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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지난 8월 15일은 성모 승천 대축일이었고, 8월 22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천국에서 여왕이 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마리아께 ‘모후’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건 “천사의 모후, 성조의 모후, 예언자의 모후…”처럼 13번의 “모후”가 나오는 성모 호칭 기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제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여왕으로서 화관을 쓰고 있는 성화와 성상은, 특별히 16세기 말 이후 서방 교회에서 널리 퍼졌습니다. 하지만 모후라는 호칭을 부여한 건 그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전통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화상 대관 예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왕관을 씌워 장식하는 관습은 에페소 공의회(431년) 이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모든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그리스도교 예술가들은 주님의 영화로우신 어머니를 묘사하기 위하여, 여왕의 표지를 두르고 하늘의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왕좌에 앉은 모습으로 그렸다. 그 성화상들 가운데에는 어머니께 빛나는 왕관을 씌워 드리는 거룩하신 구원자가 그려진 것도 드물지 않다”(3항).
교황 비오 12세(1939~1958년 재위)는 1954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관한 교의 선포 100주년이던 ‘마리아의 해’를 마감하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는 20세기 시작과 함께 발전해 온 교회 운동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마리아의 모후성은 1900년 리옹에서 열린 마리아 대회에서 제안되었고, 1902년 프리부르그와 1906년 아인시델른에서 다시 제안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하늘의 모후」 (Ad Coeli Reginam)을 통해 5월 31일을 ‘여왕이신 마리아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력 개정을 통해 5월 31일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되고, ‘여왕이신 마리아 축일’은 등급이 기념일로, 명칭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뀌면서 날짜는 8월 22일로 정해졌습니다. 8월 22일은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제8일에 해당하며, 이는 성모님의 승천과 모후성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의 기쁨은 7일 후 여왕이신 복되신 동정 성 마리아 기념일에서 계속됩니다. 이 기념일에는 영원하신 왕 곁에 좌정하신 엄위로운 여왕 마리아께서 어머니로서의 전구도 계속하심을 기념합니다”(「마리아 공경」 6항).
성모 승천 대축일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사이의 한 주간을 보내며 천국에서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전구해 주시는 성모님을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일을 맞아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를 바쳐보면 어떨까요.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25) 하느님 백성과 가톨릭 신자, 「교회헌장」 제14항
「교회헌장」 제14항~제16항은 ‘가톨릭 신자’ ‘비가톨릭 그리스도인’ 그리고 ‘비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다룹니다.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 자격을 설명하기 위한 단계적 분류인데, 이는 사실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지를 묻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성자께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은 하느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을 향해 있다는 성경의 언급에 근거합니다(로마 11,32 참조). 동시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구원에 대한 세례의 필요성 사이에는 살짝 틈이 보이는 듯합니다.
「교회헌장」 제14항은 먼저 ‘가톨릭 신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따라서 교회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개자요 구원의 길’이며 그분께서 ‘교회 안에 계신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으며,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들어오기 때문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하셨습니다. 여기서 ‘필요성’의 라틴어 원문 [네체시타스] (necessitas)는 필수적이고 불가결하다는 의미입니다. 공의회는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구원에 필수적으로 세워진 것을 알면서도 교회 안에 있기를 거부한다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14항은 이어서 교회와 ‘완전한 합체’(plena incorporatio)를 이루는 것에 관해서 가르칩니다. 이러한 합체를 이룬 사람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둘째로 교회 안에 세워진 “완전한 질서”와 “구원의 모든 수단”을 받아들이며, 셋째로 “교회의 가시적 구조 안에서 교황과 주교를 통하여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앙 고백, 성사, 그리고 교회 통치와 친교’의 유대들로(vinculis, 끈들로) 그리스도와 결합합니다.
이렇게 교회와 합체된 사람이라도 마음이 아니라 몸으로, 곧 사랑이 아니라 제도적으로만 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자신의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것이고, 그 은총에 응답의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은커녕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이전의 예비신자들은 합체를 바라는 원의(votum) 자체로 교회와 결합합니다.
