꽃 피네』
약력
정희경 시인
대구에서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 2008년 전
국시조백일장 장원과 2010년 《서정과현실》 신
인작품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문학도시》
편집장과《어린이시조나라》 편집주간을 맡고 있
으며 '영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우수출판콘
텐츠 제작지원사업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
코문학창작기금 사업에 선정되었다. 가람시조
문학신인상, 올해의시조집상, 오늘의시조시인
상, 부산시조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조집으로 『지슬리』 『빛들의 저녁시간』 『해바라
기를 두고 내렸다』 『미나리도 꽃 피네』, 평론집으
로 『시조, 소통과 공존을 위하여』가 있으며 이광
시조시인과 공저 e-book 영역시조집 『K-Poem
SiJo the Root of Korean Wave』를 펴냈다.
gmlrudj@hanmail.net
시인의 말
잊고 살았다
미나리도 꽃 핀다는 것을
그냥
오래 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미나리가
꽃필 때까지
2024년 여름
정희경
둥근 울음
공사중 산책길에 드러누운 나무 기둥
딱따구리 둥근 울음 까맣게 비어 있다
이끼가 깊숙이 와서 얼룩으로 남는다
가진 건 울음뿐이라 둥글게 움켜쥔다
밀리고 밀려서 온 비탈길 변두리쯤
부리가 무뎌지도록 보름달을 쪼았다
어둠의 수신으로 산울림 탄성彈性으로
처진 날개 휘저으며 날아간 딱따구리
굴착기 바위 쪼는 대낮 메아리로 닿는다
커피 자판기
식전엔 노인이 둘 쪼그려 앉아 있던
열시엔 엄마가 넷 시끄럽게 서 있던
아파트 상가 입구에 자판기가 덩그렇다
택배기사 빠른 걸음 스쳐 가는 오후 너머
별빛을 끌고 오는 취준생 흰 손가락
종이컵 식은 몸으로 저 물컹한 뜨거움
미나리도 꽃이 핀다
개망초 흐드러져 둔덕에 피고 피고
베이고 베인 몸 미나리도 꽃이 피네
흰 물결 출렁이는 팔월 뭇별들이 내렸나
발목을 물에 담근 베인 자리 싹이 올라
속 비운 투명의 피 초록의 저 몸부림
기다림 흰 꽃으로 피네 미나리도 꽃 피네
제습제
축축한 호주머니 한 줌의 울음까지
세상을 끌고 다닌 눅눅한 밑단까지
내 옷장 구석구석에 웅크리던 울 엄마
몇 날의 눈물마저 한꺼번에 담아가서
홀쭉한 무덤가에 노란 꽃 가득 피네
뽀송한 햇살 한 줄기 이승으로 보낸 꽃
하지
밭에서 따온 지가 한 시간도 안 됐심더
투박한 1톤 트럭 흥정이 한창이다
노랗게 물들어버린 운촌시장 길거리
장마도 올라카고 보관도 안 되고예
긴 해에 얼굴마저 누렇게 익어가는
속까지 타들어 가서 단내 풀풀 참외들
추천사
내가 시조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정희경 시인을 처음 만나 시조 이야기를 듣던 날, 이런 생각을 했다. 학창 시절을 마지막으로 시조와 멀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조는 우리 글로 빚어내는 우리 마음의 고갱이다. 인식하지 못했을 뿐, 시조는 가장 낯익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장르였다.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시조가 현대에 와서 다시 주목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희경의 시조를 눈으로 보면 단정한 한글로 공들여 쌓은 탑 같은 글맛'이 보인다. 세상 만물과 인간을 보며 생각을 벼리고, 가장 적절한 말을 고르고, 제자리에 앉히고, 솜씨 좋은 목수가 정성 들여 대패질하듯 다듬어 빚어내는 일을 눈으로 보는 것이다. 소리 내어 읽었을때 느껴지는 '말맛'은 마음을 흔든다.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가며 희로애락을 건드리는가 하면, 온 바다가 한꺼번에 일어나 덮치듯 크고 깊은 감동에 빠뜨리기도 한다. 정희경 시인의 신작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가 다시 한번 내 안의 시조 감상 유전자'를 흔들어 깨운다.
-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해설
흰 꽃으로 피어난 미학적 기억의 울림
-정희경의 시조 미학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정희경 시인은 서정시의 한 양식인 현대시조를 통해 이러한 기억의 과정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우리 시조시단의 장인匠人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펴내는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작가,2024)는 시인의 말에 "잊고 살았다/미나리도 꽃 핀다는
것을//그냥/오래 두고/기다리기로 했다//미나리가/꽃필때까지"라고 썼듯이, 그동안 망각했던 것을 오래도록 기다리면서 기억하려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때 시인에게 '시조'라는 정형 양식은 삶의 구체성을 담아내는 단정한 그릇이요 내밀한 심정 토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훌륭한 음악이요 가감 없이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성찰하게 해주는 섬세한 기록으로 거듭나게 된다.
정희경의 이번 시조집은 그가 아프게 통과해온 시간에 대한 재현의 순간을 담으면서 지금도 소용돌이치는 인상적인 장면들에 자신의 열정을 헌정하는 속성을 견지한다. 시인은 지나온 시간을 추스르는 가운데 삶의 본질에 대해 속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때 그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삶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의지로 이어지게 된다. 그만큼 그의 시조는 삶의 내력을 회상
해가는 성격을 띠면서 자기 성찰에 오랜 시간을 바쳐가는 언어적 결과물로 다가온다. 시인은 사물을 향한 외적 관심보다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내적 기억을 더 강렬하게 구성함으로써 삶을 견뎌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