[교회의 언어] 신랑(The bridegroom)이신 그리스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언약(covenant)으로 맺어졌습니다. 성경에서 언약 관계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는 결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결혼 관계로 묘사되곤 했습니다.(예레 3,14; 이사 54,1) 신약성경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약혼한 신부로 묘사했습니다.(2코린 11,2)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 된 것과 같다고 표현합니다.(에페 5,25)
신랑은 bridegroom, 신부는 bride. 예수님은 자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이라 부릅니다.(마르 2,19) 신랑이 오시는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은 혼인 잔치에서 신랑을 소개하는 ‘best man’의 역할을 합니다.(요한 3,29) 카나에서 이루신 첫 표징은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옛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새 언약을 맺으시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미사 때 우리는 이 혼인 잔치에 초대 받았습니다. 묵시록에서 성령과 신부는 우리를 혼인 잔치에 이렇게 초대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 22,17)
[가톨릭 신학] 이스라엘과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아모스서)
구약성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그 특별한 관계라는 것이 각각 하느님과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특별한 관계’는 아모스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북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에 활동했기 때문에, 아모스서는 이스라엘과 이웃 국가들이 하느님 앞에서 지은 죄를 고발하고 심판과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특히 1~2장에서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특별한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웃 국가들(다마스쿠스, 티로, 에돔, 모압 등)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언서에서 이스라엘 외의 다른 나라들이 언급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의 진정한 통치차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는 죄의 고발과 그에 대한 심판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마스쿠스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아모 1,3)
이와 달리,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언급뿐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베푸셨던 일들이 언급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끈 다음”(아모 2,10) 즉,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하느님께서 선택하셔서 과거에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주셨던 특별한 민족이라는 것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별한 관계가 이스라엘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아모스 3~6장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에 대한 신탁이 이어집니다.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아모 3,1) 1~2장에서 모든 민족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이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집중되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이르면, 이스라엘의 잘못을 보다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들의 무분별한 삶, 종교 생활, 어리석은 지도자들 등등, 몇 개의 구절에 그치는 이방 민족들 비판과 달리, 이스라엘은 몇 장에 걸쳐 그 죄를 고발당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는 보다 엄격한 심판이 내려지는데, 이는 그들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만큼,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셨던 민족이니, 다른 민족들보다 더 진실하고 충실하게 하느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새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서 보다 진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우리도 신앙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믿나이다] (38) 성 클레멘스 1세 교황과 헤르마스
교부 시대 그리스도론과 교회론 발전시킨 두 주역
교부 시대 그리스도상의 특징은 그리스도인 마음에 자리한 ‘민중 신앙’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외경이 활발히 쓰이고 읽힌 시대에 예수의 생애에 대한 통속 신앙은 동정 탄생, 놀라운 별, 세례와 유혹, 변신(거룩한 변모), 저승에 내려가심 등 예수의 생애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헤르마스의 「목자」, 「클레멘스의 둘째 편지」, 「시빌라의 신탁」 등은 ‘고통받는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끌어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박해받는 이들의 대중적인 그리스도상을 드러낸다. 예수를 예언자 중 하나로 본 에비온파, 양자설, 육화와 수난 문제를 비켜 가고자 했던 가현설, 인간의 보편적인 구원론을 설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이용했던 영지주의 등이 이단의 예이다. 영지주의와의 투쟁을 통해서 정통 신앙과 이단이 구분된다.”(「교부들의 그리스도론」 28쪽)
헤르마스의 저서들은 「디다케」, 「솔로몬의 시편」, 「바르나바의 편지」와 함께 전례·윤리·수덕·교리교육을 다룬 책입니다. 헤르마스는 비오 1세 교황(재위 140~155년?)의 형제입니다. 그는 사도 교부 시대 후반기인 130~140년께 「목자」를 저술합니다. 「목자」는 다섯 가지 환시와 열두 가지 계명, 열 가지 비유로 구성돼 있습니다. 「목자」는 고대 동방 교회에서는 성경의 정경으로 분류돼 전례 때 공식 봉독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가서 탑을 세워라. (⋯) 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으며,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네가 그들과 한자리에 앉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그들이 행한 것을 행하고 견디어 낸 것을 견디어 내는 모든 사람도 그들과 함께 앉을 수 있을 것이다.”(하성수 역, 헤르마스 「목자」, 셋째 환시 중에서)
“이 바위와 문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 하느님의 아들은 그분의 모든 피조물 이전에 태어나셨으며, 창조 때는 아버지의 조언자이셨다. 이 때문에 바위가 오래되었다. (⋯) 그분은 종말 전 마지막 날에 나타났기 때문에 문이 새것이다. 이는 구원받아야 하는 모든 이가 문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다. (⋯) 문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주님께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느님의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분께 갈 수 없을 것이다.”(하성수 역, 헤르마스 「목자」, 아홉째 비유 중에서)
헤르마스 「목자」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표현으로 요한 복음서의 ‘로고스’나 ‘영’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은 ‘육화한 로고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헤르마스 「목자」에 등장하는 ‘주님’과 ‘하느님의 이름’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 하느님 곧 천주 성부와 그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 두 위격에 대한 이해와 표현은 유다교의 유일신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관념입니다.
여기서 20세기 저명한 신학자 알로이스 그릴마이어 추기경의 헤르마스 「목자」에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해석을 살펴봅시다. “‘오래된 바위’는 창조 전의 아들의 선재와 아버지의 조언자로서 창조의 중재자 역할을 상징한다. ‘문’은 세상 안에 아들이 계시된 것과, 아버지에게 가는 길을 준비하는, 그의 유일한 구원 업적을 말한다. 그는 유일한 문, 곧 주님께 이르는 유일한 통로이다. 비록 여기에 육화에 대한 아무런 암시가 없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구원에 있어서의 중재자 역할은 분명히 창조에 있어서의 중재자 역할과는 다르다. 하지만 구원 역시 하느님 아들의 ‘이름’과 연결된다.…헤르마스의 목자는 이름-신학을 하느님 아들의 선재와 중재자 역할을 인정하는 것과 명확하게 연결시킨다.”(「교부들의 그리스도론」 296쪽)
헤르마스보다 앞서 요한 사도가 아직 에페소에서 살아 활동하고 있을 때 로마의 주교로 사목했던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은 96년께 저술했던 최초의 교황 사목 서간인 「코린토인(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씁니다. 클레멘스 1세 교황은 이 사목 서간에서 자신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을 펼칩니다.
“사도들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의 선포자들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며 사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오신 분들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의 오심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질서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받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충실히 확고해졌고, 그다음 성령께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나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와 지방에서 말씀을 설교하면서, 그들의 첫 번째 사람들을 성령 안에서 미리 심사한 후 미래의 신자들을 위해 주교와 부제로 임명하였습니다.”(황치헌 신부 역,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 75쪽)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은 「코린토인(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복음 선포 안에 이미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사도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구원 경륜에 동참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처럼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의 그리스도론과 교회론은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성경’과 ‘교회의 전승’을 토대로 형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교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틀이지요.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마침 예식 (Ritus Conclusionis)
미사 중 영성체 후 기도가 끝나면, 마침 예식으로 넘어갑니다. 마침 예식은 강복과 파견으로 이루어집니다. 초세기 마침 예식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자료가 없는데, 아마도 영성체 후 별도의 예식이 없었거나, 로마 관습에 따라 단순히 “가십시오, 파견입니다.”(Ite, missa est.)라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강복은 사제의 인사와 교우들의 응답으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이는 미사 시작 때 나누었던 인사와 같습니다. 그 내용은 말씀과 성찬을 통해 구원 은총을 베풀어주신 주님께서 일상에서도 계속 함께해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후, 사제가 교우들을 강복합니다. 전례 역사에서 사제의 강복은 늦게 도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6~7세기 「제1 로마 예식서」에는, 제대에서 내려온 주교가 개별적으로 강복을 청하는 교우들을 축복해 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강복이 미사 끝부분에 들어온 건 10세기 무렵인데, 이 역시 한동안 주교에게만 유보되었습니다. 사제도 미사 후 퇴장하면서 개별적으로 강복하는 일이 있었지만, 13세기 전례서까지는 사제가 제대에서 강복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 강복 양식에는 ‘보통 강복’ ‘장엄 강복’ ‘백성을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일반 강복은 사제가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라고 말하며 교우들을 향해 십자가를 그으며 축복하는 것입니다. 장엄 강복은 미사 경본에 20개의 양식이 있으며, 전례 시기 또는 성인 축일과 기념 의미에 따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사제가 교우들을 향하여 팔을 펴 들고 기도하면, 교우들은 매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일반 강복과 같은 양식으로 끝맺습니다. 백성을 위한 기도는 과거 사순시기 평일 미사 끝에 바치던 기도에서 유래한 청원 강복으로서 미사 경본에 28개의 양식이 있으며, 그 방법은 장엄 강복과 같습니다.
강복 후, 사제(혹은 부제)는 손을 모으고 교우들을 향하여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교우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라틴어 파견사 [이떼, 미싸 에스트] (Ite, missa est.)는 6~7세기 「제1 로마 예식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의회, 군대, 장례식 같은 공적 집회에서 흔히 쓰이던 대표적 파견사였습니다. 의역하면, ‘이상으로 식이 끝났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인사말을 전례의 의미에 맞게 우리말로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옮겼고, 이 밖의 3개 인사말을 미사 경본에 추가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평화로이 가서 주님을 찬양하며 삽시다.” “미사가 끝났으니 평화로이 가십시오.”
사제는 입당할 때와 마찬가지로 봉사자들과 함께 제대에 깊은 절을 한 다음 퇴장합니다. 다만, 미사 후에 다른 전례가 이어지면 마침 예식은 생략합니다. 대표적으로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가 이에 해당합니다.
